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8화 〉1부 TRUE ENDING - LAST
"우리 집 천장이다."
나는 VR기기를 벗어던지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매일같이 보던 펜트하우스도 아니고, 틈만나면 불려간 라의 신전도 아닌, 내가 납치되기 전의 '현실 속' 나의 집이었다.
"......시간, 시간."
스마트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마지막 접속으로부터 불과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20년, 25년을 몇 번이고 반복했는데 아직 1시간 밖에 안 지났어?'
장자지몽이라도 되는 걸까. 상황을 생각해보면 초월적인 힘에 의해 잠깐 의식을 납치당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수긍하기 쉬우리라.
'메세지랑 DLC는 삭제 되었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무한회랑'에 가두게 된 계기인 DLC, 그리고 그 DLC를 팔려고 했던 자가 보낸 메세지는 삭제되었다.
"커뮤는...어우야."
나는 내 클리어 인증 게시글에 달린 무수히 많은 쪽지의 요청에 식겁했다. 전부다 세이브 파일을 내놓으라, 혹은 피닉스 루트 진입 방법을 내놓으라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괜히 또 나같은 꼴을 당하게 할 수 없다.
사실 창염이랑 꽁냥대는 것도 보기 싫다.
꼬우면 자기들도 후안 사장이랑 친해져서 메뉴판을 딸기로 가득 채워보던가.
'그럴 수가 없지.'
미연시와 RPG 그 무엇하나 관계가 되어있지 않고, 힌트라고는 정말 쥐꼬리만한 것 밖에 없는데 어떻게 알아챌 수 있을까. 댓글과 쪽지로 알려주지 않으면 위치를 찾아서 죽여버리겠다는 협박도 수두룩했다.
"가소롭고."
이쪽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죽고 온 입장이다. 실제로 죽는다고 해도 딱히 상관은 없다.
'아무도 내가 클리어한 걸 모르니까.'
내가 개인방송을 켜서 어그로를 끌지 않는 이상, 제작사에서 내 존재를 밝히지 않는 이상 비밀은 영원하다. 모든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창염과의 관계는 나만 가지는 걸로.
삐비빅!
스마트폰에서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라는 문구까지 걸린 익명의 전화. 이 타이밍에 누가 이런 전화를 할까 싶었지만, 나는 과감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담담하십니다?]
"그냥 실감이 잘 안 나서 그런 겁니다, 하 사장님."
[하하, 그렇군요. 이제 좀 실감이 나십니까?]
전화기 너머의 상대는 목소리가 하등 다를게 없었다.
[아주 깜찍한 짓을 하셨더군요.]
"어떤 창염이라도 곁에 제가 있어야 하기에."
[과거로 하나를 보내고, 기억을 가진 분신을 현대에 남기고, 마지막으로 본인은 현실로 돌아온다라.... 정말 도박을 좋아하십니다?]
"어느 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메세지가삭제된 순간부터 나는 직감했다. '우리'의 승리라는 것을.
"그 새ㄲ...아니 그 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아, 안심하십시오. 지금 부회장님께서 불러서 직접 조지고 계십니다. 당신께 해코지를 할 수도 없어요.]
"그거 다행이군요."
[애초에 자기 멋대로 간섭했던 일입니다. 본사에서도 실무진만 협박해서 저지른 일이고, 사장단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장까지 알았으면 제가 가서 뒤집어 엎는데...흐흐흐. 이야, 장관이었어요. 그 놈이 부회장님한테 바로 머리채 잡혀서 끌려가는 꼴이란.]
...나는 잘 모르는 세계지만, 아무래도 저쪽 사정도 복잡한 듯 했다. 그나마 잘 해결되었으니 다행이라고 봐야하나.
'그룹 전체에 복수할 만큼 깜냥은 안 되고.'
창염의 세상 속에서 신의 힘을 가지고 있던 피닉스와 달리, 현실 속 나는 그저 평범한 청년일 뿐이다.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해봐야 피닉스 루트의 진입 방법을 알고 있다는 지식과 클리어에 따라 받게 될 2천억의 상금 뿐. 인간을 VR기기로 접속시켜 다른 세계의 존재에 가둬버리는 초월자들을 상대로 이겨먹을 방법은 없다.
'하찮구만.'
