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5화 〉1부 20장 27
"네가 감히 그 분을 모욕해?!"
성주가 주먹을 내지른다. 나는 고개를 까딱거리는 걸로 피한다. 볼에 실핏줄이 튀었다.
"모욕이라니! 사실이지! 내가 지금은 창염과 사랑을 하고 있지만, 유나랑 십만 번을 떡친 건 팩트다!
이번에는 내가 주먹을 내지른다. 성주는 팔을 교차하며 틀어막는다. 성주의 몸이 살짝 뒤로 밀렸고, 나는 허리를 비틀었다.
"여신이 괜히 여신이겠냐!"
"이 변태같은 놈! 네 안의 창염이 울겠다!"
"창염도 인정했거든?!"
다리를 올려 허리를 차려고 하니, 마찬가지로 다리를 들어올려 맞받아치더라. 공격이 막히기 무섭게 성주는 반격을 시작했다.
"유나랑 십만 번을 했다 치자! 창염이랑도 십만 번을 했어! 그럼 쎔쎔 아니냐!"
"그게 인정한 거겠느냐! 십만 번을 해?! 십만 번 죽어마땅하다!"
"죽여보던가!"
발목을 잡고 분지르려 하길래 그대로 허공에 떠서 턱을 차올렸다. 클린히트일까? 아니다. 성주는 일부러 내 공격을 받았다.
"죽어라, 피닉스!"
고개가 뒤로 꺾였으면서 남은 손으로 내 두 다리를 붙잡더니, 나를 야구배트마냥 크게 휘두르더라.
"고작 이 정도로?!"
몸이 빙그르르 돌며 날아가는 벽에는 오염된 장기로 이루어진 마력의 가시가 솟아나있었다. 나는 곧장 날개를 펼쳐 허공에 멈춰섰다. 그러니 성주가 뒤따라왔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봐라! 죽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명치를 노린 정권은 몸을 뒤로 빼는 것으로 피한다.
"너나 죽어! 나와 창염을 위해!"
구두굽에 마력을 날카롭게 모아 배를 걷어찼다. 마력의 칼날은 배를 꿰뚫어야했으나, 성주의 복근을 걷어차니 오히려 칼날이 망가졌다.
"배가 왜 이렇게 단단해?!"
"그 분을 위해 단련했다!"
성주의 두 주먹이 보라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피하기에는 늦었고, 나는 가드를 세워 마력으로 보호막을 펼쳤다.
"사랑을 나누다 손톱을 박아 넣으실 수 있으니! 어디 한 번 마음껏 찔러봐라! 고작 그 정도로 내 피부를 찢을 수 없을 것이다!"
"유나는 손톱 안 박아!"
"이 개새끼가!!"
도발은 제대로 먹혀들어가고 있다. 서로를 모욕하는 개싸움은 무신의 전문분야답게 쌈박질은 우수하지만, 아가리를 놀리는 싸움에 있어서는 약했다. 성주는 너무나도 쉽게 도발에 걸려들었다.
"유나는 착해서 지문으로 누르지! 손톱도 안 길러! 등에 상처 낼까봐!"
"이 미친 놈! 안에 창염이 있는데도 그런 농을 지껄이느냐!"
"농담같냐?! 너도 내 기억을 봤듯이, 창염도 내 기억을 전부 다 봤다고!"
성주는 쉴틈없이 실드를 두드렸다. 주먹을 한 번 내지를 때마다 실드가 박살났다. 나는 깨진 실드의 뒤에 새로운 실드를 만들며 뒤로 물러섰다.
"농담? 내가 다른 애도 아니고 유나를 상대로 그런 농담을 할 것 같아? 창염이 안에서 듣고 있는데?!"
실드는 끊임없이 박살났다. 심지어 한 번의 주먹에 기존의 실드와 새롭게 만들어지는 실드까지 부서지고 말았다. 이대로 계속 시간이 흘러가면 결국 성주의 주먹은 내게 닿는다.
