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484화 (484/1,497)

〈 484화 〉1부 20장 16

빠른 속도로 낙하하던 방주는 제자리에 멈춰 여덟개의 기형 말뚝이 되었고, 차렷자세에서 팔을 들어올리는 것 마냥 수직으로 세워져있던 몸을 지표와 수평으로 눕혔다.

[단장님! 각각 실드 패턴이 달라요!!]

"어떻게?"

[하나 빼고 속성마다 하나씩!]

히카리가 보낸 데이터에 나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만들어진 미래에서 내가 궁극기로 방주를 실드째로 박살내버렸던 것을 경계한 건지, 성주는 방주를 쪼개고 각각의 말뚝에 실드를 박아넣었다.

우우웅!!

회색이던 방주의 색깔마저 변해버렸다. 코어의 색과 똑같은, 적-청-녹-황-금-흑-은의 말뚝은 우리가 손을 쓸 틈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성주가 지구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때의 패턴을 떠올렸다.

- 주력이 한 곳에 집중되지 못하도록 난전을 유도하는 타입.

그야말로 폭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동시에, 상대가 일격을 모으지 못하도록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이 성주의 주된 전술이었다.

"집행관, 이동 준비--!"

내 지시에 모두가 굳은 얼굴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뛰어가든 날아가든 전세계로 흩어진 방주 말뚝을 쫓아가기에는 늦다.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접어서 움직여야 했다.

"히카리의 분석에 따라서 가까운 곳마다 떨어뜨려줘요! 김펜릴은 뛰어가고!"

부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펜릴을 하늘을 날아올랐다. 전력으로 바람을 타고 뛰면 텔레포트보다 더 빠른 만큼, 자신의 감각대로 풍속성 말뚝을 쫓아가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조심...!"

백희아는 앙그의 힘을 이용해 정령들을 모두 어둠속으로 집어넣었다. 히카리의 구체적인 분석이 끝나는 대로, 이제 전세계로 퍼진 말뚝으로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히어로들이.

"후우."

나는 63빌딩 옥상에 홀로 남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성주는 악랄하게도 내 몫인 화속성 말뚝에 더불어, 일곱가지 속성을 모두 담은 말뚝을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화속성 말뚝은 남동쪽을 향해.

칠속성 말뚝은 하늘을 향해.

"성주 어디있는지는 불보듯 뻔한데...."

방주를 쪼개었어도 성주의 성향은 변하지 않는다. 성주는 분명히 무지개빛 말뚝에 있을 것이며, 그 뒤에 할 행동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방주는 하나가 아니지.'

이대로 두면 분명 또다른 방주를 낙하시키리라.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말뚝을 처리해야했다.

"히어로들이 나머지 다 알아서 정리하라하고...우리는 저걸 정리해야겠네요."

하염없이 남동쪽을 향해 움직이는 붉은 말뚝은 봉화마냥 위에 불꽃을 연신 터뜨리고 있었다. 정말로 다행스럽게, 아직까지는 조짐만 보일 뿐이었다.

"바로 껍질을 깨면서 괴수들을 방출할 줄 알았는데.

전력을 퍼뜨림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무엇이 있을까. 단지 내가 일격에 미래의 방주를 파괴시킨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 아니면 뭔가 다른 계획이 있는 걸까?

'일단은 두고보면 알겠지.'

내가 할 일은 그저 하나.

싱크로 상태를 유지하면서 성주를 박살내는 것.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내 몫의 말뚝을 제거해야했다.

'그냥 냅두면 내핵까지 파고드니까.'

원래의 방주보다는 위력이 약할 지라도, 결국 하나라도 성공하면 지구가 박살나는 건 똑같았다. 나는 하늘로 날아오르기 전 몸 상태를 한 번 더 체크했다.

'우려했던 것 치고는 크게 나쁘지는 않은데.'

조루마냥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찍 싸버려서 내가 먹힌다거나 소멸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싱크로가 이렇게 편한 상태를 유지하는 걸 알았으면 진작에 했을텐데, 지금까지 무슨 삽질을 했나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반대죠."

짝. 나는 뺨을 두 손으로 쳤다. ...내가 한 행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과정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다다를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건가요? ...아으, 이거는 좀 불편하네."

안쪽에서 창염이 말하고 내가 답하는 형국이지만, 겉에서보면 자문자답하는 미친년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면 이렇게 해보는 건?"

창염은 손을 들어올려 마력을 끌어냈다. 동시에 나의 의식 또한 창염이 일으킨 마력 속으로 함께 당겨졌다.

우우웅--!!

의식이 푸르게 물들고,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싶더니 나는 창염과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원래의 자신의 몸으로 내게 손을 흔드는 창염을 보며 말문이 막혔다.

