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8화 〉1부 20장 10
성주의 제안은 간단했다.
이유나를 넘기는 대신 자신은 지구를 떠나겠다.
그리고 성주의 제안은 제법 매력적이었다.
"정말...정말 달콤하네요."
단 하나를 포기하고 모든 행복을 손에 넣는다.
그 하나를 잘라냄으로써 나는 창염과 행복한 미래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유나가 사라지기만 한다면, 언젠가 창염과 둘이서 침대에 누워 '이유나라는 아이가 있었지'하는 순간이 될 때까지 기억을 묻어두기만 한다면 우리는 행복할 것이다.
"......."
유나는 아무 말 없이, 아무 미동도 없이 내 뒤에 선 채 내가 내리는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으나 선택을 내려야했다.
"...정말로 유나를 넘겨주면 지구를 영영 찾아오지 않을 생각인가?"
"물론.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을 찾을 것이다. 지구에 남아있는 그 분의 코어...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신의 힘을 담은 물건이니 어디에 쓰든 좋을 터."
"허나 거절한다!"
일고의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더 길게 지지부진한 이야기를 끌 필요도 없었다.
"거래 할 가치도 없는 제안일 뿐!"
나는 유나의 앞에 서서 코트의 TAT를 꺼내들었다. 마탄은 장전되지 않은 허세였지만, 내 명백한 거절의 의사는 성주에게 분명히 닿았다.
"유감이군. 그럼 서로 상잔을 일으키는 것 밖에는 없는데.... 왜 거절한 거지?"
"반대로 물어볼게. 이유나를 포기해. 그러면 전 인류의 목숨을 넘겨주마."
"ㅍ...창염 님?"
내 말에 성주보다 오히려 유나가 더 당황했다.
나로서는 유나의 자리에 창염이 들어가면 더 마음에 와닿을 것 같았지만, 성주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유나를 넣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성주는 그 잘난 머리를 이용해 금방 내 말뜻을 이해했다.
"...아아, 이것이 '역지사지'인가. 잘 알았다."
성주는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내 비유에 금방 자신의 제안이 가진 비현실성을 이해했다. 평생동안 벌어도 닿지 못할 억만금도, 전세계의 인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면 응당 하나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내게는 창염이요, 성주에게는 이유나-의 몸에 깃들게 할 이계신이리라. 성주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지. 하지만 네게는 유나가 그런 존재가 아니지 않아."
"아냐. 맞아."
성주는 제법 아픈 부분을 찔렀지만, 나는 당당했다. 창염만큼은 아니더라도 유나는 내게 있어서 정말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유나 덕분에 히드라의 싱크로 상대를 찾을 수 있었어.'
비단 원작의 이유나를 넘어서, 유나는 현실이든 기억이든 미련이든 나와 창염이 안정적으로 이어질 수 있게 만들어 줄 장본인이기도 했다. 나는 한 손으로 유나를 잡아당기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내가 유나를 썩 마음에 들어하거든."
"...호오."
성주의 표정이 일순간 변했다.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듯 하면서도 재미있다는, 나를 조롱하는 눈빛이었다.
"나의 호적수가 나의 며느리가 되는 것인가? 아니, 사위? 어느쪽이든 애매하군. 뭐 성별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나의 피조물에 그 대단하신 창염 님께서 사랑을 느끼시게 될 줄은 몰랐는 걸."
"사랑은 사랑이지."
연인간의 사랑은 아닐지 몰라도, 나는 유나를 버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유나 또한 성주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보였다. 유나는 스태프를 꽉 붙잡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나는 성주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유나에게 슬쩍 물었다.
"...너 아까 했던 말이 이 상황을 얘기한 거야?"
"네. 죄송해요, 시험하는 듯한 말을 해서."
역시 신의 바디였기 때문일까. 유나는 미래를 읽은 듯 했다.
"혹시나 내가 거래에 응했으면 어쩌려고 했어?"
"......그게 운명이라면."
유나는 보는 사람이 답답해질 정도로 착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이 불쌍한 인공 여신이 자아가 소멸하고 육체는 성주의 아래에 깔려 미쳐버리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성주----!!"
그리고 그런 생각은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신들도 마찬가지였다.
"브라흐마스트라---!!"
콰과과광!!
섬광이 성주가 흩뿌린 보랏빛 안개 주변에 휘날렸다. 별빛과도 같은 가루를 흩뿌리는 금색 화살은 뱀처럼 날아와 성주의 로브 안쪽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흥."
성주는 별빛 화살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1차 폭격 이후 마력이 터져나가며 2차 폭발을 일으키려는 브라흐마스트라는 성주의 마력에 감싸여 찌그러지듯 소멸했다. 싱크로한 카르나의 화살을 손으로 파훼한 것이다.
