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0화 〉1부 20장 12
"아주 귀가 입에 걸리셨습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아무렴 좋고말고."
밖에서 전화를 마치고 들어온 나를 반기는 건 싸늘한 눈초리였다. 희아나 히카리를 비롯해 브릿지에 모인 모두가 '우리는 일을 시켜놓고 자기는 사담이나 나누고 오다니'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그렇게 바라보면 안 돼. 멘탈 케어가 얼마나 중요한 임무인데? 나 신관은 여러분에게 실망했어. 다들 부인 없나? 이봐, 지화.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야 부인이 지금 전장에 투입되어 있는걸요."
브릿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관측팀 팀장, 김지화는 눈에 쓰고 있던 VR 기기를 벗으며 전방 스크린을 가리켰다. 브릿지 전체를 아우르는 스크린에는 캡슐에 누워 대기중인 수많은 이능력자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얼마전 지화와 괌에 허니문을 즐기고 온 유이신이 반듯한 자세로 누워있었다.
"그리고 꼭 멘탈 케어가 아니더라도 신관님은 그냥 전화하러 나가시잖습니까."
"거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내 편 좀 들어주면 어디 덧나나? 쯧, 하여튼 인정머리하고는."
"저는 제 아내 편입니다."
브릿지 내에서 우우우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진지하다기보다는 다소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농담을 나누며 전투를 치를 준비를 마쳤다. 내가 함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다들 긴장이 어느정도 풀렸고, 각자 맡은 위치와 역할에 따라 제 소임을 다할 차례였다.
"신관님."
"아아, 여기는 무궁화 01. 지금부터 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죽어도 되기는 하지만, 죽지마. 지난 번처럼 너희들 멋대로 놀다가 바이오로이드 깨먹으면 내가 유하한테 달달 볶인다."
전장에 투입 대기중인 이들이 하나 둘 피식거리며 웃었다. 뇌파를 통한 접속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테라'에서 죽어도 실제로 죽지는 않겠지만, 가히 죽음의 고통에 걸맞을 정도로 아픈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전장에 나서기를 바랐다.
'이것도 일종의 PTSD지.'
더이상 지구에는 나타나지 않는 괴수들. 테라에서 지구로 넘어오는 차원문은 완전히 막혔고, 이제 지구에서 코어를 수급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이 하늘섬이 유일했다. 즉, 실제 괴수들과 직간접적으로나마 싸울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전부였다.
괴수와의 전쟁은 끝난지 5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전투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자들.
그들 중에서도 정예 중의 정예로서 더이상 대련이 무의미해진 자들이 인류의 평화에 공헌하며 추후 지구에 다가올 잠재적 위협을 제거하는데 힘쓰는 이들.
...자신을 본딴 바이오로이드에 의식을 접속하여 여전히 괴수가 들끓는 이계-테라로 넘어가 괴수 정화 활동을 벌이는 이들.
그 모든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이곳 하늘섬이며, 나는 그들을 지휘하는 수장이자 이라고 불리는 자다.
"현재 시각 오전 10시 22분. 오후였으면 딱 22시 22분이 되는데 유감이구만. 그럼 지금부터 접속을 시작한다. 모두들 셋, 둘, 하나-"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소리쳤다.
"접ㅅ-"
"""창염개진!!!"""
...이것들이?
* * *
[그래서 천지 점령은 성공했냐?]
"당연하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기는 했지만, 역경을 이겨내는게 바로 히어로 아니겠냐."
[히어로 아니었던 녀석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건 또 웃기네.]
홀로그램 속 백발의 여인, 석하랑은 내가 히어로 운운하는 것에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었다. 명백히 나를 조롱하는 눈빛이었고, 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하긴 은퇴하시고 동생들 보느라 바쁜 전직 원탁 나으리께서는 잘 모르겠지. 요즘 애들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흐흐."
[요즘 애들이 어떻게 싸우냐고? 씨발, 1살짜리랑 2살짜리가 서로 광선검 주왕주왕 거리면서 싸우는 거 말리느라 뒤질 것 같다.]
석하랑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영상을 하나 보내니, 그곳에는 금발의 아기들이 손에서 금빛의 마력을 흩뿌리며 서로 칼싸움을 하고 있었다.
"역시 히어로 가문은 조기교육부터 다르네. 외할아버지가 보면 어려서부터 병영 캠프도 보내겠어. 막 10살에 곰 잡고 그러는 거 아니냐?"
[...곰이야 지금도 잡을 수 있지. 에휴, 내 인생. 꽃다운 나이에 연애도 제대로 못해보고 보모로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
석하랑은 나를 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분명 얼음이 아니라 사리일 것이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화제를 돌렸다.
