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1화 〉1부 20장 3
선공은 역시 김누리. 나는 그림자 속에서 뛰쳐나온 170가량의 앳된 여인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마력을 담은 다리 끝에는 창염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차이면 그냥 아픈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흥! 이 정도로!"
그리고 누리는 내 공격에 너무나도 여유롭게 대처했다. 마력을 빠르게 튕겨 검은 안개를 펼쳤고, 내 발차기는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 사이 김누리는 그림자 속에 몸을 집어넣었다가 다시 튀어나왔다.
"죽어!"
카앙-!!
누리의 검이 내 총과 맞부딪혔다. 나는 오른손의 TAT를 휘둘러 누리의 검을 튕겨냈고, 왼손의 TAT를 누리에게 겨눴다. 누리는 아차 싶은 얼굴로 굳었다. 이대로 방아쇠를 당기면 누리는 리타이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고작 그걸로 끝이 날 리가 없다. 나는 왼쪽 TAT를 누리의 겨드랑이 아래로 내렸다.
"너 연기 더럽게 못한다니까."
"이익!"
누리가 이를 악 물며 뒤로 물러섰고, 예상대로 누리의 겨드랑이 아래에서 녹빛의 창날이 쇄도했다. 정확히 누리의 뒤에 숨어서 날아오는 공격은 매서웠으나, 이미 알고있는 이상 대처하기는 너무나도 쉬웠다. 나는 창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투두두두!
총구가 불을 뿜으며 마탄이 연발로 튕겨나갔다. 창날은 창염의 폭격에 금방 파괴되었고, 창을 내지른 장본인인 라온은 누리의 허리를 팔로 휘감고 뒤로 이탈했다.
"다음 패턴은 두 개인데...."
라온과 누리가 물러선 거리를 확인한 나는 두 정의 총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바닥을 향해 난사했다. 흙먼지가 일어남과 동시에 땅에서는 수십 가지 병장기가 솟아나 나를 찌르려했고, 나는 그 병장기들을 마탄으로 요격하며 날개를 펼쳤다.
"하아앗!"
머리를 갈색으로 물들인 샤오린이 어느새 허공에서 나를 향해 언월도를 그어내리려 했다. 나는 날개를 접고 몸을 빙그르르 돌리는 것으로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고, 곧장 샤오린의 멱살을 잡고 비틀었다. 현실의 샤오린과는 달리, 정신 세계 속의 샤오린은 지륜의 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어쩌면 샤오린이 모택평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바깥의 샤오린도 이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제는 내 무기가 될 뿐. 나는 아둥바둥 거리는 샤오린을 바닥을 향해 패대기쳤다.
"수속성 카운터는 지속성이지."
쏴아아아--!!
내가 있는 위치를 향해 정확히 날아오는 고압수탄은 샤오린을 직격했다. 회심의 일격으로 수탄을 노려맞추려했던 석하랑은 내가 내던진 샤오린 실드에 가로막혀 인상을 찌푸렸다. 샤오린은 다치지 않았지만,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것은 아쉬울 터.
"그럼 이 다음 패턴은...그거네. 더블 궁극기."
나는 날개를 넓게 펼쳐 허공에 멈춘 뒤, 총구를 좌우로 뻗어 마탄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내 옆으로는 금안의 이유나와 회안의 이유나가 지팡이를 이용해 나를 향해 집채만한 마탄을 쏘아내려하고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금빛 눈동자의 이유나에게 잠깐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까득.
금안의 이유나가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져줄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총열이 녹아내리기 직전까지 모은 마탄을 발사했다.
"하지만 용서는 구하지 않는다!"
□□□□□□□□□□□!!!
마탄이 두 이유나가 날린 궁극기를 휩쓸었다. 핵분열에 가까운 마력 에너지가 들끓던 구체는 마탄의 불꽃에 휩싸여 금방 소멸해버렸고, 두 이유나는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려 백청화의 곁으로 날아갔다.
"과연 대단하네. 역시 나야. 시작부터 가장 까다로운 공격만 하고 말이지."
누리와 라온의 연계. 샤오린의 시선 분산. 석하랑의 저격. 그리고 이어지는 유나의 고화력기. 거기에 유나로 변신한 가을의 중첩.
