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3화 〉1부 20장 25
달에서 격전이 일어나고 있던 그 시각.
화속성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정령은 여의도 청화단 아지트에 모였다. 싱크로한 여섯 정령들, 그리고 복제 피닉스를 완벽하게 쓰러뜨린 청화단의 간부들이 1층 홀에 모였다.
정확히는 아키택트와 히카리, 그리고 카르나와 김펜릴이 없었다. 청화단의 두 간부는 모종의 준비를 위해 잠시 자리를 옮겼고, 여의도를 기준으로 가장 먼 거리에 원정을 나갔던 카르나는 최선을 다해 돌아오고 있었다.
문제는 카르나가 한 시간 내로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올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것. 하필 카르나는 아마존에 자리잡은 광명왕을 처리하고 오느라 늦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렇게 기다리면 되는 거야?"
환룡은 다리를 떨며 조급함을 드러냈다. 피닉스가 아무 말도 없이 먼저 떠나버린 것에 가장 초조해하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환룡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수단을 강구해야하는 거 아냐? 벌써 30분이나 지났다고."
"지구 반대편에서 달려오고 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무리 정령들이라고 하더라도 한 시간 내에 전세계 각지에서 한국까지 날아올 방도는 마땅치 않았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이라고 한다면 피닉스, 김펜릴, 그리고 백희아와 앙그.
근처에 있던 석하랑은 마력을 때려부으며 태평양을 가로질러왔고, 이유나와 환룡은 백희아의 이공간을 넘어왔다.
문제는 백희아가 상성상 광속성 정령인 카르나를 어둠 속으로 끌어들일 수 없다는 것.
피닉스든 김펜릴이든 둘이 가서 데려와야하는데 피닉스는 없었다. 결국 김펜릴이 하늘을 달려서 카르나를 직접 등에 업고 달려오고 있었다.
"집행관, 지금 김펜릴 어디래요?"
"잠시만요. 스리랑카 쪽에 차원문이 또...."
백희아는 마도기어의 연락을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달로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기는 했으나, 중간중간 집행관으로서 각지의 차원문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진짜 이대로 지구 내버려둬도 되는 거 맞아? 달은 피닉스한테 맡기고 지구에 있는 차원문을 닫아야 하는 거 아냐?"
"그건 안 되지. 혼자서 괜히 내버려뒀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하지만 정령들이 모두 빠져버리면 지구가 난장판이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여섯 명 빨리 달에 다녀왔다가 돌아오겠다는 거 아녜요."
피닉스의 뒤를 따라 달로 올라가겠다고 하는 정령들.
피닉스를 믿고 지구의 차원문을 맡아달라는 간부들.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가운데, 모두의 마도기어에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준비 끝났어요. 모두 동작으로 오세요.]
위잉, 철컥.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동작까지 긴 오토레일이 깔렸다. 다분히 한국적인 색채가 가득한 오토레일을 깐 장본인은 히카리와 함께 있던 아키택트였다.
[간부들은 몇 번 봤지만 거기 아가씨들, 동작 지하는 처음이지?]
아키택트의 인사와 함께 오토레일의 목적지 정보가 도착했다. 정령들과 간부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랐다.
"이런 미친. 여기가 본거지였어?"
[흐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여기라면 선의철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장소라고 했거든.]
[그리고 청화단의 '비밀 기지'기도 하고요.]
청화단의 모든 자본과 기술이 집약되어있는, 간부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청화단의 비밀 거처.
기존 동작의 난민들이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곳이자 아키택트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놓은 천혜의 지하 요새.
그 바로 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이 있었다.
"이거 완전 고인능욕 아니야?"
그나마 가장 상식적인 존재, 팬텀이 말했다. 서울 난민들이 동작에 터를 잡기는 했지만, 설마 다른 곳도 아닌 현충원의 지하에 자리를 잡았을 줄이야.
심지어 피닉스는 그곳을 자신만의 비밀 기지로 만들었고, 히카리는 비밀 기지를 자신만의 연구소로 만들었다.
[원래는 임시 거처였지. 그런데 보스가 선의철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고 대한민국을 위대하게 만든다고 한다면 호국 영령들도 인정하실 거라고 하더라. 흐흐.]
[실제로 주변의 마력 데이터는 몹시 안정화되어 있어요. 슬슬 도착하셨죠? 그러면 갑니다.]
끼이이익.
정령과 간부들은 현충원의 공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땅에서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구구구구.
땅에서 거대한 기둥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팔각형으로 된 기둥은 현충탑조차 넘을 정도로 높이 솟아났고, 곧 각각의 조각들이 좌우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저건 뭐야?"
