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476화 (476/1,497)

〈 476화 〉1부 20장 8

명왕성의 낙하.

세계는 이전과 달리 아주 제대로 혼란에 빠졌고, 사람들은 완벽하게 패닉에 빠졌다.

히카리가 세계에 공개한 '명왕성 낙하 카운트' 프로그램에 따라, 사람들은 어쩌면 멸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저마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남은 돈을 흥청망청 써버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영웅의 등장을 기도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어차피 망할 인생이라며 범죄를 저지르거나 괴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인류멸망의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다.

"슬슬 보이기 시작하네요."

푸르고 맑은 하늘에는 찌그러진 소행성이 달처럼 걸려있었다. 멀리서 보면 500원짜리 동전으로도 가려질만한 크기였지만, 방주가 그 크기를 확장하면 거의 호주 대륙의 크기에 육박할 것이다.

운석 충돌.

인류 멸망 시나리오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이나, 지금 우리의 전력으로는 운석이 아니라 달이-아니 행성이 날아와도 막을 수 있다.

"지구같은 암석형 행성은 유나가 들어서 옮기면 되고, 가스형 행성은 김펜릴이 바람 불어서 옮기면 되고.... 운석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되요. 여차하면 저나 카르나가 아예 파괴시켜버리면 그만이니까."

상시 싱크로한 신이 여섯이나 되는데 설마 그 정도도 불가능하겠는가. 당장 서로 싸우기만 해도 지구가 파괴되기 때문에 전력으로 싸우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한데, 행성이 날아오는 것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진정한 문제는 셋."

나는 마도기어를 통해 내가 정리한 정보를 보냈다. 예전부터 정리해오던 정보들을 되찾은 기억을 바탕으로 '현재'에 맞게 수정한 적들의 데이터였다.

"먼저 테라에서 넘어오는 괴물들. 일반 괴수들이랑 별반 다를 거 없고, 아지다하카 게이트랑 똑같이 마룡들이 넘어올 거예요. 일반 괴수들도 넘어올 거고. 이건 평소랑 다를게 없으니까 패스."

아지다하카 게이트 이상으로 엄청난 괴수들이 쏟아지겠지만 차라리 이건 이-지 모드였다.

"그리고 성주의 부하들이 오염된 테라의 마력을 뿌리고 다닐 거예요. 얘기했죠? 테라사이트랑 테라리스트. 괴수든 인간이든 마력을 가진 존재에 달라붙어서, 마력을 오염시킨 다음 폭주하는 괴물로 만드는 거예요."

나는 테라사이트와 테라리스트를 만들어내는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기생체-'날틀'이라고 부르던 놈들의 데이터를 홀로그램과 함께 보냈다.

"징그럽게 생겼죠? 맞아요. 개체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평균적으로 사자 정도 되겠네요. 평범한 인간은 찍! 그렇게 죽을 것 같아요."

설정상으로는 박쥐 날개에 하반신은 벌, 상반신은 파충류라고 불리우던 놈들은 마룡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흉측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네? 모기 와이번이요? ...흐흐, 비슷하기는 하네요. 하지만 입이 아니라 꼬리의 독침을 조심하세요. 그걸로 마력을 오염시키니까. 자체적인 전력은 약해요. 속도는 A~S급인데, 실제 힘은 C급? 조심하세요."

날틀은 속도도 덩치도 빠르지만 타이밍만 잘 잡으면 B급 히어로도 잡아낼 수 있기는 한 적이었다. 오염당하지 않고 확실하게 잡으려면 S급은 되어야 하는게 맹점이었지만.

"그리고 마지막, 성주. ...이건 오프 더 레코드."

나는 전화 상대가 설정을 조정하는 동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금 낙하하고 있는 명왕성도 사실 빈 껍질이에요. 핵심 시설은 지금 달에 다 옮겨놓았을 테니까. 달의 뒷면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죠? 달에는 토끼가 사는게 아니라, 성주의 별장이 있어요. ...농담이고, 성주가 달의 뒷면에 베이스 캠프를 차렸다 이 말씀."

창염의 기억에 따르면 테라를 점령할 때도 마찬가지의 수법을 사용했다고 했다.

