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0화 〉1부 20장 32
캬아아악!!
해운대 바다에서 구더기가 끓는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래를 닮은 듯한 외형의 괴수는 전신의 구멍에서 회충같은 벌레를 꺼내놓은 채 해운대를 급습했다.
"막아--!!"
부산에 남은 이능력자들은 급히 지급된 코어웨폰을 들고 에게 사격을 퍼부었다. 군부대에서 달에 지원 사격을 하기에는 당장 눈앞에 나타난 괴수를 저지하기 바빴다.
"씨펄, 점마 그 때 그 놈 아인교!!"
해운대에 뿌리를 박고 살던 중년 사내가 코어웨폰 M16의 탄창을 교체하며 소리쳤다.
"그 놈이 뭔데요!"
"와, 그 때 울 부싼 여신님 각성한 날 나타난 고래랑 벌레 새끼들!"
"아, 그래요? 못 봤었는데."
좀비 고래는 여전히 기억만 떠올려도 밥맛이 뚝 떨어지는 괴수, 과 의 외형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었다. 사내는 코어 탄환이 들어간 탄창을 교체하며 해안선으로 총을 겨눴다.
"그걸 모르나! 니 부산 사람 맞...."
"신서울에서 왔는데염."
중학교 교복을 입은 단신의 소녀, 김누리는 주먹을 움켜쥐며 모래사장으로 나아갔다. 중년 사내는 눈이 뒤집힐 뻔 했다.
"아이고, 제자님! 고마 뒤로 빠지소!"
"저 헌터 겸 히어로 임!"
"A급 아입니까! 점마 S급입니다!"
"...흐흐흐!"
김누리는 왼 팔을 하늘높이 척 들어올렸다. 누리의 팔은 팔목부터 손가락 끝까지 피부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흰 붕대를 꽁꽁 싸메고 있었다.
"하이퍼 캐리 헌터 김누리가 해운대 지키러 왔음!"
"미치고 팔짝 뛰겠네!"
객기를 부리는 김누리의 모습에 중년 사내와 다른 이들이 모두 머리를 쥐어뜯었다.
끄어어어엉!!
좀비 고래는 누리를 보자마자 바다를 헤치며 백사장으로 달려왔다. 누리는 붕대의 매듭끈을 잡아당기며 오히려 앞으로 나아갔다.
"아재요, 누가 가서 쟈 좀 말려보소!"
"쟤가 여기서 제일 강한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B급 이상의 히어로는 모두 대 명왕 전장에 투입되거나 각지에 파견이 이루어졌다. 덕분에 역설적으로 부산에 남은 이능력자 중 B급 이상은 부산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누리 밖에 없었다.
"울 스승님 자리 비운 동안은 내가 부산 지키는 거임!"
"저 가시나가 돌았나!!"
누리는 붕대의 매듭끈을 잡아당겼다. 얼굴에는 긴장감과 미소가 가득 담겨있었다.
끄어어어엉!!
좀비 고래는 더욱 꼬리를 퍼덕거리며 해안산으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누리를 집어삼키기 위해 쩍 벌린 입에는 아니사키스들이 침을 뚝뚝 흘리며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붕대를 모두 풀어버린 누리는 하늘 높이 손을 뻗으며 소리 질렀다.
"변신!!"
"머라꼬!!"
붕대에서 검은 빛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누리를 중심으로 사각형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검은 장막에 좀비 고래는 그대로 대가리를 들이박았다.
쿠구구궁!!!
좀비 고래는 검은 장막에 머리를 박자마자 바닥에 처박혔다. 단순히 부딪혀서 자빠진 것이 아니라, 좀비 고래의 신체가 위에서부터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내가 암속성 이능력이 또 특이해서. 중력조작, 들어는 보셨나? 히히."
장막 안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의 목소리와 비슷하지만, 젖내가 빠진 성인의 목소리였다.
"이게 S급? 윽, 역겨움."
