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479화 (479/1,497)

〈 479화 〉1부 20장 11

"어서오세요, 이곳은 천공의 섬 유하토피아. 모든 것이 고객님을 위한 것으로 마련되어있답니다."

금발의 개망나니, 유하는 모피코트 차림으로 나타나 우쭐대기 시작했다. 누리와 라온을 나를 내려놓자마자 자기들의 쇼핑을 하러갔고, 졸지에 나는 이 막되먹은 하늘섬의 주인과 단둘이 마주하게 되었다.

"저기, 유하야."

"네, 사랑하는 고객님. 뭔가요?"

"너 얼마전에 풍마 걷어찼다고 SNS에 난리더라."

나는 마도기어의 홀로그램을 통해 당시의 영상을 재생했다. '진상고객_참교육하는_회장님_흰스.avi'라는 제목의 영상에는 한 청년의 앞에 선 금발 여인-유하가 무언가 따지듯이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여기 출입 금지에요!

-왜 그러십니까?! 방송 잠깐만 하고 내려가겠습니다! 이곳은 엄연한 서울이잖아요! 세상 어느 법으로 제 하늘섬 출입을 막는 겁니까?!

-이 섬은 내 돈으로 만들고 내 돈으로 하늘에 띄웠어요! 정 찍고 싶으면 당신도 하늘섬 만들어 보시던가! 그리고 법? 똑똑히 들어요! 디스, 이즈, 유하토피아!!

퍼억.

유하는 청년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다. 나름 S급인 풍마가 피할 새도 없이 별빛이 폭발하며 풍마는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이래도 괜찮아? 너 회밍아웃 했는데."

"악성 풍마 지지자들 말고는 아무도 저한테 뭐라하는 사람 없어요. 유성의 회장이라고 근엄하게 다 받아줄 필요도 없고. 오히려 저걸 허가해줬으면 사람들 더 난리가 났을 걸요? 저는 유하토피아 주민들이 불편을 겪는 걸 원치 않아요. 풍마가 누구 찍으려고 들어왔겠어요?"

"......그럼 인정."

유하토피아의 주민 중 한 명이자, 나의 소중한 이. 풍마가 감히 먼 발치에서 그를 찍으려한다면 내가 먼저 풍마의 마도기어를 박살내버릴 것이다.

"그래서 지금 어디있어?"

"그럴 것 같았어요. 따라오시죠. 모처럼이니까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천천히 걸어가면 30분은 느긋하게 걸릴 거예요."

"...인형 부르면 차로 10분이면 날아갈 거리일텐데."

"그런 식으로 따지고 드는 건 안 좋아요, 고객님."

아, 방금 수식어가 빠졌다. 나는 삐친 유하를 달래기 위해 시간을 확인했다. 8시 30분. 출근시간인 9시까지는 아직 30분 남아있는 만큼, 여유롭게 들어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유하야."

나는 라온과 누리가 주차하고 떠난 차를 가리켰다.

"...30분간 드라이브 좀 하고 싶은데, 같이 갈래?"

"어머, 잘 됐네요."

유하는 좋다고 웃으며 차문을 열었다. 조수석의 문을.

"타요."

"예?"

나보고 조수석에 앉으라고? 나는 주변을 살폈지만 유하의 인형이나 운전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운전할 생각으로 드라이브를 제안했건만, 유하는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 했다.

"모처럼 날이 날이니까 좀 달려보려고요."

유하의 주변에서 마력이 별빛으로 반짝이자, 선글라스 아래 유하의 피부가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 *

"F1을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빛처럼 달려나간다는게 무슨 뜻일까. 그건 바로 이런 거지."

운전석에서 금발 머리를 반짝이는 태닝녀는 선글라스를 치켜올리며 엑셀을 밟았다.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주변 환경을 보며 숨이 턱턱 막혔다.

"방금 화성이 지나간 것 같은데."

"착각이다, 신관이여."

"아냐. 나 분명히 봤어. 마도기어 상에도 지금 위치 나오는 걸. ...드라이브 괜히 가자고 했나."

생각해보면 유하 본인이 운전을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유하가 1:1 드라이브 제안을 거부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무슨 꿍꿍이인가 하니, 운전대를 잡은 사람을 바꾸어버렸다.

"그냥 하늘섬 한 바퀴 돌면 그만 아니야. 왜 굳이 우주까지 나와서 돌아다니는 건데."

"신관이여, 이것은 단순한 드라이빙이 아니다. 외계에서 올지도 모르는 적을 경계하기 위한 일종의 순찰이지. 그리고 보게.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달리기에 너무나도 좋은 곳 아닌가?"