초격부터 마지막까지 단 10초동안 이어진 공격은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지만, 그 공격 패턴을 만들어낸 사람 또한 나였다. 당연히 대처하는 방법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잘 피하고, 잘 막고, 잘 반격하면 된다. 그게 끝이었다.
"너는 안 나오냐?"
"......."
내 도발에 백청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썩어도 준치라고 나름 지구 최후의 지휘관답게, 그는 두 정의 총을 사용하는 나를 상대로 전략과 전술을 짜내고 있었다.
"안 들어오면 내가 먼저 들어간다?"
"너는 왜 그러는 거지? 왜 우리를 잘라내려 하는 거야."
백청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와 똑같은 목소리로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그는 아마 본디 내가 빙의했어야 할 원본이자 육체이자 '나'였다. 창염이 내 기억을 읽고 자신의 실체를 자각했듯, 백청화 또한 내가 플레이한 자신의 모든 궤적을 읽고 이렇게 마지막 방해 요인으로 남았다.
"네가 사라져야 내가 창염이랑 오붓하게 둘이서 살 수 있거든? 남의 집 아래에서 지금 뭐하는 거야?"
"사라질 수 없어.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슈리, 유하, 히카리, 희아를 위해서라도."
"이열, 말하는 뽄새가 주인공 뺨치는데. 아니, 주인공인가? 뭐 상관없지. 그럼 나도 똑같이 되돌려주마."
나는 백청화를 향해, 내 기억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창염을 위해 죽어다오."
"...너는 나를 죽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몰라? 네 기억은 이 세계에 종속되는 거야. 창염이 얘기한대로 한낱 NPC로 전락할 수 있는 거라고."
백청화는 서서히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건 아직까지 나를 공략할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기에 시간을 벌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지금 바로 공격을 날리면 분명 승기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이런 자존심 대결에서는 꼼수로 이겨서는 완벽하게 승리를 가져올 수 없었다.
'어디 얼마든지 머리를 굴려서 이기려고 들어봐라.'
창염이 가르쳐준 건카타는 원작 기출 범위를 한참 벗어나는 전투 방식이었으니, 예전에 하던 것 마냥 직접 맞딱뜨리며 패턴을 분석하는 법 말고는 대처할 수단이 딱히 없을 것이다. 물론 나 또한 잠깐 시간을 벌어야 했기에, 총구를 아래로 내리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
"어째 가는 곳마다 말려대는구만."
"당연히 말려야지. 불구덩이 속으로 다시 뛰어들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예 불에 타서 소멸하겠다고 하는 녀석을 말리지 않고 어떻게 하겠어?"
"그냥 불에 타도록 내버려 두면 되는데. 피닉스는 불에 타죽어도 다시 살아나잖냐."
"...네가 나였다는 기억을 잃고, 이 세계의 이면에 대한 것도 잊고, 모든 기억을 창염에게 의탁하고 살아가는 인형으로?"
"그렇지. 이제야 말이 통하는 군. 프흐흐."
나는 일부러 창염의 웃음을 흉내내며 도발을 걸었다. 비점이 낮은 하랑과 누리가 가장 먼저 달려들려고 했다.
"진정해. 아직 너네 지휘관 공략 방법도 못 찾았는데 먼저 달려들면 되겠어?"
"...이게 진짜 뒤지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씨발 열여섯이 대준다고 해도 그걸 마다하는 또라이가 어디있는데?!"
"오빠, 포기하면 편한 거임. 우리 중에 하나 선택해도 되고, 아니면 여럿 동시에 하렘 차리면 끝이잖아. 창염만 아니면 모두가 다 행복해진다고."
"창염빼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거겠지."
내 말에 여섯 히로인들이, 그리고 그 속에 깃들어있는 정령 히로인들이 울컥한 듯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게임 속 캐릭터들에 불과했지만, 반 년-아니 그 이전부터 나와 함께 원작을 수 차례 돌파했던 동료들. 그들은 내게 자신들과 이어지는 엔딩을 종용하고 있지만, 내가 노리는 엔딩은 오직 창염도 나도 살고 둘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진엔딩 뿐이다.
