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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504화 (504/1,497)

〈 504화 〉1부 BAD ENDING - 2

어떤 인사를 해야할까. 진짜로 '창염 큥큥을 하러 왔다'고 외치는 게 좋을까.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

아무도 없다. 옥좌에서 나를 시큰둥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거나 석장을 들어 불꽃을 날려야 할 여신이 자리에 없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황급히 옥좌를 향해 달려갔다.

없다.

창염은 옥좌에 앉아있지 않았다. 마치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기라도 한 것처럼 자리를 이탈했다.

흐끅, 흐끅.

"......흐흐."

귀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괜히 웃음이 세어나왔다. 울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첫인사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태양은 언제나 떠오르지. 다시 만난다고 했잖아."

"......그거 저 아니거든요."

다행히 시작부터 불타거나 맞아죽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 얼굴을 보기 꺼려하는 것 같으니, 나는 주인 대신 옥좌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한테는 다 똑같아. 히스테리 부리며 죽이려 들던 너도, 나한테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너도."

"...씨이."

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기가 세고 지기 싫어하는 고집쟁이답다 싶었다.

"당신 미쳤어요?"

"응, 너한테."

"입에 석유를 쳐바르셨나. 그런 느끼한 소리는 당신 사랑한다던 창염한테 그러세요. 나는 걔가 아니니까."

"글쎄."

옥좌 뒤의 여인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을까. 쪼그려 앉아있을까, 아니면 그냥 서서 고개만 떨구고 있을까. 어느쪽이든 나는 뒤를 훔쳐보지 않았다.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회귀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기본적인 문제기는 하지. 미래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과거에 돌아갔을 때는 다른 존재니까 말이야."

"그쵸? 그러니까 죽어주세요. 저는 당신이 아는 창염이 아니니까."

"죽어줄 수는 있어도 그건 안되겠는 걸. 나는 '너'를 구하러 온 거니까."

나는 창염을 구하러 왔을 뿐이다. 창염을 살리러 왔을 뿐이다.

"12년을 나한테 10만 번 죽고, 8년을 나한테 강간당하고, 나머지 1년동안 잠도 안 자고 개고생을 해서 또 다시 과거로 돌아가시겠다?"

"물론. 성주도 죽이고 이계신의 조력도 얻어냈지만, 딱 하나 성공하지 못한 게 있거든."

"뭔데요?"

"너랑 같이 사는 거."

"...미쳤어, 진짜."

목소리가 떨리는 건 애써 무시했다. 창염의 목소리가 떨릴 수록 나도 감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2천억도 포기하고, 하렘 엔딩도 포기하고, 고작 나랑 같이 살겠다고 세계를 다시 되돌려요?"

"고작이라니. 너랑 같이 알콩달콩 살려고 내가 이짓거리를 하는데."

"......."

또각, 또각.

익숙한 구두굽소리가 들렸다. 나는 활짝 미소지으며 내 앞에 당당히 선 여인을 맞이했다. 불꽃 무늬가 들어간 로브에 청록의 베일을 어깨에 두르고 있는 여인. 후광은 마치 태양처럼 화사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안녕? 또 만났네?"

"당신의 기억을 전부 읽었어요."

푸른 머리칼의 여인, 창염은 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테라, 플레이어, 정령, 이계신, 리셋."

"전부 다 알았구나."

"......끔찍한 시간을 한 번 더 보내고 싶어요?"

"와! 진짜 다 읽어버렸네. 현실의 드립을 치다니."

"말이나 못하면."

창염은 한숨과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옥좌의 팔걸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

"놀라긴."

창염은 자연스럽게 내 허벅지 위에 앉았다. 다리는 양옆으로 놓고, 나와 대면좌위를 하듯 내 위에 앉은 것이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렇겠죠. 만나자마자 '따먹으로 왔다' 소리나 지껄이니 바로 살해당하는 건 당연한 거죠."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

"됐어요. 괜히 스트레스만 받는 기싸움은 하기 싫어요. 기억을 이어받았다는 건...이전의 마음도 이어받았다는 거니까."

"어우, 이런 패턴은 처음인데."

"패턴이 똑같으니 이전의 제가 그렇게 쉽게 공략당했죠. 마음 편하게 생각해요."

창염은 베일을 벗어던졌다. 처음으로 지은 미소는 나를 향한 도발이었다.

"저기요. 당신은 저를 똑같은 창염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저는 다르거든요? 편의상...2020년의 그 년이랑 지금의 저는 다른 존재다 이 말씀."

