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3화 〉1부 BAD ENDING - 1
세계는 다시 반복된다.
눈을 뜬 곳은 1999년 12월 25일.
나는 과거로 돌아왔고, 또다시 과거에서 창염이 되었다.
"으아아악, 괴물----!!"
아래에서 비명이 들리니 왠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금발인 걸로 봐서는 아마 외국이 아닐까 싶었고, 역시나 한국은 아니었다.
'한참 미국 동부 굽고 있던 중이었나본데.'
주변을 슥 훑어보니 몸에 불길을 머금은 화속성 괴수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들 중 하나는 나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다음 사냥감을 찾아나섰다.
'감각도 예전 그대로고.'
창염과 피닉스가 아닌, 창염'의' 피닉스. 코어의 겉면에 남은 이계의 흔적은 지금도 나를 갉아먹고 있다.
불태워라.
죽여라.
하나도 남김없이 없애버려라.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기억들을 뒤덮는 부정한 감각이 자꾸만 몸에서 샘솟는다. 마치 당장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몸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러니 창염에게 기억을 맡기지.'
과거로 돌아오고 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역시나 똑같다. 나는 다시 피닉스가 되었다. 일곱 정령을 각성시키고 나서도, 나는 다시 피닉스가 되었다.
'안에 있나?'
대답은 없다. 지금의 창염은 자신의 몸에 깃든 '나'라는 존재에 대해 한껏 경계를 하고 있다. 물론 따지자면 내가 창염의 몸을 강제로 빼앗은 탓이기도 하지만, 창염 이외의 존재에 전생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잠깐 기다려 주셔야겠어.'
일단 해야할 일이 있다. 그들의 위치를 모르기에, 나는 직접 발로 뛰고 하늘을 날며 움직여야했다.
나에게는 이전 회차-'바로 앞의 미래'에서는 죽은 이들.
죽어야 할 이들.
그리고 그대로 이어진 이들.
나는 그들을 찾아 포석을 깔아둬야했다.
'20년 뒤의 내가 편하게.'
[후우.]
역시 이 모습이 안정적이다. 활동하기에는 이 상태만큼 좋은 게 없다.
[피닉스 님?]
괴수 하나가 내 모습을 보고 나를 불러세웠다. 괴수형의 마력을 스스로 거둬들이고 '괴인체'가 된 나를 올려다보는 건 SS급 괴수 <파이어 플라이>였다.
[벌써 주무실려고 하시는 겁니까? 아직 백만도 죽이지 않았는데.]
[명령이다.]
[말씀하십시오.]
[너는 내가 잠들 곳에 가서 미리 대기하고 있어라. 그리고 밖에서 나를 지키거라.]
[어디로가면 되겠습니까?]
가루라, 샐러맨더 급의 괴수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파이어 플라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우선 시작부터 그에게 거짓말을 해야했다.
[후지산 지하.]
[알겠습니다.]
파이어 플라이는 꽁무니의 빛을 반짝이며 하늘을 날았다. 환태평양 조산대를 따라 날아가면 후지산의 지하로 파고들 것이며, 그 아래에서 내가 찾을 때까지 그곳을 지킬 것이다.
'히카리 쪽 문제 클리어.'
후지산 대폭발을 일으킬 S+급 괴수 <야타가라스>는 <개똥벌레>가 때려잡을 것이다. 내가 그곳에 잠든다고 했으니, 그곳에 미리 자리를 잡은 괴수를 자신이 처리할 것이다.
이걸로 히카리의 오빠, 히토미-아니 질풍객 하야테가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히카리에게는 마음을 디딜 상대가 필요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화륵.
나는 날개를 펼쳤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침 붉은 저녁 노을이 지고있었다.
[아.]
가장 먼저 할 일이 생갔났다.
[루살카 뚝배기부터 깨러 가야겠네.]
가만히 놔두면 북극 전체를 녹여 해수면을 상승시킬 것이다. 원작처럼 '마력이 다해 동해 바닷가에 떠내려가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마력이 다해.
'내가 때려잡으면 그만이지.'
나중에 광검과의 침대 테크닉 좀 가르쳐 주면 기분이 풀릴 게 분명하다.
'일단 알래스카부터.'
나는 아메리카 대륙을 동에서 서로 횡단했다. 중간중간 놀란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지만, 나는 최속으로 날아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쩌적, 쩌적--!!
몸집이 80m에 이르는 거대한 얼음 나비가 얼음가루를 흩뿌리며 아주 천천히 날고 있었다. 얼음가루는 지상에 떨어져 닿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니. 벌써 임무를 마쳤니?]
