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469화 (469/1,497)

〈 469화 〉1부 20장 1

삐빅, 삐빅.

푸른 배양액이 내 주변을 따스하게 감싸안았다. 이것은 창염의 양수인가, 아니면 히카리가 내 마력 패턴을 분석해 가장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코어를 액체화한 바다인가.

전자인 것도 썩 나쁘지는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당연히 후자였다. 나는 요람같은 세상에서 창염의 몸으로 눈을 떴다.

"단장님, 끝났어요. 이제 나오셔도 돼요."

"5분만…."

"평소에는 5분 늦게는 커녕 빨리 끝내달라고 닥달하시던 분이 무슨 일이래. 진짜 이상해진 건가?"

"......그냥 조금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따뜻하기도 하고."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어놓고 온수매트를 아래에 깔아 잠드는 이불속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잠깐이라도 더 쉬고 싶었다. 이제 조금만 더 '조정'을 마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김펜릴 잡고 비몽사몽 하셨다는게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네요. 막 언니들한테 도와주십쇼라고 하시면서 말투 오류났다고 하던데요?"

"그거야 악몽을 꾸는 바람에."

"정령도 꿈을 꾸나요? 아, 이제는 간부님이라고 해야하나요?"

"...설명하면 복잡해질테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가 피닉스입니다."

환룡은 나의 정체에 대해 적당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퍼뜨렸고, 그건 히카리의 마도공학적 식견으로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덕분에 나는 여전히 피닉스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보다 그 사이에 누구 온다는 말 없었어요?"

"아뇨? 다들 벼르고 있던데요. 단장님이랑 드디어 제대로 붙는다고, 특히 샤오린이랑 카르나가 제일 의욕적이에요."

"내가 직접 싸우는 건 아닌데."

"음, 대리만족?"

히카리는 키득거리며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딸기맛 젤리를 입에 넣고 질겅거렸다.

"단장님께서 말씀하신 조건을 적용해봤어요. 대 카르나 전, 대 뉴클리언 전. 그리고 단장님의 말씀을 종합해보자면…."

이미 수 차례 확인한 나의 궁극기의 화력을 맞서게 된다면, 그것을 두고 6명의 싱크로체 동료들이 결계를 쳐서 지구가 버텨낼 수 있는가. 내가 조정되는 동안 히카리는 그걸 찾느라 애를 먹었다.

"지구는 세 쪽이 될 거예요."

"왜 하필 세 개로 갈라지는 거죠?"

"여섯 정령들이 방패를 들어올리면, 그 여파가 좌우로 뻗어나갈테니까요."

"그렇겠네요."

정령들이 방어한다고 보호막을 펼친곳 옆으로 내 파괴광선이 빗겨나갈 것이다.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기껏 지구에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결계 안에서 싸우거나 이계에 넘어가서 싸워왔건만, 이제와서 내가 다 때려부수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뭔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했다.

"그럼 히카리.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음, 꼭 정령들이 상대여야 하나요?"

"그런 건 아닌데."

단지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정령들을 불렀을 뿐이다. 싱크로한 여섯 여신들만큼 강하면서도 주변에 피해를 일으키지 않을 존재가....

"아."

"있죠?"

"그렇네요."

나는 바로 러시아로 날아갔다.

* * *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 서방님 결계 속에서 싸우겠다?"

"네. 광검 궁극기라면 안전하게 싸울 수 있으니까요."

"그럼 우리 서방님은?"

"...여파를 못 견디면 죽겠죠? 그런데 되살아날 거니까 괜찮아요. 이제 광검은 내가 죽더라도 석하랑에게로 넘어갈테니까."

광검-벨로보그-허윤환. SS급 이능력자이자 루살카의 남편인 그는 결투장이라는 이계를 만들어내는 궁극기를 가지고 있다. 예전에는 섬 하나 크기의 공간이었지만, 그 공간을 넓히는 방법은 충분했다.

"광검이 안 죽으려면 전장이 적어도 서울 전역 정도는 되어야겠죠. 아무렴 뉴클리언,그리고 다크 레기온보다 더한 괴수를 상대하는 건데."

"너 상당히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구나?"

"이성이 없는게 더 무서운 거죠. 제가 직접 제어하지 못하는 상대니까."