"누리야, 미안하지만 양보 못한다. 현실의 너는 내가 잘 후원해서 SS급으로 잘 키워줄게. 하랑이 너는 동생이나 다름없거든. 샤오린은...괴인이지만 원하는 대로 잘 살고 있고.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야. 이 기억을 잃어도 분명 잘 챙겨 줄 거야."
나는 총구를 다른 여섯 정령들에게 겨눴다.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한다. 그만 사라져다오."
그들은 모두 나의 정신 세계 속의 인물이었지만, 오랫동안 함께 루트를 공략해나가며 쌓이고 쌓인 회차데이터이자 의념인 만큼 실제 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너희들에게 분명히 말하마. 이 싸움이 끝나면, 나는 창염에게 선언할 것이다."
나는 총기 하나를 하늘을 향해 들어올렸다.
"창염, 나와...결혼해다오!!"
결혼식을 막는 불청객들은 미안하지만 지금부터 퇴실이다. 나는 궁극기의 방아쇠를 당겼다.
"해피 메리지를 위하여!!"
"앗, 피닉스의 움직임이 이상해요! 모두, 총공격!!"
타이밍 진짜....
* * *
적도 나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겠지만, 나 또한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대처 가능하며 예상 가능한 공격은 막을 수 있으나, 예상 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해야했다.
'아직 놈이 움직이지 않았어.'
백청화. 주인공이자 창염의 힘을 이어받은 자로, 후반에는 반드시 전투원으로서 전장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당연히 내가 쌓아온 전투 데이터 또한 남아있을 것이다. 누구의 데이터일까. 원작대로 총기 사용자? 아니면 2회차 이후부터 열리는 특전인 화권의 권술? 그도 아니면 샤오린이나 김누리와 함께 배운 검술?
"어이, 슬슬 움직이지?"
"킹은 움직이지 않는다."
"네가 킹이라고? 세상에. 직접 움직이지 않고 뒤에서 깔짝거리면 그게 리더의 자질인가?"
내 말에 백청화가, 히로인들이 모두 울컥했다. 빌런이나 괴인들이 주인공을 조롱할 때나 하던 말을 내가 직접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역시 히로인들을 울컥하게 만드는 도발은 주인공에 대한 도발이었다. 히로인들은 자신이 욕을 먹는 건 괜찮지만, 주인공이 욕을 먹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금방 흥분하기 일쑤였다.
"그걸 니가 말하냐!"
석하랑이 가장 먼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얼음창을 직접 양손에 쥐고 달려와 내 양 어깨를 노렸다. 나는 뒤로 피하지 않고 앞으로 오히려 달려나가 석하랑의 멱살을 쥐었다.
"윽?!"
"같은 SSS급이라고 어줍잖게 보내지 않아. 일격에 끝낸다."
석하랑에게는 미안하지만 첫 타자가 되어줘야겠다. 나는 멱살을 잡은 손에 마력을 불어넣어 방출했다.
화르르륵!
창염이 손에서 터져나와 석하랑을 집어삼켰다. 석하랑은 바로 몸 주변에 얼음의 보호막을 둘러 내 공격을 막았지만, 이미 석하랑의 몸 전체는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랑!"
박라온이 뛰쳐나와 내 팔목을 향해 단창을 내질렀다. 절풍의 힘을 담은 날카로운 창날은 이미 괴인화된 내 갑주조차 잘라낼 만큼 절삭력이 뛰어났고, 당연히 나는 그걸 맞아줄 생각이 없었다. 대신 '막을' 생각이었다.
"쉽게는 안 되지."
카가가강!
단창의 칼날 궤적으로 뿌린 막대한 양의 마력에 칼날은 허공에서 멈췄다. 절풍과 창염의 힘이 길항을 이루었고, 나는 나머지 힘을 모두 석하랑에게로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사이, 나는 나머지 손을 들어올려 라온의 심장을 향해 코어를 겨눴다.
"미안하다, 라온아."
"...사랑했다고 말해주시겠습니까?"
라온은 단창을 놓으며 두 팔을 벌렸다. 박라온 루트에서 라온과 함께 했던 일들이, 엔딩에서 함께 18평짜리 신혼집을 구하고 뒹굴던 일들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주마등이라는 건 죽기 전에 스쳐가는 것이라고 했건만, 어째서 죽이려고 할 때 이렇게 스쳐지나가는 걸까.
