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7화 〉1부 NORMAL ENDING - 3
호문클루스.
X로이드와 바이오로이드를 제작한 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기계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소체에 '영'의 일부를 집어넣어 만들어낸 별개의 개체.
호문클루스가 만들어진 배경은 히메지 히카리가 '그노시스'를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의욕에서 시작되었다.
호문클루스라는 소체 자체는 누구든지 만들 수 있었다. 기계 인형인 X로이드는 제법 흔한 기술이었고, 바이오로이드는 유성이 특허만 가지고 있을 뿐 기술 노하우가 공유되면 어떤 곳에서든 만들 수 있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호문클루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노시스'는 다르다.
영혼을 담은 그릇. 일곱 가지 속성의 코어가 정확한 밸런스를 갖추고 있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 영혼의 일부를 안정적으로 담아내는 완벽한 상태를 유지해야했다.
성주가 정령들의 코어를 연구하여 이유나를 만들었다.
그러면 자신도 못할 이유가 없다.
결과는 1% 모자란 성공.
성주가 만든 그노시스가 100이라면, 히카리가 만들어낸 유사 그노시스는 한계치가 99까지 올라가는 물건이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했지만, 신의 자리는 넘보지 못했다.
하지만 신을 포기하면 어떻게 될까.
그저 한낱 인간의 자리에 머무르기를 선택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되는 거지."
호문클루스에 들어간 그는 내 손을 자신의 가슴에 올렸다. 정확힌 비율로 '만들어진' 신체의 너머, 심장이 뛰어야 할 위치에는 인공심장과 코어가 두근거리고 있었다.
코어 안의 마력은 그저 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최소한의 힘일 뿐. 그의 몸은 달을 쪼개버리는 화력을 지닐 만큼의 힘이 없었다.
"당신...."
"엄밀히 따지자면 나는 '그'가 아니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나는 그의 기억으로부터 복제된 존재. 영혼의 일부를 떼어놓은 흔적. 코어의 마력을 읽어내 기억이 집약된 AI. 정말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나는 그라고는 할 수 없지."
"아뇨. 당신은 당신이에요."
그는 계속 자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하지만 나는 호문클루스가 된 그가 '피닉스'임을 확신했다.
"피닉스는 피/닉/스가 된 거죠. 당신은 그 중 하나일 뿐이에요."
과거로 돌아간 피닉스.
굴레를 벗어던진 피닉스.
미래로 나아갈 피닉스.
...그는 내게 설령 나 혼자 이 세계에 남게 되더라도 나와 함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피닉스를 남긴 것이다.
"당신, 마지막에 저한테 뭐라고 말했는 지 기억해요?"
"...데이터로는 남아있긴 한데."
"에이, 자꾸 그런 식으로 거리 두려고 하지 말고."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말이라 부끄럽군. ...이제 곧 크리스마스다. 바깥의 눈이 참 예쁘지 않나?"
"그렇죠. 밖의 눈도 비죠."
"말이 많아."
"아무렴요."
그는 얼굴을 붉히며 내게서 시선을 피했다. 석하랑과 루살카가 울고 있는 것도 아닐텐데, 하늘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원본은 나를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했다. 마도기어를 통해 전해지는 모든 마력 데이터를 히카리가 접수했고, 그걸 나의 기억으로 만들었지. 원본이 마도기어를 벗기 전까지는."
"달로 날아오를 때."
"...그 뒤의 일은 전부 기록으로 전해들은 일일 뿐이다. 비나 눈을 이야기한 것도, 어디까지나 그 전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는 말일 뿐이야."
"......그 정도는 괜찮아요."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허벅지를 팡팡 두드렸다. 그는 어색한 동작으로 침대에 누워, 내 허벅지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과연, 이런 느낌인가. 극락이 따로 없군."
"이 상태로 죽었으니까요."
"......혹시 나도 죽는 건가?"
"어차피 다시 만들면 그만 아닐까요. 푸흐흐."
내 협박에 그는 사색이 되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힘의 차이가 명백하니, 내 한 마디 한 마디에도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농담이에요."