"흠흠. 애 키우는 거 힘드냐?"
[내 애도 아닌데 나한테 그걸 왜 물어봐?]
"그래도 네 동생들 아니냐. 네가 거의 다 먹이고 키우고 재우고 하잖아."
[어디서 섹드립이야. 모유는 내가 안 먹여.]
"......."
[너 씨발 지금 '젖 나올 가슴은 있고'하고 생각한 거지?]
들켰다.
"...우리 하랑이 애 보면서 성격이 많이 거칠어졌네. 러시아에서 지내서 그런가?"
[흐흐흐, 너는 이렇게 안 될 것 같아? 너도 애 생겨봐. 지금 나보다 더 할 걸? 자, 봐봐.]
하랑이 가리킨 뒤에는 서로 닮은 금발의 꼬맹이들이 하랑이 만든 얼음성에서 미끄럼틀을 타며 놀고있었다. 그냥 노는 것이 아니고 '공주를 구하러 온 용사' 소꿉놀이를 하는 것이 참 떡잎부터 기질이 보인다 싶었다. 나는 아이들을 일렬로 세우면 계단이라도 만들어지겠다 싶은 생각에 살짝 떨떠름해지면서도 두려웠다.
"애들이 누구 닮아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활기차네. 저러다 사운드 오브 뮤직 찍겠는 걸."
[말도 마. 내가 진짜 남의 자식만 아니었어도...에휴.]
"큰언니가 완전히 보모 역할을 제대로 하는 걸."
[그러니까. 21세기에 지금 뭐하자는 거야? 아니 뭐 1년에 한 번씩 낳는 것도 아니고, 본체랑 호문클루스랑 두 명씩 번갈아가면서 낳는 건 또 뭔데? 그거 아냐? 지금 여름이랑 겨울이랑 번갈아가면서 한 명씩 낳고 있는 거?]
"......그만큼 하니까 그런 거 아니냐."
섹드립을 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거론할 수밖에 없었다. 인류가 평화를 되찾아 완전히 은퇴한 두 부부는 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하는 건 똑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심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횟수가 많은만큼 아이도 많이 생겨나는 거지. ...내 생각에는 너희 엄마가 콘돔 쓰지 말자고 할 것 같은데."
[내 말이. 야, 너 어떻게 엄마한테 부탁 좀 해볼 수 없어? 조카 보는 것도 보는 거지만, 나도 슬슬 보모 생활을 청산하고 연애도 해보고 그래야 할 것 아니야.]
"오호, 누구 만나는 사람이나 생각나는 사람 있고?"
[너 혹시 그런 말 아니?]
하랑은 아이를 안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남이 하면 불륜이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뚝.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이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물어보려고 했더니, 아이를 키우기는 커녕 위자료를 왕창 물게 만드는 개수작을 부리려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하랑은 바로 문자를 보냈다.
[막 불끈불끈 하지 않아? 해결할 곳이 필요할텐데ㅎㅎㅎㅎㅎㅎ]
"이 년이 진짜 미쳤나."
역시 그 핏줄이 어디 사라지는 건 아닌 듯 했다. 나는 기가 차기도 했지만, 사실대로 말해 하랑이를 격침시켜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 가졌다고 못 하는 것도 아닌데.'
애만 생겼다 하면 호들갑을 떨며 서브 육체로 하는 쪽이 유별난 거다. 나는 문자를 적다가, 예상외의 존재에게 연락을 받았다.
[잠깐 나 좀 봐.]
"...환룡?"
홀로그램 속 상대는 굳은 얼굴의 환룡이었다.
***
"네가 먼저 연락을 하다니 의외인 걸. 무슨 일이야?"
전쟁이 끝난 이후, 환룡은 무기한 수면 상태에 빠져버렸다. 스스로 관을 짜서 결계까지친다음 영면에 잠든 환룡이 스스로 깨어났다는 건 나로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만한 일이었다.
"혹시 무슨 문제 생겼어?"
"문제가 있으니 일어난 거 아니겠어."
나를 보는 환룡의 표정은 복잡했다. 왜 나를 저렇게 보는 걸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환룡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짐작이 갔다.
"혹시 관 주변에 두른 결계에 문제가 생겼어? 다시 만들어줄까?"
"그런 거라면 애초에 나오지도 않았어. 수리하러 나오는 게 더 귀찮아. 차라리 용암이 들어오든 말든 낡은대로 쓰고 말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니라…."
환룡은 진지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
"......."
"■■■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아니. 알고 있을 거야. 네가 모를 리가 없어. 네가 ■■의 힘에 당했다고 하기에는-"
"환룡."
나는 환룡의 말을 끊었다.