카르나는 운전대를 잡고있던 손까지 놓아버렸다. 차는 여전히 우주 공간을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 방향은 카르나가 틀어놓은 핸들 방향으로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다가 운석 같은 거 나오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거지. 브라흐마스트라!!"

카르나는 비상깜빡이 아래에 있는 버튼을 호기롭게 눌렀다. 차의 범퍼 부분이 반짝이더니, 광속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금빛의 레이저-브라흐마스트라가 날아갔다.

파사삭.

빛이 한 번 반짝이더니, 소운석의 잔해가 차를 덮쳤다. 나는 자잘한 진동에 숨이 턱턱 막혔다.

"히카리한테 혼나겠는데."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보호막 쳐둔 건 신관 아닌가?"

"그렇긴 하지. 그래도 이런 험한 곳에 차 몰고 나온 거 걸리면 혼날 듯 한데…."

삐비빅.

아니나다를까. 차의 오디오에서 피곤에 절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차는 어느덧 화성을 크게 돌아 지구를 다시 지나쳐, 금성 궤도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멀리는 안 나가서 다행이네요. 어디 해왕성까지 가는 줄 알았는데.]

"주차하는 시간 생각하면 지구 근처만 돌아야지. 걱정마라. 금방 돌아간다."

[나사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좀 생각해주세요. 다른 분들 생각 좀 해주시고. 자꾸 그렇게 우주 오다니면 사람들 자기도 우주관광 시켜달라고 때를 쓰잖아요. ...아무튼 조심히 돌아오세요.]

예상외로 히카리는 순순히(?) 경고를 끝냈다. 카르나도 시간에 맞게 도착할 수 있도록 차의 방향을 돌렸고, 나는 불안감에 우주 공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괜히 그 놈 나오는 거 아닌가?"

".......그 놈? 누구?"

"음...."

나는 기억을 더듬었지만, 무언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끼이익!!

"우왁?!"

갑자기 카르나가 차를 멈춰세웠다. 나는 손잡이를 꽉 잡고 몸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마력으로 자세를 잡았고, 카르나는 차 앞에 나타난 존재에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끄응...."

"신관님 메이크업할 시간까지 생각하면 3분 남았습니다. 시간 없어요."

검은 베레모를 한 백희아가 우주 공간을 세로로 열고 나타났다.

"드라이브는 끝입니다. 어서 돌아오시길."

"...쳇."

카르나는 아주 천천히 백희아의 아공간을 향해 차를 몰았다.

...나는 여전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딱히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별 일 아니겠지.'

그저 지금 내게 주어진 행복이 증발해버릴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의 발로이리라.

* * *

오전 9시 30분, 연구소 '빛'.

"오늘 뭔가 이상하네요, 신관님. 들어가셔서 쉬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출근한 지 고작 30분 밖에 안 지났는데 무슨 소리야. 지금 조퇴한다고 생각해봐. 쟤가 가만 두겠니?"

히카리는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내 상태에 걱정했으나, 나는 나를 눈으로 흘기며 다음 작전을 계획하고 있는 희아의 눈치를 살펴야했다.

"신관님. 오늘은 꼭 고지를 점령해야합니다. 점령하면...사흘간 휴가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휴가였던 것 같은데."

"고지 점령에 실패하면 휴가도 반납하시고 점령에 박차를 가할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희아는 너무나도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작전의 요지는 우리가 애를 먹고 있는 고지에 대한 점령.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적의 배치가 워낙에 까다로워 공략하는데 제법 애를 먹고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어려울 법한 곳은 아닌데.'

나는 홀로그램을 통해 구현된 고지대의 산세를 살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한 형태였다.

"희아야. 지구랑 대조하면 저기 어디였지?"

"백두산입니다. 천지를 중심으로 수, 지, 화속성 괴수들이 모여있습니다. 천지에는 마력 반응으로 추정 S급 괴수가 있습니다."

"과연. 천지의 괴수라는 건가. 제법 강하겠네. 우리 측 투입 인원은?"

"차원 이동에 따른 너프를 감안했을 때...샤오린과 슈리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마력 깎이는게 그만큼 심해? 굳이 둘을 보내야 할만큼?"

"SS급이 A급까지 너프를 당하는 곳이니까요. 백두산 근처는 유독 그런 기운이 강해요. 정화작업을 하고 간다면 모를까...."

옆에서 조언을 해주던 히카리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혹시?"

정화작업.

테라의 오염된 마력을 태워버리는 작업으로서, 반드시 '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지난 번 정화작업에서 입은 오염을 씻어내기 위해 요양 중이다. 애초에 무리한 작업에 투입할 상황도 아니었다.

"기각. 약화된 대로 투입한다. 여차하면 여럿 투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알겠어요. 그러면 샤오린이랑 슈리 부대를 투입할게요."