코스믹 호러에는 손을 대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하선태가 웃음을 멈추고 말을 하기까지 기다렸다.
[...2천억과 관련된 서류와 돈은 제가 아는 사람이 직접 가서 전달할 겁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해야하는데, 몇 가지 서명을 할 게 있어서요.]
"서명했다가 뭐 또 원작 세계로 빨려들어가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흐흐, 원하신다면 이번에는 제가 그렇게 해드릴 수 있기야 합니다만....]
"정중히 사양합니다."
[저런, 창염을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습니까?]
"만나고야 싶은데, 그럴 수는 없으니까."
과거와 미래의 창염에게는 내가 한 명씩 붙어있다. 창염이 현실로 오지 못하는 이상, 현실로 돌아온 나는 창염을 만날 수 없다.
"그리고 만나고 싶으면 게임 다시 접속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고도 징하시네요.]
"DLC 업데이트 된 거 정상적으로 가동되면 일단 미국으로 날아가려고요. 흐흐."
[정말 여러모로 대단하신 분입니다. 아...이런 걸 두고 겜창이라고 하던가요?]
"창염 만나러 가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런 거라면야. 흐흐흐. 아참, DLC 얘기하셔서 말인데요. 그거 아마 파일이 조금 바뀌었을 겁니다.]
"뭐요?"
나는 황급히 게임을 켜서 업데이트 파일을 확인했다. 데이터 용량이 얼마인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공지사항 속 업데이트 자료 중에 일부 데이터가 누락되어 있었다.
"이거 도대체 뭡니까?"
[피닉스 루트는 삭제되었습니다. 잠수함 패치죠.]
"헐. 그럼 다른 사람들 피닉스 루트 진입 못합니까?"
[예. 완전히 공략불가 히로인이 되었습니다.]
"......."
동서남북으로 감사의 절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식으로...?"
[당신이 보여준 스토리가 인상깊었다고 하는 분이 계셔서요.]
하선태는 내게 파일 하나를 보냈다. 원작에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던, 의 실루엣이 담긴 사진이었다.
[여의도에서 코어를 건네 주고 소멸하는게 아니라, 이런 형태로 아군의 힘이 되어주는 NPC가 되는 거죠. 물론 기존 피닉스 루트의 진입 조건을 달성해야하겠지만....]
"잠깐만요. 이러면 괴인 피닉스가 히로인이라도 되는 겁니까?"
[...어디까지나 당신을 모티프로 해서, 간혹 정신적으로 생리를 하기는 하지만 듬직한 조력자 포지션으로서 최후의 전장에서 소멸하는-]
"그러니까 내가 덜렁덜렁 거리는 지휘관 놈들한테 박힌다 그 말인 겁니까?"
[......그건 정말 미안합니다. 반대급부라서 어쩔 수 없었어요. 회장님 특별 지시라서.]
"허."
머리가 잠시 아파왔다. 갑옷 괴인을 상대로 온갖 망상을 펼칠 진짜 괴물들을 생각하니, 절로 머리가 띵했다.
"......창염 대신 내가 박히게 생겼구만."
[미안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피닉스 루트가 맞다. 단지 숱한 사람들이 원하는 히로인 창염은 원작에서 사라지게 되고, 남은 건 나를 모티프로 했다고 하는 괴인 만 남게 될 것이다.
'창염이 다른 놈들이랑 꽁냥대는 것보다는 나은가?'
하선태가 저자세로 나오는 걸 보니,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인 듯 했다. 하선태도 결국 '사장'이고, 그룹의 '회장'이 특별하게 낸 지시라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뭐...어떤 의미로 박히는 데에는 이골이 나있으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직접 체험하는 것도 아닌데."
[감사합니다. ...슬슬 도착했을 시간이군요.]
띵동.
집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아마도 하선태가 전화를 길게 이어나간 이유는 찾아올 직원에 대해서 안심하라고 그런 게 아닐까.
'배려심 한 번 쩌네.'
자기도 박힐 뻔한 상황에서 내가 최대한 도와준게 신의 한수가 될 줄이야. 역시 사람은 서로 돕고 봐야 하는 일이다.
"고맙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직원 분이랑 이야기하도록 하죠."
[예. ......아까, 괴인 피닉스가 DLC에 들어간 게 반대급부라고 했잖습니까?]