"그래. 사랑했다. 그러니 추억 속에 조용히 묻혀있어다오."
"......그거면 됩니다."
타-앙.
나는 라온의 심장에, 코어에 마탄을 박아넣었다. 화륵,하고 터진 푸른 불꽃이 라온의 전신을 휘감았고, 라온은 금방 재가 되어 사라졌다. 라온의 본래 성정도 그러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빠른 수용력을 보이는 정령이 펜릴이었다.
1/7. 나는 기억 속 라온과 절풍을 고이 묻었다. 그리고는 옆에서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누리에게 옆차기를 날렸다.
"커흑!"
누리는 어둠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실체가 되어 내 다리를 얻어맞았다. 피를 토하는게 아무런 신체 보호를 하지 않은 듯 했고, 누리는 검을 바닥에 내던지고 내 옷깃을 잡으며 쓰러졌다.
"오빠, 그래도 우리...계속 친구지?"
"물론. 여자사람친구."
"...하 씨, 나도 화속성 되어서 여자친구 될 걸. 끝까지 그러네."
누리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나는 누리의 정수리를 향해 총구를 옮겼고, 망설임없이 탄환을 날렸다. 2/7. 누리와 마암룡 또한 기억의 잔재 속에 파묻혔다. 이제 남은 것은 다섯.
"당신이 그 길을 선택했다면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와라, 깔끔하게 이기고 바닥에 때려눕혀줄게."
나는 석하랑을 저 멀리 집어던졌다. 그와 동시에 샤오린은 바닥을 손으로 크게 내리쳤다.
구구구구!!
땅에서 창칼이 수백 자루 솟아나 나를 습격했다. 나는 백덤블링으로 후퇴에 가속도를 붙여 샤오린의 공격을 완전히 회피했다. 그리고 그 황토색 창칼의 물결 사이로, 언월도를 꼬나쥐고 달려오는 갈색 장발의 군신이 보였다. 나는 양손을 들어올려 질주 경로에 위협사격을 날렸다.
타다다당!
연발로 날아간 마탄이 공중에서 폭발했다. 일부는 샤오린에게 닿을 뻔 했지만, 대부분은 샤오린이 휘두른 언월도에 도탄되었다. 샤오린은 언월도의 면을 이용해 마탄을 쳐내는 식으로 창염을 모두 흘려냈다.
"흐아앗!"
"기합 내지르고 왼쪽으로 공격하는 거 습관이라니까!"
나는 두 총을 꺼내 X자로 교차시켰다. 정확히 언월도가 휘둘러지는 경로에 총을 가져다대니 샤오린은 입술을 깨물며 움찔거렸다. 그 허공에 뜬 짧은 순간, 나는 발을 빠르게 굴러 바닥에 창염을 퍼뜨렸다.
"땅에 발을 디디고 있으면 병장기는 무한하지만, 이렇게 허공에 있으면 안 되지."
"이런-"
화르륵!
내 발밑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불기둥이 되어 샤오린을 덮쳤다. 푸른 불기둥은 샤오린을 하늘 높의 띄워올렸고, 하늘에서 공중폭사 시켰다.
"1합이지만...강하시군요. 망설이지 않고 약점을 찌르시다니."
"아무렴 내가 너를 키웠는데 그걸 모를까."
"...당신께서 주신 패배,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샤오린과 지륜은 허공에서 소멸했다. 이걸로 3/7.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전쟁이었다.
"니!"
전신의 창염을 떼어낸 석하랑이 나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내 버리고 후회 안 할 자신 있나!"
"누가 버린대? 연인 관계로 나아가지 않을 뿐이야."
"마! 다다익선 모르나! 창염도 챙기고 내도 챙기고 다른 애들도 같이 챙기면 되는 걸!"
"내 사랑은 한 명으로도 과분해서 말이지."
석하랑이 얼음의 날개를 펼쳤다. 나비의 날개는 언제봐도 아름다웠고, 현실의 하랑보다 더욱 정교하고 단단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창염에 대한 나의 사랑을 느껴봐라! 이 마탄의 공격력은 내가 창염을 사랑하는 만큼 강하다!"
사랑으로, 나는 이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