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0화 〉1부 20장 22
화명왕 공략이 끝났다. 화명왕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명왕들이 정령들과 히어로들의 활약으로 파괴되었다.
집정관과 집행관의 지휘는 완벽에 가까웠으며, 사망자 하나 없이 명왕성의 조각들을 무사히 파괴하였다. 성주와의 1차전은 끝이 났고, 전세계는 잠시나마 멸망을 막아냈다는 안도감에 취해있었다.
삐이이이이---------
하지만 그 안도감도 잠시. 숨을 한 숨 돌리기가 무섭게, 사람들의 전자기기에는 비상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비상! 차원문 발생.]
아지다하카 게이트 이후로 소규모나 국지적으로 발생하던 차원문. 그것이 도심, 촌락, 산, 바다, 강 구분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생성되기 시작했다. 아지다하카 게이트로 이미 트라우마가 생겼던 이들은 급히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그 수가 아지다하카 사태보다 더 심각했다.
[차원문 안전지대---없음.]
전 지구에 차원문이 열렸다. 차원문에서 쏟아지는 괴물들이 영향력을 미치는 반경이 직경 10km의 원이라고 한다면, 그 반경이 모두 지구를 덮을 만큼 차원문은 마구잡이로 생성되었다.
[잘 들어라, 지구인들아.]
지구의 모든 존재들의 앞에 노란 로브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양인처럼 보이는 사나운 인상의 남자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명왕성의 주인. 나의 첫 인사는 아주 손쉽게 막아냈더구나.]
누군가는 성주의 외형을 보고 혼란에 빠졌지만, 노란 로브 너머로 보이는 온갖 이형 물체들의 향연에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갉아먹히는 탓에, 지구인들은 역설적으로 명왕성의 주인에게 시선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두 번째 인사다. 그래...총공격이라고 하지. 순순히 멸망하거라. 저항은 무의미하다.]
명왕성의 주인은 시원하게 웃었다. 마치 어젯밤에 있었던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 마냥, 명왕성의 주인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내가 너희들의 종말이니라.]
집행관 명명.
.
명왕을 공략하기 위해 모여든 히어로들은 황급히 제 나라로 흩어져야만했다.
* * *
.
캬아아악---!!
하늘에 온갖 파리들이 날아다닌다. 땅에는 하이에나같은 짐승들이 어슬렁거린다. 모처럼 고향을 방문해 조부의 집에 모였던 기우는 일가친척과 함께 숨죽이고 방안에 틀어박혔다.
"미안하다...미안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던 노인은 연신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기우는 진작에 고향을 떠나 서울이나 신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던 조부모를 한순간 원망했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지 오래였다.
"그러니까 내가 진작에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자 하지 않았소!"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요?! 애초에...."
부부는 숨죽여 말다툼을 하면서도 뒷말을 흘렸다. 턱밑까지 차올랐다 삼킨 뒷말이 무엇인지 이 작은 방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걸 따질 수가 없었다.
"젠장. 밖에는 어떻게 됐다냐?"
"어떻게 알겠어요? 비상 사이렌 계속 울려서 스마트폰 전부다 베란다 밖으로 집어던졌는데."
차원문이 발생했을 때 몇 차례 울리는 비상 알림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차원문이 생기면 무조건 설정에 관계없이 사이렌을 울리도록 하는 건 분명 좋은 취지였으나, 지금처럼 차원문이 분당 한 개 꼴로 생겨나는 상황에서는 인류에게 최악이었다.
그르르르.
기우의 가족들은 밖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에 숨을 죽였다. 암막 커튼의 너머로 노르스름한 눈동자가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누구 하나라도 스마트워치를 차고 있었다면 분명 소리를 듣고 방을 습격했을게 틀림없었다.
크르르.
창문 너머의 괴수 그림자가 사라졌다.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기우의 가족들은 참았던 숨을 내쉼과 동시에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라디오. 라디오. 거실에 라디오가 있다.... 그것만 가져오면 안 되겠느냐?"
"아버지! 그걸 지금 가지러 갈 수 있겠어요?! 거실에 괴수라도 있으면 어쩌려고요?!"
"히어로가 올 것이야. 히어로가 온다. 히어로가...."
"히어로는...안 올 거예요."
기우가 우울한 목소리로 희망의 끈을 잘라버렸다. 이미 기우는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다.
"모든 히어로가 한국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그나마 있는 사람들도 지금 독도에서 싸우고 있으니까.... 이제 우리는 끝장이라고요."
"너 이 새끼!"
기우의 부친은 기우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게 할 소리냐?!"
"그럼 어떻게 해요?! 차라리 서울에서 버티고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요!"
"이 불효막심한 자식아! 네가 물려받을 그 재산이 누가 그 고생을 하셔서 피땀흘려 모은 재산인데!!!"
"아범아, 그만해라. 내가 잘못했다...."
