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506화 (506/1,497)

〈 506화 〉1부 NORMAL ENDING - 2

세계는 혼란에 빠지기는 했으나, 달이 지구에 떨어진다거나 하는 수준의 혼란은 없었다.

당장 인류의 위협이 되는 괴수와 차원문이 사라지고, 그에 따른 반대급부로 코어의 공급이 끊겼을 뿐.

코어는 더이상 무한으로 공급되는 자원이 아니게 되었다.

코어는 이제 그저 석탄과 석유 같은 한정된 자원이 되고 말았다.

코어의 분배에 대하여 국가에서 독점을 시도하려는 곳도 있고, 거대 기업이 코어를 막대한 값에 팔아넘기는 경우도 있고, D급 코어를 가지고 상해 사건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이런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히어로들이 나섰다.

괴수가 사라진 세계에도 불구하고 마력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히어로들은 코어를 노리는 빌런들과의 전쟁으로 인생의 2막을 펼쳐야 했다.

단지 세계에 괴수가 사라졌을 뿐, 세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멸망을 피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과 감사를 느끼는 자들 또한 있기에, 세계는 여전히 이전과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 저희 결혼합니다.

......인간과 괴인-사도의 결혼 소식만 아니었으면.

* * *

<오후 1시, 신서울 히어로 협회.>

"단군신화에 보면 환웅이 웅녀와 짝이 되잖아요. 그게 지금 딱 그 짝 아닐까요?"

"그건 그냥 설화 아이가."

"모르죠. 그때도 웅녀가 사실은 곰을 베이스로 한 괴수였고, SSS급 능력자라서 인간 여자의 모습이 되었떤 걸지도."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빙시가? 그게 진짜면 기원전부터 테라랑 이 세계가 연결된 거지."

"농담을 찐으로 받아들이니까 아직까지 남자친구가 없는 거예요."

"...아직 2025년도 아니고 2020년이거든? 그리고 내 남자친구 누가 잡아먹었는데?"

"선 넘네?"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상대도 마력을 끌어올렸다. 결혼식장에서 검은 정장에 피튀기는 싸움을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서로서로 오늘은 참기로 했다.

"가루라 때문에 참는 줄 아세요."

"울 엄빠 때문에 참는 줄 알아라."

"그이한테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주제에."

"어쩌라고. 내가 금마는 못 이겼어도 니는 한 손으로 이긴다."

"이기면 저도 언니야로 콜?"

"지랄하고 자빠졌네. 등시가."

그의 앞에서 얼마나 조신하게 굴었던 걸까. 입이 걸걸하다 못해 마음껏 쌍욕을 퍼붓는 이 여자가 세상에 <설화령> 석하랑이다.

"나이 21살 먹고 엄마아빠 결혼식에 서는 여자가."

"......나이 얘기하면 니 존나 불리한 거 아님?"

"흥. 2000년 1월 1일에 그이를 만나고 여자로 다시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니까 상관없네요. 그러니까 저는 21살이랍니다. 언니라고 불러요."

"그렇게 따지면 내랑 동갑이구만. 에휴, 됐다. 니랑 말싸움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키스로 입 아프게 해드릴까요, 아니면 아랫입을-"

"두 분 다 여기계셨네요?"

우리에게 주어진 방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흰색을 전부 빼버린 검은색 계열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유나였다.

"어서와요, 유나. 오늘도 예쁘네요. 한 번 안아봐도 될까요?"

"죄송해요. 저 그 쪽으로는 취미 없어서."

"칫."

"...참 니도 금마도 별나데이. 닌 여자 그렇게 밝히면서 왜 금마 좋다고 엥기는데?"

"성적 취향이랑 인생의 반려랑은 다른 문제라서? 푸흐흐."

유나와 하랑이 동시에 나를 눈으로 흘겼다. 조만간 광속성 페어, 풍속성 페어, 그리고 환속성 페어만 오면 정령들은 다 모이는 택이었다.

"슬슬 일어날까요. 유하가 결혼식 뷔페로 유명 쉐프들 불렀대요. 디저트는 후안 사장님이 주도하셨고."

"네 입에서 뷔페라고 하니까 되게 그런데."

"저도 겸사겸사 눈요기를...흐흐. 아참, 둘이서 얘기 좀 나누고 있어요. 신부 대기실 좀 다녀오게."

"왜? 가루라한테 아까 다녀갔잖아."

"......."

나는 방을 반쯤 나간 상태에서 하랑에게 윙크를 날렸다.

"제가 다른 여자들은 다 한 번씩 핥아봤는데, 루살카는 아직이라서-"

"미친 년아!!"

얼음창이 날아왔다. 나는 잽싸게 밖으로 빠져나가며 유나에게 손키스를 날렸다.

"부탁해요!"

"야아아아!"

"그라운드 제로."

