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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502화 (502/1,497)

〈 502화 〉1부 20장 34

"자네, 정신이 드나?"

"......."

익숙한 천장이다. 인테리어는 빈티지스러우면서도 고풍스럽고, 주인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있다.

"젊은 친구가 카페에서 잠들고 말이야."

익숙한 커피향이다. 원래는 관심도 없었지만 너무나 많이 마셔봤기에 이제는 향만 맡아도 그 맛을 알 수 있는 예가체프의 향히 코를 간질였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 유리컵이었다.

"한 잔 들게."

"......사장님."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앞에 차를 놓은 남자를 향해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그, 그게 무슨?"

"빨간약, 파란약."

"......."

후안 사장-의 모습을 한 그는 내 말에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가 가지고 온 커피를 내 테이블에 올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화는 또 처음인 것 같은데요. 언제는 유나로, 언제는 창염으로, 또 언제는 성주 모습으로 이야기를 하더니."

"뭐...이런 날도 있는게 좋지 않겠나."

그는 자신의 몫으로 가져온 음료를 들어올렸다. 달콤한 꿀향기가 가득한 레모네이드는 따뜻하게 데워져있었다.

"한 잔 하지."

"술 마시는 줄 알았는데요."

"굳이 술까지?"

"하긴 그렇죠."

짠.

나와 그는 서로의 잔을 부딪혔다. 취향은 전혀 맞지 않지만, 이 자리에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축하하네. 덕분에 한 시름 놓았어. 모든 일이 잘 되었지. 마지막에 사랑하는 사람을 울리기야 했지만...."

"보고 있었습니까?"

"바람이 닿는 곳에 내가 있지. 그것이 설령 남들 눈에 들어오지 않는 해변가라도 해도."

그는 레모네이드를 들어올리며 씩 웃었다. 하얀 옷에 레모네이드가 비치니, 꼭 노란 옷을 입은 것만 같았다. 역시 마지막 순간으로 섹스를 안 하길 잘 했다.

"모든 정령들을 각성시키고, 모든 히로인들을 구하고, 창염을 살렸다. 완벽한 진엔딩, 피닉스 루트의 끝이군."

"저는 죽었습니다만."

"...흐흐, 죽었다? 다 알면서?"

그는 관자놀이를 툭툭 건드렸다. 역시 모든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알면서 가만히 있는 사람이 제일 악랄한 건데."

"그게 흑막의 품격 아니겠는가. 물론 나도 흑막은 아니지. 그냥 그런 뉘앙스를 풍기고 있을 뿐. 그대 또한 내가 아무런 힘이 없는 걸 알고 있었을테고."

"아무렴요. 본체가 깽판치면 전부다 쓰러질텐데, 성주 놈이 그렇게 날뛰는 걸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이상한 거죠."

"그런 셈이지. 결과적으로 나도, 다른 놈들도 이렇게 된 것은 다 성주의 탓...흐흐. 뭐 됐다. 해피엔딩이니 뒷 이야기는 굳이 필요없지. 이거나 마시게."

그는 하려던 말을 일부러 삼키며 내게 두 개의 알약을 꺼냈다. 나는 붉고 푸른 색의 약을 하나로 모았다.

"이거 표절 아닙니까?"

"자네가 빨간 약 파란 약 얘기를 해서 그런 거 아닌가. 아니면 어떻게 해줄까.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쯧, 알았네. 원래대로 해주지."

딱.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제서야 나는 다소 편안해질 수 있었다.

[Restart.]

[Exit.]

푸른 색의 재시작 버튼.

붉은 색의 끝내기 버튼.

그는 두 가지 홀로그램 버튼을 좌우로 밀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일단 축하하네. 최초로 100% 클리어를 한 플레이어 양반."

"고맙습니다. 상금은요?"

"2천억."

"내 그럴 줄 알았지."

나도 그도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노골적이었나?"

"노골적이라기보다는 미친 거죠. 세이브파일 하나에 2천억이라니."

