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5화 〉1부 20장 17
나는 나를 비롯한 청화단이 대처하기로 한 화속성 명왕을 제외하고 다른 명왕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백희아가 아공간을 이용해 정령들을 흩뿌려주기는 했지만, 같은 속성이든 상성 속성이든 명왕은 아직 건재했다. 내가 유영호와의 문자를 나누며 생각에 잠긴 사이, 창염은 청화단의 간부들에게 명왕의 외형을 홀로그램으로 띄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선 말뚝...명왕의 가장 큰 특징을 얘기해줄게요. 실드를 깨는 순간, 안에서 테라리스트들이 무지막지하게 튀어나올 거예요. 마치 바퀴벌레처럼."
"으윽."
간부들은 평균 S급 괴수들이 바퀴벌레마냥 우글우글 튀어나온다는 것에 혐오감을 내비쳤다. 좋게 말해도 테라리스트들의 외형이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만큼, 바퀴벌레는 차라리 귀엽다고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까 명왕이 제각기 위치에서 멈춘 시점에 실드를 부수고 침투조가 들어가야해요. 밖에서 이능력자들이 대치하고 있는 동안, 소수 정예가 안에 침투해서 명왕을 박살내는 거죠."
"명왕이라는게 하나라도 지구 내핵에 들어가는 순간 지구가 쪼개진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단장님, 바로 공략은 할 수 없는 겁니까?"
등대는 손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나도 창염도 금방 깨달았다.
"달로 올라간 성주를 공격하자?"
"예. 성주도 지구를 정복하려는 놈이니 지구를 완전히 쪼개려는 시도는 아닐 겁니다. 명왕성을 방주로 삼아 움직였던 것처럼, 명왕이 내핵까지 파고들기 직전에 멈추게 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명왕들을 컨트롤하는 스위치 같은 게 있을 것이다?"
"그렇네. 그리고 그냥 머리부터 날려버리면 그만 아니야? 위험하다고 해서 일단 산개한 것 까지는 이해하지만, 너 계속 머리부터 잡을 거라며 벼르고 있었잖아."
간부들 중, 팬텀은 은근슬쩍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대충은 눈치챈 모양이지만,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에 감사히 여기며 나는 창염을 살짝 눌렀다.
"전제가 잘못된 것이다. 성주는 진짜 지구를 파괴할 생각인 것이다."
"...뭐요? 보스, 그럼 스위치는?"
"딸기 케이크를 먹을 때 일단 전체를 빵칼로 조각을 나눠서 잘라먹지, 케이크 한 판을 통째로 먹는 사람은 없는 거예요."
"이런 미친."
창염의 비유에 간부들은 질색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창염의 비유대로, 성주는 지구를 파괴할 생각밖에 없었다.
"지구를 정복하려는 것도 지표에 있는 모든 생명들이 자기가 지구를 파괴할 때 방해가 되니까 먼저 치우려고 하는 거지, 지구를 정복해서 세계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히드라가 간부인데도 네게 협력했던 이유가 얼굴에 반해서 그런 건 아니구나?"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군. 지구 자체가 파괴되면 살 곳이 없으니 그런 것도 있을 게다."
"......글쎄요."
창염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나를 슬쩍 올려다봤다.
"아무튼 성주를 먼저 공략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지구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 당장 있는 위험부터 제거하도록 하죠. 각각 속성을 딴 일곱 명왕부터 깔끔하게 제거하는 거예요."
"성주가 달에서 의식을 준비하기까지 적어도 시간은 넉넉하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우리에게 맡겨진 화속성 명왕을 제거하는 것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화단을 불렀다. 한국에 있는 모든 히어로들은-그 외에도 전 세계의 모든 히어로들은 기차든 비행기든 뭐든 온갖 방법으로 백희아의 지시에 따라 명왕을 쫓기 시작했다.
