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2화 〉1부 20장 4
"개소리 진짜!"
개소리고 나발이고 일단 맞아보면 정신이 바로 들 것이다. 나는 석하랑에게 겨눈 방아쇠를 당겼고, 두 개의 마탄이 직선으로 날아가 석하랑의 얼음 날개를 각각 깨뜨렸다. 마력의 응집이 깨지고 창염이 잔불로 붙은 얼음날개는 더이상 형상을 유지할 수 없었다.
"허, 시벌."
그리고 창염은 석하랑의 전신에 달라붙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수속성이라 역상성임에도 불구하고, 석하랑은 쉽게 포기해버렸다.
"니, 내한테 돌아오기만 해봐라. 백번은 강제로 당하고 나서야 허락해줄 거다."
"돌아가는 건 허락해준다는 거네. 고맙다, 하랑아."
"아오, 쓰벌. 저걸 죽일 수도 없고...확 현실의 내한테 자다가 한 번 당해삐라!"
석하랑은 중지를 양쪽으로 들어올리며 불꽃과 함께 사라졌다. 이제 4/7. 전투원으로서는 상당히 난감한 적이었으나, 다행히 다른 이들처럼 성질이 급한 녀석들은 아니었다. 다른 히로인들처럼 축첩에 관대하지 않고, 1:1의 사랑을 고수하는 여인들이었으니.
"말도 안 되는 생각하고 있네.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나 아직 아무 말도 안했다, 가을 누나."
"표정만 보면 알거든."
천가을-마스커레이드는 내가 익히 알고있던 30대 초반의 얼굴로 나를 반겼다. 환룡 덕분에 곪아터진 몸의 상처는 모두 회복되었지만,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음울하고 퇴폐적인 기운은 여전히 사는게 힘들어보였다.
"그래. 나같은 년이 이 쟁쟁한 애들 사이에서 너 잡을 수나 있겠니. 늙으면 뒤져야지."
"너무 나이 들어보이는 말은 하지 말자."
"안한다고 그게 달라져? 나는 이미 포기했어. 히로인 유일 30대 아니야. 나도, 환룡도 한 번씩 선택받았으면 그만이야."
천가을은 회색으로 물든 가면을 얼굴에 쓰고, 어릿광대마냥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고마워. 한 번씩은 선택해줘서. 한 번은 사랑해줘서."
"안 싸울 거야, 누나?"
"나는 다른 애들처럼 괜히 티격태격 하는게 싫거든. 귀찮기도 하고. 그리고 뭣보다 좋잖아? 다른 애들이랑은 달리 쿨하게 떠나주는 거. 네 식대로 얘기하면...."
천가을은 허리를 일으켜 손가락을 튕겼다.
"다른 애들이랑 다를수록 매력이 있다며?"
"...고맙네."
천가을은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이제 5/7. 남은 사람은 둘.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유나.
카르나와 일체화가 되어 금빛의 천사 날개를 펼친 여신이, 나의 마지막을 가로막았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크림파이 좋아해요?"
"......없어서 못 먹지. 그런데 하나 사족이 있어."
나는 총구를 유나에게 겨눴다.
"딸기크림파이 말고는 안 먹는다."
"...그러시구나. 그걸로 충분해요."
유나는 싱긋 웃으며 스태프를 들어올렸다.
"그 대답이면, 충분해요."
퍼----억.
유나는 백청화의 몸통을 스태프로 날려버렸다.
"어...째서...?"
...내가 아니라, 백청화의 몸통을.
* * *
상식적으로 100레벨, 신들간의 대결이 이리 허망하게 끝날 리가 없다. 서로 싸우다가 결국 지구가 견디지 못하고 전장이 파괴되어 무승부가 나기 십상인 사람들끼리의 전투가 이리 허망하게 끝날 리가 없다.
한 쪽이 전의가 없지 않는 이상.
"졌어요."
"고맙다."
유나는 시원하게 웃으며 백청화를 스태프로 꼬깃꼬깃 눌렀다. 감정이 실린 듯한 움직임에서 유나의 진심이 느껴지는 것 같아 나는 괜히 침이 넘어갔다.
"다들 신관님...아니, 신관님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네요.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저희 처음 만났을 때처럼 사장님? 아니면 길드장님? 지휘관님?"
"글쎄. 정 부를 게 애매하면 피닉스 님이라고 불러."
"피닉스...그렇네요. 완전히 그쪽으로 마음을 굳히셨네요."
유나는 쓰게 웃으며 발로 백청화를 짓밟았다. 창염의 힘이 구현된 덕분에 다시 부활이 가능한 그는 유나에게 짓밟혀 금빛의 사슬에 묶여 입에 마개가 씌워졌다.
"피닉스 님."
"응."
