〈 517화 〉IF Route, Normal Ending # 009 - B
"이승형이 구로로 진격해 온다구요?"
- 예. 생각보다 빠릅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승형. 내가 심장에 창염을 박아넣어 S급으로 강제로 각성시킨 화염술사. 그리고 천가을과 서로 썸을 타고 있던 남자. 나는 절로 심사가 뒤틀렸다.
"등대. 혹시 전장에 '얼음'이 나타나면 바로 연락주세요."
- 알겠습니다. 혹시 단장님께서 나가십니까?
"네."
나는 등 뒤에 불꽃의 날개를 펼쳐, 구로를 향해 날아올랐다.
[직접 후드려 패줘야 할 것 같아서.]
괴인형으로.
* * *
이승형의 합류 이후, 구로 전역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흐아앗!"
하얀 불꽃이 건물 전체를 휘감았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 숨어있던 헬하운드 좀비들은 백염에 육신이 타버려 그대로 쓰러졌다.
"이게 무슨...!"
"역시 S급!"
히어로들은 구원을 나선 그의 힘에 감탄했다. 개중에는 미처 '모종의 비밀 임무를 수행해야 했을' 소나무 부대도 있었다.
"젠장...!"
철표 박성태는 압도적인 이승형의 무위에 땀을 흘렸다. 이승형은 '안양에서 구로까지 직선으로 주파해' 히어로들의 구원을 나섰고, 소나무 부대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몰래 빠져나가지 못했다.
"히어로들은 재정비! 화권을 따라 활로를 엽니다!"
"야! 정신차려! 반격 시작이다!"
운사와 템페스트 레이디가 동시에 바람을 일으켰다. 바닥에 잔불처럼 남아있던 하얀 불꽃의 불씨가 바람에 흩날려 퍼졌다.
키에에엑!
괴수들은 백염에 닿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소멸했다. 이승형의 백염은 이상하리만큼 '괴수만' 태워버리는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하아아--!"
전방에 대로를 가로막는 수 M 높이의 건물을 향해, 이승형은 마력을 모은 주먹을 뻗었다. 심장에 박힌 불꽃이 무한한 마력을 내뿜어 그를 보조했고, 흰 불꽃에는 푸른 색이 스며들어 파괴력을 더했다.
콰---앙!!
"......미친."
박성태는 주먹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버린 이승형의 힘에 이능력이 풀릴 뻔 했다. 아무리 고깝게 여기던 이라도 이정도로 차이가 나면 이능력자로서 경외감이 들 지경이었다.
"여의도로 향하는 길은 뚫었습니다! 이대로 진-"
[안 될 말이지.]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검은 갑옷을 입은 괴인이 여의도 방향에서 걸어와 히어로들을 맞이했다. 최전선에 있던 히어로들이 끓어오르는 괴인의 마력에 몸이 벌벌 떨렸고, 이승형만이 앞으로 나서며 기함을 토했다.
"누구냐!"
[빌런.]
괴인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라졌다. '탓'하고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이승형은 팔을 들어올려 방어자세를 취했다.
카앙-!
괴인의 발길질이 이승형의 팔을 때렸다. 단단히 가드를 올린 이승형의 몸이 뒤로 밀렸지만, 이승형은 자세를 유지한 채 반격의 기회를 엿보았다.
"흐아아!"
이승형은 괴인의 다리를 감싸쥐고 크게 휘둘렀다. 공중에서 다리를 붙잡힌 괴인은 이승형의 괴력에 그대로 휘둘러졌다.
"하앗!"
이승형이 괴인을 바닥을 향해 내던졌다. 괴인은 바닥을 향해 내동댕이 쳐지기 직전, 등에 불꽃의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을 난다고...!"
"서울에 어떻게 이런 빌런이?!"
괴인은 오만하게 하늘에서 히어로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주 사이에 피어오르는 푸른 불꽃은 그가 서울 소동의 주범임을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가세하겠습니다!"