"히카리가 지금 명왕들의 이동 경로를 읽고 있어요. 최대한 인명 피해가 없을 만한 곳을 골라서 싸우려고 하는 거죠."
"집행관과 집정관이 각각 셋 씩 맡아서 지휘할 것이며, 정령들은 각각 실드를 부수기 위해 자기 속성과 맞는 명왕 앞에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원작과는 달라진 명왕이라는 이름 때문일까. 히카리가 읽어낸 예상 이동 경로나 백희아가 정한 전장은 원작과 하나도 겹치는 곳이 없었다. 당장 청화단이 맞상대 할 곳 마저도.
'원래는 백두산이었는데.'
백두산 천지를 뚫고 내려가 거대한 화산 폭발을 일으키는 화속성 말뚝. 그것이 지금은 백두산이 아닌 남동쪽의 다른 화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저걸 막으러 가야해요."
"위치상으로 보면 익숙한 전장이라는 것이다."
창염이 지도를 띄우자 간부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우리가 저길 지켜야 한다고?"
"막기 싫어도 막아야죠. 안 막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알잖아요?"
창염은 홀로그램으로 시뮬레이터를 돌렸고, 나는 말뚝이 박히자마자 부글부글 끓어넘치는 산을 날개 끝으로 가리켰다.
"후지산 대폭발인 것이다."
......본래 떨어져도 백두산으로 이동했어야 할 화속성 말뚝은, 명왕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 때문인지 한반도를 남동으로 가로질러 후지산을 향해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 * *
굳이 신경은 쓰지 않았지만, 이 세계의 한국은 선의철의 시대부터 국수주의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히어로 인재 유출에 있어서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국가가 중국과 일본이었고, 중국과 일본은 알짜배기라고 할 수 있는 B급 이상의 히어로들을 제외하고 다시 외국으로 판매하는 등 온갖 방법을 이용해 한국을 괴롭혀왔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중국의 경우 서해 미사일 도발이나 압록강을 넘어오려고 했던 평양 진격 사건이었고, 일본의 경우 부산 모비딕 사태나 히드라에 의해 발생한 대마도 사태였다.
둘 다 나로 인해서 직간접적으로 벌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원래 일어나야 했던 일이 조금 빨리 일어나거나 그와 비슷한 상황이 다른 장소에서 일어났을 뿐이었다.
석하랑과 내가 앞뒤에서 한반도에 자리를 잡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양국은 시도때도 없이 한국을 괴롭혔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의 암적인 존재인 선의철을 제거함과 동시에, 양쪽의 위험 요인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중국의 모택평은 환룡으로 대체되었다. 체제의 문제에 관해서는 환룡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뒀고, 환룡을 보좌하던 봉효는 대외적으로는 현상을 유지하면서 뒤로는 한국-청화단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대표적으로 흑사갈 코어의 무상 납품처럼.
일본의 히카리는 이미 청화단의 핵심 요인으로 들어오게 되어, 질풍객이 실종된 동생 찾는다고 미쳐 날뛰는 일은 사라지게 되었다. 루살카를 통해 원탁을 끌어들이게 되면서, 질풍객은 청화단과 한국을 '동생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니 세계 멸망에 대한 위협 요인은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국가가 유지되고 있는 만큼 서로의 관계는 최악에 다다라 있었다.
'애초에 친하게 지낼 수가 없는 상황이지.'
부산의 대마도 사태만 하더라도 양국의 관계를 첨예하게 나타내던 대표적 사례였다. 히어로 기질이 뼛속까지 박혀있는 석하랑도 대마도에서 부산해협으로 헤엄쳐 넘어오려던 이들을 모두 빙벽으로 막아세웠을 정도로, 반일감정은 현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설령 선의철이 실각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마찬가지. 나는 이 상황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할 수 있는 존재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바쁘니까 문자로 남긴다. 어떻게 생각해?]
삐리리.
