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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75화 (475/1,497)

〈 475화 〉1부 20장 7

삐이이이------

비프음이 울리며, 캡슐의 문이 열렸다. 내 전신을 감싸는 푸른 배양액은 온천처럼 여전히 따뜻했지만, 더이상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끝났어요.]

배양액 속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마도기어의 홀로그램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연구실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고, 나는 배양액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로브를 걸쳤다.

"어때요?"

"역시 안 될 것 같아요. 외부에서 건드릴 수 없도록 되어 있어요. ...단장님이 직접 해결하셔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히카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꼈다. 아마도 자괴감의 근간에는 성주에게 기술적으로 밀렸다는 열패감이 깔려있을지도 모른다.

"히카리, 전혀 미안해 할 것 없어요."

나는 히카리의 오빠, 하야테가 자주 했듯-그리고 내가 백청화로서 했던 것처럼 두 팔을 벌렸다. 히카리는 바로 내게 달려와 끌어안았다.

"성주는 외계에서 살면서 수 천...아니 그 이상의 세월을 살아온 존재예요. 히카리는 아직 20도 안 됐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히카리가 지금까지 해준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감사하고 있어요."

자기 능력에 대한 확고한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히카리에게 어른과 아이로 비교하는 것은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도 좋겠지만, 살아온 세월의 차이는 무시하지 못한다.

"당신과 성주의 능력은 대동소이해요. 단지 당신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연구하는 시간동안, 성주는 미리 연구했던 걸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를 하는 거죠. 출발선이 같았다면 아마 당신이 압도적으로 이겼을 거예요."

"제가 조금만 더 잠을 줄여서 연구했더라면...."

"아니, 하루에 2,3 시간 자면서 연구하고 날밤까는 건 예사면서 무슨."

나는 히카리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왜 앙그가 상성상 더 잘 맞는 누리가 아니라 백희아를 선택했겠어요? 자라나는 새싹에게 무거운 짐을 맡기기 미안해서 그런 거 아녜요. 물론 저도 당신에게 과한 임무를 요구하고 있지만...."

"아뇨! 전혀 과하지 않아요! 단장님 덕분에 살면서 제일 재미있었던 걸요! 그리고 당장 오늘 했던 그것만 하더라도-"

"쉿."

나는 히카리의 입술을 붙잡았다.

"최종병기는 아무도 모르게 써먹어야 재미있겠죠? 막 아군이 '이제 가망이 없어'하는 순간, BGM이 깔리면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거예요. 알겠죠?"

"......네!"

히카리는 다행히 우울함을 떨쳐냈다. 작아서 그런가, 히카리는 어린 아이처럼 웃을 때가 행복해보여서 좋았다. 덕분에 나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보험, 잘 부탁드릴게요."

"물론이에요. 믿고 맡겨주세요!"

천군만마를 손에 넣은 기분이었다.

* * *

오랜만에 다들 한 자리에 모였다. 나는 회의실이 아닌 나의 펜트 하우스에 직접 간부들을 불러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회의를 시작했다.

"다른 곳은 히어로들에게 맡겨요. 여러분들은 서울만 지키면 됩니다."

"그...다른 곳에도 지원을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등대가 가장 먼저 반론을 펼쳤다.

"서울에는 단장님이 계시지 않더라도 전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몇 달간 청화단의 전력은 상당히 늘어났고, 또 저희 간부진도 강해졌습니다."

"테라사이트든 테라리스트든, 최소 B급 이상이 될 거예요. 최악의 경우에는 죄다 A급, 고등급 개체는 S급이 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물론입니다. 다른 지역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그럼 편한대로 하세요."

서울을 중심으로 과연 얼마나 많은 지역을 지킬 수 있을 지는 의문이 들었지만, 본인들이 저렇게 열의를 보이니 막을 방법도 이유도 없었다.

지난 몇 달간 서울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도 그 수가 고작 백 만이 채 되지 않으니, 어쩌면 서울 청화단의 전력을 따지고 보면 신서울까지 지키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정령들은 여의도에서 대기하세요. 지난 번 아지다하카 게이트 때 처럼, 여차하면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지원을 나가는 겁니다. 각자 구역은 잘 알고 있죠?"