[제가 소개할 게요.]
마도기어에서 카르나의 파트너, 은유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유하와 히카리는 못 된 장난을 준비한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언젠가 고객님이 달까지 갈 수 있는 로켓을 만들라고 하더라고요. 코어를 판 자금으로 우주공학에 투자를 해서, 기술자들을 불렀죠.]
[내가 진두지휘했어요! 다른 건 두고서라도 최우선적으로 여기에 가장 많은 투자를 했죠. 들어간 S급 코어의 수만 거의 200개가 넘을 걸요?]
막대한 자금과 기술력이 투입된 우주선은 현충원 한가운데에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높이만 족히 30m에 이르는 우주선은 금방이라도 달을 향해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이걸 타면 달까지 무사히 다녀올 수 있어요. 계산대로라면 15분이면 가죠.]
[나도 15분이면 도착한다냥! 미리미리 탑승해서 벨트꽉 붙들고 있으라냥!]
아무 지체없이 우주선에 승선한다면 30분 후에 달에 도착하는 셈이었다.
"청화단 간부 여러분은 지상을 부탁드립니다. 등대, 아니 김지화 씨. 한국 전체 이능력자에 대한 지휘를 부탁드립니다."
"예?! 집행관, 저기요?!"
"저도 타야합니다. 제게 주어진 역할이 있거든요."
우주선 제작의 정치적 문제에 가장 깊게 개입되어있던 존재로서, 백희아는 당연히 우주선에 승선해야했다. 애초에 우주선은 백희아가 함장석에 앉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그럼 정령 여러분. 탑승하시죠. ...함장까지 7명이 탑승 가능합니다."
"7명...? 그거 완전 정령들만 타라는 얘기 아닙니까?"
"맞습니다. 달의 전장은 싱크로한 이들만이 갈 수 있죠. 행여나 달이 파괴되기라도 한다면, 우주공간에서 호흡없이 단독으로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우주선 승선에 자원하려고 했던 청화단 간부들은 꼬리를 말았다. 어렴풋이 듣기는 했지만, 설마 진짜로 정령들만 데리고 최종전을 치르려고 했을 줄이야.
청화단 간부들은 내심 섭섭했지만, 행여나 잘못되었을 경우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사태에 순순히 마음을 접었다.
단독으로 대기권을 돌파할 수 있거나,
단독으로 우주공간에서 무호흡으로 버틸 수 있거나,
단독으로 무중력 상태에서 지구를 향해 돌아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달에 올라가기는 사실상 불가능이며 자살행위였다.
"그럼 뒷 일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문을 열게요.]
끼이이익.
우주선의 가운데 부분에서 푸른 빛으로 이루어진 계단이 만들어졌다. 우주선의 코어에서 방출된 마력은 정령들이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이 되었고, 함장인 백희아가 가장 먼저 우주선에 올랐다.
"먼저 오르겠습니다. 5분 뒤에는 동기화를 끝내겠습니다만 미리 올라오셔서 준비하셔도 됩니다."
"아, 아니. 잠깐만요."
석하랑이 손을 들었다.
"무엇입니까, 설화령. 혹시 뭔가 질문이라도-"
"디자인은 왜 이따구래요?"
석하랑은 우주선의 외형을 지적했다.
"이거 금마가 허락 안 했을 건데?"
[후훗, 하랑아.]
김펜릴의 등에 업힌 은유하가 입을 가리며 눈웃음을 쳤다.
[맘대로 하라고 해서 마음대로 했지. 후후.]
"언니야, 그래도 이건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후훗. 그럼 승선 준비를 하시지요. 이...."
백희아는 두 팔을 벌리며 정령들을 환대했다.
"호에."
영칭.
블루 플레임 화이트 피닉스.
백영도에서 전투를 치렀던 메카 피닉스와 똑같이 생긴 우주선이 달을 향해 부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 * *
시간이 아무리 급하더라도 할 것은 해야했다.
설령 내 상태가 이상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창염이 저지르는 행동에 대해서 나는 아무 딴지를 걸 지 않았다.
"아하하하!!"
창염은 웃으며 석장을 높이 치켜들었다. 태양처럼 빛나는 스태프의 끝은 푸른 레이져를 사방으로 퍼뜨리며 성주를 농락했다.
"생쥐처럼 도망다니는게 꼭 절풍같네요!"
콰앙, 콰---앙!!