히어로 협회에 특별히 마련된 하객 대기실 중 한 객실에서, 지속성 정령이 수속성 정령을 감금했다. 그 사이 나는 빠르게 복도를 달려,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윽."

백금발의 여인, 루살카는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어허, 신부화장 다 망가지는데요."

"결혼식 부정탔어."

"에이, 고작 이걸로 뭘."

"하필이면 마지막에 보는 사람이 너라니. 진짜 지옥 같구나."

"왜요? 제 덕분에 당신 부부의 금슬이 얼마나 좋아졌는데."

"네가 아니라 형부 덕분이지."

"......."

호칭 하나가 사람을 이리 싱숭생숭하게 만들 줄 몰랐다. 루살카의 말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미, 미안."

루살카 또한 내게 사과했다.

"아녜요. 괜찮아요. 이렇게 될 운명이 아니었으면, 아마 영원히 고통받았을 사람이니까."

"그,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말야. ...남들 없으니까 지금 얘기할게."

루살카는 나를 향해 고개를 짧게 숙였다.

"너희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정말이란다."

"아무렴 고마워하셔야죠. 누구 덕분에 광검이 부활했는데."

"유하 덕 아니니?"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고."

광검을 죽이는 건에 대하여 그도 나도 '죽이자'는 생각만 했지, 괴인으로 부활시킨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

어쩌면 거기서부터 또다른 스노우볼이 굴러간 게 아닐까. 광검은 알게 모르게 큰 도움이 되었고, 루살카를 온전히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아 참. 그 사람이 거짓말 한 거 있는데, 알려드려도 될까요?"

"뭔데?"

"사실 그 사람이 광검 놀리려고 했던 말인데요."

나는 주변을 살펴 유리창이 있는지 확인했다.

"사실 그 사람이 석하랑이랑 했다면서 당신들에게 알려준 체위들, 석하랑이랑 한 게 아니라 저랑 한 거였어요. 푸흐흐."

"......."

어라. 왜 화를 안 내지.

"저, 저기요? 루살카?"

"당연히 나는 알고 있지."

루살카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하면서 가슴 만지는 테크닉이 어색하더라고. 그건 가슴 작은 사람을 위한게 아니라, 어느정도 볼륨감 있는 사람을 위한 손동작이던 걸."

"......으앙 들킴."

역시 사랑을 아는 정령이라 그런지 그런 쪽으로도 눈치가 빨랐다. 덕분에 이야기하기도 왠지 모르게 더 편해졌다.

"사랑받는 느낌이 들어서 더 좋았죠?"

"그래, 그래. 너희 부부 염장 지르는 거 대단하니까 그만하렴. 이제 슬슬 식 시작이잖니. 가서 서방님 좀 챙겨주렴."

루살카는 내게 축객령을 내렸다. 마침 화장을 위해 러시아에서 파견된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들어오길래, 나는 루살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축하해요. 진심으로."

"...고맙네. 설마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듣게 될 줄 몰랐거든. 라-어라?"

"성주도 죽었고, 이계신도 떠났으니 이제 원래 이름을 불러도 필터링은 안 걸려요. ...물론 이제 그 이름은 더이상 쓰지 않을 거지만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죠?"

"......그렇네."

루살카는 쿡쿡 웃으며 벽면을 가리켰다.

"신부 이름으로 그 이름을 쓰기 보다는 루살카가 훨씬 더 예쁘지?"

"그렇죠."

신부, 아나스타샤.루살카.블라디미르. 가운데 루살카 글자에 굵은 표시가 되어있는 이유가 따로 뭐가 있으랴.

"그럼 준비 잘 해요. 울지 말고."

"너나 울지말렴. 너희 부부한테 유일하게 안 먹힌 정령이 결혼한다고 말이야."

"결혼식 파토내버릴까보다. 칫."

"그랬다가는 네가 아끼는 가루라 결혼식부터 파토날 걸?"

"......흥."

나는 신부대기실을 떠났다. 마침 앞에는 오늘 협회의 건물을 빌려 결혼식을 거행하는 두 커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허윤환, 루살카.

"살아님이 광검계신다."

이슈에는 이슈로 덮고, 혼란에는 더욱 더 큰 혼란을 일으켜 상호확증파괴를 유도한다.

어차피 부산 사람들에게 모두 들킨 것, 벨로보그는 화끈하게 광검으로서의 자신을 인정했다.

- 역시 죽은 척하고 계셨군요!

- 아니, 진짜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피닉스랑 1:1로 맞짱떴다가 살해당했다. 근데 피닉스가 나 죽이기 아깝다고 자기 사도로 살렸지. 목숨이 피닉스에게 저당잡힌 거다.

- .......

단순히 아름다운 이들이 최강의 자리에 올라있다는 이유로 여신이라고 불리우던 이명이 확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죽은 자의 부활.

