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8화 〉1부 20장 30
기존 스마트 워치는 차원문 경보가 계속 울려 먹통이 되었다.
하지만 마도기어는 차원문 경보가 울리긴 하더라도 제 기능을 충분히 수행했다. 특히 흑사갈의 S급 코어 함유량이 많은 수록 영상은 끊기지 않고 잘 재생되었다.
월면최종결전.
달은 문어가 되었고 천천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이름조차 부르기 힘든 거대 문어는 살아있는 운석이 되어 지구로 낙하를 시작했다.
"......."
오라클은 천문대 관측소 한 가운데에 홀로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마도기어를 통해 전해져오는 멸망의 카운트다운은 이제 10분도 채 남지 않았으나, 오라클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게 맞는 거겠지."
오라클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수면제 한 통을 집어들었다.
"실패하면 분명 고통스럽게 죽을 거야."
오라클이 본 미래는 인류에게 닥친 재앙이 고스란히 보였다. 달에서 떨어진 거대 문어는 바다 전체를 집어삼키며 자신의 새끼를 마구잡이로 흩뿌렸고, 전 지구의 사람들은 테라리스트가 되어 살아남은 생명체를 학살했다.
그리고 지구는 멸망하더라. 그러므로 얌전히 생을 마감하려면 지금 이 타이밍밖에 없다.
수면제의 약효가 들어 테라리스트들에게 감염되기 전, 영면에 들기까지 남은 시간도 마침 시간상 딱 맞았다. 미래를 알고 있는 만큼 누가 이길 지 알 수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오라클은 이제 더이상 미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봐, 아들! 너 진짜 이러기야?!]
마도기어에 익숙한 금발의 남자가 나타났다. 오라클은 일그러진 그의 모습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빠, 나 진짜 모른다니까."
[1400만 개 미래 중에 승리하는 미래가 하나 쯤은 있을 거 아냐!]
"그건 영화니까 가능한 이야기고. ...물론 내가 이런 상황을 읽은 건 맞기는 하지만, 딱 여기까지 읽었거든? 이 뒤로 나도 몰라."
오라클은 수면제 통을 들어올렸다. 남자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너! 허튼 생각하지마라! 내가 핵단추를 누르든 뭐든 저걸 부서버릴테니, 자진할 생각일랑 추호도-]
"내가? 왜?"
오라클은 수면제 뚜껑을 열어젖혔다. 안에 들어있던 알약들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말을 저정할게. 이 뒤로 어떻게 되는지는 나도 몰라. 근데 대략 세 개 정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던 경우가 있어."
[그럼?!]
"내가 지난 번에 얘기했잖아. 아메리카 절반이 소멸하는 미래는 이미 없어졌다고."
'남아메리카지만.'
천만다행으로 지금의 '그'는 그런 빡대가리가 아니다. 물론 그 때문에 밤잠을 여러 번 설쳐야 했지만, 오라클은 약병을 뒤로 던져버리고 의자에 몸을 눕혔다.
"그러니까 아빠도 마음 편하게 생각해. 혹시나 멸망 전에 '사랑했다, 아들!'이런 낯간지러운 말이나 하려고 한 거야?"
[크, 크험. 아들아, 지금 여기 화이트 하우스....]
"사랑합니다, 파파. 됐지? 그럼 이제 천천히 지켜보기나 해. 나 혼자서 조용히 있고 싶으니까."
뚝. 오라클은 가차없이 전화통화를 끊어버렸다. 월면의 전투는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오라클은 미리 준비해둔 콜라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려나...?"
오라클은 남은 손으로 레포트 세 개를 집어들었다. 손 때가 묻은 낡은 A4 뭉치에는 각각 문구가 적혀있었다.
Bad Ending - # 000
Normal Ending - # 000 (H)
E.Ending - # 000
"...이 셋 중에 뭐가 될 지 지금 모르겠단 말이지."
오라클은 근심어린 눈빛으로 영상을 주시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기억하고 기록했던 단서와 일치하는 상황이 있는지 찾기 위하여.
그리고.
"......이런 미친."
오라클은 콜라를 입에 물고 숨을 죽였다.
* * *
"브라흐마스트라---!!"
하늘에서 금빛의 유성우가 빛발친다. 별빛은 곧 금빛의 화살이 되어 전장에 처박혔다.
파바바밧!
비처럼 내리는 빛의 화살에 보라색 촉수는 힘을 쓰지 못하고 그대로 꿰뚫렸다. 화살이 지나간 자리에는 새로운 촉수가 문어다리처럼 돋아나기 시작했다.
"칫!"
카르나는 혀를 차며 활을 통째로 휘둘렀다. 어느새 뒤로 돌아온 촉수 하나가 카르나의 허리를 휘감으려 했고, 카르나는 활을 칼처럼 휘둘러 촉수를 베어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
쯔아아악!
바닥에 떨어진 촉수의 잔해가 거머리처럼 카르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런...!"