운사가 창대를 잡고 앞으로 나섰다. S급에 비하면 A급은 프로와 아마추어 수준의 차이가 있었지만, 운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A팀! 정체불명의 적을 토벌합니다! 상대는 추정 S급! 화염술사!"
"에이, 야! 일단 저 새끼 조지자!"
소나무 부대도 저마다 괴인, 빌런에게 무기를 겨눴다. 허공에서 날개를 퍼덕이던 빌런은 수십명에 이르는 히어로들을 마주하면서도 위축됨이 없었다.
[도망치지 않는가?]
"하나 묻겠습니다."
이승형의 눈에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히어로 이기성을 납치한 자가 당신입니까?"
[그렇다면?]
괴인은 날개를 접고 바닥에 착지했다. 이승형이 전신의 마력을 끌어올리며 괴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렇다면 빌런을 쓰러뜨리고, 동료를 구출할 뿐!"
"레이드 진형 구축! 상대는 근접전 특화형으로 보임!"
A급 히어로들이 이승형의 뒤를 따랐다. B급 히어로들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원거리 계열의 히어로들이 저마다 총구를 겨누고 활의 시위를 당겼다.
[흐.]
빌런 1명을 상대하는데 투입하기에는 과도한 전력임이 분명했으나, 히어로들은 굳이 '레이드'라고 표현해야할 정도로 면전의 빌런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해주지.]
화륵. 괴인은 손가락을 튕겨 날개를 소멸시켰다. 새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이점을 스스로 버리고, 두 주먹을 들어올렸다.
[나를 이기면 서울을 넘겨주마.]
오만한 발언이었지만, 히어로들은 직감했다.
이 자를 물리쳐야만 서울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생각이 섣부른 오판이었음을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적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 * *
구로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건물 잔해에는 피를 흘리며 기절한 히어로들로 가득했고, 그들의 목에는 푸른 불꽃의 고리가 걸려있었다.
"커헉!"
히어로 한 명이 괴인의 니킥을 맞고 피를 토했다. 괴인은 손을 뻗어 히어로의 목을 움켜쥔 채, 불꽃을 일으켜 히어로의 전신을 휘감았다.
"아아악!"
히어로는 괴성을 질렀다. 불꽃에 휩싸였음에도 신체의 그 어느곳도 화상을 입지 않았지만, 분명 무언가가 빠르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끝.]
괴인, 피닉스는 히어로의 마력을 모두 태워버린 뒤, 무너진 건물을 향해 집어던졌다. 히어로는 유리창을 깨고 그대로 바닥을 굴러 피를 토했다.
"커흐, 허어억."
[이걸로 너 하나 남았다.]
피닉스는 발밑에 깔아둔 남자 히어로, 이승형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을 짓누르는 금속제 군화는 불에 달구어진 양 뜨거워, 이승형의 살갗을 벌겋게 태워버렸다.
"아냐…! 아직 남아있어!"
[석하랑?]
피닉스가 손을 들어올렸다. 건틀릿의 손바닥에 작은 구멍이 열리며 마력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구---웅!
"...?!"
화염술사이기에 너무 잘 느껴진다. 피닉스의 손바닥에 모이는 마력의 에너지는 강철마저 녹여버릴 고열을 담고 있었다.
□□□□□□!!!
피닉스의 손이 불을 뿜었다. 모여든 마력은 레이저처럼 손바닥에서 뿜어졌다. 동남쪽의 상공으로 쏘아 푸른 광선의 끝에는 막 관악을 넘어오는 얼음의 나비의 날개를 박살내버렸다.
[이제 없다.]
피닉스의 장갑에서 과열된 마력이 허공에 방출되었다. 뜨겁게 달궈진 공기에 이승형은 숨이 턱턱 막혔다.
"......크흑."
[겨우 이정도인가?]
"......!!"
이승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피닉스는 발을 들어올려 이승형의 명치를 짓밟으며 말을 이었다.
[겨우 이정도로 무엇을 지키겠다는 거냐?]
"으아아악!!"