"여보, 기우야! 소리 낮춰-"
콰---앙!!
일가가 숨어있던 안방과 베란다 사이의 벽이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1m만 더 가까이 다가왔으면 몸통이 통째로 찔렸다 싶을 회백색으로 반짝이는 발톱에, 기우는 그만 정신이 나갈 뻔 했다.
"아, 아으, 으아아...."
거대한 발톱에는 콘크리트를 부순 흙먼지와 말라붙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5m는 훌쩍 넘어보이는 비행형 괴수가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웃고있었다. 발톱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발톱이 아닌, 날카롭게 벼려진 꼬리침이었다.
"말벌..?"
캬아아악!!
말벌처럼 생긴 이형의 괴수가 포효를 내지르자, 심신이 약해진 조부가 가장 먼저 입에 게거품을 물고 졸도했다. 다른 모두가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던 순간, 기우는 자신도 모르게 번쩍 일어나 두 팔을 벌렸다.
"오지마, 씨발!!"
키에엑!!
괴수는 기우의 비명을 오히려 즐기듯 뿔침을 기우에게 겨누며 몸을 움직였다. 기우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푸----욱!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꿰뚫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기우는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에 가슴이 철렁내려앉았다.
'설마?'
자신을 피해서 뒤를 공격한 건가? 기우가 깜짝 놀라 눈을 뜬 순간.
"으악?!"
기우의 눈앞에는 말벌같은 괴수의 뿔을 바닥에 꽂아버리며 착지한 후드티의 대머리 남자가 있었다. 척 보기에도 인상이 더러운 그가 기형 말벌을 보고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자, 하늘에서 푸른 빛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파바박!
키에엑---!
유성우처럼 쏟아져내린 화살은 정확히 괴수를 불태웠다. 괴수만 불태웠다. 기우는 도시 전체를 물들이는 푸른 불꽃에 입이 쩍 벌어졌다.
"이건 도대체...?"
"뭐하는 거예요?"
하늘에서 미성이 들려왔다. 기우는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매일과도 같이 봐왔던 푸른 머리칼의 소녀가 날개를 펼치며 대머리 거한의 옆에 착지했다.
"갑자기 뛰쳐나가더니 사람 구하러 온 거예요? 이야. 대단하시네."
"시끄러워. 빨리 다른 곳으로 가기나 하자고."
"잠시만요. 차원문부터 닫고."
소녀는 어울리지 않는 백색의 총-핸드캐논?-을 한 손으로 들어올려 하늘을 향해 쏘아올렸다. 기우는 잽싸게 귀를 막았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라?"
"마력 감응이 뛰어난 사람만 총성을 들을 수 있어요. 걱정 안하셔도 돼요. 아아, 삼척은 클리어.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소녀는 대머리에게 후드를 다시 뒤집어 씌운 뒤 날개를 펼쳤다. 기우는 긴장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가족을 지키려고 나서는 거 좀 멋졌어요. 당신은 가족을 지키시고...뭐 조금 낯부끄럽기는 하지만."
소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라는, 지구는 우리가 지킬게요. 일단 우리도 여기서 먹고 살아야해서."
화륵--!
소녀와 대머리는 빛처럼 사라졌다. 기우는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푸른 불꽃의 깃털을 집어들며 중얼거렸다.
"설마 그 때 현금 진상이 진짜로...?"
기우는 그만 졸도하고 말았다.
다행히, 더이상 삼척에는 괴수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 * *
"아 씨. 기억하는 것 같던데."
"누구? 아까 걔?"
"네. 사람이 참 쪽팔리는 기억이 있으면 얼굴을 잊을 수 없단 말이죠."
나는 조덕배를 들고 삼척에서 남하했다. 해안가, 해수욕장, 아파트, 호텔 꼭대기 등 국지적으로 열린 차원문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동해 바다에서 울릉도를 거쳐 올라오며 닫은 차원문의 수만 족히 10개가 넘건만, 아직까지 닫지 못한 차원문의 수는 한국에만 족히 기백을 훌쩍 넘었다.
"성주 이게 진짜."
"이런 상황은 예상했던 거 아니냐?"
"그렇긴 하죠. 설마 시작부터 클라이막스를 찍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차원문이 열리더라도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열리지는 않았다. 최소한 열리더라도 아지다하카 게이트처럼 전세계 주요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차원문이 열렸지, 지금 내가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이상한 장소에서 차원문이 열릴 정도는 아니었다.
"부하 2호. 가서 저거 문닫고 와요."
"...장난하냐? 지금 정화조 터졌는데?"
"괴수도 괴로워하고 있잖아요. 어서 가서 처리하고 오란 말이에요."
"그냥 네가 원거리에서 태워버리면 안 되냐? 어? 정화의 불꽃이라며? 내가 괜히 달려들었다가 옷에 묻으면? 너 그거 잡고 다녀야하는데?"