<설야의 루살카>는 나를 보고 흠칫 놀라 긴장하며 물었다. 정령 루살카가 아닌 간부 루살카는 '간부 피닉스'를 앞에두고, 자신이 지구를 파멸로 이끄는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열심히 어필하고 있었다.
[나 지금 여기 얼리려고. 바다를 전부 얼려버릴까 생각 중이야. 어떠니?]
[내 눈치 보지 마라.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어려운 자가 아니다.]
[.......]
루살카는 나를 기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루살카가 나와 조우했을 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단서를 줘야했다.
[너도 '자식을 낳으면' 알게 되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정도만 언급해도 대충 알 것이다. 루살카는 성주가 나와 함께 지구 정복을 위해 가장 공을 들인 투 톱으로, 나중에 아이-석하랑-을 낳으면 내 말을 깨달을 것이다.
'아, 그 때 이미 창염은 자신을 각성했었구나. 비록 몸은 괴인형인 피닉스지만.' 하고. 루살카는 똑똑하니까.
물론 똑똑한 만큼 마력을 너무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마력을 조금 줄여줄 필요가 있다. 나는 내게 주어진 간부 우두머리로서의 권한을 마음껏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루살카, 체벌을 내리겠다.]
[뭐?! 무슨 말이니?! 내가 시작부터 뭘 잘못했다는 거니?!]
[이유는 없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나는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코어에서 뿜어져나오는 마력은 내 전신을 충족시키기 시작했다.
[나를 상대로 역상성인게 마음에 안들어.]
[그게 무슨-]
[화속성 아래 모두가 약해야지, 어딜 수속성이 건방지게.]
나는 루살카를 향해 뻗은 손의 손가락을 튕겼다.
* * *
12월 26일. 알래스카에서 루살카를 만나 날개를 뜯어버렸다.
루살카는 나를 상대로 꼬박 하루를 버텼으나 결국 마력이 다했고, 나는 인간형이 된 루살카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아마도 해류를 따라 내려가다보면 갓 전역한 동정 청년을 만나지 않을까.
못 만나면? 석하랑은 태어나지 않고 배드엔딩이지 뭘.
12월 27일. 자카르타에서 개천광 카르나와 만나 인간이 되기를 꼬득였다.
70m가 넘는 금빛 거인을 상대로 괴인체로 승리를 거두니 카르나는 괴인형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앞으로 흥미진진한 싸움을 하고 싶으면 인간의 모습으로 싸우는 게 어떠냐 제안했다. 25년간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면 나도 인간으로 싸워주겠다는 약속도 덤으로.
인간으로 안 살고 괴수로 날뛰면? 그것도 배드엔딩.
12월 28일. 튀니지에서 독액을 내뿜던 히드라를 만났다.
지상에서 힘겹게 돌아다니지 말고 지저를 정복하는게 어떻느냐 물으니 히드라는 좋다고 땅을 파고 들어갔다. 이미 이 시점부터 딴생각-지구 외곽은 멸망하더라도 아래에는 자신만의 왕국을 구축하겠다는 야망-을 품은 듯 했다. 나야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내가 깨어나기 전에 먼저 지저에서 튀어나와 지구를 정복하려 한다? 그것도 배드엔딩.
12월 29일. 사하라 사막에서 친구 없는 아지다하카와 친구가 되었다.
아프리카 일대를 박살내버린 아지다하카는 혼자서 멍하니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식겁했지만, 내가 아지다하카의 업적을 추켜세워주니 우쭐대기 시작했다. 이미 내가 아지다하카를 찾았을 때는 억 단위의 사람들이 학살당해있었다. 20년이든 25년이든 후에 나와 만났을 때 '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나는 미리 언질을 주고 떠났다.
아지다하카가 몸으로 유혹하는 대상 중에 히로인 관계자가 있어서 꼬여버린다? 그것도 배드엔딩.
12월 30일. 그린란드에서 펜릴을 만났다.
인적이 드문 곳에 웅크려 자려던 펜릴에게 '바람이 세상을 떠돌아야지 혼자서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 되겠느냐'고 방랑벽을 부추겼다. 언제 어디서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대기하겠다고 하니, 어차피 25년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24년 정도는 놀고 먹어도 되지 않겠느냐 바람을 넣었다. 펜릴은 홀라당 넘어왔고, 나는 아르엘이 버려진 북유럽의 숲으로 가도록 펜릴을 유도했다.