창염의 포격은 성주가 도망다니는 사방을 덮쳤다. 성주는 반격할 기회를 잡고 있었으나, 창염은 반격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공격을 이어나갔다.
끼아아아악!!
불꽃으로 이루어진 독수리들이 공동 전체를 활개치며 성주에게 달려들었다. 성주는 바람을 일으켜 몸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이, 이 놈! 감히 신의 물건을 태우려고 하다니!"
"그깟 물건은 관심 없어요! 내가 태우고 싶은 건 당신이니까!"
성주를 괴롭히는 창염은 어느때보다도 즐거워보였다. 정신세계에서 살을 섞을 때 7연속 절정에 다다랐을 때 수준으로 기뻐하고 행복해했다.
"빨리 타죽어요!"
창염이 석장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전장은 분명 달이건만, 바닥에서 마그마가 용솟음치며 성주를 덮쳤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푸른 마그마의 해일은 바닥 전체를 가득 메웠다.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거에요!"
내가 창염을 취하고 싶어서 몇 날 며칠을 벼르고 벼렀던 것처럼, 창염 또한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을 것이다.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성주에게 복수를 하는 순간이 얼마나 짜릿하겠는가.
화륵!
아래에서는 불기둥이 치솟고, 하늘에는 미니 피닉스들이 호시탐탐 성주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공에는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하는 화염구들이 풍선마냥 두둥실 떠있고, 창염이 석장을 통해 내뿜는 레이저는 빛처럼 날아가 성주를 습격했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성주는 주먹을 휘두르고 발차기를 하며 바람을 일으켰다. 사각에서 날아오는 화마에는 발을 뻗으며 황색 폭풍을 내뿜었다.
"고작 이 정도 힘으로 그분의 옷을 도모하려고 하였느냐!"
"칫!"
상당히 많은 양의 마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성주는 피하거나 쳐내거나 하며 이계신의 로브에 불씨하나 닿지 않게 만들었다. 상황만 두고보면 창염의 공격은 일절 성주에게 닿지 않은 셈이지만, 창염은 웃고 있었다.
오히려 성주가 더 씩씩거리고 있었다.
"장난 치는 거라면 그만 둬라, 창염--!!"
"장난인 거 들켰네요? 저인 것도 들켰고. 그럼 더는 재미없죠."
창염은 진지한 얼굴로 석장을 거꾸로 들었다. 푸른 태양 무늬의 장식이 아래를 향했고, 창염은 푸른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서서히 솟아올랐다.
"눈치챌 때까지 좀만 더 가지고 놀려고 했는데 아쉽네요."
창염은 철저히 성주를 농락하고 능멸했다. 시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시간을 허비하는 행위는 자칫하다가는 큰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제였다.
가령, 마지막 일격을 넣기 직전 싱크로가 풀린다거나. 그렇게되면 창염이 성주에게 원거리 포격을 날리며 똥개훈련을 시키듯 조롱하고 인성질을 한 것은 곧 심각한 패인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창염에게 그걸 허락했다. 오히려 내가 먼저 제안했다.
- 성주에게 쌓인 것들, 지금 이곳에서 마음껏 풀어도 좋다.
다리를 으스러뜨려도 좋고, 모가지를 잡아 비틀어버려도 좋다. 그리도 아끼고 아끼는 이계신의 로브를 소매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태워버려도 좋다. 그렇게라도 성주에게 '창염의 피닉스'로 전락한 복수를 할 수 있다면, 나는 설령 싱크로가 풀리게 되더라도 만족했다.
"한 방에 보내버릴게요. 궁극기로."
창염이 거꾸로 든 석장이 두둥실 하늘에 떠올랐다. 손잡이 부분이 태양무늬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고, 창염은 태양같은 원판을 들고 눈을 살포시 감았다.
"정말 이 순간만을 오랫동안 기다려왔어요. 내가 살아서 그쪽에게 다시금 이 말을 하는 나날을."
화륵, 화르르륵---!
창염이 손에 든 태양 원판이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푸른 불꽃을 뿌리며 돌아가기 시작하는 태양 원판은 푸른 구체-아주 작은 태양이 되었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죠. 잘 들어요."
창염은 푸른 태양을 하늘 높이 들어올리며, 지상에 가드를 세운 성주에게 이죽거렸다.
"내 별에서 꺼져, 이 더러운 벌레 새끼야."
딱.
창염이 손가락을 튕겼다.
시간은 낮.
아침-케프리도 아니며, 저녁-아툼도 아닌, 창염이 자신으로서 가장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 때.
- 라 익스플로젼.
신이 만들어낸 푸른 태양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