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6화 〉1부 20장 18
정부에서 온갖 협상 카드를 내걸어 유리한 고지를 가져온 이후.
백희아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전장 마저도 의미심장한 장소로 선택을 하게 되었고, 결국 화명왕을 요격하기로 한 장소는 독도-동해가 되었다.
[무조건 'East Sea'가 되어야 합니다. 협회에서 등록할 때 분명히 이렇게 등록하세요. 안그러면 협조할 수 없습니다!]
...백희아와 백세준의 고집으로 인해 전장은 '동해'가 되었다. 그리고 동해에서 화명왕을 요격하는 팀은 한국에서 출전하는 헌터 길드 .
[현재 부재중인 설화령, 화권, 그리고 그 외 수많은 히어로 분들을 대신하여 청화단에서 나서주셨습니다. 보수는...승전보를 울리고 돌아왔을 때 먹을 뜨끈한 국밥 한 그릇입니다.]
'괜히 다 맡긴다고 했나.'
도대체 어디까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나 싶을 정도로 백희아와 백세준은 청화단을 이용해먹었다. 선의철의 무궁화 보이 급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국밥 이야기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청화단도 한국 사람인데 당연하지!
- 외국 상대로는 골수째로 뽑아먹으면서 한국 상대로는 누구보다 혜자로운 청화단ㅠㅠ
- 국밥 100그릇이면 인정이지.
헌터 길드 청화단은 국밥 100그릇을 보수로 받기로 했다. 국내의 여론은 하늘을 찌르는 반면, 국외-화명왕이 도착할 것으로 예정된 일본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 한국 영토 내에서 있는 문제라면 한국에서 해결하는 게 맞다. 하지만 화명왕이 있는 곳은-
- 그래서 저거 부술 힘은 있고? 모비딕에게도 털리던 분들이?
- .......
힘의 논리에 의해 커뮤니티의 여론은 한순간에 압살되었고, 결국 청화단 이외에는 화명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 질풍객은 어디에 있는가?!?!
- 그 질풍객 지금 바람을 타고 발트 해 상공에 있는 풍명왕 자르러 갔다.
일본 국적의 원탁 히어로인 질풍객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국가의 요청을 무시해버렸다. 자존심이 구겨질대로 구겨진 일본은 결국 마지막 자존심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 일본의 영해로 넘어오는 즉시 한국은 전장에서 손을 뗄 것. 추후 요청하기 전까지는 일본 안에서 해결하겠음.
그들은 마치 차원문이 발생했을 때의 상황처럼 자국 우선 처리 협약을 들먹였다. 그리고 백세준은 흔쾌히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럼 독도에서 일본 영해로 넘어가기 전에 처리하면 우리의 영토가 확실히 정해지겠구만.]
[아니, 거기는 우리 땅-]
[꼬우면 이능력자들 데리고 화명왕 부수러 오던가.]
조금 과격하다 싶은 백세준의 말에 결국 우선권은 청화단에게로 넘어왔다. 이미 대마도 사태로 많은 이능력자들이 국외로 빠져나간 일본은 동원할 수 있는 히어로도 국가 권력의 힘도 없었다.
- 넘어오는 즉시 손을 떼시오!!
- 독도에서 일본 영해까지 한 시간이면 넘어가겠지.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하겠구만.
즉, 청화단은 한 시간 내에 화명왕을 완벽하게 제거해야했다.
그를 통해 백희아가 노리는 것은 '세계 멸망의 일곱 명왕 중 하나가 독도에서, 한국이 파괴하였다'는 기록, 오롯이 한국의 헌터 길드에 의해 독도, 동해 위의 화명왕을 깨뜨렸다는 역사.
그 위대한 업적을 위해 모인 청화단의 수는 약 백여명.
간부진 화염거인, 등대, 팬텀, 터뷸러스, 하늘성, 아키택트, 흑염룡.
그리고 등대가 지휘하는 이능력자들.
예전 멕시코 원정을 나섰을 때의 정예병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생존한 푸른 깃털들을 모두 포함하였고, 청화단은 모두 똑같은 제복을 입고 전장에 나섰다.
[가시는 장소까지는 국가에서 지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백세준 대통령은 우리에게 웃으며 하나의 '전함'을 선물했다.
[마침 이런 날을 위해 비밀리에 건조한 배가 한 척 있습니다.]
청화단이 전력손실없이 안전히 독도까지 넘어갈 수 있도록 전함을 지원했고, 우리는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달려 삼척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함에 승선했다.
"...누구 작품인지 알겠네요."
항공모함처럼 생겼지만 선수에 용의 머리를 달고 있으며, 갑판의 디자인 전체가 마치 거북이의 등딱지와도 같은 형태의 전함.