펜릴이 귀찮아서 아르엘을 구하지 않는다? 아르엘은 누군가에 의해 구조되겠지만, 그러면 또 일이 복잡해진다. 그냥 귀찮더라도 민트단을 같이 엮어 놓는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물론 펜릴이 아르엘을 물어 죽여버리면 배드엔딩.
12월 31일. 중국 병마용 위에 결계를 쳤다.
정령임을 자각하고 있는 환룡에게 아무 준비도 없이 빌미를 줬다가는 혼돈이 자극을 받아 날뛸 수 있었다. 그러므로 환룡에게는 미안하지만 방치가 최고였다. 먼저 깨우지 않는 이상 혼돈과 환룡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또는 모택평이 혼돈을 찾을 때까지 병마용 지하에 잠들어 있으리라.
...괜히 환룡이 무신의 육체에 깃들어 나를 범하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무신의 육체를 지금 없애는 것도 배드 엔딩이다. 그랬다가는 성주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세기가 바뀌는 2000년 1월 1일.
나는 하와이의 화산 분화구 위에 올랐다. 나 또한 테라에서의 마나가 전부 소진되어 지구의 마나로 몸을 채울 시간이 필요했고, 괴인형의 육체는 저연비 인간형의 상태로 바뀌었다.
"흠흠. 마이크 테스트. 아아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는 미래의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읊었다. 물론 조만간 창염에게 기억을 모두 의탁하고 나면 창염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듣게 되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정말 아름다운 날이에요. 새들은...."
나는 되는대로 지껄였다. 과연 창염은 다시 돌아온 나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창염과 함께 살아가는 미래'에 도달하지 못한 나를 보고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우는 얼굴 한 번 보고 싶은데.'
생각해보니 나는 한 번도 창염이 절정에 달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 이외에, 슬퍼서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우는 창염도 예쁘지 않을까. 일부러 울먹거리며 연기하는 건 본적이 있어도, 진짜로 슬퍼서 우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우주선 만들 때 반드시 디자인 검수해요. 안 그러면 쪽팔려 뒤질테니까."
울리고 싶어서 온 건 아니지만, 울렸으면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는가.
"진짜 마지막으로, 이계신은 내 편이에요. ...아참. 이것도 하나 더."
과연 이 말이 전해질 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들었던 말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우린 시작부터 이겼어요. 왜냐면 또다른 내가 지금 이겼거든요. 푸흐흐."
이 세계 미래의 '나'는 과연 이 말뜻을 알고나 있을까. 나는 양손이 근질근질했고, 끓어넘치기 시작하는 화산 아래로 점프했다.
"끼요오오오옷------!!"
창염을 보면 뭐라 말해야 할까. 너무나도 부끄러워 자꾸 이상한 말만 내뱉고 있다. 보자마자 눈물을 왈칵 터뜨릴테니, 일단 뇌내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지껄이는 건 어떨까.
'그래도 따먹으로 왔다는 아니지.'
그건 너무 배려가 없는 심한 말이었다. 아마 이전에 창염의 트롤링에 뭔가 큰 충격을 받고 반발심리가 작용한 모양이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그래, 그게 좋겠네요."
풍덩--!!
내 몸이 닿자마자 마그마는 포근한 바다처럼 나를 감싸안았다. 나는 붉은 바다 속으로 점점 아래로 가라앉았다. 인간들이 알아챌 수 있는 과학의 한계보다 더 깊이, 히드라조차 닿지 않을 지구 깊숙한 곳 까지.
'내핵 정도면 충분하지 않으려나?'
이번에는 더 깊게 내려가보자. 20년이 아니라, 25년에 뛰쳐나올 수 있도록 하는 거다. 나는 안으로 더 깊이 내려갈수록, 내 마력에 의해 마그마가 점점 푸르게 물드는 것이 느껴졌다.
'슬슬.'
신전으로 가야할 때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화륵----
세계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하늘은 청명하고, 내 앞에는 신전으로 오르는 붉은 계단이 놓여있었다.
저벅, 저벅.
오르는 동안, 나의 몸은 자연스레 백청화의 몸이 되었다. 내 원래의 몸은 불러낼 수 없다. 그건 이 세계에서 허용되지 않는 몸이니. 그러니 백청화의 몸을 내 것처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얼굴 잘생기고 몸매 좋고 거기도 크니 뭐 어때.'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나는 힘차게 계단을 올랐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지난 번에는 보자마자 소각당했지.'
끼이익.
나는 신전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힘차게 소리쳤다.
"창염, 큥큥을 하러 왔다!!!"
역시, 마음아프니까 울지 말라는 말은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 * *
"글쎄."
노란 로브의 남자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