방주라는 소행성을 행성에 들이받게 하여 최대한 많은 생명을 죽여버린 뒤, 행성을 도는 위성에 침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 뒤에 이전에 점령한 세계와의 차원문을 연결하여, 이전 세계의 주민들이 다음 행성을 멸망시키도록 상잔을 일으키는 것.

그게 성주가 행성을 먹어치우는 기본 전법이었다.

"그러니까 명왕성의 잔재는 제가 치울게요. 성주가 베이스 캠프는 달의 뒷면에 차려놓았지만, 성주가 거기에 숨어있을 놈은 아니거든요. 혹시 위성으로 보이나요? 아...아직 렌즈가 안 좋아서 잘 안보이는 구나. 명왕성 뒷편에 혹시 노란 로브 입은 괴물 안 보이나요? 그게 성주인데."

성주는 우선 혼자서 내려오고 있을 것이다. 운석 충돌 이후흔들리는 마력을 이용해 차원문을 무수히 열어제낄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운석 어택부터 막아야했다.

"러시아 쪽은 아는 사람이 있고...인도 쪽도 수배를 해놨죠. 당신은 미국에 얘기를 해줘요. 핵미사일 몇백 발을 날려봐야 지구 방사능 수치만 늘리게 될 거라고. 명왕성 낙하하는 곳 아래에 마력 스캔해보라고 하세요. 거기 지금 SS급 보호막이 펼쳐져 있을테니까."

원작에서 끝까지 살려두거나 미리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명왕성을 향해 핵을 펑펑 쏴댈 핵무새들은 모두 처리했다.

미국은 내가 가지 않아서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미국에 입김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관음증 변태가 우리 편이다.

"...아, 한 발 벌써 쐈어요? 그럼 잘 됐네요. 직접 보라고 하세요."

콰과과광----!!

대기권 너머로 날아간 핵미사일 하나가 명왕성에 직격했다. 핵폭발은 보호막을 휩쓸었지만, 핵폭발은 방주의 보호막에 고스란히 먹혔다.

"미안해요. 성주가 제 기술도 훔쳐가서 말이에요."

창염의 베일. 방사능 폭발도 흡수하던 대열대폭 절대방어의 기술이 방주의 보호막에 녹아들어가있다. 그 뿐만 아니라 루살카의 얼음 방벽, 카르나의 난반사 플레이트 등 일곱 간부들의 방어기술이 집약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괜히 아까운 세금 낭비하지 말라고 해요. 네? 그럼 저 명왕성은 어떻게 막냐고요? 명왕성보다 더 크게 마력으로 감싸버리면 끝이잖아요."

원작에서는 유나가 가장 마음에 맞는 정령과 싱크로를 하며 마력으로 명왕성을 밀어내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어디보자...내가 그냥 창염개진으로 다 소멸시켜도 되고, 석하랑이 태평양 한 가운데로 안착시켜도 되고, 김펜릴이 부유성, 유나가 지저에 수납, 카르나는 브라흐마스트라, 앙그는 아공간에 수납, 환룡은...특별히 방법 없네요."

당장 떠오르는 방법만 하더라도 여섯 개나 된다. 환룡을 빼고 물리력을 가진 여섯 속성마다 대처 방법이 하나씩 존재하는 만큼, 무슨 방법을 쓰든 일단 명왕성 낙하는 막을 수 있다.

"그러니까 딱 하나 문제는 성주 본인이에요. ...제가 셀프 싱크로하지 않으면 성주에게 세뇌당할 수 있다 그 말씀."

나는 히카리가 나를 해부한 끝에 발견해낸 코어의 구조에 대한 데이터까지 넘겨버렸다.

외부의 E급에 해당하는 층부터 SS+까지 이르는 층을 넘어, 오염된 테라의 마력이 마법진처럼 그려진 껍질이 나타났다. 이계신의 문장까지 박혀있는 마력의 껍질은 성주가 세뇌빔을 날리면 바로 폭주하게 되어있다.

지금은 껍질의 '안'에서 마력을 터뜨릴 수 있도록 구멍을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껍질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다.