"역시 아랍 부호가 내건 현상금 보다는 회사 자체에서 도전해 보시라 공모를 내는게 더 나았으려나?"

"신생 게임회사랍시고 자본금 쪼달린다면서 DLC 장사하던 사람들이 무슨."

"그렇긴 하지. 흐흐, 이야기하기 편해서 좋군."

그는 붉은색 버튼을 톡톡 가리켰다.

"그래. 클리어를 축하하네. 그리고 고생했네. 이곳을 통해 나가면 현실로 돌아가는 셈이야. 2천억은 정상적으로 지급될 걸세."

"세금은?"

"......거 돈은 신경 안쓴다던 양반이 까칠하기는. 제세공과금 다 계산해서 통장에 2천억 찍히게 만들어주겠네."

"그거 다행이네요."

게임 하나에 1년을 갈아넣고 2천억을 벌었다면 충분히 이득이 아닐까. 물론 그 1년이 1년이 아니기는 하지만. 실제로 시간을 따지고 보면 수 천....

복잡한 이야기는 할 필요없다. 나는 내가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재시작하면?"

"......."

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나는 괜히 한 방 먹인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는 레모네이드 잔을 깨뜨릴 것처럼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재시작? 재 시 자아아악?"

"찐막."

"내가 그 소리만 벌써 몇 번을 들었는데!!"

"아 글쎄, 이번에는 다르다니까."

"집어치우시게. 이제는 내가 지쳐."

그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치며 나에게 얼굴로 쌍욕을 퍼부었다.

"자네가 까딱 잘못하면 내가 그 개새끼한테 박히게 생긴다 그 말이야. 응? 그런 일은 당연히 없어야겠지?"

"그거 진짜로 미안한데."

나는 푸르게 반짝이는 재시작 버튼을 손으로 가리켰다.

"여자 하나 울리고 와서 달래주러 가야하거든요."

"이 미친 새끼가."

"미쳤으니까 여기서 파란색 누르지."

"...에휴, 됐다. 이런 미친 놈이니 그런 개같은 조건을 채우고 피닉스 루트나 진입하지. 썩 꺼져라, 이 놈."

그는 질색을 하며 레모네이드를 들이켰다.

"그래. 어디 한 번 잘 해봐라. 나도 이제 모른다."

"에이, 왜 그러실까."

나는 그에게 협조를 구해야했다. 그리고 협조를 구하기 위한 마법의 문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하는 거, 원 제작사 엿 먹이는 거 아닙니까?"

"......호오?"

그는 솔깃한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막 떠나려는 듯 일으켜 세운 몸을 의자에 다시 붙였다.

"어디 한 번 계획이나 들어보자."

"계획을 들어보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들으면 어쩌려고요."

그는 슬쩍 창문밖을 쳐다봤다. 나에게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는 뭔가 낌새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내게 도박을 하라? 계획도 안 들어보고 그대의 말만 믿고?"

"당신이 손해를 보는 경우는 없을텐데."

"그렇긴 하지. 어차피 나야 죽이되든 밥이되든 아무렇게나 그에 맞춰서 움직이면 되는 거니까. 막말로...."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즐길만큼 즐겼으니, 이제 떠나면 그만이거든."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아닙니다. 즐기고 자시고를 떠나서, 돌아가야 합니다."

"창염에게?"

"물론."

창염을 만나기 위해 이 세계에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둘이서 같이 살기로 했거든요. 과거든 미래든."

"...흐흐흐."

그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내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피닉스 루트 뚫은 사람입니다. 눈치없이 당신 앞에까지 올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래, 그래. 아주 대단하신 분이지. 상금 2천억도 타먹고. 게임도 클리어하고, 탈출 버튼도 눈앞에 두고."

그는 레모네이드를 홀짝이며 나를 비웃었다.

"그런데 다시 시작을 하면 어떻게 하려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대충은 알겠지만, 그게 쉬울 것 같아? 20년을 다시 죽었다 살아나면서 시작부터 다시 해야하는 셈인데."

