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5화 〉IF Route, Bad Ending # 093 (2)
IF Route는 본편과는 관계없는, 본편에서 파생된 가상의 시나리오입니다.
보시는 분에 따라서 불쾌감이 들 수 있으니, 본편을 보실 분은 다음 장으로 바로 넘어가셔도 내용 이해에 문제가 없습니다.
* * *
<2025년 12월 24일. 강원도 속초시.>
크리스마스이브.
성인의 탄신을 알리는 전야.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온 나라가 축제의 도가니였다.
한 커플의 결혼.
불과 반년 만에 대한민국을 히어로 강대국 반열에 다시 올려놓은 자. 집정관마저 인정한 세계 최고의 지휘관. 대한민국 구국의 영웅.
그리고 상대는....
"아가씨!"
청회색 코트를 입은 여인이 화들짝 놀랐다. 여인의 눈은 죽은 생선처럼 맹해 보였다.
"뭐 마실 거야? 지금 뒤에 기다리는 거 안 보여?!"
"...아."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주문을 기다리고 있는 몇몇 커플과 아주머니 일행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주문할게요."
여인은 곧장 현금을 내밀고 메뉴를 가리켰다.
"카라멜 마키아토랑 딸기 요거트 스무디. 드시고 가시나요?"
아르바이트생의 표정이 좋지 않다. 여인이 고개를 가로젓자 환해진 얼굴의 아르바이트생이 진동벨을 건넸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카페 안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데이트를 나온 커플들. 수다를 떨러 나온 중년의 여인들.
여인은 슬그머니 구석진 자리 벽에 기댔다. 청록의 반투명한 목도리를 콧잔등까지 끌어올려 더욱 얼굴을 가렸다.
진동벨이 울리기까지 십 수 분. 여인은 카페의 백색소음을 즐기며 시간을 죽였다.
"오빠. 오빠라면 누구랑 결혼했을 것 같아?"
"나? 으음.... 너?"
"경사 났네, 경사 났어. 역시 남자는 몸으로 자빠뜨려야 한다니까? 미국 봐봐. 결혼까지 해버리니까 미국도 쉽게 터치 못 하잖아."
"SS급 히어로가 술 먹고 임신공격을 하다니.... 거기에 공략당하는 세계 최고의 지휘관.... 말세다, 정말."
"뭐 어때? 이제 <신관>이 한국에 들러붙어 살겠다는데. 하, 신관님이랑 결혼하고 싶다. 그럼 매일 밤 마력 늘어날 거 아냐."
"너 남자거든?"
"알아."
우우우웅.
진동벨이 울린다. 여인은 곧장 계산대로 걸어가 음료를 챙겼다.
"고맙습니다."
여인은 베일을 내려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순간적으로 가게의 모든 이들의 이목이 쏠렸다.
"......."
여인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는 곧장 카페를 빠져나왔다.
가장 가까이 있던 커플이 말했다.
"오빠. 어딜 그렇게 봐? 저 여자가 그렇게 예뻐?"
"응? 어, 그렇기는 한데...."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되게 천가을 닮았다."
"뭐? 천가을 만큼 예쁘다고? 지금 내 앞에서 다른 여자 예쁘다고 한 거야? 우리 헤어져!"
* * *
가을은 음료 박스를 차에 두고 짐을 확인했다. 대중적인 중형차 트렁크는 온갖 식자재와 생필품으로 짐이 한가득하였다.
"...아. 안 샀다."
가을은 머리를 긁적이다 주변을 훑었다. 다행히 그리 머지않은 곳에 허름한 상가가 있다. 가을은 곧장 상가로 걸어가 빠뜨린 물건을 팔만한 곳을 찾았다.
"어서 오세요, 으잉?"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가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가을은 베일을 내리며 배시시 웃었다.
"안녕하세요?"
"아, 그려. 젊은 아가씨가 여긴 뭔 일이야?"
가을이 점포 안을 쓱 둘러봤다. 제법 구색은 갖춰놓았지만, 인근에 있는 대형 마트보다는 많이 초라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주인은 그걸 눈치챘는지 손사래를 치며 한탄을 늘어놓았다.
"다 저 망할 놈의 양놈들 때문에 내가 먹고살지를 못 해. 유성의 아가씨만 아니었어도 이 동네 골목은 다 죽었어. 망할 양키 놈들. 고 홈이나 해버려라."
가을이 낮게 웃었다.
"신관도 미국 출신이잖아요?"
주인이 화들짝 놀라 어포로 바닥을 내리쳤다.
"무슨 섭섭한 말! 한국인이랑 결혼했으면 이제 한국 사람이지! 아가씨 어디 가서 말조심해. 쥐도 새도 모르게 신서울로 끌려갈 수 있어."
주인의 으름장에 가을이 씁쓸하게 웃었다. 가을의 손이 매대로 향했다.
바스락.
"이거 주세요."
"아, 그거 좋지. 근디 자연산이라 아라페이 안 되는데...."