"농담 한 번 살벌하게 하는군. ...좀 봐줘라. 나 스펙 지금 어떤지 알고 있잖나."
"E급 따리가 말이 많아요."
"......."
그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나는 그게 괜히 우스워서 그의 코어 부분을 살짝 토닥였다. 인공심장 속 박동하며 혈관을 통해 마력을 뿜어내는 코어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화수풍지광암환. 모두다 딱 7이네요?"
"투자자의 입김이 들어간 사양이라서 말이지."
"심지어 코어에 있는 마력에 조금씩 걔네들 마력이 들어가있고?"
"물방울 수준으로 섞여있을 뿐이다. 역설이긴 하지. 신의 그릇을 만들기 위한 그노시스가...이런 완벽한 호문클루스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니 말이야."
신을 포기한 대가는 참혹했다. 세계 최강자라고 불리우던 피닉스는 고작 마력을 단 '7'정도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E급이 되었다.
마력으로 신체 스펙을 끌어올려도 어디가서 운동 좀 하는 수준일 뿐, 코어웨폰 조차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몸이 되고 만 것이다.
"이제 지나가던 들개한테도 잡아먹히게 생겼네요."
"그런 셈이지."
"이런 몸뚱아리가 밖에 싸돌아다니면 분명 하이에나들이 잡아먹겠죠? 좋다고 낼름."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음, 남들이 먹기 전에 제가 먹어야겠다?"
나는 그를 향해 활짝 웃었고, 그는 떫떠름한 얼굴로 머리를 들어올리려 했다. 나는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려 그의 이마를 콕 눌렀다.
"안 됩니다."
"......원본이 원망스럽군."
"원망스러우면 왜 모습을 드러냈어요? 당신에 대한 건....."
나는 내 코어를 가리켰다.
"제가 전혀 모르던 거였는데. 심지어 싱크로 하고 난 뒤에도."
영혼의 일부분을 떼어낸 다음 그걸 호문클루스에 남겨둔다? 그런 계획이 있는지 알았다면 내가 진작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면 더더욱.
"설명을 들으니까 '아, 그랬구나'하는 거지, 이런식으로 갑자기 훅 들어오는데 이해가 쉽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싱크로하면서 그의 속내를 속속들이 다 알아챘는데?"
"......하나는 아니지."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마도 기어를 툭툭 건드렸다.
"미니 피닉스로 주변을 감시해도, 마도기어의 마력을 하나하나 스캔해도, 매일같이 기억을 읽고 안에서 보더라도, 딱 하나 알아채지 못하는 방법이 있었을 뿐이다. 너 몰래 이런 짓을 저지르는 방법이."
"......24시간 매일매일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걸 모를 수가 있다는 말이에요?"
"간부 피닉스. 너의 표현을 빌리자면...그의 '미련'이라고 할 수 있지. 너, 그는 꼴도 보기 싫어했잖나."
"......그야 그건 하렘충이니까."
나는 잠시 마음을 다잡아야했다. 눈앞의 이 건방진 남자가 말하는 단편적인 단서로만 판단을 내려보자면, 내 감시를 피해 이런 깜찍한 서프라이즈를 할 수 있던 방법은 역시....
"해부."
"...원본이 히카리에게 괜히 쩔쩔매던게 다 이유가 있었지."
히카리는 우리의 승리에 정말 많은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그도 히카리를 히로인이라는 걸 떠나서, 정말 아끼고 잘 챙겨줬다.
"그는 정말 많은 것을 두고 히카리를 시험했어. 정말로 데이터를 유출하지 않는지. 자신과 너에게 무조건적으로 도움이 되는지. 히카리는 그 길고 긴 시험을 통과했지."
"알리지 말아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죠."
"그래. 물론 그런 침묵 때문에 우주선 디자인이 그 따위로 되기는 했지만...그만큼 히카리는 입이 무거웠다. 그러니 도박을 걸어본 거야. 히카리라면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도, 오히려 흥미를 가지고 더 연구하지 않을까. 환룡조차도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매드 사이언티스트니까요."
잠깐 잊고 있었다.
- 이 세계는 원래 게임이다.