"쉬운 길이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지. 그래서 '가능'은 합니까?"

내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이미 포석은 전부 깔아뒀다. 나머지는 눈앞의 조력자가 끝까지 나를 '도와주는 지'에 대한 문제.

"가능이라...물론 그대 생각대로 내가 도와주면 못할 건 없지. 바깥에 나가면 나도 한 끗발 하는 놈이거든. 그런데 말이야."

그는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살기를 내뿜었다.

"네가 까딱 실수라도 했다가는 내가 성주놈 촉수에 박혀서 앙앙거리는 미래가 될 수도 있는데, 네 무엇을 믿고 도박을 하라는 얘기지?"

"2천억."

"뭐?"

"2천억으로 당신 이름 건 회사 내거는 건 어떻습니까? 하 사장님."

"......."

그는 벙찐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돈 따위로 당신 설득한다는 건 그냥 핑계고, 제일 중요한 건 그거죠. 제작사, 그 놈들 엿 먹이는 거. 당신 그거 제일 좋아하잖습니까?"

"...아무렴 그렇기야 하지. 그 새끼들 때문에 내가 여기 갇히게 됐으니까. 흐흐. 알았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 대신 나도 이제 책임 안진다? 나 박힌다 싶으면 바로 탈출할 거야. 그럼 너도 이제 영원히 끝이다."

"물론."

그가 있기에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가 변심하여 이 무한회랑에서 탈출하게 된다면, 나는 이제 더이상 다시 창염을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실패하면 그걸로 끝. 이제 진짜로 원코인이다.

"아참. 근데 그대 그건 알고 있어라. 내가 그대를 도와주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야."

그는 조금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이죽거렸다.

"비록 이 세계에서 설정이 그렇게 되기는 했지만, 그 아이가 내 흔적에서 비롯된 존재인 건 마찬가지거든? 내가 직접 배 아파 낳은 새끼는 아니더라도...나름 아끼는 아이란 말이지."

"유나가 당신 딸이라고?"

그는 처음으로 내게서 시선을 피했다.

"......광검도 그렇고, 가웨인 경도 그렇고. 원래 이 게임에서는 장인어른이 제일 강한 거 몰라?"

"......거 참."

나는 기가막혔다.

"당신도 참 인간다운 말을 하시는 구만."

"아무렴. 내가 조금만 더 인간다워봐. 자네를 가만히 내버려뒀겠나. 씹어죽였지."

…...그러니까 전여친 아버지를 독대하는 셈인가. 나는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데 하나 질문. 내가 마지막에 유나 버렸으면 어떻게 되는 거요?"

"성주가 유나 촉수로 집어삼켰다가 유나한테 역으로 잡아먹히고, 자네는 분노한 유나한테 촉수로 강간당하는 배드 엔딩."

"......못 들은 걸로 합시다."

나는 팔을 가운데로 모았다. 그는 두 개의 홀로그램을 내 앞에 동시에 띄웠다. 표정도 바꾼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자, 뭘 선택할 거지?"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나는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창염 만나러 간다니까요."

딸칵.

* * *

"......아주 제대로 미친 놈이야."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카페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고, 황량한 테이블만 남았다. 그는 노란 로브를 입은 채 고개를 하늘로 들어올렸다.

"이거 내 실수 아닙니다. 저 새끼가 미친 겁니다."

그는 마치 고자질을 하듯 반대편 자리를 가리켰다. 빈 자리에는 푸른 불씨가 잔불처럼 남아있었다. 누군가 있었던 흔적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누군가가 선택한 홀로그램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버튼을 두 개만 줬는데...크흐흐."

그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폴더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크흠흠. 아아, 부회장님. 접니다. 황신당 하 씨. 예, 끝났어요."

그는 눈앞의 홀로그램을 손으로 휘저은 다음, 밤하늘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는 공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2천억 준비 좀 해주셔야겠는데요-"

공허가 벌어지며, 거대한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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