히카리가 마도기어를 만지작거리기 무섭게 연구실에 샤오린과 슈리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무릎까지 흘러내리는 긴 회색 머리칼을 가지런히 묶은 샤오린이나 사자갈기같은 적발을 흩날리는 슈리 모두 훈련용 검은 탱크탑과 스패츠를 입고 있었다. 둘 다 개인 훈련을 하고 있었는지 전신이 땀범벅이었다.

[찾으셨습니까.]

[무슨 일인데.]

"샤오린 1픽, 슈리 2픽. 서브로 붙을 애들은 너희가 정해."

거두절미하고 내린 내 지시에 샤오린과 슈리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저희가 이번 전투의 핵심입니까?]

[의외인데. 나는 카르나 투입할 줄 알았더니.]

"카르나 보냈다가는 백두산 화산 폭발 일으킬 것 같아서 말이지. 더군다나 너희 둘 다 지금 심심하잖냐. 잠깐 다녀와."

카르나만큼 싸우기를 좋아하는 샤오린, 그리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슈리에게 '대장'의 역할을 부여한 만큼 충분히 임무를 성공하리라.

[간단히 샤워하고 '접속'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이쪽도. 작전 언제 시작할 건데?]

"10시. 30분안에 준비 끝내. 이쪽도 준비해둘테니."

[뭐? 씨발, 샤워를 고작 30분만 하라고?! 섹스는 30분 넘게 기본으로 하면서 샤워는 왜 30분인데! 싫어! 나 입욕제 깔고 목욕할-]

치직.

슈리의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나는 따로 건드리지 않았고, 희아가 슈리와의 연결을 끊어버린 채 무언가 패널을 두드리고 있었다. 희아는 내 눈길을 느끼자마자 은은하게 웃었다.

"10시까지 오지 않으면 2팀 대장은 바꿔버린다고 했습니다."

"...웃으면서 살벌한 말은."

"아무렴 신관님께 욕을 한 건 용서할 수 없으니까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봐준 겁니다. 그리고 여차하면 5분 대기조로 있는 사람도 하나 있지 않습니까."

"누구?"

"이 몸이다냥!"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녹색머리 고양이귀 메이드는 음료가 가득 담긴 트레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자세를 잡았다.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검지를 찌르는 자세는 어딘가의 챔피언을 연상케하는 모습이었다.

"이미 상황은 다 전해들었다냥! 슈리가 안 나가면 이 몸이 나갈 거다냥. 드디어 청화단 전설의 부대, 스쿼드가 나갈 때가 된 것이다냥!"

"슈리 아마 제 시간 안에 접속할 걸? 그리고 누구 마음대로 떼껄룩이래. 너희들은 늑대야, 멍청아."

"그건 편견이다냥! 태어나기를 늑대로 태어났어도 마음이 고양이라면 고양이인 것을! 그래, 바로 우리가 정령에서 인간이 된 것처럼 말이다냥!"

녹색머리 고양이귀 메이드 미소녀-김펜릴은 당당히 트레이에 있던 자신 몫의 음료를 들어올렸다. 알싸한 민트향이 연구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김펜릴은 히카리에게 카페인이 잔뜩 들어간 걸로 추정되는 에너지 드링크를 건넸다.

"오오, 기계장치의 신이시여! 정령마저 인간으로 만들어버린, 신조차 모독하는 존재시여! 쇤네가 감히 진상하겠나이다."

"고마워요. 마침 살짝 피곤하던 참이었어요."

히카리는 김펜릴에게서 에너지드링크를 건네받으며 홀짝였다. 나와 희아도 각자의 몫을 챙겼다. 희아는 진한 커피를, 그리고 나는 딸기가 듬뿍 들어간 딸기라떼를.

"후후, 인간이란 건 정말 좋구나. 정령 시절에는 몰랐던 제약들도 즐겁게 느껴질 정도인 거다냥."

"호문클루스지만."

"아무렴 인조인간이든 뭐든 부르는게 뭐가 중요하냥. 먹고 자고 싸고 하면서 도구만 사용하면 그게 다 인간인 것을."

한 때는 정령이었던 존재라 그런지 인간에 대한 정의가 어긋난 걸 넘어서 괴팍하기 그지없었다. 인간에 대한 정의가 정령의 입장에서는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김펜릴의 말을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쪽은 안 싸는데."

"...먹은 음식들을 마력으로 전환하는 사양으로 만들어졌으니까요. 그에 비해 김펜릴은...."

"배설도 나름 재미있다냥!"

"......하아. 굳이 그런 불편함을 감내하는 이유가 뭐람...."

희아는 한숨을 내쉬며 툴툴거렸다. 화제가 20대 파릇파릇한 여인들이 남자를 앞에두고 하기에는 상당히 민망하기는 했지만, 화두를 꺼낸 나로서는 부끄러움이 없었다.