성주는 강했다. 원작의 그 약한 SS급 수준과는 확연히 다른 강함이었다. 원작보다 더 이른 시간에 내려온 그가 원작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성주의 육체.
"...무신의 육체."
로브 아래의 성주는 인간의 모습을, 무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과거 내가 환룡이 무신의 유해에 들어가는 걸 한사코 막아세우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성주는 무슨 수를 썼는지 무신의 육체에 깃들어있었다.
"그래, 이 몸 또한 신이지."
성주는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사납게 웃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SSS급에 오른 자의 힘. 그리고 내게 상처를 입힌 자의 힘. ...내 목덜미에는 그의 잇자국이, 침이, DNA가 남아있었다. 물론 완벽한 복제는 할 수 없었고 0.1% 정도가 모자라지만,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구나. 너희도 온전한 신은 아니야."
무신의 복제품에 들어가서 그 눈썰미도 닮은 것일까, 성주는 자신을 에워싸는 다른 정령들을 눈으로 훑으며 피식거렸다.
"인간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반인반령, 인간에 동화되어 짐승이 된 자, 나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나의 피조물에 들어간 자, 존재의 소멸을 앞에두고 자비로 살아남은 자, 이미 심신이 피폐해진 자, 그리고...겁쟁이. 모두가 다 똑같구나. 창염, 너는 저들에게서 나의 주박을 억지로 벗겨내려 한 모양이나 아쉽도다. 저들은 모두 완전무결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어."
".......젠장."
절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성주의 말에 나는 제대로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성주는 나를 향해 혀를 차며 두 팔을 벌렸다.
"본래의 격을 되찾고 싶은가?! 감히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 분과 같은 자리에 있고 싶은가?! 그렇다면 깨달아야 했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필요에 의한 사랑 따위로 흉내를 내봤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더냐!"
성주의 성토에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대부분 필요에 의해 싱크로를 했지, 진심으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여 자연적으로 싱크로가 이루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완전무결의 단계-100에 이르기 까지는 조금 시간이 더 필요했다.
단지 합의점을 도출하여 이루어낸 싱크로. 성주는 굳은 정령들을 비웃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흐하하! 다들 당혹스러운 눈빛이구나! 그렇다, 너희들이 가진 진정한 사랑이 누구를 향하는 지 뻔히 보이건만, 눈 가리고 아웅해봤자 유분수지!"
"......."
모두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성주가 내가 미리 언급한 '외형'이 아닌 것에 놀랐고, 성주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사나운 마력과 기세에 당황했다. 그리고 나는 그 시선에서 성주의 말이 생각이 나 당혹스러웠다.
'씨발, 나 새끼 기억없다고 더럽게 꼬리치고 다녔네.'
...나는 지금에서야 미련을 잘라버릴 수 있었지만, 미련이 가득했던 내가 저지른 과거의 업보는 더이상 되돌릴 수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는 정령들, 그리고 여인들과 이어온 관계는 역설적으로 성주와의 전투에서 불리한 제약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못 이기는 건 아니야.'
최초의 원탁이 성주와 싸웠던 12:1. 이제 그게 반대가 되었을 뿐이다.
어차피 성주가 낙하하는 방주에서 뛰어내린 순간부터, 나는 원래 계획이 제대로 어긋났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내가 당황해서는 안된다. 내가 당황하기 시작하면 일을 그르치는 것을 넘어, 성주에게 승기를 넘겨주게 될 것이다.
"...다들, 혼란스러워하지 마요. 우리는 이길 수 있으니까."
"그래, 너희는 이길 수 있겠지. 하지만 나도 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정령들을 다독이려하기가 무섭게, 성주는 나를 향해 정면으로 바라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성주의 눈에는 이미 보라색 마력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런-"
"아디오스, 아 미고!!"
성주는 눈에서 보라색 레이저 빔을 쏨과 동시에,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은 나로서는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싸아아---
의식이 날아감과 동시에, 내 시야는 검게 물들었다.
* * *
"신관님, 지금 뭐함?"
"어?"
나는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익숙한 사무실의 전경과 진한 커피향이 가득한 공간 속에서, 나는 나를 깨워주는 여인의 편안한 목소리에 다시 잠에 들 뻔 했다.
"이 시간에 나가야 한다고 보채던 사람은 어디로가고...흠흠. 저기요. 아저씨? 오빠? 신관님?"
"너...누구니?"
내 눈앞에는 고등학교 일진 여고생 같은 외모의 여인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인 앳된 여인은 내 물음에 중지를 들어올렸다.
"누구긴 누리지."
"김누리?"
"응. 장난함?"