"난 창염에게 모든 것을 드러냈다! 내 기억의 모든 조각마저도! 심지어 내 기억을 창염에게 맡기기까지 했지! 나는 내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카-앙!
"창염은 이런 나를 이해해주고 인정해줬어! 내가 유나와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마지막 실드가 부서졌다. 성주는 어깨를 뒤로 젖히며 마력을 주먹에 집중시켰다.
"그럼 대답해봐라! 이유나와 창염, 둘 중 한 명을 구해야한다면 누구를 구하겠느냐!"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 묻는 것보다도 유치했다.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었고, 나는 답을 말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냐!"
"둘 다라고 하면 죽는다!"
나는 성주와 같은 팔을 뒤로 뻗으며 허리를 비틀었다. 입꼬리를 억누르려고 했지만 자꾸만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당연히 창염이지!"
일권. 마력을 주먹에 집약시켜 지른다. 단순한 주먹질이지만 팔만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주먹을 내지른다.
-------!!
나와 성주의 주먹이 맞부딪혔다. 서로 공격을 피하지 않고, 흘리지도 않고, 나와 성주는 물러서지 않고 공격을 공격으로 받았다.
"크으윽!"
주먹이 닿았을 뿐인데 안에서 피가 울컥 튀어나왔다. 주먹과 팔을 타고 흐른 황색 폭풍은 내 전신을 집어삼켰고, 내장까지 진탕 헤집어놓았다.
"크흐흐!"
성주또한 입에 피를 한가득 머금고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성주의 팔에는 창염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모순이다, 모순이야! 창염을 선택하겠다면서 이유나를 잘라내지 못한다니!"
"몇 번을 얘기했냐! 나는 창염의 뜻대로 할 뿐이다!"
맞부딪힌 주먹은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다시 팔을 회수하여 마력을 억지로 불어넣었다. 장갑은 터지고 손등은 핏줄이 튀었으나, 아직 주먹은 펴지지 않았다.
"유나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서 유나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내가 사랑했던 유나랑 지금의 유나는 다른 유나고, 지금의 내 사랑은 창염이니까!"
이권. 일권과 똑같이 마력을 응집시킨다. 첫번째 공격으로 쓰러뜨리지 못했다면, 이번에는 더더욱 많은 마력을 집어넣어서.
"그런데 창염이 이유나를 구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 이유면 충분해!"
"이 미친 놈들!"
카------앙!!!
성주는 가드를 올렸고, 나는 성주가 X자로 교차한 곳을 정확히 가격했다. 성주는 뒤로 크게 물러났고, 나는 내 팔이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푸슈우우웃!!
팔 전체에 감각이 사라졌다. 고통밖에 남지 않았고, 어깨부터 손끝까지 피부는 마력의 폭발과 충격으로 인해 근육까지 터져버렸다.
"크으으윽...!"
무신의 육체라고 해도 완벽하지는 않다. 결국 그 또한 성주에게 패배했던 몸이며, 여러가지 원소가 섞인 유기화합물이다. 내 두 번째 권격을 방어한 두 팔은 새까맣게 그을렸고 바싹 말라비틀어졌다. 피며 체액이며 할 것 없이, 뼈대에 근육의 잔재만 남기고 모두 불타버린 것이다.
"미쳤구나, 미쳤어! 내가 인간의 몸에 들어가서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성주는 죽지 않았다.
"이유나는 너에게 과거의 인연일 터! 그런 존재를 어째서 그렇게까지 챙기는 것이냐!"
"별 거 있나."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력은 여전히 끓어넘친다. 하지만 팔이, 몸이 견뎌내지 못하고 있다. 주먹을 한 번이라도 내지르면 분명 몸 전체가 터지고 말 것이다.
"미안하니까."
하지만 나는 팔을 뒤로 젖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말아쥐고, 남은 마력을 모두 끌어모아 주먹에 모았다.
"고마우니까."
초격으로도, 이격으로도 적을 죽이지 못하면 세번째에 모든 것을 쏟는다. 그게 원작 최강 괴수를 봉인했던 숨겨진 강자, 김철수의 필살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창염이 바라고 있으니까."