21세기.
우리는 거북선을 타고 독도를 향해 진격했다.
* * *
"아무리 그래도 거북선은 조금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선수에 있는 용머리 장식을 가리켰다. 21세기 항공모함이 판을 치는 시대에 거북선이라니. 심지어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리모델링되어 세련되어 보이기도 했다.
세련되어 보이는게 더 부끄러웠다.
"국뽕도 이정도면 치사량인데."
딱히 상관은 없지만 생중계 중인 일본 측에서는 상당히 짜증나지 않을까. 나는 마도기어를 통해서 그 실황을 중계중인 히카리에게 잠시 연락을 걸었다.
"히카리, 반응은 어때요?"
[다들 미쳐 날뛰려 하죠! 흐흐, 멍청이들. 사실은 부러워 죽을 것 같으면서 열폭하는 꼴이란.]
히카리는 한 손으로 데이터를 분석하며 다른 손으로는 연신 일본 커뮤니티의 반응에 집중하고 있었다. 히카리도 태어난 나라에 쌓인게 많았던 만큼, 그들이 겪는 굴욕을 구경하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게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러길래 왜 어려서부터 예쁘다고 이지메를 시켜서.'
그 이지메 덕분에 역설적으로 청화단의, 나의 큰 힘이 되었지만, 정말 볼 때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했다.
[아 참, 거북선에 저도 한 몫 거들었어요. 단장님, 비밀 커맨드 하나 알려드릴게요.]
"뭐요?"
나는 히카리로부터 전해진 데이터를 보고 기가 막혔다. 히카리가 뭔가 건드렸다고 생각은 들었지만, 설마 저기다가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저기요? 비밀 커맨드 수준이 아니라 이건 무슨 주포를...."
[후후, 로망입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멋지고 자시고를 떠나서 그걸 해야하는 사람이 나라는 게 문제다.
"저보고 이걸 하라고요?"
[단장님 말고 누가 하겠어요! 단장님, 어차피 외곽의 실드 까려면 단장님이 하셔야 하잖아요? 그러면 그냥 마탄 날리는 것보다는 제가 셋팅해둔 게 더 효과적일 거라고요. 중요한 건 시각적인 이팩트에요, 이팩트.]
"물론 마탄 한 발로 실드 박살내는 것보다는 화려하겠지만...."
발사 시퀀스부터 결정대사까지 정해놓다니. 이것은 결전의 시간인가, 아니면 공개처형인가.
[이건 절호의 기회잖아요? 사실 단장님도 마음에 드시죠? 그렇죠?]
"......."
나야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 내 속의 창염은 어떨까. 나는 속으로 창염에게 물었다.
'콜?'
'당연한 거 아니에요?'
"......알았어요, 할게요. 발사 시각만 알려줘요."
[아싸!]
히카리는 활짝 웃으며 화명왕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전송했다. 아무래도 다른쪽보다 우리쪽을 더 신경쓰려는 듯, 아예 직접 영상으로 지켜보면서 시간을 보낼 듯 했다.
"다른 명왕들은 어떻게 됐어요?"
[화명왕 공략 시간에 맞춰서 각자 요격하기로 했어요. 각자 인명피해는 없는 장소니까 안심하세요.]
전세계로 뻗어나간 명왕들은 정령들이 요격하기 쉬운 장소에서 대처하기로 했다. 제각기 장기를 살릴 수 있는 전장과 현지의 히어로들은 이미 우리처럼 언제든지 명왕을 요격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었다.
"수명왕은 석하랑이 얼음길을 만들어 줄 거고, 지명왕은 유나가 땅을 솟아나게 하겠죠. 풍명왕은...김펜릴이 바람길을 만들어줄테고. 인근에 있는 원탁들도 하나 둘 합류했어요."
제각기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못해도 하나씩은 있었다. 문제는 다른 이들.
"카르나랑 ...환룡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카르나는 브라흐마스트라로 광명왕을 사막에 떨어드리기로 했어요. 환룡은 샤오린과 싱크로해서 적토타고 돌진한다고 하네요. 집행관은 실드만 깎아낸 다음, 아공간으로 직접 투입한다고 하고요.]
"그럼 다행이고."
다른 명왕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제 나만 그 방법을 정하면 끝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부탁'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했다.
"히카리. 진짜 이렇게 하라고요?"
[네. 안 그러면 저 삐져서 울 거예요. 우주 여행 관련 연구도 올 스톱.]
"...제가 화력으로 실드 까버리는 것까지는 이해하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혹시...싫으신 가요? 빅데이터를 이용해서 단장님 취향을 완벽하게 맞춘 건데.]