이승형의 전신에서 백염이 분출됐다. 흰 불꽃은 자신을 짓누르는 검은 갑주를 서서히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S급의 힘은 강하기는 허나.]
피닉스는 발에 힘을 주며 백염을 꺼뜨렸다.
[그 힘은 내가 준 힘임을 잊은 모양이로군.]
"뭐…?!"
지금 이자가 무슨 말을. 이승형이 놀랄 새도 없이, 피닉스의 몸이 푸른 불꽃에 휩싸였다.
"......."
"여자...애?"
피닉스는 이승형을 말없이 내려보았다. 아담한 맨발이 옷이 다 타버려 가슴이 훤히 드러난 이승형의 가슴을 짓밟고 있었다.
"화마룡 죽이느라 고생했어요, 이레귤러. 다음 생에는 주인공으로 태어나길 바라요."
"그게 무슨-"
피닉스가 오른팔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이승형이 감당할 수 없는 푸른 마력이 주먹에 휘감겨, 날카로운 새의 발톱 모양으로 굳어졌다.
"......."
이승형은 눈을 감았다. 무슨 의도로 눈앞의 빌런이 자신에게 힘을 빌려준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자신을 죽일 마음으로 가득했다.
'미안합니다.'
이승형은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
…
…
"...?"
이승형은 다시 눈을 떴다. 고개를 숙인 피닉스의 얼굴은 울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어떻게 나온 거예요."
"너 막으려고."
익숙한 목소리가 피닉스의 뒤에서 들렸다. 이승형이 서울에 온 이유이자 그렇게 찾고자 했던 여인은 머리를 회색으로 물들인 채 피닉스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이거 놔요. 이 남자 죽여버릴 거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마. 너 사실은 아무도 죽이고 싶어하는 거 아니잖아."
"아녜요, 아니라고요…."
"그럼 왜 히어로들 안 죽이는 건데."
피닉스는 오해라고 외치고 싶었다. 자신이 히어로들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그저 괜히 죽였다가 경을 칠까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러지 마…. 응? 그냥 조용히 보내주자. 너 사실은…."
가을이 피닉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피닉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승형은 듣지 못했다.
"......치사해요, 치사하다고."
"네 잘못이야. 그러니까."
가을이 피닉스를 더욱 꽉 끌어안으며 흐느꼈다.
"나한테 미움받기 싫으면, 제발 사람들 좀 그만 죽여줘…."
가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협박이었다. 피닉스는 제 등을 적시는 가을의 눈물에 팔을 떨구었다. 날카로운 발톱같은 불꽃은 사그라들었다.
"......가요."
피닉스는 이승형의 턱을 발로 툭툭 밀었다.
"딱 한 번만 기회를 줄게요. 그러니까 서울에서 당장 꺼지라고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
이승형은 몸을 일으켜 고집을 부렸다. 피닉스의 눈에 살기가 서렸지만,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가을 때문에 이도저도 못하는 눈치였다.
"승형 씨. 미안하지만 돌아가요. 이 아이가 한 번 봐줄 때-"
"저는 약속했습니다. 가을 씨의 부모님과."
피닉스와 가을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승형은 담담히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반드시…. 반드시 가을 씨를 신서울로 데리고 오겠다고."
"불가능해요. 가을 씨는 서울에서 못 내려가요."
피닉스가 가을의 손을 꼭 끌어안았다. 마치 장난감을 빼앗기기 싫은 아이와 같은 고집에 가을도 난처해졌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정도가 심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절대로, 절대로 가을 씨를 내어줄 수 없어요. 선의철이 무슨 짓을-"
"그러면 제가 올라오겠습니다."
이승형의 말에 피닉스가 딸꾹질을 했다.
"가을 씨 부모님을 모시고, 제가 서울로 올라오겠습니다."
"......헐."
피닉스는 혼란에 빠졌다.
***
서울수복작전은 끝났다.
히어로들은 강남에서 선전을 벌였지만, 구로에서 지하에 거점을 잡고 있던 서울 난민 조직 '청화단'에 의해 패배하였다.