검은 장막이 사그라들기 시작하니, 백사장에 검은 슈트를 차려입은 장신의 여인이 긴 생머리를 흩날리기 시작했다. 여인은 키가 무려 30cm 가까이 차이가 났으나, 김누리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이, 이게...."
"나도 S급이거든요! 내가 괜히 앞에서 나댄 줄 아심?! 흥!"
중년 사내는 자신을 노려보는 누리의 모습에 얼굴을 붉혔다. 나이는 중학생인 걸 알고 있었으나, '변신'을 외친 순간 변해버린 몸은 성인 여성 중에서도 수준급을 달리는 외모와 외형이었다.
"...어우야."
"아재요, 정신차리소. 발찌 차고 싶소?"
"...크흠."
몇몇 남성들은 불편한 진실에 몸이 움츠러들 수 밖에 없었다. 누리는 그런 그들을 보며 미안한 마음에 웃음이 살짝 나왔으나, 표정을 굳히며 해안가로 몸을 돌렸다.
"그러니까 안심하라 이거에요! 스승님 달에 올라간 동안 여기는 내가-"
"위험합니다!"
캬아아아악!!!
좀비 고래의 눈으로부터 아니사키스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김누리는 재빨리 마력을 일으켜 아니사키스 주변의 중력을 늘렸으나, 아니사키스의 궤도가 살짝 내려갈 뿐이었다.
"이런-"
눈을 파고먹으려던 아니사키스의 궤도는 정확히 김누리의 심장 쪽으로 급선회했다. 중력을 다루는 능력이 오히려 해가 된 것이다.
"늦었-"
"항상 조심하거라."
쿵---!!
하늘에서 금빛의 검이 떨어졌다. 누리는 검면에 닿자마자 소멸하는 아니사키스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건...?"
"괜찮니?"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리의 뒤에는 변신하기 전의 누리보다 작은 백발의 소녀가 입술에 검지를 붙이고 있었다.
"루.... 합."
누리는 말실수를 하기 전에 먼저 입부터 닫아버렸다. 백색의 여인, 루살카는 눈을 찡긋거리며 바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캬아아아앙----!!
해안선 너머에서 거대한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해운대에 들어온 좀비 고래와 똑같은 괴수들이 수백 마리가 줄을 지어 달려오고 있었다.
"너는 옆을 지켜 줄 파트너를 찾는게 좋을 것 같구나."
루살카는 바다를 향해 뻗은 손을 위로 까딱거렸다.
사아아악---
해안선으로부터 파도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미동도 없이 가만히 멈춰있기 시작했다. 해안선을 달려오던 좀비 고래들은 딱딱하게 멈춘 바다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서방님?"
"그래."
금발의 남자-벨로보그는 손에서 금빛의 단검을 만들어 해안선으로 집어던졌다. 작은 단검은 포물선을 날아가며 증식하기 시작했고, 곧 해운대 바다 전체를 뒤덮었다.
끼아아아악!!
좀비 고래들은 괴성을 지르며 소멸했다. 몸에서 빠져나온 아니사키스들도 빛을 쬐자마자 소멸했다.
고작 일격.
두 남녀가 손짓을 한 번 한 것 만으로, 해운대 앞을 가득 채운 S급 괴수들이 일거에 쓸려나갔다. 누리는 멍하니 입을 벌리며 혀를 내둘렀다.
"역시...."
"혼자서 나선 건 장하단다. 칭찬해. 하지만 다음부터는 어른이랑 함께 움직이렴."
"저 몸은 어른인데요."
"아직 여기가 덜 여물었잖니?"
루살카는 누리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나름 C컵 정도로 자란 가슴이었지만, 누리는 루살카의 손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깨달았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왜 부산 오신 거임? 러시아 그 넓은 곳을 두고."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차원문 닫고 왔지. 그리고 이제 슬슬 끝나기도 하고."
루살카는 손목의 마도기어를 가리켰다. 시각은 어느덧 5시 정각이 되었다.
"끝난다는게 설마...."