"오프 더 레코드가 길었네요. 아, 뭐 당신이라면 중간부터 알아서 적절히 편집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알아야 안심할 수 있는 것도 분명히 있을테니까. 나중에 제 코어 해부도를 보고 마도공학의 발전사에 사료로 남지 않겠어요? 뭐...마력으로 신체를 유지하는 정령으로서는 MRI에 CT가 전부 까발려진 셈이라 좀 그렇긴 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설마 코어 단면도 보고 꼴린다고 하는 미친 놈이 있겠...있기는 한데 뭐 사소한 건 넘어갑시다."

짧은 시간 안에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자꾸 잡설이 길어진다. 하지만 나는 중구난방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아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 이야기를 그칠 수가 없었다.

설령 내가 죽게 되더라도.

설령 내가 다시 20세기의 마지막 순간으로 되돌아가게 되더라도.

내가 소멸함으로써 이 세계에 확정적으로 살아남게 될 창염이 조금 더 편하고 안락하고 윤택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 많이 남겨야했다.

'잘 전해지고 있나 모르겠네.'

나는 불안감에 마도기어의 연결을 조정해 '스튜디오'와의 연결을 잠시 끊었다.

"아아. 잘 편집되어서 나가고 있나요, 가을? 당신 대본 보면서 연기하는 건 잘 하잖아요."

[갑자기 끼어들지 마. ...실수할 뻔 했잖아!]

스크린에 회색 눈동자의 청화-로 변신한 가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장님, 갑자기 그러시면 지금 말씀하신 내용도 편집해서 방송합니다?]

[야, 김지화. 너 대본 삑사리 내기만 해봐. 지금 내 연기 절정인 거 안 보여?]

마냥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뭐라도 하겠다고 나선 가을은 이렇게, 청화단과 함께 나와 마지막 대 지구 사기극을 펼치기 위한 배우로 자신의 이능을 마음껏 펼쳤다. 차마 연기 재능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미안해요. ...그럼 다시 시작합니다. 아아, 그러니까 인류 여러분. 부디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남아주세요."

설마 내가 다시 이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안심하세요. 히어로들은 여러분을 지켜드릴 겁니다."

나는 빌런이니까, 성주와 이계신 뚝배기만 깨고 바로 침대에 누울 것이다.

"지구는 안전합니다."

귀찮은 일은 모두 히어로들에게 맡기고, 창염과 실체화 함으로써 하와이에 신혼여행을 가리라.

* * *

[전 세계의 여러분께 알립니다. 지구는 현재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전세계에 혼란이 가득한 가운데,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가 전세계에 울려퍼졌다. 지하 방공호에 들어간 이들에게는 라디오 전파로, TV로 뉴스를 시청하고 있던 이들에게는 브라운관으로, 스마트 워치나 마도기어를 사용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스크린과 홀로그램으로 전해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청화.

[많은 분들이 불안해하실 겁니다. 현재 명왕성은 지구를 향해 낙하 중이며, 소행성이 충돌하게 되면 지구는 파괴될 게 분명합니다. 전세계의 30%가 즉사할 것이며,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파괴된 지구에서 더이상 살 수 없게 되겠죠.]

청화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런 청화의 얼굴에는 비관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신만만한 얼굴이었고, 공포로 가득찬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희망이라는 작은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저희'는 이번 사태에 대하여 미리 준비하고 또 계획해왔습니다. 명왕성은 결코 지구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약속드립니다.]

청화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새끼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불안해하는 인류에게 지구를 지키겠다고 약속을 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쉬운 제스쳐였다.

[히어로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저희를 믿으십시오. 그 어떤 재해와 멸망이 다가와도 지구를 망가뜨릴 수는 없을 것 입니다.]

안도감 가득한 청화의 미소에 사람들은 조금씩 청화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던 소요는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청화는 회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지구는 안전합니다. 저희가 안전하게 만들겠습니다. 하지만 정 불안하다면 이렇게 외쳐주시길 바랍니다.]

청화는 천장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며 두 팔을 하늘 높이 벌렸다.

[도와줘요, 히어로! 히어로들이 여러분을 지켜드릴 겁니다. 믿으십시오.]

창염개진을 외치려던 이들이 모두 어영부영 자리에 앉았고, 청화는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선언을 마무리했다.

[창염개진. ...여기서부터는 제 개인적인 부탁입니다만.]

청화는, 진심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죽지 말아주세요. 죽으면 엄청 아플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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