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0화 〉1부 20장 2
"야, 천가을. 너는 지금 나가리 됐는데 빡치지도 않냐?"
"내가 뭐하러 땀 빼면서 싸워? SSS급들 사이에 나같은 애가 끼는 거 아니야."
조덕배와 천가을은 캔맥주를 한가득 쌓아두고 잔을 나눴다.
"그보다 나는 네가 더 의외인 걸. 너 술 이렇게 대작하려드는 것도 의외고, 그게 나를 상대로 인 것도 의외네."
"...그러게."
둘 사이는 이런 식으로 술을 나누거나 할 사이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는 한 캔 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냐'는 조덕배의 제안에 잔이 돌기 시작했다. 천가을은 다 마신 캔을 찌그러뜨리고, 촉수로 다른 캔을 집어들었다.
"너 실은 심심해서 나 찾아온 거지?"
"심심? 내가?"
"맨날 걔 옆에 뭐든 따라다니다가, 이번에는 못 따라갔잖아. 옆에 있으면 터진다고."
"......쳇."
조덕배는 거칠게 문어다리 한 짝을 들어 질겅질겅 씹었다. 말린 문어라서 다행이지, 말랑거렸으면 비주얼 적으로 천가을의 촉수를 씹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구토감이 올라왔을 것이다.
"어쩌냐. 고작 A급 따리인 것을. 최소 SS급 아니면 칼같이 사망한다고 하는데. 애초에 뽑힌 녀석들도 화려하더구만. 막말로 정령 페어만 부른 격 아니냐. 광검이랑 가웨인은 핵심 관계자고."
"그렇기는 하지."
"거기다가 이제 걔들이 상대하는 게 괴수형? 어우, 상상도 못하겠네."
조덕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의자에 몸을 숙였다. 천가을은 전투를 직접 참여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만큼, 예전부터 지나가는 식으로 말했던 '피닉스 본체'라는 것에 대해 살짝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걸 넌지시라도 들었을 법한 존재는 다름아닌 피닉스의 대나무숲, 조덕배다.
"야, 조덕배. 너 뭐 들은 거 없어?"
"뭐. 피닉스 본체 괴수형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그 외형은 어떻게 되는지?"
"너 혹시 독심술도 하니?"
"흐름상 뻔하지. ...모르는 건 아닌데, 나도 별로 들은 바는 없어서 말이야."
"그래도 네가 가장 많이 들었을 거 아냐. 애초에 본체를 꺼낸 적이 없는 걸."
"꺼낸 적이 없...."
조덕배는 문어다리를 씹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오, 드럽게 질기네. 그래, 이번에는 본체를 드러내는게 처음이지."
"......?"
천가을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조덕배는 싸가지가 없기는 해도 속내가 그의 맨들맨들한 머리만큼 잘 드러나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의 생각이나 감정이 안 느껴지거나 하는 적은 없었다.
하위의 이능력자를 상대로 마력의 흐름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경우는 단 하나.
"조덕배. 너 혹시 S찍었니?"
"크흐...."
조덕배는 캔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시원하게 웃었다. 형광등의 빛이 그의 머리와 이에 비쳐 반짝였다.
"시원하구만. 그래, S 달았다. 누구 덕분에 아주 격하게 몸을 움직이고 다녔거든."
"와...나는 환룡한테 마력 주입당한 이후로 방치됐는데 누구는 와...."
천가을은 왠지 모를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불쾌해해서는 안 되겠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의 자리를 다른 누구도 아닌 조덕배에게 빼앗긴 것만 같아 짜증이 났다.
"뭘 그렇게 쳐다봐?"
조덕배는 다시 문어다리를 질겅거리며 자조했다.
"내가 옆에서 같이 싸운 줄 아냐? 맨날 배트니 마탄이니 해서 무기로 사용된 게 몇 번인데. 그렇게 비인격적인 대우를 당하면서 S급 찍게 됐다. 됐냐?"
"음......."
천가을은 이상을 느꼈지만, 그 이상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피닉스 본체 얘기 말인데, 나는 본 적은 없다."
조덕배가 화제를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위화감의 근간을 찾을 수 없어, 천가을은 호기심이 동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본 적은 없지만 들은 적은 있지?"
"어. 듣기야 했는데...잠깐만."
조덕배는 마도기어를 두드려 홀로그램 하나를 꺼냈다. 그곳에는 늘씬하고 멋드러진 형태의 푸른 불사조가 날개를 좌우로 펼치고 있었다.
"본 적 없다며!"
"오, 마도기어 쩐다. 이게 걔가 나한테 불꽃으로 보여준 자기 본체라고 했거든?"