다리를 들어올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카르나를 후려치려는 저 거대한 다리가 문제였다.
"늦-"
순간, 바람이 불었다. 카르나의 금발 머리가 산발이 되어 흩날렸고, 등 뒤에서 불어온 바람은 다리와 맞부딪혔다.
"웨리야아아아---!"
알 수 없는 기합과 함께, 하늘높이 날아오른 바람은 문어 다리의 정중앙에 드롭킥을 날렸다. 녹색의 바람 속에는 고양이 귀의 메이드가 있었다.
퍼---억!
아래로 찍히려던 다리는 그대로 튕겨나갔다. 동시에 바람과 함께 육탄돌격을 감행한 메이드도 카르나를 향해 날아왔다. 카르나는 재빨리 다리의 촉수를 떨쳐낸 다음 두 팔을 벌렸다.
키기기긱!
카르나는 메이드를 품에 안았다. 메이드는 엄지를 척 들어올리며 씩 웃었다.
"고맙다냥!"
"위험했다!"
"한 발 먹였으니 된 거다냥!"
김펜릴은 피를 철철 흘리며 카르나의 품에서 뛰어올랐다. 우주공간이라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지는 못해도, 전장을 가장 활개치고 다니기에는 충분했다.
"괜찮나?"
"침 바르면 낫는다냥."
김펜릴은 피가 철철 흐르는 오른팔을 혀로 살짝 핥았다. 웨이트리스 같은 메이드복에는 붉은 피가 튀어 있었다.
"...너는 여전히 TPO를 맞추지 못하는 군."
"이 몸 절풍 아닌데?"
"알 게 뭐냐. 나처럼 이렇게 갑옷이라도 입고 있으면 되지 않느냐. 그럼 다치지도 않을 것을."
카르나는 자신의 황금 갑옷을 탕탕 두드렸다. 마치 은하계 전사와도 같은 디자인에, 등에는 우주 공간을 수놓은 듯한 망토를 펄럭이고 있었다.
"히히,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다냥."
"...칫. 그래, 구해줘서 고맙다. 됐나?"
카르나는 툴툴거리며 비쟈야를 들어올렸다. 김펜릴은 구두를 바닥에 툭툭 두드리며 마력을 방출했다.
고오오오.
팔에 바람이 휘감기며 상처가 아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손에는 메이드복과 어울리지 않는 만도-윈드시어가 들려있었다.
"문어 회치는 데에는 활보다는 이게 제격이다냥."
"그러니까 무기가 아니라 복장이 문제라니까?"
"흐흐, 이래서 쌈박질만 아는 녀석은. 피닉스도 인정한 옷이다냥. 자고로...."
할짝. 김펜릴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사납게 웃었다.
"이런 전장에서야말로 메이드복을 입어야만 진정한 빠요엔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냥!"
"...그건 또 무슨 말인지."
카르나는 눈을 별빛으로 반짝이며 발을 크게 굴렀다. 황금갑옷이 빛무리가 되어 흩어지고, 손에 금빛의 화살로 모여들었다.
"방금 이 몸 보고 복장지적 하더니."
"나는 원래 이런 사양이다."
유성의 레오타드형 배틀 슈트를 입은 카르나는 비쟈야를 치켜들었다.
구구구구.
김펜릴의 드롭킥을 맞았던 다리가 재생을 마쳤다. 찢겨나간 다리의 일부분은 상처하나 없이 재생되었다.
"크게 한 방을 날린다. 막아다오."
"얼마든지 맡겨달라냥."
전위에 김펜릴, 후위에 카르나.
■■■■■■■■!!
둘을 상대로 뻗어지는 무수히 많은 촉수의 향연 속에서, 카르나는 무장이 해제된 상태로 화살을 비쟈야에 걸었다.
"할 수 있지!"
모든 방어는 김펜릴에게 맡긴 채.
"물론이다냥."
김펜릴은 엄지를 척 들어올리며 마력을 방출했다.
"절풍이 아닌 이 몸이 이자리에 온 이유, 똑똑히 보여주겠다냥."
캬오오오오오오!!!
녹색의 바람은 거대한 늑대의 형상이 되어, 촉수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 * *
"강한 쪽에 더 몰리는 건 뉴클리언 때와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만."
"그거 무슨 뜻?"
석하랑은 희번득 눈을 뜨며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허공에 떠있던 나비 날개는 얼음 가루를 사방으로 흩뿌렸고, 둘을 향해 날아오던 촉수는 얼음 가루가 닿자마자 얼어붙었다.
"문어 다리는 여덟 개 아닙니까."
어둠 속에서 상체만 꺼낸 백희아는 석하랑의 옆에서 전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석하랑의 사각으로 날아오는 촉수 다발을 향해 손을 뻗어 허공에 검은 안개를 흩뿌렸다.
찰싹!
이공간으로 빨려들어간 촉수는 들어갔던 각도와 반사각으로 빠져나와 다른 촉수와 맞부딪혔다. 석하랑의 사각을 노리고 날아온 촉수는 공멸하여 바닥에 떨어졌다.