- 사실은 원래 하나의 세계인데, 초월적 존재에 의해 게임 속 세상으로 변질된 것이다.
-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세계는 그런 게임 속 세계를 무한히 반복시켜놓은 만들어진 세계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충격적인 진실에 대하여, 히메지 히카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 지 잊고 있었다.
"히카리, 너무 치트 아닌가요?"
"히로인 중에 치트가 아닌 존재가 누가 있어."
"...그렇게 말을 하니 뭐라 말을 하기가 그렇네요."
각자 자기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재능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래서 '히로인'으로 선정된 이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눈을 가리고 진리를 일부 깨우쳤다.
"이 망할 원작 녀석들이."
비단 이 세계의 히로인 뿐만 아니라, 나와 그의 정신세계에 남아있던 기억 속의 그들까지.
"...전 여친, 미련들 주제에 이런 식으로 나를 엿먹이네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거지. 모두가 살아있는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너와 함께 미래로 나아가고 싶다."
어쩐지 너무 쉽게 나가 떨어지더라.
<청운>이든 <야황>이든 <마스커레이드>든 쿨하게 떨어지기는 커녕 죽기 전까지 미저리처럼 달라붙을 애들인데, 너무 쿨하게 물러나 준다 싶더라.
'<성녀> 이유나가 그렇게 할 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이 상황을 알고 있었구나.
알고 연기를 했구나.
물론 그들도 도박을 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소멸 당하는 건 확정이니, 이 세계의 자신들이라도 행복해지도록 흉계를 꾸민 것이다.
"지금 엄청 배신당한 느낌이네요. 나한테는 나만 바라보고 산다고 해놓고,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요? 응? 야. 지금 이거 하렘엔딩이잖아."
"자, 잠깐만. 따질 거면 원본한테...."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나는 그의 목을 잡고 침대에 집어던졌다. 180이 넘는 거구에도 내가 마력을 조금 사용하니 깃털처럼 가벼웠다.
"좋은 건 나눠먹으라고 하기는 했는데, 일단 나눠먹어도 좋을 지 먼저 시식부터 해야겠어요."
"잠깐만 기다려보라니까. 나는 원본이 아니라-"
"닥쳐요."
나는 그의, 피닉스의 셔츠 째로 멱살을 잡았다.
"기억의 파편이고 나발이고, 복제고 나발이고, 내가 당신이 피닉스라고 하면 당신이 피닉스인 거에요."
그는 과거의 나도 만나러 간다고 했다. 분명 그의 기억을 읽고 내 기억과 감정을 읽었을 테니, 과거의 '창염' 또한 지금의 나와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건 지금 눈앞의 남자도 마찬가지. 나는 그가 '피닉스'인 이유를 물었다.
"당신, 세상에서 누구를 제일 사랑하죠?"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누운 상태로 내 얼굴을 잡아당겼다. 키스라도 하려나 했더니, 자신의 얼굴을 내 귓가에 대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나의 창염, 나의 신라, 나의 청화, 나의 태양. ...어떤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을까?"
"그러게요. 저도 당신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요.... 아. 그냥 편하게 하죠."
나는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나는 창염. 당신은 나의 피닉스. 어때요?"
"...심플해서 좋군."
그는 슬며시 웃었다. 나는 평소처럼 내 몸을 위에 겹쳤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흐흐, 동정마냥 부끄러워하기는. 선수끼리 왜 이래요? 당장 당신의 미니 피닉스 고개 좀 들어보라고 해요. 아, 미니는 아닌가? 푸흐흐."
"...내가 자꾸 원본이 아니라고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하나 있다."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흔들리는 눈동자로,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게 고백하듯 중얼거렸다.
"......히카리는 미성년자다."
"그래서요."
"......그는 간부 피닉스의 오염된 마력 조차도 히카리에게 넘겼다. 히카리는 그 마력 패턴을 읽고 원본의 기억과 지식을 데이터로 정리했지."
"그런데요. 그게 지금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죠?"
"......아주 큰 문제가 있지. 그도 나름대로 상식적인 사람이라, 미성년자에게 차마 '그것'까지는 알려주지 않았어."
"......헉."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온몸이 들끓기 시작했다.