스스로를 불사조라고 말하는 장본인 답게, '괴수형'의 형태는 영락없는 불사조였다. 단지 신체 여러 곳의 깃털이나 장식이 주작, 봉황 등을 섞어놓은 특이한 형태라는 것이 천가을의 이목을 끌었다.
"되게 예쁜데."
"예쁘다고? 단독으로 지구 전부를 폭파시킬 수 있는 괴물이?"
"......외형만 두고 얘기한 거잖아. 그리고 언제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나? 애초부터 궁극기 파괴력은 너도 나도 알고 있고, 더군다나 괴인형에서 더 나아가는 괴수형이라며? 그럼 더 강하겠지."
"어."
조덕배는 피닉스가 자신의 본체-괴수형에 대해 얘기했던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크기가 15m 정도 되던가?"
"뭐? 그렇게 작아? 혼돈도 그거 보다는 훨씬 크기가 컸는데."
천가을은 왠지 모르게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신체의 크기가 괴수의 강함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 괴수들을 평균적으로 따져봤을 때 그게 정비례하는 경향을 보이는 건 분명했다.
"히카리도 얘기했는 걸. 괴수의 육체는 결국 코어의 마력을 견뎌낼 수 있는 부하 장치라고. 그래서 S급 정도 괴수가 되면 수 십 미터에 이르는 신체를 가지는 게 기본이라고."
"언제나 예외는 있기 마련 아니냐."
조덕배는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인간 이능력자를 상대하기에 최적화된 크기란다."
"그럼 남는 마력은?"
"밖으로 뿜어내면 끝 아니냐. 그래."
조덕배는 손을 양쪽으로 쭉 펼쳤다.
"사방으로 불꽃이 팡! 하고 터져나가는 거지."
* * *
"으아아아!!"
석하랑은 악을 쓰며 마력을 쥐어짜냈다. 석하랑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마력의 꽃이 얼음으로 퍼져나가 일행의 주변에 얼음의 꽃을 펼쳤다.
파바박!
얼음꽃의 꽃잎에 푸른 불꽃의 깃털이 박혔다. 꽃잎들은 하나 둘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깃털들 또한 얼음의 한기에 열기를 잃고 굳어가기 시작했다.
"으아, 더럽게 씨네!"
석하랑은 화속성의 유일한 카운터 속성인 수속성의 정령으로서, 전투에서 이탈한 루살카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유일하게 상성에서 이길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현재 아무 문제없이 마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존재였다.
"엄마!! ...아빠는?!"
"괜찮단다!"
넓게 펼쳐진 전장의 가운데, 광검은 푸른 불꽃이 전신 곳곳에 붙어 괴로워하고 있었다. 루살카는 그 옆에서 자신의 마력을 퍼부으며 잔불이 퍼져나가는 것을 억제하고 있었고, 주변에 원형의 결계를 펼치며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랑, 앞에!"
은유하와 싱크로한 카르나는 전방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며 소리 질렀다. 카르나가 가리킨 곳에는 푸른 깃털들이 화살처럼 날아오고 있었다.
"벽을 세울게요."
이유나는 굳은 얼굴로 땅을 지팡이로 내리찍었다. 바닥에서 튀어오른 토벽은 십 수 미터 가량의 너비였으나, 깃털은 아무렇지 않게 토벽을 뚫고 날아왔다.
"후우, 으아아!"
석하랑은 마력을 빠르게 가다듬어 토벽의 뒤에 얼음의 꽃잎들을 만들어냈다. 쏘아진 깃털들은 다시 꽃잎에 막혀 얼어붙었다.
"제, 젠장...."
무사히 공격을 막아냈지만 석하랑은 거칠게 숨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얘기하던, 피닉스가 자신을 상대로 '전력으로 싸우면 금방 이길 수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체감되었다.
"진짜 봐주고 있었네...!"
창염은 무엇이든지 태우고, 마력 또한 불태운다. 그리고 그 불꽃을 다루는 피닉스는 이능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까지 불태우는, 압도적인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점마 저리 쌨어요?!"
"...우리 여섯을 상대로 엄청나게 버텼으니까. 그만큼 강해진 거지."
샤오린의 몸에 깃든 환룡은 쓰게 웃으며 투명언월도를 투창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언월도가 석하랑의 얼음 방패의 위를 미끄러지듯 하늘로 날아올랐다. 연이어 카르나가 눈동자를 금색의 별빛으로 반짝이며 마력을 방출했다.
"브라흐마스트라!!"
