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4화 〉1부 20장 26
차원문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리기 시작했다. 어떤 곳에 열리든지 까다로웠으며, 특히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은 가장 난감했다.
"병력지원! 헌터든 빌런이든 제발 누가 좀 도와줘! 도와달라고!"
전신이 괴수의 피에 절은 히어로는 피를 토하며 스마트 워치에 소리쳤다. 하지만 스마트 워치는 히어로들의 연락보다 차원문 발생 경보가 더 심하게 울렸다.
에에엥, 에에엥---
"누구든 제발 도와달라고! 여기 아직 사람 대피하지 못했어!!"
국경지대. 경계를 지키는 군인이나 도심 외곽을 기웃거리며 괴수를 사냥하는 사냥꾼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발을 디디지 않는 외딴 곳. 하지만 마음은 따스한 이들이 100명 남짓 사는 마을이 있다.
히어로는 명왕 공략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고향의 부모를, 친구를,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애초에 명왕 공략전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리 강하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히어로의 이능 등급은 아슬아슬한 B급. 명목상 B급이라고 해도 그 힘을 자유롭게 다루지 못한다면 C급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히어로의 전력으로는 고향 마을 언덕 너머에 열린 차원문을 막을 수 없었다. 차원문에서 튀어나오는 D급 괴수들을 막는 것도 급급했다.
"젠장! 아저씨, 연락은요?!"
"구형 설비로 어떻게든 하고 있는 중이야! 근데 어려워! 잡음이 너무 심해!"
"심해도 해야해요! 안 그러면 다 죽는다고요!"
차원문에서 나오는 괴수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강해질 것이다. 괴수들과 싸우는 히어로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약해질 것이다.
상처는 하나 둘 늘어나고, 몸에 남은 마력은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히어로는 자신의 한계를 직감하고 있었다.
삐빅.
"드디어!"
히어로는 스마트 워치의 신호를 확인했다. 협회 전체 채널을 통해 전해진 신호는 그에게 희망이 되었다.
[모든...히어로들은...치직..차원문...닫...전력….]
그리고 희망의 불씨는 너무나도 쉽게 사그라들었다. 히어로는 순간 절망에 빠졌다.
"아아…!"
히어로는 결코 절망해선 안된다. 자신이 흔들리면 자신을 믿고 목숨을 맡긴 시민들마저도 불안해진다. 하지만 히어로는 자신에게 놓인 상황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끝이다.'
설령 자신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우더라도 마을 사람들은 지킬 수 있을까. 세계 대전 당시에 만들어진 지하 쉘터에 숨은 마을 주민들은 금방 들킬 것이고, 그 뒤는 불보듯 뻔했다.
캬아아악!!!
하늘에 비행형 괴수들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히어로는 하늘을 뒤덮는 수많은 괴수들의 날갯짓에 좌절했다.
"신이시여…."
히어로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신에게 기도해야만 했다. 눈으로 척 보기에도 B급으로 보이는 비행형 괴수들이 무려 수 백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어…?"
히어로가 괴수들이 '도망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
금빛의 불사조가 쏜살같이 날아 괴조들을 모두 태워버렸다. 붉은 불꽃을 뿌리는 불사조는 하늘의 괴수들을 잔해조차 남기지 않고 불태워버렸다.
투두둑.
하늘에서 구슬이 내리기 시작했다. 괴수들이 죽고 남은 코어는 비처럼 땅에 떨어졌다. 히어로는 말끔한 코어를 집어들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차원문...클리어. 해당 지점의 히어로는 잔존 괴수를 소탕하라….]
협회의 지시도 말끔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차원문이 닫혔다는 증거였다. 히어로는 적금의 불사조가 꼭 어디서 본 것만 같은 기시감을 받았다.
"괜찮습니까?!"
절벽에서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히어로는 청년의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화권…?"
"화권 이승형입니다! 구조 요청을 듣고 왔습니다!"
화권은 언덕에서 뛰어 히어로의 앞에 착지했다. 온몸에는 괴수의 사체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위쪽의 차원문은 닫았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 또 있습니까?"
"아, 아뇨. 없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할 일인 걸요."
화권은 시원하게 웃었다. 히어로는 강한 힘을 가진 그에게 순간 질투심을 느꼈으나, 워낙 순하게 웃는 미소에 힘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님. 그러면 이곳을 부탁드립니다."
"예? 제 이명은 어떻게…?"
"7년전 누르술탄 게이트에서 활약하셨잖습니까? 민간인과 히어로들이 펼친 합동 작전을 지휘하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가루라!!"
화권이 하늘을 향해 소리치자 적금의 불사조가 땅으로 하강했다.
"무슨 일이야?"
"여기에도 스팟 하나 설치해달라고."