주인이 뒷말을 흘렸다. 가을은 묵묵히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주인에게 건넸다. 주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사람이 현금을 수북이 들고 다녀야 복이 쌓이는 거야. 그런데 아가씨. 혹시...."
주인이 가을의 배를 훑었다.
"임신했어? 미역은 왜 사 가는 거야?"
가을이 손에든 미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그 웃음은 꼭 누군가를 닮아있었다.
"네. 임신은 했어요. 제가 아니라."
* * *
덜커덩, 덜커덩.
산길을 달리던 차가 공터에 멈췄다. 넓은 정원과 나무로 된 오두막. 과거에는 제법 인기를 끌었을 법한 외진 곳의 조용한 펜션.
가을이 코트의 단추를 풀었다. 동시에 코트가 안에서부터 들리며 자동으로 벗겨졌다.
쁘적.
자동은 아니다. 가을의 뒤에서 나온 촉수 하나가 코트를 들었다. 다른 촉수들이 각각 식자재와 생필품이 든 종이봉투를 받쳐 들었다.
"♪♬♬♩"
가을은 콧노래를 부르며 음료를 챙겼다. 고소한 된장 끓이는 냄새가 주차장까지 진동했다.
드르륵.
가을이 들어서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촉수로 짐들을 가지런히 정리한 가을은 잰걸음으로 부엌을 향해 걸었다.
"다 들려요."
후룩.
푸른 머리칼의 소녀가 국자로 국의 간을 맛본다. 은하수가 그려진 앞치마를 입은 소녀는 가을이 사 온 음료를 보며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또 카페 갔어요?"
"괜찮아. 아무도 몰랐어."
가을은 요거트를 꺼내 소녀에게 건넸다. 소녀는 잠시 뚱해 있다가 한 손으로 요거트를 받고는, 다른 한 손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딱.
끓고 있던 냄비 아래에서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소녀는 냄비의 뚜껑을 닫고 요거트를 한 모금 마셨다.
"괜찮지? 네가 좋아하는 유성 거야."
"......이번 만 봐주는 거예요."
소녀는 새침하게 등을 돌렸다. 요리를 위해 틀어 올린 머리칼 너머로 새하얀 뒷목이 눈에 들어왔다.
불끈.
촉수가 탱탱해졌다. 가을은 카라멜 마키아토를 내려놓고 소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청화야. 나 그거 먹어보면 안 돼?"
가을이 소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가을과 입을 맞추면서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눈총을 줬다.
"안 돼요."
"그러지 말고."
소녀, 청화는 등 뒤에 묶은 앞치마 끈을 풀기 위해 손을 뒤로 넣었다. 끈의 양 끝을 쥔 두 손에 촉수가 턱하고 올려졌다.
"...저기요, 가을 언니? 좀 있다가 밥 먹어야 하거든요?"
청화가 눈으로 된장찌개를 가리켰다. 천연의 재료에 창염으로 끓인 찌개는 언제 먹어도 일품이었지만, 가을은 그보다 다른 게 먹고 싶었다.
가을이 청화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아, 정말. 하지 마요. 지난번에 그러다가 요리 다 식었잖아요."
"청화야."
가을이 기발한 생각이 났다는 듯 촉수를 움직였다. 전광석화처럼 휘둘러진 촉수가 청화의 요거트를 빼앗았다.
"지금 뭐하는...!"
촉수가 요거트를 집어삼켰다. 회백색 촉수의 안에 선홍빛 스무디가 몰캉거렸다.
청화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가을이 청화를 뒤에서 강하게 움켜쥐었다.
"윗 입 아랫 입, 둘 다 요거트 먹게 해줄게."
* * *
"그래서 재밌었어요?"
청화가 입술을 삐죽였다.
가을은 그의 바로 옆에서 허벅지를 연신 주무르며 애교를 피웠다. 촉수들 또한 청화의 전신을 마사지했다.
"언니가 미안해. 그렇게 요거트가 먹고 싶었어?"
"촉수로 요거트 뿌리고 언니가 다 핥아 먹었잖아요."
가을은 할 말을 잃었다. 결국 카페에서 사 온 음료는 가을이 다 마시게 되었다.
"그래도 너한테 조금은 갔...."
"남의 뱃속에 쑤셔 박아서 뿌린 거, 다시 촉수로 빨아갔잖아요. 암만 흥분해도 그렇지."
가을이 청화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청화가 손을 '탁' 치려고 하다가, 한숨을 쉬고 그대로 몸을 맡겼다.
"촉수꺼비 귀신이 들러붙었나.... 왜 이렇게 성욕이 강해요?"
"그러는 너도 이제 여자가 다 됐네. 이제 편하게 언니라고 부르고."
"그거야 언니가 그걸 원하니까...."
청화는 가을의 시선을 피했다. 쑥스러워하는 모습에 가을은 그대로 소파에서 누워 청화의 허벅지에 머리를 올렸다. 청화는 익숙하다는 듯 손으로 가을의 머리를 쓸었다.