"그래, 저거."
루살카는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S급 이능력자의 눈에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하늘에서는 운석같은 무언가가 낙하하고 있었다.
"...문어 대가리?"
"정답."
"세상에!"
누리는 손뼉을 치며 방방 뛰었다.
"진짜로 때려잡은 거임?!"
"그런 모양이야. 후훗, 역시 내 딸-"
"꺄아아악! 대박! 스승님 오졌다! 역시 세계 최강 여신! 지렸구요!"
"......."
루살카는 자신보다 더 기뻐하는 딸의 제자에 기특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출렁거리며 격하게 흔들리는 무언가에 조금 씁쓸해 하기도 했다.
"서방님. 이거 수술해서 바꿀까?"
"당신은 그대로가 좋으니까 괜찮아."
"페도."
"나는 페도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 몸이 그런 거지."
두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겨우 진정한 누리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여러분----!! 이제 끝날 것 같아요-----!! 우리 이긴 거임-----!!"
누리의 힘찬 승리 선언에 사람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광검! 광검! 광검!
광검! 광검! 광검!
광검! 광검! 광검!
"......무엇?"
사람들이 자신의 이명을 외치기 시작하자, 광검은 땀을 삐질 흘리며 목청을 높였다.
"나, 나는 벨로보그-"
"저기요, 스승님 아버님. ...기니까 선배님이라고 할게요."
누리는 콧방귀를 뀌며 두 팔을 양옆으로 펼쳤다.
"이 나라 이 땅에 선배님이 광검인 거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음? 히힛."
"......."
광검! 광검! 광검! 광검! 광검! 광검! 광검! 광검! 광검!
허윤환은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루살카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지만, 루살카는 멍한 얼굴로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끝이네...."
서쪽 하늘, 서해로 떨어지고 있는 문어 대가리는 서서히 붕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 * *
달이 붕괴된다.
달을 육체로 삼아, 자신을 코어로 삼아 이계신을 부른 성주의 약점은 당연히 코어 부분이다. 성주는 뇌를 조종하는 존재답게 자신의 뇌 또한 자유자재로 다루는 괴물이었다. 뇌를 가장 안전한 곳에 두고 육체만 따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기도 했다.
'보통 리치들 보면 라이프 베슬 따로 두기 마련이죠.'
그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곳.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곳. 정령조차도 들어갈 수 없는 곳.
이계신의 몸속.
성주는 그 안에 자신의 본체를 숨겨두었다. 아무리 싱크로한 정령이라 할지라고 동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계신의 장기에 직접 노출되면 피해를 입기 마련이라, 성주 입장으로서는 자신의 코어-두뇌를 보관하기에 가장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원작에서는 유나가 잡혀있지.'
위아래로 뻗은 촉수 기둥 한 가운데에 발가벗겨진 유나가 잡혀 숙주가 되고, 주인공은 이계신의 몸에 직접 파고들어가 유나를 구출한다. 동료 한 명 없이 혼자서 목숨을 걸고 유나를 구한다. 유나의 몸에 기생하려던 성주는 주인공에 의해 살해당한다.
'구하면 3P 엔딩이 열리고, 못 구하면 다른 히로인 엔딩 가는 거지.'
이유나 루트를 타면 무조건 구해야만 스토리가 진행되는 격이지만, 다른 히로인 루트를 타도 구해야 하는 대상인 이유나다. 결국 이계신의 화신체에서 유나를 구하면 하렘 엔딩이 열리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성주를 죽이는게 목적이지만.'
성주는 방심했다. 내 기억을 읽었으니 항상 주인공이 성주를 죽이러 들어간다고 착각해, 이계신의 몸속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가 더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무려 셋이나 되는데.'
싱크로한 창염의 힘을 가진 존재, 나.
영체가 되면 마력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싱크로 환룡.
그리고 이계신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유나.
나는 환룡과 유나에게 처음부터 침투를 요청했다. 바깥의 문어다리 쯤이야 나머지 넷이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고, 여차하면 내가 마력을 쓰면 그만이었다.