괴수의 인간화.

사람들이 찬양하고 두려워하는 신의 힘이 오늘 이 자리의 결혼식을 만들어냈다.

"이승형, 가루라."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더니 진짜로 결혼을 하겠다고 할 줄이야. 이미 서로 죽고 못사는 관계가 되어버린 만큼, 강제로 떼어낼 수조차 없는 노릇이다.

"......이승형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걸까요?"

"뭘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리냥."

"신랑이 참 복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이봐요."

나는 김펜릴을 불러세웠다.

"결혼식에 메이드복이라니, 장난해요?"

"이 몸 지금 뷔페에서 일하고 있는 중이다냥."

"그럼 아르엘은 몸에서 빼놓고 일하던가."

"본인이 부끄러워서 나오기 무섭다고 한다냥. 나중에 사진 찍을 때는 '셋이서 같이' 올라갈 거니까, 걱정말라냥."

"...하아, 그게 아니라. 결혼식에서 흰 색은 신부 전용이라고요. 저 봐요."

나는 나의 드레스 코드를 가리켰다.

"백청화가 아니라 오늘은 흑청화라고요."

"...절풍은 이게 맞다고 하던데?"

"절풍 말을 믿을래요, 아니면 내 말을 믿을래요?"

"당연히 건물주 님이지. 알았다냥. 실은 이 몸에게 정해진 유니폼이 있다냥. 알바생 김펜릴, 오늘은 결혼식장 이벤트 업체 알바로 불려왔다냥."

김펜릴은 손뼉을 쳐서 자신의 옷을 갈아입었다.

"짜잔!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 이어!"

"...장난?"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산타다냥! 결혼식장에 온 하객들을 위해 선물을 나눠줄 생각이다냥."

김펜릴은 품에서 종이로 포장된 알사탕을 하나 꺼냈다. 내용물은 안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거 코어잖아요."

"이 몸이 아르엘이랑 전 세계 돌아다니면서 지금까지 모아온 코어를 선물로 주는 거다냥! 아, B급 부터 S급까지 랜덤이니까 치트 치지 말라냥. 그럼 재미 없다냥."

"...알았어요. 맘대로 해요."

누가 또 무슨 이벤트를 기획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내게 주어진 역할만 잘 하면 그만이다.

'신부 입장의 아버지 역할.'

최소한 신부 만큼은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자가 이끌어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한 보수적인 여인의 입김에 따라, 나는 정장에 넥타이까지 착용한 남장을 고수해야 했다.

"그럼 잘 들어가요. 아, 저도 혹시 선물 있나요?"

"...흐흐흐. 너한테는 오늘 밤에 산타가 찾아갈 거니까, 기대하라냥."

산타 김펜릴은 미묘한 웃음과 함께 떠나버렸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산타는 과연 실존할까.

* * *

"죄송해요, 창염 님!"

가루라는 내게 부케를 던졌다.

* * *

성야.

밖에는 캐롤이 울린다.

나는 백영도에 마련된 나의 거처에 들어와, 부케를 책상위에 올렸다.

버릴까.

부케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으로써, 가루라가 벌인 깜찍한 짓에 나는 순간 화딱지가 나서 결혼식장을 엎어버리려 했다.

"지가 행복하다고 누구 엿 먹이는 것도 아니고."

가루라는 나와 그의 관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자세히 알려줄 이유도 없었고, 누군가가 시켜서 부케를 내게 던졌을 뿐이다.

"이게 크리스마스 선물? 하."

이승형과 신혼여행을 떠났을 가루라에게 저주를 내려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그저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신에게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신 님, 계시나요? 들리면 꼭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신이 신에게 소원을 들어달라 기도하는 것도 웃기기는 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오늘 꽁냥대는 커플들 콘돔에 구멍 뚫리게 해주시고, 자기도 모르게 뱃속에 남은 난자에 정자가 랑데뷰를 해서 수정하게 해주세요. 한 명도 남김없이 싹 다."

그리고 10달 뒤에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나도록. 나는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아무렇게나 틀어놓은 TV에는 캐롤이 들릴 뿐이었다.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안 주신대~

"흥, 선물 따위-"

"필요없나?"

"......."

익숙한 목소리의 그가, 창문 밖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는 아이한테도 선물 주려고 왔는데."

"...무슨 선물이요?"

"나."

드르륵.

그는 창문을 열며 창틀에 걸터앉았다.

"밖에 비 대신 눈이 내려서 말이야. ...들어가도 괜찮나?"

"...이것들이 단체로 나를 엿 먹인 셈이네요."

"서프라이즈지."

"네, 서프라이즈네요. ...어서와요. 아예 죽어버린 줄 알았는데."

"죽었지. 그런데...."

그는 여느때와 같은 얼굴로, 나를 향해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래 피닉스는 죽어도 부활하잖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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