"저를 수십 수백 번 사랑한다고 하셨잖아요. 피닉스-창염 루트를 들어가다가 실패하면 바로 제 루트 밟으면서 사랑한다고."
"그래."
"그러면...적어도 그게 게임이 아니라 실제였다면, 피닉스 님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하셨을 건가요?"
"아니."
아무리 내가 창염에 미쳐있다고는 해도, 도의적으로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설령 하게 되더라도 유나에게만큼은 할 수 없었다. 그건 비단 다른 히로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필요에 의한 사랑 고백. 그건 게임이니까 가능한 선택지였지, 현실이라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창염은 그런 걸 싫어하니까.
"하지만 해야한다면 하실 거죠?"
"......해야한다면 할 거다."
"그러면 말이에요."
유나는 백청화를 잘근잘근 밟으며 두 팔을 벌렸다.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유나는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때보다도 더 기뻐보였다.
"저한테 사랑한다고 한 마디만 해주세요. 그러면 바로 피닉스 님을 막는 모든 걸 치워드릴게요."
"사랑했다."
"...했다?"
유나의 표정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나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지만, 유나의 발밑에 깔린 백청화의 전신에 금빛의 쇠사슬이 휘감겨 그를 옥죄기 시작했다.
"사랑했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거랑 다르잖아요."
"그래. 그런 의미에서 사랑했다고."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니까."
"...잔인하시네요. 정말."
푸-욱!
유나의 스태프가 백청화의 심장을 꿰뚫었다. 죽어도 다시 부활하겠지만, 나는 유나가 백청화를-나를 죽였다는 것에 괜히 긴장되었다. 싸우면 잘못하다가는 질 수 있기는 했다.
"안 잡아먹어요. 걱정마요."
"...그런가?"
"잡아먹어도 현실의 제가 피닉스 님을 잡아먹지, 피닉스 님의 정신세계 속 제가 어떻게 잡아먹겠어요? 이 의식세계의 주인은 결국 당신과 창염인데."
SSS급 5명이 나와의 전투에서 그리 크게 활약하지 못한 이유가 그러했다. 그들이 설령 클리어 데이터가 의념으로서 구체화된 존재라 할지라도, 결국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들'이기에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었다.
백청화는 하렘을 원하던 나.
그리고 다른 히로인들은 게임 속 히로인들에 대한 나의 미련.
"저희가 게임 속 캐릭터였던 것처럼, 지금 이 세계에서의 저희도 피닉스 님이 만들어낸 존재라는 거죠."
"그런 것 치고는 엄청 리얼하지 않니."
"그만큼 피닉스 님께서 저희를 기억해주고 계셨잖아요. 여기서 질문. 풍유코어를 복용하지 않았다고 가정했을 때, 카르나와 싱크로한 저의 3싸이즈는 얼마?"
"845587?"
"정확해요. 그만큼 저희에 대해 잘 알고 계시니까, 이렇게 진짜에 가깝게 피닉스 님을 대할 수 있는 거예요. 피닉스 님이 저희 루트 공략하려고 온갖 난리를 피우셨으니까, 덕분에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억에 남는 거죠."
칭찬일까. 칭찬으로 생각하는 것이 내게는 속이 편했다.
"하나만 물어보자, 유나야."
"네. 말씀하세요."
"...백청화는 그렇게 죽여대면서 나한테는 안 그러는 이유가 뭐야?"
"그거야...."
푹! 유나는 백청화가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뒷통수를 짓밟았다. 다소 과격한 성정은 분명 카르나와 싱크로를 했기 때문이리라.
"이게 피닉스 님이 망설이게 된 미련이기 때문이죠."
"하렘에 대한 미련이?"
"...그렇다기 보다는, 저희들에 대한 미안함이죠."
푸욱, 푹! 유나의 스태프 끝이 백청화의 등에 바람 구멍을 송송 만들었다. 그 공격은 카르나의 브라흐마스트라 한 발 한 발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내가 창염을 선택했기 때문에 다른 애들은 버려버린게 아닌가 하는, 그런 미련들. 그리고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실체화된 거예요. '내가 선택받지 못해서 나를 싫어하지는 않을까?'하는 걱정. 톡까놓고 말해서...."
푹!
유나의 구두굽이 백청화의 장골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누르면 터질 것 같았다.
"'아무리 게임 속 캐릭터라도 내가 먹버한 것 같아서 미안한데!'하는 양심의 가책에 의한 삽질이다, 이런 말씀."
"뭔가 유나 치고는 제법 신랄한 것 같은데."
"그게 당신이 유나에게 바라는 모습이니까요. 자기합리화. 그렇게 부르셔도 돼요. 그리고 지금 제가 하는 말이 곧 유나의 심정이고, 유나의 진실된 마음인 거죠. 매일 속으로만 끙끙 앓았던 속마음."