"아, 시작한다."
성야(聖夜)를 앞두고 남은 한 시간. 정확히 23시에 결혼식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려 퍼진다.
신랑이 검은 턱시도를 입고 나타났다. 가을은 촉수로 청화의 가슴을 주무르며 물었다.
"신관 슈트 꽤 멋지지 않아?"
"왜요. 잘생겼어요?"
청화가 답지 않게 입술을 삐죽였다. 가을은 그대로 촉수로 청화의 볼을 문지르며 위로했다.
"질투하지 마. 나 너밖에 없는 거 알잖아."
"...으휴. 됐어요."
신관이 큰 발걸음으로 카펫 위에 올라섰다. 청백 머리칼의 남자가 다가와 신관을 거세게 끌어안았다.
"이승형...."
청주작(淸朱雀). 세계에 단 네 명뿐인 SSS급 이능력자이자 신관의 사방신 중 청일점. 푸른 화염의 불사조. 5년 전 S급으로 각성한 그는 신관과 의형제를 맺고 SSS급이라는 전무후무한 경지에 이르렀다.
가을이 슬쩍 청화의 눈치를 살폈다.
피닉스. 청화가 가을과 함께 도망치면서 버린 자아.
그 이명은 어느덧 돌고 돌아 이승형에게 넘어갔다.
"아직도 후회해?"
"...후회하지 않아요. 오히려 고마운걸요? 그 덕분에."
가을이 청화와 눈을 마주했다. 청화는 제 배에 가을의 머리를 붙였다.
"이런 행복을 깨닫게 해줬으니까."
"......후후."
뱃속에서 들리는 작은 심장박동 소리. 가을은 청화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이미 죽어버리고 부활한 몸인 괴인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없었다. 가을은 청화와의 사랑의 결실을 원했고, 수년간의 노력 끝에 청화는 제 육신에 가을의 정(精)을 새기는 데 성공했다.
"옛날 생각난다. 그때는 네가 꼭 남자 같고, 내가 여자 같았는데."
"일반적인 커플의 이야기를 하기에는 우리가 좀 많이 다른 삶을 살았죠."
청화가 우수에 찬 눈으로 가을을 내려다봤다. 가을은 두 손으로 청화의 손을 꼭 붙잡았다.
"고마워. 지금까지 내 옆에 있어 줘서. 이기적인 나를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이렇게까지 있어 줘서."
"......."
청화는 아무 말 없이 가을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가을의 말에 청화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새삼스럽지만 말해도 돼?"
"마음껏 하세요."
"사랑해."
"......."
청화는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대신 울먹일 것 같은 눈으로 가을의 머리칼을 계속 쓸어주었다.
"...청화야. 나 슬슬 졸려. 자도 돼?"
가을은 응석을 부리듯 청화의 몸에 부대꼈다. 청화는 그저 계속 가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고 일어나면, 한 번 더 하자. 그 때는...."
가을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청화는 그대로 목을 뒤로 꺾었다.
감은 두 눈 사이로 투명한 물줄기가 흘러나왔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가을의 눈가에 떨어졌다.
가을은 일어나지 않았다.
"역겨워. 인간 따위와 사랑놀음이라니."
맞은편 소파에 앉아있던 여인이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 청화가 가을의 심장에 손을 올렸다.
화르륵.
이미 생명이 다한 가을의 육신이 창염에 휩싸여 재가 되었다.
청화는, 피닉스는 조용히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벌써 시작하는 거예요?"
"말도 걸지 마.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으니까."
흑발의 여인은 피닉스가 앉아있던 소파를 발로 걷어찼다.
"이미 유예 시간은 충분히 줬어. 이 다크 레기온의 수치. 언제까지 이런 산골에서 숨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지다하카."
피닉스가 고개를 돌렸다. 두 눈에는 푸른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일부러 신경 써줘서 고맙습니다."
"흐, 흥! 무슨 소리람!"
피닉스가 손가락을 들었다.
오두막 근처에서 마력의 반응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좌측에서 셋, 우측으로 둘. 숫자를 헤아린 피닉스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정면에 하나.
[약속의 날이 되었다. 창염.]
아지다하카의 옆에 로브로 얼굴을 가린 성주를 본 피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하죠. 명령대로 이 지구를 부숴버리겠습니다."
"뭐? 당신? 이 불경한 것이!"
"대신."
피닉스가 날개를 펼쳤다. 두 주먹에는 푸른 불꽃이 일렁거렸다.
"여기 있는 여섯 간부 년들. 그리고 성주 네 놈의 대가리 뽑아놓고 나도 지구랑 같이 죽는다."
피닉스가 성주에게 날개를 펼치며 달려들었다.
...
...
...
이계의 신이 눈을 떴다.
테라를 부수고 잠든 이계의 신은 그의 사제의 부름에 응답했다.
그리고 지구는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