"서, 설마-"
"무, 물론 너와 했던 행위들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너와 했던 행위'만' 기록으로 남았어. 히카리를 믿고 넘긴 거라 히카리도 어른이 되면 보게 되겠지만...."
"세상에."
히카리가 어른이 빨리 되고싶다고 노래 노래를 부르던 이유가 있었구나.
"저기요. 당신 호문클루스죠?"
"...그렇지."
"그럼 히카리도 지금 당신을 통해서 상황을 볼 수 도 있겠네요?"
"볼 수야 있겠지만, 개인 프라이버시를 위해-"
"발랑까진 중학생들도 섹스하는 시대에 무슨."
찌이이익!
나는 셔츠를 좌우로 열어젖혔다. 피닉스는 입술을 오므리며 나를 무서워했다.
"아."
지릴 것 같았다. 침대에서 나를 상대로 자웅을 겨루던 남자가, 이렇게 '그쪽 지식만' 거세당한 채로 동정마냥 구는 것에 절로 아랫배가 자극되기 시작했다.
"......뉴비를 만난 고인물의 심정이라는 거, 이제 알겠어요."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팔은 순식간에 머리 뒤로 넘어가 침대 해드에 묶였고, 발목에도 불꽃의 베일이 휘감겨 사지가 구속되었다.
"자, 잠깐만!"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죠. 히카리 성인식 하는 날 당신 섹스 테크닉 인스톨 하는 거로 하고.... 일단 지금은 저랑 이 밤을 즐기는 거로 하죠."
나는 그의 남근 위에 걸터앉았다. 빨딱 선 그의 피닉스는 모든 것이 그와 똑같았다. 나는 그의 위에서 앞뒤로 살살 움직이며 상체를 숙였다.
"저기요."
겁에 질린, 그러면서도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피닉스에게, 나는 귓불에 입술을 맞추고 속삭였다.
"뉴들박이라고, 아세요?"
잘 먹겠습니다.
...피지컬은 그대로라서 좋았다.
* * *
정신세계에서 하는 것은 몽정을 하는 감각과 비슷하다.
따라서 정신세계에서 아무리 질펀하게 몸을 놀린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꿈속에서 느낀 가상의 감각이지 실제와는 달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신화를 이룩한 신의 힘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 그와의 싱크로는 풀렸으나, 석하랑이 그러하듯 나는 태양신으로서의 힘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
'신에게 덤빈 대가는 혹독할지니.'
나는 내 옆에 기절한 듯 잠든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처음 한 발로 테스트 사정을 한 이후, 내가 적절히 사정관리를 하며 쥐어짠 덕분에 그는 볼살이 쏙 들어갈 정도로 체력이 다했다.
너무 격하게 하는 바람에 기절한 것이다. 나는 따뜻하게 데운 딸기라떼를 홀짝이며 유리창 앞에 섰다.
찌걱.
고간과 허벅지를 따라 하얗고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나는 그 끝에 손가락을 대고 닦아낸 다음, 혀를 대고 살짝 홀짝였다.
"연유?"
크림치즈를 적당히 섞고 끈적하게 만든 연유같은 맛이었다. 질감이나 맛이 그의 정액과 큰 차이가 없었다. 마력으로 구현화된 물건이라고는 하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일곱 발이 한계인 게 흠이지만."
사정횟수 일곱 번. 꿈속에서 하면 기본이 두 자리 수를 찍건만, 호문클루스는 고작 일곱 번을 사정하고 지쳐서 기절해버렸다.
"한 발 쌀 때마다 몸의 마력이 1씩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람."
슬슬 시동이 걸린다 싶은 순간에 자기 사양을 밝히더라. 눈물을 글썽이며 그만 싸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그답지 않다고 느껴지면서도 귀여웠다.
'꼭 예전에 기억 제거하고 처음 할 때 같은 느낌이네.'
모든 기억을 내게 맡기고 내 처음을 가져가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와 달리 이번에는 내가 주도적으로 움직이기는 했지만.
"후우. ......슬슬 나와주셨으면 하는데요."
나는 마도기어를 눌러 이 일을 꾸민 원흉을 불러냈다. 당사자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흥미진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떠셨어요...?]