삼권필살.
"사람이 다른 사람 팔아먹고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냐? 그래, 너같은 외계인도 이해할 수 있게 한 마디로 정의하면 말이지...."
심플하게, 주먹질 세 번 안에 때려죽인다. 나는 성주를 향해 뛰었다. 날개를 접고, 날개에 돌리던 마나마저도 달려나가는 발걸음에 힘을 더했다.
"인류애다, 이 버섯 대가리야!!"
"!!!"
사람을 구하는데 이유가 있을까.
"어리석은 피닉스여! 그 공격을 하면 너는 죽는다!"
"너도 죽겠지!"
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주먹을 내지르기가 무섭다.
'또다시.'
죽으면 다시 시작이다. 또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20년을 용암속에서 죽고 또 죽다가 다시 화산을 뚫고 나와서 시작해야한다.
'리겜은 이제 질색이다.'
주먹을 내지르지 않으면 대화의 여지가 있다. 성주의 도움을 받으면 즉석에서 나와 창염이 분리되어 둘이서 실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주 뜻대로 따르는 건 싫잖아요?'
환각일까, 아니면 마력의 영향일까. 주먹의 위로 창염이 손의 살포시 얹어졌다. 터진 핏줄과 근육 위로 푸른 마력이 신체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이걸 내지르면 모든게 끝날 거예요. 마지막이니까, 당신 하고싶은 대로 해요.'
창염은 내 주먹을 꽉 붙잡았다. 이대로 앞으로 내지를 수도, 뒤로 당길 수도 있다. 아마도 내 기억상 처음으로 창염은 자신의 선택을 내게 맡겼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는 거라면 네가 하고싶은 대로 하는 건데.'
나 또한 창염에게 선택을 맡겼다.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형국이었지만, 사실은 이미 통하고 있다.
창염이 하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똑같았다. 통했다. 말을 할 필요 없었고, 오직 행동만 하면 끝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리스타트로 과거로 돌아가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창염은 이대로 앞으로 나아가기만을 바라며 지금까지 버티고 떠 버텨왔다.
삼권.
나와 창염은 함께 주먹을 내질렀다. 단순한 주먹질이고, 굳이 외칠 필요는 없지만, 나와 창염은 동시에 기합을 내지르듯 소리쳤다.
"'창염개진----!!"'
최후의 일격이 무신의 가슴을 꿰뚫었다.
***
푸쉬이---
열기가 빠져나간다. 몸안에 응축되어있던 마력이 더이상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방출되고 말았다.
"하하, 하."
시야가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체구도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내지른 팔도 근육이 탄탄하게 자리잡은 성인 남성의 팔에서 연약한 여인의 팔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끝났네요. 완전히."
목소리마저 여성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분명한 남성의 목소리를 내던 성대는 점점 원래의 목소리-창염의 목소리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정말...이해할 수 없군."
성주는 해탈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방금 전까지는 그래도 시선이 맞닿았는데, 창염의 몸으로 변하기 시작하니 내가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의 일격으로 너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아느냐?"
"알죠."
말투조차도 원래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당신을 상대로 손대중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했으니까. 결국 하나를 희생해야했어요. 손에 든 카드 하나는 내려놓아야 했다 이 말씀."
"그것이 백청화의 육체인가? 남자로서의 육체를 버려?"
"그런 셈이죠."
후회는 없다. 아니, 살짝 후회는 된다. 백청화의 몸은 삼권필살을 견뎌내지 못했고, 결국 들끓는 체내의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이제 창염이랑 현실에서는 못하겠네.'
마력지체라 신체가 폭사하는 그로테스크한 광경은 없었지만, 완전히 소멸해버리고 만 것이다. 덕분에 나는 더이상 백청화의 몸을 취할 수 없었다.
"아아, 아쉽네요. 그래도 나름 육체미 하나는 세계 제일이었는데."