"그렇긴 하죠."
[......위상을 맞추기 위해서는 같은 계에 동시에 존재해야했습니다. 저를 너무 원망하지 마십시오. 등가교환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예?"
뚝. 전화는 끊겼다. 현관문 너머에는 아무도 비치지 않았다.
"......설마."
입이 바짝 말랐다. 현관의 거울 상태를 확인한 뒤, 대충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끼이이익.
"안녕하세요?"
* * *
뚝.
하선태는 통화를 종료했다. 스마트폰은 스피커폰 상태로 연결되어 있었고, 하선태는 맞은편의 남자에게 웃으며 말했다.
"들으셨다시피 저희를 상대로 뭐 협박하거나 그럴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순수하게 게임을 즐기는 청년일 뿐이죠. 이제는 둘이서 즐기게 되겠지만...."
"그만."
그는 손을 흔들어 말을 끊었다.
"내가 직접 옆에서 봤었다. 그 정도면 됐어."
"...사실은 이렇게 다시 만나는 것까지 보고 싶으셨던 것 아닙니까? 그래서 외계에 간섭까지 하시면서 직접 데려오시고. 흐흐."
"시끄럽다."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회색 후드를 뒤집어썼다. 회장실에 앉은 자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복색이었으나, 아무래도 그는 그게 제법 마음에 든 것 같았다.
"하선태."
"예, 회장님."
"...16명을 전부 데려오는 건 무리겠지?"
"예. 더 데려온다면 한 명밖에 안 되겠죠. 이쪽에서 한 명이 들어갔으니까."
"씁, 아쉽군. 그러면 말이야...자네가 딸이라고 했던 그 아이라도-"
"조 회장님?"
"......아, 글쎄. 인간답게 농담도 못하나?"
"저도 인간답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쯧. 아쉽군."
회장은 의자를 뒤로 눕혔다. 유리창에 비친 햇빛이 후드 아래의 머리에 비쳐 환하게 반사되었다.
"그 자들, 자네가 책임지고 주기적으로 지켜보면서 보고해. 괜히 지구 전체 딸기를 전부 사들이겠다고 난리피우면...적당히 조절하고."
"물론입니다. 더 하명하실 것은?"
"...한 명 더 데려오는 건 어떻느냐? 역시 그 놈은 한 명 보다 두 명한테 쥐어짜이는 걸-"
"회장님?"
"......에잉, 썩을 놈. 그럼 말이야."
회장은 사납게 미소지으며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촉수녀, 욕쟁이, 망나니. ...셋 중 누구를 붙여야 그 놈이 평생을 스트레스 받으며 쥐어짜일까?"
"꼭 그렇게 하셔야겠습니까?"
"당연하지. ...니알라 놈을 흑사갈에다가 집어넣었는데, 한 명 더 데려올 수 있잖아? 등가교환."
"......제 생각은 그냥 두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이곳은 중혼이 안 됩니다."
"......아!"
"회장님의 뜻은 알겠으나...."
"그래. 둘이서 백년해로 하라지 뭐. 에잇, 젠장."
회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유리창을 향해 소리질렀다.
"이 놈들, 확 콘돔 쓰다가 찢어져버려라---!!"
"......콘돔이 뭔지 알기나 할까요?"
* * *
"만나서 반가워요. ...집이 생각보다는 깔끔하네요? 맨날 석하랑 보고 생활력 개판이라고 욕하더니."
"아...."
아는 얼굴이었다. 정장차림은 처음이지만, 보기만 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하신라. 하 씨 성을 가지고 있고요, 이름은 '신라'라고 합니다. 어느 분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분에 대한 저의 최소한의 예의? 푸흐흐."
"......이거 하사장님한테 따로 인사드리러 가야할 것 같은데."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았다. DLC를 통해 창염의 루트가 삭제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런 결과라면, 갑옷 괴인 피닉스를 상대로 플레이어들이 박고 싶다며 헉헉대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서 신라양. ......아,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제가 먼저 말해볼까요?"
푸른 머리칼의 그녀는, 나의 집으로 들어와 현관문을 걸어잠그며 내 귀에 속삭였다.
"......씨, 섹스를 하러 왔어요."
창염의 피닉스.
True Ending.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