문자를 보내자마자 전화가 날아왔다. 마력을 사용하고 전세계의 전장 세 곳을 컨트롤 하느라 바쁠텐데. 나는 괜히 문자를 보냈나 싶었다.
'들어와서 전화 받아요. 그래야 이후 작전도 확정되니까.'
'그게 낫겠지?'
나는 창염의 속으로 들어가 간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테이블 위에 소태 씹은 얼굴의 집행관 백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명왕이 하필이면 그게 거기로 가서.]
애국보수 백희아는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팍팍 내비쳤다. 히어로와 애국보수라는 딜레마에 빠져, 화명왕에 대해서는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했다. 아니, 꺼려했다.
[거기 도와주기 싫은데.... 혹시 하와이나 괌으로 가는 거 아닐까요? 후지산은 그냥 지나가는 걸 수도 있잖아요.]
"히카리 본인도 당신만큼 일본 싫어하는데 후지산이라고 했잖아요. 히카리의 데이터는 정확합니다."
[하아.... 알겠어요. ...그런데 지금 전 히어로들 다 빼버려서 전력이 없....]
내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자, 백희아 또한 입을 가리며 씩 웃었다.
[히어로는 없네요. 후후, 설마 이걸 예상하시고?]
"글쎄요. 그냥 청화단 단독으로 처리하려고 했는데, 장소가 하필이면 그곳이네요. 이왕 이용할 거라면 철저히 이용해야겠죠?"
나는 청화단의 대외적인 '본질'을 언급했다.
"청화단은 헌터 조직, 기본적으로 용병 집단 같은 거니까요. 대신 귀찮은 정치적 거래에 관해서는 당신 외조부께 맡길게요."
히어로로서의 양심에 대한 면피는 충분하리라. 백희아가 어느 정도 충분히 뒤에서 언질을 줄테니, 나머지는 이제 청화단이 어떤 식으로 화명왕을 공략할지 계획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불꽃 말뚝, 공략 작전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장 날아가서 실드를 벗겨낼 수도 있지만, 우리 쪽은 귀찮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일단 실드 벗기고 나서는 저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예?!?!?"
"제가 청화단을 왜 만들었는지 생각나요?"
솔직히 말하건데.
"다 이런 상황에서 귀찮은 잡놈들 처리하라고 만든 거예요. 푸흐흐."
나는 성주와 이계신만 상대할 것이니, 나머지는 알아서 해주기를.
* * *
"...알았습니다. 조심하시길, 집행관."
[꼭 이기고 돌아오겠습니다. 대통령 님.]
뚝.
결의에 찬 집행관의 홀로그램이 사라지자, 현 대통령 백세준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의자에 눕혔다.
"귀찮은 일이라...."
백세준은 백희아가 전한 피닉스의 언행을 곱씹으며 피식 웃었다. 수십 년을 정치적인 문제만 생각하며 살아온 이로서 대외정치-국제적인 파워 게임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귀찮은 일' 로 치부하는 것에 불쾌한 것이 사실이었다.
'확실히 귀찮기는 하겠지.'
자국의 생명과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하는 것과 달리, 피닉스에게는 지구 전체의 운명이 달려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인간의 수만 따지고 봐도 60억과 4천만. 과장 좀 보태어 비로 따지면 99:1.
"그럼 나도 그 귀찮은 일을 한 번 멋지게 처리해볼까."
욕심은 있었지만 한 때는 포기했던 위치에 오르게 된 사람으로서, 백세준은 요구대로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모두들, 자네들이 생각하기에는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을 것 같은가?"
대통령의 긴급 소집에 모인 각계 관료들은 저마다 눈치를 보며 누군가가 먼저 이야기를 하기를 기다렸다. 다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기뻐하면서도, 또 먼저 이야기하기는 상당히 껄끄러워했다.
"그, 그게."
"이런 일은 우선 외교부에서 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외교로 풀 상황입니까?"
"쯧."