정령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방어지역'을 살폈다. 예전 다크 레기온의 간부들이 서로 점령하려고 했던 지역들이 이제는 각자 지켜야 할 구역이 되었다.

"석하랑, 아메리카 전역을 부탁해요."

"얼마든지."

유사시를 대비하여 석하랑은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아야했다. 과거 루살카가 알래스카를 시작으로 러시아 일대를 일주일 동안 지배했던 것 이상으로, 석하랑은 그 영토에서 내가 점령하기로 예정되어있던 아메리카까지 전부 도맡았다.

"할 수 있죠?"

"당연히 할 수 있지. 아니 해야지."

사실상 지구 전체의 1/4 정도를 혼자 도맡은 셈이었지만, 석하랑에게는 그만큼의 힘이 있었다. 어차피 석하랑은 태평양으로 가야했다.

"혹시나 제 공격 유폭되면 태평양 물 끌어다가 지구 지켜줘요. 비어버리는게 있으면 당신 마력으로 채우면 되니까."

"알긋다."

"고마워요. 그러면 지금부터...모두 일어날게요."

성주가 오기까지 이제 남은 시간은 12시간. 히카리와 '벼락치기'를 준비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준수하게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나, 홀로그램 훈련 프로그램 혹시 어떻게 됐어요?"

"전부다 S랭크 찍었어요. 싱크로하지 않고 솔로플레이로."

"그러면 이제...다함께 SS랭크 레이드 찍어봅시다. 직접 느껴봐야 알 거예요."

나는 히카리로부터 받아온 훈련 프로그램을 동료들의 마도기어에 업데이트 시켰다. 이제 조종석같은 시뮬레이터 기기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즉석에서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게 된 만큼, 당장 이 자리에서 '대 성주전'을 연습할 수 있었다.

"딱 한 시간. 딱 한 시간만 다들 자유롭게 성주랑 싸워봐요."

성주의 지정 레벨은 97.

98,99는 커녕 이미 싱크로를 통해 100에 이른 이들이 수두룩했지만, 과연 그들이 성주를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저는 그러면 한 시간 바람 좀 쐬고 올 게요."

나는 옥상으로 자리를 옮겼고, 동료들은 성주와의 전투를 벼락치기로 나마 연습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성주를 이기지 못하겠지만.

* * *

"넌 애들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런 식으로 세팅한 거지?"

"아닌데요? 진짜 이거 말고는 저거 벗길 방법이 없어요."

나는 덕배의 추궁에 사실대로 말했다. 애초에 내가 성주와의 전투라는, 이 세계에서의 사실상 최후의 전투에서 장난질을 칠 이유는 없었다.

[아아악! 얼었는데도 왜 다시 얼음 깨고 나오는 건데?!]

[브라흐마스트라! 브라흐마스트라! 브라흐마스트라아아아!!]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미 포기할 사람들은 진작에 포기하고 빠져나왔고, 석하랑이나 카르나, 샤오린같이 고집이 센 이들은 여전히 노란 로브를 입은 성주에게 데미지를 넣기 위한 방법을 찾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히카리에 의해 완벽하게 구현된 대 성주전. 그 누구도 창염의 힘 없이 이계신의 로브를 벗길 방법이 없었다.

"그럼 질문. 이승형 안에 있는 건 안 되냐?"

"그걸로 가능하면 제가 당장 이승형한테 절이라도 해서 성주랑 싸우라고 보냈죠."

"그렇긴 하지. 이승형한테 숭고한 희생을 요구하고, 설령 죽더라도 사도로 되살려주겠다고 약속할테니까."

"당신은 참 나보다도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네요. 그거 가능만 했으면 저 분명히 시도했을 거예요."

상당히 솔깃했다. 이승형의 심장에 있는 나의 마력을 이용해 성주에게 공격을 날린다? 내 마력이자 창염이 깃들어 있으니 효과가 있을 법도 했지만, 이승형은 상대적으로 '격'이 낮았다.