"99점."
[......히힛.]
히카리는 아쉬워하면서도 만족했다. 내가 99점이라 했으니, 다른 이들도 크게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히카리."
[네, 창염 님.]
히카리는 나를 창염이라 표현했다. 그의 말대로 히카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당신에게 맡겨놓은 거, 내놔요."
[......그거 저도 건드리지 못하는 데이터로 설정해뒀어요! 저 성인이 되면 열리도록.]
"쳇."
내가 아무리 마력의 스페셜리스트라고 하더라도, 마력이 영향을 줄 수 없는 순수 디지털 자료로 만들어버리면 대책이 없다. 히카리를 협박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당사자가 섹스 테이프를 달라고 하는데 장난해요? 그거 범죄에요, 범죄."
[저 빌런 맞는데요.]
"......."
배짱이 두둑한 건 알고 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히카리. 호문클루스를 저에게 보내준 건 고마워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재미 없을 줄 알아요."
[진짜 안 돼요. 한 가지 허락을 받지 않으면 이거 보내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들어서.]
히카리는 손에 8mm 테이프를 흔들었다. 역으로 나에게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허락해주시지 않으면 이거....]
"유포나 파기라도 하게요?"
[제가 봐버릴 거예요.]
"......."
이 깜찍한 협박을 하는 야마토 나데시코를 어떻게 해야할까. 마치 사고를 친 고양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나는 속을 달래야했다.
"제가 당신을 믿어도 되겠죠? 유포나 파기, 공유는 절대로 안 됩니다."
[당연하죠. 대신 저 성인이 되면 꼭 보여주시는 거예요?]
"......제가 먼저 확인한 후에 같이 보는 걸로."
내가 아닌 그의 기억이기에 안에 무슨 기록이 남아있을지 모른다. 아무리 히카리가 성인이 되고난 뒤라고 하더라도, 19금이 아니라 29금이 있다면 적당히 거를 필요가 있다.
"후우. 그래서 호문클루스 누구누구 알고 있어요? 보니까 은유하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저랑, 사장님이랑, 사장님 파트너 분이랑, 루살카 님. 이렇게 끝이에요.]
"진짜 당사자들만 알고 있네요. 다행이면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호문클루스 제작에 자금을 댔을 은유하.
은유하와 싱크로 하는 카르나.
이미 호문클루스를 사용하던 루살카.
정말 철저하게 비밀로 만들었다 싶었다. 카르나가 싱크로로 인해 은유하가 알고있는 것을 무조건 알게 된다는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제작자, 투자자, 그리고 임상실험자만 알고 있는 극비인 셈이었다.
"......."
나는 고민했다.
과연 이것을 영원히 비밀리에 둘 것인가. 넷은 내가 충분히 컨트롤이 가능한 존재들이며, 내가 요청하면 평생을 비밀로 가져갈만큼 입이 무거운 존재들이다.
"......에휴, 내가 진짜 사람이 착해서."
언젠가 그가 나를 다시 보게 된다면, 꼭 말할 것이다.
"내가 진짜 큰 맘 먹고 하렘 허용해준다."
그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자신의 일부를 남겼을 지는 모르지만, 나는 감히 나를 기만한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히카리. 부탁할 게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당신들 집에 피닉스 한 대 씩 마련해주려고 하는데요-"
실시간으로 어디 한 번 1:1 마크를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저, 저기...."
"어, 일어났어요?"
마침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쪼그라든 그의 피닉스는 나를 보더니 서서히 날개를 펼치듯 커지기 시작했다.
"회복력은 확실하네요. 흠흠, 그럼 당신. 지금부터 끔찍한 시간을 보낼 준비는 됐어요?"
"...이상한 걸 시키려고 하는 건가?"
"이상한 거라기 보다는, 당신이 그렇게도 바라는 하-렘 엔딩이죠."
나는 홀로그램으로 히로인들의 사진을 띄웠다. 아직 미성년자인 이들이 몇 명 섞여있기는 했지만, 일단 되는대로 전부 띄웠다.
이유나. 박라온. 김누리.