백세준은 지리멸렬한 대화가 시작되리라 직감했다. 자신이 예전부터 이런 책임회피성 대화를 주도하였기에, 관료들이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보시게들. 뭘 그리 젠체하는 겐가? 한 마디로...벗겨먹기 딱 좋은 시점이란 말일세."
"하지만 이런 상황을 이용해도 되겠습니까?"
한 때 히어로 길을 꿈꿨으나 D급으로 좌절했던 관료는 자신의 양심에 떳떳하기 위해 분명히 의사를 밝혔다.
그간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가만히 내버려두기는 커녕 화명왕을 후지산에 처박아버려도 모자라겠으나, 도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이용해먹을 수 있는 건 이용하라고 했는데...음...."
누가 있을까. 이미지에 전혀 신경쓰지않고 적절히 빼먹을 수 있는 방법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백세준은 좌중을 훑었지만 누구 하나 없었고, 머릿속으로 이 자리에 없는 이를 떠올려야했다.
"아."
백세준은 그의 얼굴이 떠올랐고,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하라.
"선의철."
절반은 표정이 굳었고, 절반은 씩 웃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합디다. 이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물불도 가리지 않던 자가 아닙니까? 그에게 한 번 물어본 다음, 불가능하다 싶은 건 하나씩 소거하도록 하죠."
한 때는 대원군의 재림이라고도 불리우던 그가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백세준은 귀찮은 일을 모두 다 떠넘겨버렸다.
'감옥에 들어간 자기 상황은 내버려두더라도 일본 엿 먹이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
백세준은 감히 선의철에게 되돌려 줄 말을 떠올렸다.
'이 시국에?'
"자, 자. 우리는 선의철이 생각한 것을 현실에 맞게 수정하면 됩니다. 너무 심하다 싶은 건 빼버리고, 좋은 의견이 있으면 수용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백세준의 지시에 따라 특사가 감옥으로 급히 파견되었다.
정확히 30분 뒤.
대통령 관저 회의실에 A4 용지 수 백장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 * *
'날씨 좋군.'
어느덧 해는 떨어지고 밤이 되었고, 나는 창염과 떨어져 홀로 옥상 난간에 서서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처럼이니 기회를 줘야지.'
병력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는 진작에 끝냈다.
정치권에서 회의가 끝나는대로 청화단 전체가 준비된 이동 수단으로 움직일 것이며,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각자 10분내로 복귀할 수 있는 상황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재미있게 잘 노내.'
창염과 가을은 둘이서 후안 사장의 카페로 떠났다. 가을은 창염이 진짜로 나인지 아니면 별개의 존재인지 파악하기 위해, 그리고 창염은 가을과 데이트를 한다는 것을 즐기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저런 거 보면 본성이라는게 참 무섭단 말이지.'
게임 속 히로인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매력적인 여성이니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다 싶으니 바로 기회를 잡더라.
'단순히 고맙기도 하고 얘기하고 싶어서 간 거라면 참 다행일텐데.'
가을이 피닉스에게 가진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 가을과 일부러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니. 싱크로를 하게 되었지만 나는 일부러라도 창염의 속마음을 읽지 않으려 했다.
'괜히 불안하네.'
과연 가을과 무슨 이야기를 할까. 지금이라도 따라 붙을까? 항상 옆을 지키겠다고 하면 창염도 거부는 하지 않을 것이다.
'옆에 있어도 된다고 말이야 하겠지만.'
아무리 가을의 가슴이 끝장나게 크고 창염도 만지고 싶어하더라도, 창염은 내가 옆에서 자신의 가슴을 만지작거려준다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색없이 느껴줄 것이다.
'남자랑 둘이서 가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나.'
창염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다른 외간 남자와 둘이서 자리를 가지게 된다면 아마 세계는 무너지게 되리라. 내가 일단 그 놈부터 족치고 볼 것이다.
"오호통재인 것이로다."