말투가 걸걸하고 급식체인 걸로 봐서는 누리가 분명했다. 하지만 누리라고 생각하니 뭔가 이상했다. 누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여인처럼 167cm에 꽉찬 C컵 정도 되는 나이스바디가 아니라 아동복을 입어야 할 사이즈의....
"...오빠 뒤질래?"
"아니."
"크흠흠. 그러면 빨리 나오셈. 약혼한 이후부터 아주 정신을 놓고 다니네. 밖에 차 대기시켜 놓을게."
누리는 종종걸음으로 내려갔다. 진한 커피향이 사무실에 맴돌았고, 나는 머리가 띵해져서 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컵을 들어올렸다.
"...도대체 뭐지?"
나의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는 푸른 불꽃 무늬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 * *
"타시죠, 신관님."
"어...라온?"
"예. 라온입니다. 누리가 아까 말한게 사실이군요. 오늘 뭔가 이상하다고 하더니."
정장 차림의 라온은 담담한 얼굴로 차문을 열었다. 승용차 조수석의 뒤는 비어있었고, 누리는 이미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타시죠."
"......너 머리 원래 길었니?"
"길었죠. 정확히는 길렀습니다. 더이상 싸울 일도 없으니까요."
라온은 날개뼈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쑥쓰러워했다. 기억 속 라온은 언제나 단발이었다. '전투에 머리채라도 잡히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칼단발을 고집하던 라온이 긴머리를 하고 있으니 상당히 생경했다.
"흠흠, 신관님. 제 긴머리는 어울립니까?"
"......단발 때도 예쁘기는 했는데, 지금은 더 예쁘네. 여성미가 흐르는 것 같아."
"그 말은 예전에는 여성적이지 못했다는 말이군요."
"......말투도 그렇고, 아무래도 그렇기는 하지?"
라온은 볼을 부풀렸다가 피식 웃었다.
"하긴 그렇네요. 그러면 예전처럼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니, 지금이 좋아."
풍속성 S급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던 만큼 라온이 미형인 건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단발에 군인 말투를 고수하던 시절은 여성미보다는 보이쉬의 매력이 더 짙었다.
'원판이 미형이니 뭘 해도 예쁘기는 하네.'
바지를 고수하는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몸의 선이 다 드러나는 정장바지는 거의 스키니에 가까웠다. 나는 라온의 몸을 훑던 시선을 차로 돌리고 잽싸게 자리에 앉았다.
"...훗."
라온은 내가 자신의 몸을 훑었다는 것에 자랑스러워하며 운전석에 앉았다. 안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누리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쏘아봤다.
"언니. 오늘 뭔가 이상하지 않음?"
"그러게요. 저러다가 눈동자 찔리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누리, 미리 연락해두세요. 오늘 신관님은 응큼하다고."
"......선글라스라도 껴야하나."
"어차피 마력으로 다 느껴지는데 소용이 있나? 흐흐, 그래도 오랜만에 옛날 느낌나고 좋네. 신관님, 발기했어?"
"...헐."
대놓고 저지르는 누리의 섹드립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다행히 발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목까지 열이 올라서 뭐라 말을 해야할 지 어이가 없었다.
"누리, 너무 그러지 마세요. 신관님 곤란해하지 않습니까."
"그러길래 남의 몸을 그렇게 쳐다보면 됨? 어머,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시선강간? 꺄악, 신관님이 나 범하려 든다! 웰컴!"
"무슨 웰컴이야...."
노골적인 누리의 말에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의기양양한 누리에게 한 방 먹여주고자 나는 큰 맘을 먹고 반격했다.
"그리고 이거 주인있거든?"
"와, 짜증. 이런 식으로 받아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라온 언니, 어떻게하지? 가서 들이박을까?"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만, 오늘 아침에도 당장 지고 왔지 않습니까. 포기하세요."
"칫."
"......그건 다행이네."
십년감수했다. 아마도 누리가 이겼다면 누리는 나를 아공간으로 납치하여 그렇고 그런 짓을 벌였으리라.
"에이, 내가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는 안 하지."
"정말?"
"당근아님? 내가 그래도 지금까지 인연이 있는데, 우리 라온 언니까지는 오케이지."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저도 이기면 누리랑 함께 하도록 하죠."
둘은 한쪽 손을 하이파이브하며 의기투합했다. 무엇을 함께하는지는 불보듯 뻔했고, 나는 둘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트에 몸을 눕혔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강 선착장?"
차는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한강 강변에 들어왔고, 라온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하늘길. 열어주시길 바랍니다."
[알았다냥.]
"방금 그 목소리-"
우우웅---!!
내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차는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하늘에 떠있는 거대한 섬이었다.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