"집을 사게 되면 말이야, 나는 후분양제로 사기를 바라. 먼저 거래부터 하고 그 뒤에 입주했더니 집에 하자가 있으면 그렇잖아? 그러니까 꼼꼼하게 알아보는 거지."
"무슨 말을...잠깐만."
환룡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설마…."
"아니, 뭐."
나는 환룡의 어깨를 잡고 살포시 미소지었다.
"......나는 자식을 낳으면 말이야, 딸 이름을 유나로 지을 거야."
"너!!"
"그래. 알아. 거꾸로 물어볼게, 환룡아."
나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환룡의 몸을 지긋이 손으로 눌렀다.
"너는 지금 이게 환상이라고 생각하니?"
****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을 들어서 그럴까. 환룡은 계속 입만 뻐금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다 알아. 아니까 안심해."
"아니...안심할 수가 없잖아. 지금 뭐하는 거야? 5년 후? 미래? 하늘섬? 좀 알아듣게 설명해봐."
"간단히 말해서, 성주가 세계를 개편한 거다. 유나가 없는 세계. 유나만 없는 세계. 유나라는 존재는 지구에서 지워지게 되었고, 모두가 나름 행복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미래라는 거지."
내 단언에 환룡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환룡 또한 유나에게 신세를 졌던 존재로서, 유나가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고 있었다.
"거짓말...너 설마 진짜로 거래를 받아들인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유나를?"
"......."
환룡이 봤던 내 기억 속에는 유나가 환룡에게 육체를 넘겨주었다. 수백년을 함께 했지만 결국 정신이 마모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정확히는 유나가 주인공과의 관계에서 '이정도로 즐겼으면 됐다'고 만족했기에 육체의 주도권을 고스란히 넘겨주고 잠들어버린 것이다.
그런만큼 환룡에게 있어서 유나는 전생의 은인인 동시에 빚을 진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전혀 아니지만, 실제로 그런 가능성이 있기야 하겠지만.
"너...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미친 거 아니야?"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거래를 받아들일 리가 없지."
"그런데 왜!"
"나 안 미쳤다. 아무리 나라도 그런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아."
내 단언에 내 멱살을 잡으려던 환룡의 손이 멈췄다.
"이곳은 우리가 있던 현실이 아니다. 가상현실이나 마찬가지지."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고? 아까는 무슨 말을 한건데?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환룡은 주변에 자신의 마력을 흩뿌리며 자신의 실존을 다시금 자각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현실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아니, 현실 그 자체였다.
"살아있는 것도 맞아. 현실이 아니되, 현실이지."
"빙빙 돌리지 말고 결론만 말해."
"음...잠깐만. 롸는 금방 이해하겠지만, 너한테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거든?"
나는 환룡이 이해하기 쉽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지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이 복잡한 상황을 명쾌하고 명료하게 정리하는데에는 역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존재가 개입했음을 언급하는 게 가장 적절했다. 나는 우선 대화의 매끄러운 흐름을 위해 몇가지 단어를 읊었다.
"아아. 성주. 이유나. 역시 필터링은 안 되네. 지금 이런 대화에 대해서는 OK라 이건가? 서비스도 좋으셔라. 아, 이게 안쪽에서는 필터링 걸리거든. 어...그러니까 이게 말이야."
"결론만!"
"내가 성주의 거래를 받아들였을 때의 상황을 보여주는 거지. 실제로."
"......자세하게."
환룡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손을 집게 모양으로 만들었다. 길이 1cm짜리 정육면체 하나가 들어갈 만큼의 공간을 집은 상태로.
"큐브로 세계를 하나 복사해낸 거야. 현재 모든 지구인의 의식이 성주가 만들어낸 세계에 붙잡혀있는 거지."
"그게 가능해?"
"물론. 너야 또 정신을 육체와 분리시키니까 괴리감을 느껴서 자각한 모양인데...사실 이 세계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딱 두 명 뿐이야."
나는 나와 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가리켰다.
"나랑 신ㄹ...창염만이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다."
2020년, 성주와의 거래를 받아들인 이후부터 2025년까지.
나와 창염은 성주가 큐브로 구현한 '상황' 속에서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부부'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된 모든 이들, 그리고 전세계 모두가 진심으로 행복을 영위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덧 지구 인구는 70억. 5년 사이 발전한 마도공학 기술을 바탕으로 인류는 외계로의 진출에 성공했고, 마음만 먹으면 달이나 화성의 테라포밍도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성주가 복제한 가상의 세계이기는 하나, 이 세계는 실제 시간의 흐름과 똑같이 흘러가는 만큼 현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 세계는 말이야. 일종의 체험판이야. 조금 길고, 긴 엔딩 체험판이지."
유나는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