"젠장."
부정할 수 없는 팩트에 말빨에서 밀려버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TAT를 아래로 내려 마탄을 발사했다.
뜨오오오오오---!!
괴수는 비명을 지르며 불타죽었다. 괴수가 터뜨린 시설 내부의 분뇨들 또한 불길에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강원도 산골 돼지 농가의 분뇨장에 열린 차원문은 가장 먼저 나와 똥밭에서 구른 괴수의 비명소리와 함께 타들어갔다.
"휴우."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다시 마도기어에 호출이 들어왔다.
"야. 지금 신안 염전에 차원문 열렸다는데?"
"강원도에서 다시 전라도까지....... 이래서야 24시간 내내 히어로들이 괴수들 잡으러 다녀야겠는데요."
몸이 100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한국에 남아있는 히어로들은 명왕 공략 작전에서 전력외로 판정을 받은 저등급 밖에 없었고, K2 코어웨폰을 다루는 이들 또한 대부분이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도서산간에 열리는 차원문은 이렇게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나같은 존재가 아니면 사실상 빠르게 닫기 어려웠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반격할 기회도 없겠죠?"
"그렇겠지? 거의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으니."
삐비빅!
마도기어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한국이 아닌 옛 북한 땅, 심지어 백두산 천지에 거대한 차원문이 열려버렸다. 단순히 테라의 괴수나 테라리스트 뿐만 아니라, 간부들의 미완성 복제품인 마룡들도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럼 부하 2호. 이 상황을 타개할 가장 명확한 대책은 어떤게 있을까요?"
"대가리를 친다?"
"정답."
정령들을 모을 시간은 없다.
달에 갈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정령들을 모으기까지 불과 한 시간도 안 걸릴 테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정령들을 모으기도 전에 성주는 최종병기를 완성할지도 모른다. 그런 예감이 자꾸만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부하 2호. 뒷 일을 부탁해도 될까요?"
"대충 알아서 둘러달라? 이대로 가려고?"
"네."
다행히 조덕배는 눈치도 빨랐다. 나는 날개를 최대한 펼치며, 땅을 향해 천천히 활강했다.
풀썩.
조덕배는 바닥에 두 발로 착지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예전에 자유낙하를 할 때마다 착지를 못해 육편이 되거나 심장마비로 죽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조덕배도 어느덧 S급 답게 훌륭하게 땅을 디디고 일어났다.
"이것 좀 나중에 히카리한테 전해줄래요?"
"이게 뭔데?"
조덕배는 내가 건넨 작은 코어를 주머니에 넣으며 의아해했다.
"제 유언 모음집?"
"부정타게 무슨."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하고 싶었던 말들을 기록해둔 거예요. 사용할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혹시나 모르니까. 히카리한테 가면 해독할 수 있을 거예요. 무슨 일 생기면 히카리한테 가세요."
"너 죽으면 나도 죽...아하."
조덕배는 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또렷히 쳐다봤다.
"진짜 가냐? 혼자서?"
"네. 마지막은 못 보여줄 것 같아서. 미안하네요. 푸흐흐."
"다른 애들은 어쩌라고?"
"...지상이 이 난리인데 달까지 올라올 겨를이 있겠어요? 여유가 된다면 모를까."
나는 조덕배에게 손을 내밀었다. 창염의 몸이기는 하지만, 창염 이외에 나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라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 했다.
"고생했어요."
"...집어치워라. 우리 사이에 무슨 악수야."
조덕배는 손사레를 치며 물러섰다.
"사라질 생각하지 말고 살아서 돌아와. 그리고 성주 놈 어떻게 뚝배기 깨버렸는지 평소처럼 떠벌여보라고. ...아이씨, 빨리 사라져버려!"
"...푸흐흐. 그렇네요."
나는 무안해진 손을 거둬 하늘로 날아올랐다. 조덕배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곧장 뒤도 돌아보지않고 다른 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도 밍기적거리면 안 되겠죠?"
속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이제 떠나갈 때가 되었다. 덕배가 군말없이 달려나간 것처럼, 나또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대신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고. 흠흠."
나는 마도기어를 통해 모두에게 일방적으로 메세지를 남겼다. 답장은 필요없었다.
"긴 말 안 할게요. 먼저가서 끝판왕 잡고 돌아올게요."
돌아오는 것이 나와 창염일지, 아니면 창염'만'일 지는 두고봐야 할 일.
뚝.
나는 마도기어를 손목에서 풀어버렸다. 실시간으로 전해져오는 모든 정보는 더이상 내게 닿지 않았다.
"가자."
하늘로.
"혼자서는 무리일 지 몰라도."
성주가 기다리고 있을 최종 스테이지로.
"둘이서 충분해."
나는, 우리는 날개를 크게 펄럭여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성주의 두 번째 방주.
달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