싫은 건 아니다. 단지 히카리가 전한 그 부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창염의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했다는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뇨. 싫은 건 아녜요. 그냥...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냈는가 해서."
[집단지성의 힘이죠! 은하대 학생들한테 은근슬쩍 과제로 돌렸거든요. 이야, 역시 천재적 발상에 집단지성이 1g 들어가니 아이디어가 샘솟더라고요.]
"......."
나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이미 속에 있는 창염은 어떤 멘트를 날리며 주포를 쏘고 날개를 펼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실드를 벗겨내고 청화단을 화명왕 안으로 투입하는 것으로 내 역할은 끝난다. 지휘봉은 어디까지나 이 전장에서 지휘관 역할을 맡은 의 단장의 몫.
"시간입니다. ...시작하죠, 김지화."
나는 거북선의 선수에 섰다. 나의 손 앞에는 포격을 위한 조종간이 잡혀있었고, 심장은 크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창염의 겉으로 빠져나와 의자에 앉은 창염의 몸을 깃털로 덮었다.
"후후후, 고마워요. 어떻게 날려버릴까~"
새삼 느낀 거지만, 역시 창염은 화력덕후가 분명했다.
* * *
새벽 4시 정각.
청화단을 태운 거북선의 상공으로 화명왕이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청화단의 모든 전투원들은 마력을 끌어올리며 각자 가지고 있는 무기들을 들어올렸다.
"총원, 충격에 대비."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만 낀 청년, 는 나지막하게 지시를 내렸다. 군데군데 끼어있는 모든 이들이 마력으로 보호막을 만들었다.
"주포 발사와 동시에 모든 청화단 단원들은 적의 강습에 대비하라."
등대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속으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아무도 죽지는 않겠지만, 설령 죽어도 부활할 방법은 있겠지만, 설마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전투를 치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청화 양은...주포 발사 준비."
"주포 발사 준비!!"
어린 아이처럼 신난 청화의 목소리에 등대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기도했다.
'그냥 실드 째로 혼자서 박살내주세요, 단장님!'
부끄러움은 그냥 청화 혼자서 가지고 끝날 수 있도록. 등대는 거북선의 용머리 뒤에 서서 TAT를 장착한 청화의 모습을 주시했다.
"......."
청화의 등 뒤에 서있는 푸른 불사조는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등대는 전장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불사조의 모습에서 괴인 피닉스의 모습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설마?'
"주포 발사 시퀀스, 3, 2, 1--!!"
옆에서 보좌하는 터뷸러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동시에 용머리가 고개를 치켜들며 화명왕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3, 2, 1--!!"
청화는 카운트를 따라 외치며 TAT를 겨눴다. 순백의 마총과 거북선의 용머리는 연동이라도 된 듯 각도가 일치했고, 푸른 불사조는 불씨를 흩뿌리며 총열로 빨려들어갔다.
"창염개진."
청화는 웃음을 찾는 목소리로 의식을 치르더니.
"창염신포(蒼炎神砲)!!"
청명한 목소리와 함께, 마탄의 방아쇠를 당겼다.
구구구구.
용의 입에서 마룡들의 브레스마냥 푸른 불꽃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
전장 100m가 넘는 푸른 불꽃의 불사조가 화명왕을 향해 날아들었다. 불사조는 화명왕과 닿자마자 외곽의 실드를 불태워버리기 시작했고, 곧 안에서 이상을 감지한 정체불명의 괴수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엑!!!
"전 청화단 단원 집중! 테라리스트들에게서 눈을 돌리지 마!!"
보기만 해도 혐오감이 드는 외형에 몇몇 이들은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지만, 테라리스트들은 화명왕을 감싼 푸른 불꽃에 닿자마자 재가 되어버렸다.
파삭, 파사삭!
그와 동시에 타원형으로 된 실드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와장창-----!!
빌딩 전체의 유리창이 깨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화명왕의 실드가 모두 박살났다. 푸른 불사조는 날개를 펄럭이며 거북선을 향해 떨어졌다.
푸스스.
푸른 불사조의 크기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고, 청화는 하늘 높이 두 손을 들어올려 작아진 미니 피닉스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고생했어요."
청화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뒷 일은 이제...여러분께 맡길게요."
"침투조, 강습 준비---!!"
철컹, 철컹!!
등대의 외침과 함께, 10여명 가량의 청화단 단원들이 선수를 향해 뛰어내렸다. 등대는 실드가 부서진 화명왕의 입구를 가리키며 외쳤다.
"날아올라라, 흑염룡!"
캬오오오오!!
흑염룡이 동해 바다 속에서 상공을 향해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새벽 4시 14분.
헌터길드 청화단에 의한 화명왕 공략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