"그 중 두 개가 저희쪽에 있으니, 가장 강한 이에게 전력이 많이 배치되는 건 똑같은 모양입니다."
정령 중 유일하게 비전투원인 백희아는 석하랑의 보좌를 자처했다. 석하랑은 내심 마음에 들어하면서도, 표정을 굳히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흥. 그러면 저한테는 고작 하나만 왔다는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저는 전력 외니까, 설화령 님이 두 개를 맡으신 거죠."
백희아는 다른 전장을 가리켰다.
카르나, 김펜릴 페어에게로 세 개.
이유나, 샤오린 페어에게로 세 개.
그리고 석하랑과 백희아 페어에게로 세 개.
전투가 지속되면서 정령들은 2인 1조로 짝을 이루게 되었고, 성주의 폭주체도 그에 맞춰 거대 다리를 각각 구분지어 배치했다.
"다른 분들에게 1.5개씩 돌아간다고 하면, 설화령 님은 혼자서 2개를 맡은 거 아닙니까."
"...얼굴에 금칠한다고 돌아가는 것 없는데."
"뭘요. 이 나라의 자랑 아니십니까. 금칠이 아니라 당연한 겁니다."
"......내가 진짜 쪽팔려가 말을 말아야지."
석하랑은 얼굴을 붉히며 두 손을 모았다. 성주의 폭주체는 다리 하나를 위로, 다리 하나는 아래로 놓고 가운데에 막대한 에너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1.5인분이든 2인분이든 내는 신경 안쓰니까 같이 싸워요. 이거 다 기록으로 남을텐데, 나중에 점마처럼 띵가 놀았다고 듣고 싶지는 않을 거 아녜요?"
"...그렇긴 하죠."
둘은 복잡한 시선으로 청화백조 호의 머리 위에 선 피닉스를 쳐다봤다. 그는 촉수가 닿지 않는 전장 외곽에서 정령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애초에 촉수는 피닉스를 철저히 피하고 있었다.
"이겨라, 이겨라! 아, 김펜릴! 오른쪽에 테라리스트 튀어나와요!"
"지가 나서면 금방 해결 될텐데 저서 응원단장 카는 거 보이...."
"...나설 수 없는 상황이겠죠. 흠흠."
백희아는 피닉스를 한 번 흘기고 소리 죽여 말했다.
"여자 몸으로 여자 후리고 다니는 바람둥이는 나중에 혼인신고서에 도장이나 찍혔으면."
"헐."
석하랑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백희아를 흘겼다. 하지만 백희아는 당당한 얼굴로 피닉스를 가리켰다.
"이거봐요. 못들었죠? 지금 상태 이상한 거 맞다니까요."
"......그거 확인 한 번 이상하게 하네. 뭐 확인해준 건 고마운데 그거 하나 단디 아이소."
석하랑은 위로 들어올린 손을 튕겼다.
"점마 울 가족이고 나름 내 오빠같은 새끼니까, 혼인신고 할라카면 내랑 울 엄빠랑도 상의해야 할 겁니다."
"...따지면 제 오라버님 같은 위치기는 합니다만."
석하랑과 백희아는 서로를 잠시 노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서로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동병상련을 겪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 조금은 웃픈 일이었다.
"나중에 유하 언니야랑 셋이서 같이 밥 한 끼 하죠."
"당신 국밥 싫어하지 않나요?"
"시끄럽고. 에이, 일단 전투 끝나고 얘기합시다. 근데 당신은 뭐 공격기 하나도 없어요?"
석하랑은 머리 위에 거대한 얼음창을 만들어냈다. 다리 하나를 요격하기에는 충분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둘에게 배정된 다리는 하나가 더 있었다.
"마땅한 공격기는 없고, 그거 하나 더 만들어드릴 시간은 벌어드릴 수 있습니다. 석하랑 님."
백희아는 마도기어를 툭툭 건드리며, 사악하게 웃었다.
"대한의 용사들이 당신을 보좌할 겁니다. 안심하고 싸워주십시오."
"...내가 당신 그카이까 쪽팔려서 같이 못 댕기겠다 아입니까!"
석하랑은 냅다 얼음창을 내던졌다. 백희아는 귀까지 시뻘게진 석하랑을 보며 쿡쿡 웃으며, 허공에 이공간을 열어젖혔다.
"아아, 여기는 무궁화 1."
쩌적---!!
위에서 찍어내리려던 다리의 정중앙에 얼음창이 꽂혔다. 다리는 얼음창이 꿰뚫리자마자 전체가 얼어붙었다.
"짧게 말합니다."
■■■■■■■!!
아래에서 다리 하나가 빨판을 활짝 열어젖혔다. 안에는 수 천, 아니 수 만에 달하는 테라리스트들이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르기 직전이었다.
"백희아-!!"
"준비된 사수로부터, 사격 개시."
어둠으로부터 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