나의 여신님은 똥 같은 건 싸지 않는다. 그것이 기존의 인류와 호문클루스 사이의 진정한 차이가 아닐까.

"김펜릴, 왜 굳이 그런 기능을 넣은 거죠? 설마 진짜로 거기에 재미가 들렸다거나...?"

"에이, 아무리 이 몸이라도 거기까지는 안 그런다냥. 내가 그러는 궁극적인 이유는...흐흐."

김펜릴은 사악한 장난을 생각하는 악마마냥 사납게 웃었다. 꼭 마녀들이 데리고 다니는 고양이들이 짓는 표정과 비슷했다.

"우리 대-단하신 전 여왕님이 매일 마시는 루왁 커피를 위해서다냥!"

"......우웁."

희아는 질색을 했고, 히카리는 소리없이 웃었다. 나는 전 여왕을 위해 심심한 애도를 표하며 딸기라떼를 한모금 들이켰다.

'역시 맛있네.'

꼭 누구의 맛이 생각나는 맛이라 더 맛있었다. 이런 맛인 줄 알았으면 예전부터 맛있게 즐겼어야했는데. 지구의 딸기가 멸종하기 전에 더 즐겼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그래도 다른 공급책이 있으니 딱히 문제는 없었다.

"그러면 모두. 마시면서 회의하자. 백두산 어떻게 점령할 건지. 김펜릴 너도 와서 같이 들어. 슈리 늦으면 진짜로 빼버리고 너 투입할 거니까."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냥? 이 몸 지금 알바중인데."

"네 동생 있잖아."

"음...나중에 알면 자기 왜 안데려갔냐고 따지겠지만 나중일이니까!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 거냥?"

나, 희아, 히카리, 그리고 음료를 가져다 주러 왔다가 졸지에 서브 멤버로 투입하게 된 김펜릴. 넷이서 백두산 공략에 관한 최종 점검을 하는 사이 시간은 30분을 훌쩍 넘겼고, 나는 10시 정각이 되는 시점에 둘을 호출했다.

"둘 다 준비 됐어?"

[물론입니다.]

[...씨이.]

샤오린과 슈리 둘 다 다른 연구실의 '접속기'에 앉아있었다. 슈리는 머리칼을 제대로 말리지 못해 물기가 가득했고, 나를 향해 이를 갈고 있었다.

"욕 하지마. 지금 희아가 너 한 번만 욕하면 전선에서 빼버릴 거래."

[......야발!]

"슈리 아웃."

[왜에에에에!!! 이거 욕 아니잖아!!]

"눈빛이 '저 저 저 썅년 내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잊었나요? 내가 누군지."

희아는 슈리를 차갑게 노려보기 시작했고, 슈리는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은하대학교를 졸업한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날뛰는 슈리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옆에서 보듬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게 아쉽군요. 하지만 걱정하지마세요, 신관님. 저희가 잘 보살피겠습니다."

"......그래? 그럼 잘 부탁할게. 상냥하게 대해줘."

살아온 환경이 그러하다보니 입이 걸걸하기는 해도 심성은 나쁜 아이가 아니다. 욕설과 손이 먼저 나가기는 해도 엄연히 히로인 중 한 명인 만큼, 그렇게까지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다.

누군가 한 명, 옆에서 착하게 대해주기만 한다면-

삐비빅!

"이런. 잠시만."

연락이 왔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잽싸게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흠흠. 흠."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도기어의 호출에 응답했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 있어야만 전화하는 사이에요, 우리가?]

"아, 아니. 잠깐만. 그런 얘기가 아니잖냐. 나는 혹시 무슨 급한 일이 생긴 줄 알았지."

[급한 일 있죠.]

나는 홀로그램 속 상대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흔들의자에 앉은 푸른 머리칼의 여인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들고 나를 향해 살포시 웃고 있었다.

['얘'도 아빠를 보고 싶어해서 전화했어요. 급한 일이죠, 당신?]

"...그러게. 세상에서 제일 급한 일이네."

나는 여인에게 다가가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비록 홀로그램이지만, 내 마력은 여인에게 날아가 그 감각을 전해줄 것이다.

"근데 너는 나 안 보고 싶었냐, 청화야."

[얘'도'라고 했잖아요.]

푸른 머리칼의 여인, 청화는 나를 향해 볼을 부풀리며 심통을 부렸다.

[당신이 억지만 안 부렸어도 오늘 아침에 차 몰고 가는 건 나였다고요. 알아요?]

"그건 안 될 말이지."

나는 엄격한 얼굴로 청화의 배를 쓰다듬었다. 살짝 부풀어오른 배의 안에는 홀로그램으로도 한 생명의 태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임산부가 어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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