유나는 다소곳이 손을 모으며 고개를 꾸뻑 숙였다.
"사랑해요. 당신이 다른 누구를 선택하든, 저는 당신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 않아요. 그게 게임 속이었든, 아니면 실제 세계였든. 설령 당신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과거의 인연으로 남게 되든."
"......."
유나는 자신의 말이 곧 진짜 유나의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유나의 말대로 그게 진짜 유나의 말인지는 모른다. 결국 저 말은 내가 내 좋을 대로 해석하는 자기합리화일 수 있기 때문에.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건 미연시 히로인들이 다들 한 번은 거쳐가는 과정이잖아요? 후후. 하지만 괜찮아요. 저희들 다 한 번은 선택을 받았으니까."
콰득!
드디어 유나가 백청화를 터뜨렸다. 그리고 직감했다. 원작 게임에 대한 미련이 유나의 말 덕분에 서서히 내 의식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을.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기본 소양이죠. 너무나 사랑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지는 것에 행복을 빌어주는 것. 정말 구차하고...짜증나고...화가 나지만...어쩌겠어요."
유나는 나를 향해 울면서 웃었다. 아래에 깔린 백청화는 유나의 금빛 마력에 의해 하나의 구체가 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랑하니까 행복하기를 바라는게, 제 마음인데."
"......."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렇잖아요? 피닉스 님도 마찬가지죠? 창염이 만약에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줄 건가요?"
"......글쎄. 예전에는 그럴지 몰라도, 나는 미연시 히로인이 될만한 그릇은 아닌 모양이야."
나는 유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유나는 구슬을 1cm도 되지 않을 작은 사이즈로 만들었다.
"창염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 있을 수 없어.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좋아요. 그래야 제 피닉스 님이죠. 크흠,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유나는 내 손에 백청화를 놓고 손에 꼭 쥐게 만들었다. 유나보다도 더 먼저 나의 것을 되찾았다. 이제 6/7.
"피닉스 님."
유나는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현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갈 각오는 되어 있으신가요? 무한히 반복되는 이 세계에서 탈출하기를 실패하면, 당신은 이제 한낱 캐릭터로 전락하게 될텐데."
"물론."
나는 유나와 손을 맞잡았다.
"그게 창염과 함께 웨딩 마치를 올릴 수 있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정말 뒤라고는 없으시구나. 좋아요.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매력에서 밀린 거니까. 그렇게 확고하다면 열어드릴게요. 창염과의, ■와의 싱크로."
유나는 손을 털어내 내 얼굴을 붙잡았다. 그 신체적 접촉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키스 한 번으로 퉁칠게요. 피닉스 님 다운 해결이죠?"
"...창염 말고는 키스 안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섹스로 하려다가 지금 키스로 어어어엄청 수위 낮춘 거거든요? 그리고."
유나는 내 얼굴을 잡아당겼다. 분명 의식세계에서는 내가 갑이라고 했건만, 어째서인지 이 순간 만큼은 나는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언제나, 항상,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거지만 말이에요."
유나는 까치발을 들며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물은 떨쳐내고 환하게 웃는 미소가 마치 햇살과도 같았다.
"허락받을 생각도 없거든요?"
쪽.
7/7.
...나는 모든 미련을 떨쳐냈고, 온 세계가 푸르게 물들었다.
* * *
"니, 진짜 그걸로 만족하나?"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당장이라도 멱살잡고 마음 되돌리게 하고 싶은데."
"하여튼 사람이 착해도 너무 문제야. 이거봐. 그렇게 사랑한다고 들어도, 눈에 콩깍지 씌이니까 아직도 실드 쳐주잖아. 너는 어쩌다가 저런 쓰레기한테 반한 거니?"
"그런 말하는 언니도 반해서 그렇게 된 거면서."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네."
"후훗. 다들 행복하게 보내줘요. 그래야...."
유나는, 씩 웃으며 하늘로 날아가는 피닉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현실의 저희에게도 원찬스가 있지 않겠어요?"
"구걸하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한데."
"사랑 앞에서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려야 한다고요. 그리고 지금 우리 얘기를 곧이곧대로 듣고 있을 분에게도 분명히 말해주는 거죠."
유나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현실의 우리들이 피닉스 님 빼앗으면, 그 때는 순순히 인정하라고!"
건방지게.
"꺄아악! 피닉스 패턴이 갑자기 괴랄해졌어!"
"발악 패턴? 아니야, 히스테리 같아!"
"꺄아악! 서방님, 괜찮아?! 상처가 너무 깊어! 차라리 죽었다가 부활해!"
"꺼흑."
창염이 곳곳에서 폭발하는 가운데, 광검의 결계는 아직까지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