"...뭐가 떨어지나 싶더니 코어였어? 쯧."
적금의 여인은 히어로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여인-였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걸까, 아니면 질투심이 생겨 그런걸까.
"......."
히어로는 실수로 어쩌다가 보게 된 영상을 떠올렸다. 한껏 멋드러진 옷을 입은 선남선녀가 모텔 안에서 사랑을 나누던 모습이 떠올랐다.
"......미스트 바이퍼 님. 이 아이들을 부탁합니다."
화륵.
가루라가 코어를 향해 불을 내뿜자 코어를 중심으로 불꽃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이건 도대체?"
"미니 가루라. 다 괴수형이야. 당신이 얘들 지휘해서 이 근방을 지켜."
가루라는 피곤한 듯 하품을 하며 화권의 품에 안겼다. 곧 화권의 등 뒤로 붉은 날개가 피어올랐다.
[지원!! 살려주세요!! 괴수들이!!]
화권의 마도기어에서 구조 요청이 선명하게 들렸다. 히어로는 그제서야 화권과 가루라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깨달았다.
"설마 진짜로 제 구조 신호를 듣고…?"
"그렇죠. 그럼 저희는 다른 곳으로 갑니다."
화권이 가루라를 안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히어로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방금 화권의 마도기어에서 나온 구조요청의 목소리는 스리랑카 방면에서 활동하던 히어로였다.
"당신은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사람들 지키려고요. 그리고…."
화권은 지친 가루라를 향해 살포시 웃었다.
"이 싸움이 끝나면 이 녀석과 진짜로 결혼할 겁니다."
"......."
화권은 떠났다. 지상에는 미니 가루라들이 히어로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구나. 죽음을 각오하고 있구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하던가. 지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 사망 플래그를 박는 화권의 모습에 히어로는 의지를 다잡았다.
"그럼 나도 질 수 없지! 얘들아, 도와다오! 아직 괴수들이 많다!"
끼아아악.
미니가루라들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
달 기지 전체가 불에 타올랐다. 성주가 마련한 전장은 온통 푸른 불꽃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닥, 벽, 모든 곳에 도배지마냥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공간 내에는 불씨가 바람의 움직임과 함께 대류하고 있었다.
"피하면 뭐하겠나. 전장 전체를 불태워버리면 그만인 것을."
피하면 된다? 피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다. 예전에는 지구에 피해가 갈까봐 걱정돼서 화력을 가감했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하등 없다.
달은 성주의 땅. 그러므로 달을 부수는 것은 곧 성주의 힘을 줄이는 것.
"지구는 파괴하지 않아? 흐흐, 웃기는 군."
성주는 선채로 우리를 향해 이죽거렸다. 전장이 불타는 것처럼 성주의 몸도 불타고 있었다. 궁극기를 막기 위해 전신에 황색 폭풍을 휘감았지만, 그보다 더한 불꽃이 성주를 덮쳤다.
"달은 파괴해도 좋다 이건가?"
"네. 달까지는 괜찮아요. 결과적으로 당신의 옷에 불이 붙었으니까."
사아악.
오른쪽 어깨 위. 왼쪽 허리. 그리고 발치. 총 세군에데 주먹만한 불씨가 자작자작 타오르고 있었다.
"고작 세군데."
'저쪽도 방어기 장난 아니게 쓴 것 같은데요.'
달에서 지구까지 닿을 정도의 불기둥이 치솟았음에도 고작 불씨 세 개를 피웠다는 건 다소 자존심이 상했지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어찌됐든 불은 붙었다."
'꺼뜨리지 못하죠.'
창염은 의지와 목적을 가진 불꽃이다. 그렇기에 태우고자 하는 것을 완전히 태우지 못하면 꺼지지 않는다. 성주는 자신이 입고있는 노란 로브'만' 태우고 있는 창염에 이죽거렸다.
"달을 부수면서까지 그 분의 것을 없애고 싶더냐…?"
"당연하지. 유나가 있으니까."
달의 데이터는 나사가 가지고 있는 천문학 데이터로도 충분히 얻어낼 수 있다. 싱크로한 유나가 마력을 조금만 사용하면 달과 똑같은 위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테라포밍당한 달 따위 쳐다보고 싶지도 않고요.'
"네놈에 의해 더러워진 달 따위, 없애버리고 다시 만드는 게 더 나아."
"흐흐, 흐하하, 하하하!"
드디어 성주가 미쳤다. 창염에 타오르며 박장대소를 터뜨리던 그는 로브를 와락 붙잡았다.
파---앗!
황색 폭풍이 수직으로 치솟았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마력을 가다듬었다. 더이상 깐족거릴 상황은 아니었다.