금빛의 화살이 일곱 갈래로 퍼져나가 환룡이 투창한 언월도의 주변을 지키듯 날아갔다. 속도는 빛처럼 빨랐고, 언월도를 지나치며 하늘에 둥둥 떠있는 푸른 구체를 요격했다.
카가가강!!
"칫!"
푸른 구체에 일곱 갈래의 브라흐마스트라가 박혔다. 하나하나가 S급 괴수를 일격에 날려버릴 만큼의 공격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르나의 브라흐마스트라는 구체를 뚫지 못했다.
끼아아아악!!
구체 안에서 비명같은 괴조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지며, 다시 구체의 바깥으로 푸른 깃털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하랑아!"
"알았어요!"
석하랑은 얼음의 나비들을 만들어 하늘로 띄워올렸다. 새처럼 빠르게 날아간 나비들은 불꽃의 깃털들과 맞부딪히며 폭발했다.
그리고 그 폭발의 틈바구니 사이로, 환룡이 날린 투명언월도가 푸른 구체를 찔렀다. 아주 약간, 틈이 보였다.
푸흐흐.
익숙하면서도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구체 안에서 울렸다. 언월도에 살짝 벌려진 틈 사이로, 괴수가 된 피닉스가 웃고있었다.
변신 중에 공격하다니...역시 당신 답네요.
화륵, 화르륵.
푸른 구체가 날개처럼 뒤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집행관과 일행은 완전히 괴수로 변신한 피닉스를 보고 입안이 바싹 말랐다.
"...저거 싱크로 한 거 아니제?"
"그냥 원래 엄청 쌘 거야. ......미치겠네, 진짜."
환룡은 입술을 깨물며 허탈하게 홀로 중얼거렸다.
"안에 있던 거랑 바꿨네...미친."
오랫동안 숨겨왔던 히든카드라는 거죠.
화르르르륵!
푸른 불꽃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불사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사조는 눈동자에서 보라색 빛을 반짝이면서도, 완벽하게 그 폭주를 통제하고 있었다.
피닉스 배틀 모드, 1페이즈갑니다?
"이게 1페이즈가 아니었다고?!"
창염, 개진!!
불사조는 1페이즈의 시작과 함께 입을 쩍 벌리며 브레스를, 궁극기를 뿜어냈다.
"휴우. 정말, 공감한다니까요. 시작부터 강한 공격을 날리는 거."
창염은 옥좌에 앉아 바깥의 상황을 살피며 마력을 일으켰다. 지하에는 그가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고 싸우고 있는 만큼, 자신 또한 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했다.
"지금부터 히로인들 기강 한 번 세게 잡아봐야 겠네요. 푸흐흐."
창염은 자신과 연결된 괴수 피닉스의 육체를 자유롭게 움직이며, 두번째 공격을 준비했다. 당연히 '적'은 백희아의 지휘에 의해, 가벼운 궁극기를 얻어맞고도 무사했다.
"그 사람이 이기고 돌아올 때까지, 심심풀이로 좀 놀아주셔야겠어요. 최강의 괴수-100렙 피닉스 갑니다!"
창염은 피닉스가 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 * *
푸른 하늘의 데스디나스, 원작의 최종전은 모두 7명의 동료를 데리고 성주의 방주에 침임하게 된다. 방주를 중심으로 펼쳐진 배리어를 뚫기 위해서는 일곱 속성의 이능력자가 한 명씩 투입되어야 하며, 그 일곱 속성의 히어로로 대부분 히로인-또는 정령의 힘을 가진 존재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일곱 명이 바로 정령과 싱크로한 히로인들이며, 그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효율을 가진 존재가 바로 내 눈앞에서 나를 상대로 죽일 기세로 싸우는 '적'들이다.
수속성, 설령화 석하랑.
풍속성, 절풍의 박라온.
지속성, 지륜의 샤오린.
광속성, 사타나엘 이유나.
암속성, 마암룡 김누리.
환속성, 혼돈의 천가을.
...그리고 화속성, 창염의 백청화.
비전투원 히로인 히카리, 백희아, 은유하, 그리고 화속성 메인인 슈리를 제외하고 전투원으로만 편성한 최강의 조합이었다. 내가 피닉스 루트의 난수를 고정하기 위해 수십 수백 번을 고정시켰던 히로인과 정령들의 싱크로 조합. 내가 매번 피닉스 루트에 진입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그들은 내 계획에 따라 짝을 이루어야 했고, 매번 싱크로하여 최종전에 투입되었다.
그런만큼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믿음직한 동료인 동시에, 적으로 돌아선 지금 이순간에는 최악의 상대였다.
'톡 까놓고 말해 만렙 1:7이나 다름없지.'
이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물론.'
창염 가라사대, 최강은 피닉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