"드디어.... 이건 또 뭔데."

"?"

"그건 좀. ...과연, 싱크로를 하면 이렇게도 할 수 있는 건가."

나는 창염에 의해 새롭게 마련된 내 육체를 살폈다.

푸른 불꽃의 날개. 그리고 인간과는 전혀 다른 몸체. 창염과의 눈 높이를 감안했을 때 대략 키는 190cm 정도.

나는 말 그대로 불사조, 피닉스가 되었다.

"실전 압축 마력 같은 건가? 크기가 생각보다 작네."

"지금은 저 태우고 가야하니까요. 원하면 얼마든지 더 키울 수 있어요. 발기하듯이."

"...그거랑은 다르지 않나. ...아무튼 얘기하기는 편하겠군."

나는 다리를 살짝 굽혔고, 창염은 내 등 위에 올라탔다.

"창염, 네가 해도 좋다."

"그래도 되나요?"

"지금 청화의 목소리는 네 것이니까."

"...그래요. 그러면 잘 빌릴게요."

창염은 쓰게 웃으며 마도기어를 두드렸다. 내가 창염을 위해 청화로서 활동하며 만들어낸 권위가 드디어 원래 주인의 입에서 나올 때가 온 것이다.

"청화단, 집결."

* * *

"과연 신속하군.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성주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방주의 위에서 혀를 찼다. 생각보다 피닉스의 대처는 빨랐고, 다른 정령들 또한 기민하게 움직였다.

"시간이라도 벌어주길 바라야지."

전 지구로 퍼뜨린 명왕성 말뚝은 시간벌이를 충분히 해주리라 믿으며, 성주는 고개를 우주로 들어올렸다.

"아직 방주 하나 더 남았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위력으로 개조가 완료되는 순간, 지구는 산산조각 나리라.

"그래...이름은 이 좋겠어."

그 기술과 어감도 비슷한 이름에 성주는 썩 마음에 들었다.

***

정말 오랜만에 청화단을 소집했다.

대 성주전에서 나오게 될 테라리스트들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청화단 간부들은 즉시 아지트의 펜트하우스에 소집되었다.

화염거인, 등대, 팬텀, 궁성, 흑염룡, 아키택트, 하늘성.

중반부터 헌터 겸 히어로로 합류한 김누리는 히어로들과 함께 움직이도록 조치를 내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리에 모인 인원들은 순수한 이라고 할 수 있는, 초창기부터 연이어 나를 도와온 이들이었다.

- 이렇게 처음 만나니까 상당히 어색한데요.

창염은, 청화는 상석에 앉아 내 뒤를 흘깃거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항상 내가 앞에 나서서 대화를 주도했으나 자신이 이 자리에 앉은 것에 상당히 어색해하는 듯 했다. 물론 어색해하는 건 다른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꼭 그러니까 S병원에서 천가을 뒤에 따라오던 게 생각나는데."

"그...엄청 크네요. 소환수 같은 겁니까? 그게 미니 피닉스들의 진짜 실체...?"

"그보다 꼭 그렇게 날개로 안고 있는 듯이 있어야 해?"

간부들은 저마다 궁금한 것을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창염은 살짝 짜증어린 표정을 지었다가, 내가 연기한 청화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싱크로하면서 생긴 힘이에요. 미니피닉스의 본래 모습이기도 한 동시에, 마력이 적게 나가도록 신체를 줄였어요. 원래 크기는 다들 알고 있죠? 메카피닉스. 정령들을 상대로 하던 30m 짜리 거대 괴수. 소환수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일종의 분령이에요."

'설명'을 시작하면서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창염은 나를 자신의 분령으로 표현했고, 나는 곰곰이 생각한 청화단에게 첫인사를 남겼다.

"만나서 반갑다는 것이다. 이쪽은 창염, 나는 피닉스라고 부르는 것이다."

"......피닉스?"

천가을이 가장 먼저 애매한 얼굴로 창염과 나를 번갈아보기 시작했다. 감이 좋은 여자답게 나와 창염의 관계가 다른 정령들과는 다르다고 직감한 듯 보였다.

"구, 구분하는 거예요. 제 피닉스가 분신이기는 하지만, 저와 동격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간단히 말해서 인간형 피닉스와 괴수형 피닉스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나뉘어져있을 때는 SSS가 아닌 SS+ 수준이겠지만...."

나는 창염의 정수리에 잠시 턱을 올렸다. 창염은 나를 끌어안으며 마력을 해제했고, 곧 나는 창염의 안으로 바로 빨려들어갔다. 집밖에 나가있다가 다시 돌아온 감각이 전신을 충만하게 채우기 시작했고,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마력을 살짝 일으켰다.

"흠흠, 이런 식인 거예요."