매일 붙어있는 건 정신세계와 만들어진 미래에서 25년 가까이 붙어있었으니, 잠깐 정도는 충분히 시간을 내어줄 수 있다. 나는 둘이 카페에 들어가는 시간을 확인한 뒤, 옥상으로 올라오는 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뭐하냐?"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다.]
직접 말을 했다가는 말투가지고 꼬리를 잡을게 분명하니 마력으로. 내 말에 회색 후드의 대머리, 조덕배는 하품을 하며 내 옆에 섰다.
"저게 네 이거냐?"
조덕배는 히히덕거리며 새끼손가락만 들어올렸다.
[반려지.]
나 또한 부정하거나 숨길 생각은 없었다.
이미 누구보다도 많은 걸 알고있던 덕배가 나와 피닉스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듯, 나 또한 덕배에게 굳이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천가을한테는?"
[이미 알아버린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지만, 본인이 눈치채기 전에는 굳이.]
"징한 녀석."
[어차피 곧 사라질 지도 모르거든.]
창염과 잠시 떨어져있는 만큼 나는 내 본심을 얘기하기가 다소 편했다.
[오늘 몇 일이지?]
"자정 지나면 12월이다."
[...나야 운명의 시한은 진작에 넘긴 것 같지만, 이제 전 인류가 시한부 인생이 됐군.]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중천을 향해 떠오르는 달의 색깔은 어딘가 모르게 거무틱틱했다.
[명왕을 처리해도 전세계에 테라리스트들이 출몰할 거다. 사실상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쏟아질 거고, 그 때서야 비로소 대가리를 날리면 끝나는 전투가 시작되는 거지.]
"그 벼르고 벼르고 있다던 달에서의 최종전?"
[그래. 달에서 싸우게 될 거다. 정령들 모두가.]
그 순간에는 아마 내가 없을 지도 모르지만.
"그러니 남게 될 사람들끼리 잘 지내라는 것이다."
"딱히. 야, 그런데 잠깐만. 너 뒤지면 나도 뒤지는 거 아니냐? 천가을도 마찬가지고."
"아마도 그럴듯? 간부쪽은 여전히 나니까."
"씁. 아오, 이제 안 죽나 싶더라니."
덕배는 벽을 발로 두드리며 짜증을 냈다. 나는 그래도 지금까지 고생을 시킨만큼 미안한 마음이 살짝 들어, 덕배에게 슬쩍 제안을 했다.
"원한다면 창염에게 부활 권리를 넘겨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다. 걔 밑에서 평생 있느니 차라리 죽을 수 있을 때 죽고 말지. 난 말이다. 네가 나를 개고생시킨 만큼 너도 개고생 하는 걸 보고 죽고 싶거든. 예를 들어서...그래. 창염이 가을에게 반해서 너 버리는 건 어때?"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다."
"정색하는 거 보소. 하여튼 말이라도 못하면. 에휴, 됐다. 나는 내려가서 준비나 할란다. 적당히 궁상떨고 슬슬 주인님한테 가봐."
덕배는 손을 흔들며 옥상을 떠났다. 나는 달빛에 반짝이는 뒷머리에다가 불을 지를까 잠시 생각했지만, 마력 손실이 날 수도 있으니 참기로 했다.
"나름 S급 오르느라 개고생했는데 이번만 봐주는 것...음?"
창염 쪽으로 흘러들어가려던 익숙한 마력 반응이 내 쪽으로 흘러들어왔다. 마력 데이터 안에는 백희아의 문자가 있었다.
"오호."
누군지는 몰라도 제법 머리를 굴렸구나. 나는 백희아가 정한 전장과 시각에 날개를 활짝 펼쳤다.
- 세 시간 뒤, 독도를 지나가자마자 화명왕 파괴.
"후지산에서 싸우면 화명왕 때문인 척 화산 폭발시키려고 했는데."
유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