"천만다행이네요."
마력을 더이상 쓰지 않아도 된다. 폭주체의 공격 수단인 여덟 다리는 모두 잘려나갔고, 문어 대가리는 외곽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야! 이거 진짜 괘안은 거 맞나?!"
블루 아이즈 화이트 피닉스 호-결국 백희아의 명명을 따르기로 했다-로 날아온 석하랑은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둘을 걱정했다. 이계신의 육체는 붕괴되고 있으나, 안으로 침투한 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괜찮아요. 유나가 먹혔으면 오히려 저 육체가 더 안정되었을 테니까."
"먹혔으면 우예 되는데?"
"...침략 오징어 여신?"
아마도 거대 문어녀가 되어 지구를 침공하지 않을까. 나는 원작 설정화를 떠올리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기다려보세요. 봐요, 지금 나오잖아요?"
서걱--!!
문어의 정수리가 세로로 길게 갈라졌다. 동시에 두 명의 인영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탈출했어요----!!"
유나는 환룡의 손을 잡고 날아올랐다. 뛰쳐나오는 것 까지는 좋았으나, 여기는 무중력 공간이 아닌 지구의 대기권 한 가운데였다.
"꺄아아아악?!"
"김펜릴."
"에휴, 알았다냥."
김펜릴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흔들었다. 유나와 환룡의 아래에 구름이 생겨나 둘을 집어삼켰다. 구름은 근두운마냥 둘을 태우고 청화백조 호로 귀환했다.
"유나는 의외로 대담한 속옷을 입는다냥."
"자주색이라. 오늘 너무 많이 봤는데 설마 이계신의 몸과 깔맞춤은 아니겠지, 유나여?"
"...못 본 걸로 해주세요."
중력 때문에 치마가 순간 뒤집혔던 일 따위 나는 모른다. 나쁜 건 우주에서 계속 싸우면 될 것을 지구로 낙하를 시도해서 괜히 중력 때문에 치마가 뒤집히게 만든 성주다. 성주 탓이다.
"크흠. 유나 속옷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시고, 다들 승선하죠."
나는 가슴이 활짝 열린 청화백조 호를 가리켰다. 포신은 이미 전부 수납되었고, 함장인 백희아는 이미 함장석에 앉아있었다.
"카르나, 잠깐 마도기어 좀."
나는 카르나의 마도기어를 빌려 히카리와 연락을 취했다.
[사장님...아, 단장님이에요? 단장님 마도기어 회수했어요. 바로 드릴게요.]
"달의 문어 낙하 지점은?"
[서해 한 가운데요.]
바다 한복판이라 다행이다. 정령들은 하나 둘 청화백조 호에 승선했다.
"니 안 타나?"
"잠시만요."
나는 석양과 함께 사그라드는 성주의 폭주체를 한참동안 바라봤다. 반구형의 결계는 망가지지 않고 바다에 떨어질 것이며, 아주 약한 쓰나미는 일으키더라도 민간에 해는 없을 것이다.
'결계 안에다가 불을 질러야 끝나겠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싶었다. 내가 아니라 나의 힘을 전해받은 이를 투입해도 되겠지만, 그건 그의 목숨을 희생시키라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자기희생은 히어로 전용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피닉스 님? 지금 무슨 소리를-]
"개짓거리?"
나는 마력을 끌어올려, 청화백조 호를 결계 밖으로 집어던졌다.
[마! 니 미친나!!]
[피닉스 님!!]
안에서 정령들이 당황한 게 느껴졌고, 백희아가 황급히 아공간을 열어 결계 안으로 들어올려 했다. 하지만 나는 불길을 만들어 아공간을 차단했다.
"바퀴벌레 빠져나갈 지도 몰라요.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다 태워야해서."
끼아아아아아아악!!
말 하기가 무섭게, 이계신의 육체 파편에서 수많은 테라리스트들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