"근데 이승형이 그만큼 능력이 안 되네요. 그 로브가 병아리같은 원색 형광 로브라서 그렇지, 엄연히 신이 쓰던 물건이에요. 적어도 동격의 수준이 아니면 딜을 넣기 힘들다 이 말씀."

SSS급 이승형에게 부활을 약속하고 성주의 옷만 벗기게 해달라고 요청한다면, 굳이 내가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이승형은 SSS급은 커녕 SS에 들어올까말까 한 어중간한 위치에 놓여있다. 고로 현재 화속성 SSS급이 가능한 이는 싱크로를 한 나밖에 없다.

"그러니까 어찌됐든 간에 제가 나서야 한다는 거죠."

"그러냐. 실패하면 나도 천가을도 죽겠군."

"자꾸 부담주지 말래요? 나 혼자만 뒤지는 거면 괜찮은데 당신들이 고집 부리니까 괜히 양 어깨가 무겁잖아요."

"응? 천가을은 그렇다치고, 나까지 부담이 되냐?"

덕배는 진심으로 놀랐다는 얼굴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왕 하루밖에 남지 않은 마지막 순간인 만큼, 나는 쑥쓰럽기는 했지만 사실대로 얘기하기로 했다.

"뭐...이번에는 처음으로 영입해봤으니까요."

"...? 그전에는 나 청화단 아니었어? 괴인도 아니었고?"

"이번 생에 처음뵙겠습니다만."

"그러냐. ...아오, 그러면 나 여태까지 너랑 안 엮이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었다는 거잖아."

덕배는 이를 갈며 성난 얼굴로 나를 위협했다. 내 변덕 때문에 덕배는 되살아나기는 했지만, 아무렴 청화단의 화염 거인 인생이 그가 원래 살았을 인생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제가 누차 얘기하잖아요. 당신 거기 있어봤자 인천 부두에 진출한 중국 쪽 괴인 삼합회에 먹혀서 쪼다나 하고 있었을 걸요? 쎼쎼하면서 인신매매하고."

"......."

덕배는 침묵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람마다 흑역사는 다들 가지고 있지만, 덕배의 흑역사는 생각보다 더 깊고 어두웠다.

"뭐...그런 쪽보다는 확실히 너 삽질하는 거 보는게 재미있기는 하네."

"푸흐흐. 다음에도 어떻게 기회가 되면 보여드릴까요?"

"다음? 실패하고 리셋한다 뭐 그런 얘기는 아니지? 집어치워라. 무조건 성공해. 행여나 실패해서 다시 시작을 하더라도, 나는 좀 내버려둬라. 괴인 만들지 마."

"하지 말라고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게 사람 마음인데."

"......씁."

덕배는 내게 쌍욕을 내뱉으려던 걸 참았다. 나는 이 신선한 전직 빌런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정말, 여러모로.

"어떻게 지금까지 옆에서 삽질하는 거 보면서 재미있었어요?"

"갑자기 왜 그래?"

"사망 플래그 오지게 박고 회피하는 게 제 전문이라, 한 번 당신한테도 박아보려고요."

"정신 나갔나, 이게."

덕배는 소름이 돋는다는 듯 온몸을 떨었다. 머리털은 없어서 떨리지 않았다.

"푸흐흐. 좋아요. 다음은 없어요. 꼭 성공하도록 할게요."

"그래. 꼭 성공해라. 네가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살아있는 딜도 꼬라지가 되는 걸 내가 꼭 눈으로 봐야겠다."

"그렇게라도 얘기해줘서 고맙네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린 덕배의 뒷통수는 햇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야, 근데 히카리한테 들었다는 보험이 뭐야?"

"조커요."

"네 좆 크다고? 그래, 맨날 가슴 키우고 다니는 거 보니까 왠지 그럴 것 같더라. 농담하지 말고 빨리 얘기해봐. 생명보험이나 실비보험 같은 개소리 집어 치우고."

"......."

역시 이 새끼는 안 된다. 나는 덕배를 63빌딩의 옥상에서 걷어차버렸다.

낙하해도 살아남았길래, 쫓아가서 태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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