"그분의 옷에 궁극기를 태워…? 실수했구나, 피닉스여. 옷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잊었느냐?"
"무신."
치우와 항우가 대충 섞인 괴수. 육체의 스펙 하나로 SSS급에 비벼볼 수 있는 초월체. 그리고 그 복제 육체 안에 들어가있는 최강의 두뇌파, 성주.
"아니다, 틀렸다."
성주는, 그는 기묘한 자세를 취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근육이 부풀기 시작하고,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김에서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육체는 다른 이의 것일 지언정, 정신은 온전히 '나'의 것이지. 그건 네가 가장 잘 알지 않은가, 피닉스. ...아니, ."
"역시."
환상빔을 쏘고 나서 기억을 스캔한게 틀림없다. 하지만 저리도 노골적으로 '나'를 지칭할 줄이야.
"환룡조차도 쇼크먹었는데 생각보다 담담하군."
"그건 내게 중요치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와 달리 기억이 이어지지 않겠지. 하지만 지금 성공하기만 한다면 내 승리다. 나는 아주 잠시만이라도, 그분을 나의 것으로 만드니까."
"지독한 새끼."
"누가 할 소리."
나와 그는 서로를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한 존재를 위해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목을 메는 것이 참 닮았다 싶었다.
"보통 이런 경우는 한 사람을 두고 싸우던데."
"그럼 그대가 포기하라. 그대는 창염과 영원을 행복하게 살고, 나는 이유나를 데려가겠다."
"그건 안 되지."
나는 두 손을 합장하듯 하나로 모았다.
'뭐하는 거예요?! 미쳤어요?! 안 그래도 시간 없는 사람이 그렇게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요!'
안에서 창염이 화들짝 놀라 하지말라고 외쳤지만, 이제 이 방법 말고는 성주로부터 버틸 수가 없었다.
'싱크로가 더 빨리 풀릴 수 있다고요!'
"알아. 아는데, 해야하는 상황이야."
두둑, 두두둑.
관절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눈높이가 커지고, 점점 몸이 익숙한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 나는 손을 들어올려, 흰색의 코트 안주머니에서 푸른 가죽장갑을 꺼내 손에 끼웠다.
"최종전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네."
두근. 두근. 장갑의 손등에는 금빛으로 된 무궁화 자수가 놓여있었다. 행여나 마주치면 창염을 빼앗길까봐 그리도 전전긍긍했으나, 지금은 든든하기 그지없는 몸이다.
"창염 버프 먹은 주인공의 육체다. ...최종보스 전에서 플레이어블로 사용가능한 스펙이지."
.
설령 무신이 최강이었다고는 허나, 과거의 존재일 뿐. 창염이 깃든 주인공의 몸이야말로 최강이라 부를 만한 존재다.
"그럼 한 판 붙어보자고."
"흐르. 회광반조라는 말을 알고 있는가?"
"알지. 지금 내가 그 상황인데."
억지로 주인공의 몸으로 바꿨다. 덕분에 싱크로는 더욱 불안정해져, 시한부 인생의 끝을 조금 더 앞당긴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몸을 바꾸었나? 창염의 몸이든 그 몸이든 스펙은 똑같을텐데."
"기분의 문제지. 어차피 너랑 치고박고 싸우면 엄청 얻어맞을텐데, 창염의 몸을 얻어맞게 할 수 없잖아."
"......과연."
성주는 기묘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자부하던 그가, 지금까지 우리를 깔보기만 하던 그가 처음으로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것이다.
"좋은 반려를 만났구나, 창염. 부러울 지경이야. 하지만 나의 사랑도 그에 못지 않다. 나는 그 분을 직접 뵙기 위해 수십개의 행성을 부수고 먹어치웠다. 드디어 기회가 온 거야. 이 지구에서."
"사랑이 삐뚤어졌다고 말은 못하겠는 걸. 그럼 더는 잔말 말고 붙어보자고. 아직 달이 버티고 있는 동안."
구구구구.
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라 익스플로젼으로 지구 공전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으로도 모자라, 내핵이 폭발할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달은 곧 폭발한다.
"누구 사랑이 더 깊은지 자웅을 겨뤄보자꾸나!"
"싸움으로 자기 사랑을 증명하는 머저리가 어디있냐. 시끄럽고 덤벼."
나는 손을 들어올려 까딱거리며 도발했다. 성주가 들어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최강의 도발.
"너, 유나랑 자봤냐?"
...안에서 창염이 기가막혀 하지만, 이것만큼 효과적인 도발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네 이 노 오 오 오 옴!!!"
효과는 대단했다. 성주는 주먹을 높이 치켜들며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나는 유나랑 창염이랑 셋이서 같이 자봤다! 3P로!!!"
원작 게임에서.
그게 피닉스 루트의 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