서울에 난민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 신서울의 주민들은 혹시나 서울에 두고온 생존자가 있을까 동요하기 시작했다.
가족의 생사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는 선의철도 꺾을 수 없을 만큼 불타올랐다.
그 선봉에는 천가을의 부모가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내 딸이 서울 난민들의 도움으로 구조되었다.
빌런들은 강남에서 전부 체포.
난민들은 청화단으로 둔갑.
그렇게 서울의 소동은 잦아들었다.
그리고 1년의 시간이 흘렀다.
***
쿵!
이승형이 발을 내딛어 땅을 굴렀다. 피닉스는 바닥을 굴러 발구름을 피한 뒤, 몸을 일으키며 다리를 돌려찼다.
콰앙!
팔뚝에 휘감은 백염에 발차기가 틀어막혔다. 피닉스는 혀를 차고 크게 뒤로 물러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건방지게 자꾸 막아요?"
"그럼 막아야지 않습니까!"
이승형은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선생님께서 저를 이름으로 불러주셨는 걸요!"
"닥쳐요, 쓰레기!"
피닉스가 얼굴을 붉히며 뛰었다. 발바닥에 마력을 방사해 추진력을 얻은 피닉스가 쏜살같이 쏘아진 몸을 옆으로 뉘여 이승형에게 드롭킥을 날렸다.
콰--앙!!
이승형은 가드를 올려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씩 웃으며 피닉스의 맨다리를 낚아채려했다.
"히익?!"
피닉스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마력으로 제어할 틈도 없이 중심을 잃은 피닉스가 몸을 바닥에 굴렀다.
"어딜 만져요, 이 변태!"
"...그러면 그냥 변신하시지."
"이, 이건 가을 씨가 입힌 거라고요! 당신 같으면 벗을 수 있겠어요?"
"아뇨. 평생 입어야죠."
피닉스는 상체를 펴며 탱크탑과 핫팬츠를 과시했다. 가을이 직접 정해준 옷을 입는 다는 것에 땀에 젖은 자신의 몸이 드러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습니까."
이승형은 쓰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피닉스가 그의 마력이 흔들린 것을 느끼고 눈을 게슴츠레 뜨며 다가갔다.
"푸흐흐, 뭐예요? 언제는 천가을 바라기라더니, 그새 이 몸에 혹하셨나? 발정했어요?"
"제, 제가 언제 선생님께 발정을…."
"거짓말. 그렇게 세워놓고?"
"?!"
이승형은 하반신을 뒤로 빼며 화들짝 놀랐다. 혹시나 자기도 모르게 섰을 까봐 식겁했지만, 성기는 전혀 발기하지 않았다.
"꺄하하! 진짜 발기했을까봐 놀라는 거 봐요, 푸흐흐. 아!"
피닉스가 종종걸음으로 이승형의 지척까지 다가가 그를 지긋이 올려다봤다.
"당신이 나한테 홀리면 가을 씨는 제게 되겠죠…?"
"그게 무슨 닭대가리같은 소리야?"
콩. 뒤에서 나타난 가을이 피닉스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피닉스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투덜거렸다.
"닭대가리라니. 말이 심하다고요."
"네 생각이 불순해서 그래."
"칫."
피닉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드러냈다. 가을은 피닉스의 입술을 손으로 붙잡고 흔들었다.
"됐어. 빨리 따라오기나 해. 승형 씨도 와요."
"네, 네. 그런데 어디로…."
가을이 얼굴을 붉혔다.
"하, 항상 하던 곳으로 가야죠. 승형 씨 강화해야 하잖아요."
"......예."
승형도 얼굴을 붉히며 그 뒤를 따랐다. 피닉스만 앙칼진 고양이마냥 아둥바둥하며 신경질을 부렸다.
"저는 가을 씨랑 둘이서 하고싶-"
쪽.
가을이 피닉스의 입을 입술로 덮어, 입을 닥치게 만들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서울에 한켠에 가을의 아파트이자 셋의 보금자리. 청화단의 아지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