"자, 잠깐만. 저기요? 창염님? 아니, 신라님? 우리 천천히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면 안 될까요? 2020년의 창염 양도 저랑 말 트는데 5년이나 걸렸는데!!"

"닥치세요. 아니...닥쳐."

창염은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내 옷이 전부 사라져버렸다. 창염 또한 나체가 되었고, 손을 뒤로 넘기며 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했다.

"신을 여자로 만들고 울리게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그냥 죽여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두 손을 들었다. 하지만 창염은 나를 비웃으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엉덩이가 살짝 들린 것은 덤이었다.

"죽여는 드릴게. 복상사로."

"......."

이런 창염은 또 처음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창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당신 혹시 2020년의 창염에게 질투를-"

푹찍.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 * *

"정신이 드나요?"

"아, 다시 말 높인다."

"아이덴디티니까요."

창염은 내 팔을 베고 누워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유두로 찌르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누가 하도 빨아댄 탓에 가라앉지를 않네요."

창염은 가슴을 내 겨드랑이 아래에 부비적거리며 베시시 웃었다. 나는 창염이 바라는 대로 창염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슴에서 딸기우유 무한 리필 해주시는데 아무렴."

"당신 딸기 알레르기 있다면서요."

"누구한테서 나오는 딸기인데 참아야지. 암."

"......걔는 이런 거 안 해줬죠?"

창염은 눈에 불을 키며 질투심을 내비쳤다. 창염이 질투하는 이가 누군지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나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는 걔가 너라니까."

"저랑은 다른 사람이네요. 원작 유나랑 20 유나랑 다른 사람인 것처럼."

"정말 그러기야? 응?"

"꼬우면 다시 미래로 돌아가시던가."

"......진짜 꼽다. 꼬와서 확 꽂아버고 싶다."

"그럼 나야 좋지 뭐."

말빨이 전혀 밀리지 않는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창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럴 때는 또 갸르릉거리며 내 손길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다.

"하아. 시작하자마자 설마 한 번 쥐어짜이고 시작할 줄이야."

"흐흐, 한 번 쥐어짜인 걸로 다행인 줄 아세요. 안 그랬으면 십만 번을 쥐어짜였을 테니까."

"......그거 참 무서운 얘기구만. 나 방금 복상사로 죽고 왔는데 말이야."

"복상사로 십만 번 채우면 그건 또 재미있지 않을까요?"

"살려주십쇼, 주인님."

"푸흐흐."

창염은 눈을 감으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나는 주인이 원하는 대로 입술을 맞춘 뒤, 혀를 섞었다. 기억을 읽으며 테크닉도 이어받은 건지, 창염은 정말 대단했다.

"푸하. 어때요? 걔랑 비교도 안 되게 잘 하죠?"

"......나 하나만 물어보자. 원래는 유나한테 질투해야 하는 거 아니냐?"

"유나보다 더한 적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거 너라니까."

"어머, 저는 그런 '경험' 없는데."

뭐라고 해야할까. 색다르면서도 짜증나고 요망했다. 자꾸만 자신과 이전의 창염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너 꼭 그러니까 바람 피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걸."

"어머나, 들켰네요.

창염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손가락을 튕기기 무섭게 옷까지 단정히 차려입었다.

"어디 가려는...어?"

나 또한 말끔한 백색 정장을 어느샌가 입고 있었다. 창염이 마력으로 순식간에 입힌 듯 했고, 나는 절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위이이잉.

세계가 변했다. 우리가 있던 호텔 펜트하우스는 라의 신전이 되었고, 창염은 그 출구의 앞까지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가요. 이전의 그 여자랑 제가 어떻게 다른 지 확실히 알려줄테니까."

"잠깐만. 지금 나가면 간부 피닉스 때문에 제정신이 아닐 걸?"

"...하아, 진짜 바보 머저리네. 당신은 어떻게 그 여자가 한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요? 바보에요?"

"바보 맞아. 창-"

"나밖에 모르는 바보 소리 했다가는 가만히 안 둬요."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창염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는 지 몰라도, 나는 창염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아직 바깥은 하루도 안 지났을텐데."

현재, 2000년 1월 1일. 내가 용암속으로 몸을 던진 지 24시간에 거의 육박하고 있을 때였다. 1월 2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나는 정신세계에서 창염에게 한 번 복상사를 당한 것 말고는 별달리 한 게 없다. 아무리 이전 회차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지었다고 해도, 이렇게 시작부터 창염이 적극적으로 나를 돕고 나선 건 처음이었다.

'못해도 떡각 잡을 때까지 12년은 걸렸는데.'

말문을 트는데 5년, 첫 행위를 하는데 12년.