"...싱크로를 유지해주던 유일한 길이었다. 그게 풀렸다 이 말이야."
성주는 어이없는 얼굴로 나를 타박했다. 덕분에 성주는 내 팔목을 아주 손쉽게 붙잡을 수 있었다.
"건드리지마요. 창염 몸이라고."
"빼내기만 할 거다."
성주는 내 손목을 잡고 밀었다. 나는 손을 회수해 뒤로 물러섰다. 성주는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싱크로가 붕괴되었어. 단순히 해제가 아니다. 합이 깨졌다. 부서진 그릇은 영영 다시 붙일 수 없어."
"하지만 목적은 달성했죠."
나는 성주의 명치를 가리켰다. 내가 백청화의 몸으로 성주의 가슴에 낸 바람 구멍 너머에는 온통 검은색만 가득했다.
성주의 가슴 너머로 우주가 보였다.
성주의 가슴에는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아쉽네요. 당신이 만약 무신이 아니라 화권의 육체를 복제했다면, 아마 막아낼 수 있었을 거에요. 수속성은 불 데미지를 감경시키지, 화속성처럼 불을 흡수하지는 않으니까."
"지금 내 앞에서 마력 강의를 하는 건가?"
"푸흐흐. 강의하면 어때요? 이긴 사람이 마음대로 지껄이는 건데."
"그것도 그렇군."
세 번째 권격, 창염개진.
우리가 내지른 주먹은 성주의 가슴을 꿰뚫었다.
대신, 우리의 싱크로는 붕괴되었다. 나는 창염의 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마력은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한 가지 물어보도록 하지. 그렇게까지 내게 이유나를 넘기지 않은 이유가 진짜로 창염이 바라서 그런 건가? 창염이 유나와 그대가 3P를 하고 싶어서?"
"...아니, 뭐 그런 것도 있는데."
나는 호흡을 고르고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창염이 제 기억을 앗아가고 처음 저한테 들켰을 때 한 말이 뭔지 알아요?"
"......?"
기억을 읽었어도 그건 모르는 건가. 나는 최대한 내가 지을 수 있는 미소를 가득 머금고 허공으로 불씨를 피워올렸다.
"남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거지같다는 거였어요."
실제로는 조금 더 과격한 표현이기는 했지만, 창염은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명령을 듣는 존재가 아니다.
태양과도 같은 존재. 태양 그 자체. 하늘에 오롯이 혼자서 고고하게 떠있는 유일신으로,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판에 뜻대로 움직이는 장기말이 아니다.
"원작에서 당신 밑에서 개처럼 일했다는 걸 알고 자괴감 때문에 힘을 넘기고 소멸했는데, 지금이라고 오죽하겠어요? 푸흐흐."
심장이 두근거린다. 안에서 창염이 자꾸 헛소리를 하지 말라고 조잘대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점차 모스부호처럼 끊어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푸스스.
등에 펼쳐진 날개의 깃털이 하나 둘 빠지기 시작했다. 전세계를 누비고 다녔던 강철같은 날개가 마력 결합이 약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신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몸의 원주인이 코어 밖으로 나오게 되어 고스란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객식구가 몸을 조종하고 있으니,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창염의 불꽃은 이물질을 정화하지. 그건 네 영혼조차도 마찬가지다, 피닉스여. 지금까지는 내가 씌워놓은 장기가 그 불꽃을 억누르고 있었으나-"
"싱크로로 그것도 사라졌잖아요. 알아요. 괴인체로 변해도 그건 형태만 그럴 뿐, 이제 더이상 몸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걸."
"그래. 더이상 그대와의 전투는 끝이다. ...창염도 전투 의지가 없지. 창염이 전면에 나온다는 건 그대가 완전히 소멸한다는 거니."
성주는 현재 나에게 주어진 상황의 약점을 꼬집었다.
"영혼이 섞이는 게 아니야. '그대'는 온전히 소멸해버린다. 라는 괴인 이외에 더이상 적을 둘 곳 없는 이방인은 정령에게 몸을 내어주고 소멸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