정슈리. 히카리. 샤오린.
은유하. 아르엘. 천가을. 백희아.
석하랑. 김펜릴. 삭풍. 히드라. 지륜.
카르나. 앙그. 환룡.
그리고 나.
"어라. 헤아려보니 17명에서 몇 명 더 있네요? 뭐 아무렴 어때. 어디 한 번 선택해봐요."
나는 그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당신 분신이 만들어진다면 누구한테 가장 먼저 팔려갈래요?"
"......아니, 그, 그걸 얘기하라고 하면."
그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홧김에 질러버렸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경매로 넘기는 수밖에."
"뭣?"
"아아, 창염이 전합니다."
나는 마도기어를 통해 적당한 진실을 각색하여 '모두'에게 전했다. 일방적으로 전했기에 답장은 깡그리 무시하고, 결론만 받았다.
"그래서 피닉스 살 거에요, 안 살 거에요? 올해는 선착순으로 딱 세 명만 팔게요. 푸흐흐."
...
...
...
불과 10초도 지나지 않아 완판되었다.
* * *
2025년 12월 24일.
나는 드디어 1가정 1피닉스 계획을 끝맺음 지을 수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완강히 거부하던 이유나는 결국 길고 긴 인내를 참지 못하고 피닉스 16호기를 덮쳐버렸다.
역시 이유나.
연동되어있던 다른 피닉스들을 순간 고장낼 정도로 이유나는 대단했다. 덕분에 히카리가 밤을 지새우며 고쳐야했지만, 그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후후, 즐겁죠?"
"...죽을 것 같은데."
나는 그와 백영도의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서로 손만 잡고 걸을 뿐이지만, 마도기어를 통해 또다른 그의 분신들이 열심히 쥐어짜이는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견하셨어야죠. 어디 당신이 뿌려놓은 플래그가 한 둘이어야지."
"...네가 하렘 허락만 안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지 않나?"
"흥. 감도 20배."
나는 분신으로부터 전해지는 성감을 본체와 공유했다. 최초의 호문클루스, 나의 피닉스는 순식간에 본체로 전해진 20 피닉스의 성감에 걸음을 멈춰야했다.
"후후, 역시 20 피닉스로는 이제 찍 싸지도 않네요."
"...이미 일곱 발 다 빼버렸으면서 무슨."
"뭐,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고."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히로인들 모두 조건을 내건 내 허락에 따라 자신만의 피닉스를 가지게 되었지만, 내 앞에 있는 피닉스 만큼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다.
"저기요."
"왜."
"고마워요. 이런 식으로라도 저와 평생을 함께 해주게 해주셔서."
"...그 얘기는 언젠가 돌아올 지도 모르는 원본에게 얘기해라. 나는 어디까지나 그의 자리를 대신하는 존재일 뿐이야."
"아뇨. 당신은 저한테 유일한 피닉스인 걸요."
나는 그에게 분명히 선언했다.
"당신은 나의, 창염의 피닉스랍니다."
창염의 피닉스.
Normal Ending # 000, 완.
* * *
"호문클루스는 신체를 개조할 수 있는 사양이 아니던가?"
"그렇죠. 덕분에 자기 취향에 맞게 몸도 개조할 수 있죠. 히카리가 고생은 하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재미있군. 그런데 저 조건...."
"아, 그거요? 참 창염답네요. 자기 원할 때 FMF로 3P를 하든, 아니면 각자 자기 피닉스 데리고 2:2 난교를 하든 하렘 멤버가 되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건. 푸흐흐."
"참 대단하군. 저러다 망년회로 다같이 모여서 40P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가는 오라클이 자위중독으로 죽을 걸요?"
"그건 그렇군."
"그렇죠. 아참, 창염 포함해서 히로인은 모두 19명인데 왜 20 피닉스에요? 한 명은 또 누구길래?"
"창염이 19호기 챙겼다. 19호기는 청화 베이스의 여체지."
"설마."
"그래. 창염이 라스푸틴을 착용하고 박았다."
"......하렘충에게는 정말 적절한 엔딩이네요. 그럼 저 갑니다."
"어딜 가는가?"
"인사하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