그런데 지금은 5초만에 대화를 이어나갔고, 12분만에 사랑을 나누었다. 내가 의자에 묶여 일방적으로 당하기는 했지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건 똑같았다.

"저기요, 당신. 그 여자가 혹시 했던 말 기억해요? 자기가 엄청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좀 비슷한 말을 하기는 했던 것 같은데."

"그렇죠. 히로인들이 하나같이 다 트롤링을 하기 마련이었지만, 그게 다 원작을 꼬아버린 업보에서 비롯된 거죠. 그 원흉은 그 여자고."

"아니지. 그건 내가 움직여서 그런 거-"

"그 여자에요."

창염은 확언했다.

"그 여자가 당신이랑 떡친다고 빨리빨리 안 움직여서 그렇게 된 거라고요."

"......예?"

"십만 번."

창염은 열 손가락 전부 펼쳐들었다.

"유나랑 아힝흥헹 하신 10만 번의 횟수를 자기랑 할 때까지 당신을 정신세계로 오도록 붙들어 놓았던 거라고요, 이 멍청아. 당신은 만나러 갈때마다 다리 벌려주니까 좋다고 박아댔고. 시작부터 밖으로 나갔으면 되는데."

"......자, 잠깐만?"

"처음 만났을 때 뭐라고 하던가요? 표정 굳히면서 '당신 누구에요?' 아니면 '하등한 인간이 여기는 왜 온 거죠?', 그것도 아니면 '태양신의 신전에 온 걸 환영하오, 낯선 인간이여?'"

"......."

충격이었다.

"자, 잠깐만. 그러니까 네 말은 정리해보면-"

"당신만 떡각 잡고 있던게 아니라 이 말씀. 기억 이어받고나서 당신 보자마자 자궁 큥큥 거려서 좀처럼 견디질 못했을 걸요? 푸흐흐."

"......."

너무나 적나라하고 충격적인 말에 나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 그럼 너는?"

"뭐...저야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헤어졌으니. 큥큥거릴 시간에 마음 다독이느라 혼났다 이거죠."

창염은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뒷짐을 지며 신전의 밖으로 발을 옮겼다.

"비가 오려나~"

"...야 이."

창염의 뒤를 따르며 나는 직감했다.

아.

이제 진짜로 잡혀살겠구나. 창염은 신전의 계단 앞에 멈춰선 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그러면 당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준비 됐어요? 저랑 함께."

"물론."

나는 창염의 옆에 함께 섰다. 창염이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창염은 창염이다.

"그런데 이제 뭘 할 생각이지? 지금 나가면 마력도 없을텐데."

"간단하죠."

창염은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일단 명왕성에 가서 성주 뚝배기부터 깨고 올까요?"

"잠깐만. 그게 계획이라고? 가능해? 세뇌빔 맞으면?"

"푸흐흐. 저는 그 여자랑 다른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창염은 까치발을 들며 내 목에 팔을 걸었다.

"원래 다회차 플레이하면 인계 플레이 되는 거 국룰이잖아요. 싱크로, 하지 않겠어요?"

"하, 그게 그렇게 쉽게 가능하다고? 내가 싱크로 하려고 개고생을 했는데?"

"...당신이 그 개고생을 하신 덕분에 저는 시작부터 싱크로 할 수 있게 됐답니다. 아마도 처음으로 온전하게 방법을 이어받은 건 저밖에 없을 거에요. 당신이 넘겨주신 기억 첫번째 페이지에 그게 있거든요. 싱크로 하는 방법."

나는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숱한 실패 끝에 처음으로 싱크로에 성공하고 과거로 돌아왔다. 설마 이런 식으로 스노우볼이 굴러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진짜 눈물나는데."

"저기요."

창염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내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여자랑은 시작부터가 다르죠? 어때요...? 저는."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20 창염이 그렇게 해준 덕분에 네가 싱크로 하는 방법을 알게 된 거 아니야."

"......칫. 그래서 할 거에요, 말 거에요?"

"두 말하면 잔소리지."

나는 창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창염은 발을 내 발등 위에 올리며, 살포시 입술을 맞췄다.

여전히 딸기맛이었다.

* * *

성주는 눈을 떴다.

"갓 피닉스--!!"

화륵.

죽었다.

Bad Ending # 000, 끝.

"이게 왜 배드엔딩이죠?"

"히로인에게 NTR 당했으니 배드 엔딩 아닌가?"

"똑같은 창염이라고 하잖아요."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만."

".......와, 이걸 이렇게 빼앗긴다고요?"

"죽써서 개줬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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