"...이게 진짜 힘입니까?"

"S급으로 올라도 느끼지 못할 정도라니...."

간부들은 다들 SSS급에 이른 내 힘에 경탄하거나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이 자신을 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는 적을 향한다는 두려움이 더 큰 듯 했다.

"지금 '저 놈이 도대체 어디까지 적을 때려잡으려고 더 강해진 건가'생각하고 있죠, 아키택트?"

"...거 남의 속마음을 읽기 있습니까, 보스?"

"굳이 마력을 읽지 않아도 표정만 봐도 알겠는 걸요. 네, 다 때려잡을 거예요. 성주도 잡고, 이계신도 잡고. 이 몸이 과연 어디까지 버텨줄 지 모르겠지만."

나는 굳이 단서를 달았고, 간부들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뭐 시한부라도 됩니까?"

"비슷해요. 정확히는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건데, 터지는 타이밍이 언제가 될 지 몰라요. 그게 당장 10분 뒤가 될 수도 있고, 100년 뒤가 될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영생에 가깝게 살아갈 수 도 있는 거고. 막말로...이렇게 이야기하다가 끽 하고 의식을 잃을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데리고 다니는 거예요."

창염의 몸을 빌어 대신 말하고 있던 나는 마력을 일으키는 척 하며, 창염의 몸에서 빠져나와 다시 불사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는 창염에게 슬쩍 눈치를 줬고, 창염은 쓰게 웃으며 나를 가리켰다.

"...피닉스가 사라지는 순간, 싱크로가 풀릴 거예요. 하지만 걱정마요. 이제 성주에게 세뇌는 당하지 않으니까."

정확히는 성주가 더이상 세뇌빔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제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세뇌빔을 쓰지 않을 것이다.

'세뇌빔 날리면 바로 동귀어진이니까.'

내가 성주에게 공격을 날리면 성주가 세뇌빔으로 맞받아 칠 것이며, 성주가 내게 세뇌빔을 날리면 공격으로 맞받아 칠 것이다. 이제 성주는 거의 '인간'답게 판단하게 되었으니, 제 욕망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짓은 하지 않으리라.

'거기에 세뇌빔도 이제 안 통해.'

성주가 갑자기 방주에서 뛰어내렸을 때 당황하여 타이밍을 놓치기는 했지만, 이제는 내가 겉에 나와있음으로 인해서 상시 경계상태이기 때문에 '창염에 대한' 성주의 세뇌 자체도 통하지 않는다.

즉, 겉에 있는 내가 성주와 함께 지옥으로 빠지는 한이 있을지언정 창염은 살아남는다. 그것이 '피닉스가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의 진의였다. 창염은 그것을 적당히 각색하여, 슬픔을 머금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성주가 세뇌를 하더라도 분령인 피닉스가 받아줄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저는 살아남는다 이 말씀."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창염으로부터 파생된 것. 창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만큼, 충분히 각오는 되어있다는 것이다."

성주의 세뇌받이 역할을 하게 된 나에 대해 간부들의 표정이 복잡미묘했다. 특히 다른 누구보다도 천가을의 표정은 심각해보였다. 행여나 조금이라도 단서를 주지 않기 위해, 나는 다음 화제를 생각하며 창염에게 화두를 던질 것을 제안했다.

"흠흠, 그러면 지금부터 성주가 남기고 간 방주의 파편에 대해서 얘기할 게요. 그러니까 일명 말뚝-"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누가 그런 이름을 붙인 거예요?"

"집정관 유영호입니다만."

창염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방주가 말뚝의 형태로 변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따로 그에 대한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고, 그 사이 유영호가 벌써 이름을 가지고 선수를 친 모양이었다. 나는 창염의 손목에 채워진 마도기어를 슬쩍 날개로 눌러 마력을 불어넣었다.

[유영호. 왜 하필 명왕?]

[지금 난리 났는데 이름이 중요하나?]

[다른 이름 있는데.]

[그럼 진작에 알려주지 그랬냐ㅋㅋㅋ 이미 정해진 건 어쩔 수 없다. 방금 희아가 이라고 정했거든.]

[언제?]

[10초 전에.]

백희아 너마저. 물론 명왕성이 쪼개져서 더이상 행성이든 왜행성이든 '별'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해졌기는 하지만, 그래도 원래 이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이름을 붙인 건 조금 찝찝했다.

'적의 이름을 강하게 붙여버리면 어쩌냐.'

왕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으니 뭔가 강해보이지 않은가. 보통 명왕이라고 하면 그리스 신화의 하데스를 생각하기 마련이니, 굳이 적을 상대로 그런 이름을 붙였어야 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명 따위는 아무래도 좋지.'

결과적으로 이기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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