한 번 폭주를 해본 경험이 있는 루살카로서는 내 말뜻이 무엇인지 금방 이해했다.

"그렇긴 하지. 그래서 나는 걱정하는 거야. ...괜히 잘못되면 어떡해?"

"여기도 걱정많은 사람이 하나 있네요. 괜찮아요. 이길 수 있어요."

"노파심에 하는 말이기도 한데, 내가 진짜 너 걱정되서 그런 거야."

루살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끌어안았다. 내가 불속성이고, 루살카는 수속성이건만, 왠지 모르게 루살카의 체온에서 이유모를 따스함이 느껴졌다.

"이제까지 와서 죽으면 안 돼. 그럼 우리 딸도 그렇지만, 우리도 얼마나 슬프겠어."

"당신은 그렇다치더라도, 광검이?"

"입에는 쓰레기 달고 살아도 미운 정이라는게 있잖아. 그래도 나름 네 덕분에 자기가 죽기 전에 가장 후회하던 것 해결하고 나름 좋게좋게 지내고 있는데, 아무렴 고마워해야지. 안 그래? 적어도 난 하랑이 문제에 관해서는 서방님보다는 네 편이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고."

의외로 루살카는 사랑에 눈이 먼 것처럼 보였지만, 광검의 너절함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덕분에 나도 이야기를 하기 훨씬 수월했다.

"그럼 수보르프한테 얘기해줘요. 무대는...예전의 거기."

나는 루살카에게 좌표를 넘겼다.

"백영도."

* * *

"복잡한 심경입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에서 인류사를 결정지을 최후의 전투가 시작된다니."

백희아는 쓰게 웃으며 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런만큼 드레스 코드도 중요하지요. 자, 다 됐습니다."

어차피 옷은 이제 중요하지 않지만, 백희아는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르니 나를 자신의 취향대로 단정하게 정돈시키고 싶어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살폈다.

"정장이네요?"

"TPO는 중요하니까요."

거울 속 나는 온통 검은 색으로 물든 남성용 정장과 바지를 입고있었다. 안에는 흰 와이셔츠를 받쳐입었고, 아직 넥타이는 묶지 않았다.

"저는 당신이 한복 입히지 않을까 고민했었는데."

"결혼식장에 한복 입고 가는 분은 왠만하면 없지 않습니까. 비슷한 겁니다. 이 섬에 오기로 한 이들이 한국인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시대는 글로-벌한 시대니까요."

"...앙그가 들어가서 그런가, 상당히 독특하네요. 지금. 글로벌이라. 무궁화 보이 디자인 원작자가 그런 말을 하니까 상당히 어색하네요."

"......선의철이 멋대로 제 초등학교 과제를 도용했던 겁니다. 선의철이 나쁜 겁니다."

백희아는 입술을 부루퉁 내밀며 불만을 표시했다. 나는 괜히 그게 재미있어서 등을 토닥였다. 백희아의 손에는 푸른 넥타이가 들려있었다.

"당신 역할이 가장 중요해요. 당신이 버텨내지 못하면 전장은 바로 수중 필드가 될테니까. 그리고...이런 지휘 어지간해서는 할 곳 없어요?"

"감사합니다. 예봉을 제게 맡겨주셔서."

"어차피 저는 지휘할 수도 없는 상황인 걸요."

굳이 따지자면 지휘는 커녕 지휘로 쓰러뜨려야 할 '적'의 입장이다. 백희아는 천천히 내 목에 넥타이를 묶기 시작했다.

"가을 언니에게는 뭔가 말씀 안하셔도 됩니까?"

"항상 하고 있어요. 딱히 생략한 건 아니고, 언제나처럼 얘기했죠."

다녀온다.

천가을은 지금 여의도를 지키고 있다. 지구인들끼리의 모든 전투가 끝나고, 우리가 모두 살아서 돌아갈 집을.

"어디까지나 이 전투는 제게 걸린 주박을 풀어내는 문제니까, 당신들은 버텨주시기만 하면 돼요. 시간이 많으면 조금 더 연습할 시간을 주겠지만, 이미 많이 늦었잖아요?"

"......그렇긴 하죠."

꽈악. 백희아는 넥타이를 꽉 붙들며 고개를 떨구었다.

"......오라버님."

"저는 당신 오라버님이 아닌데요?"

"설령 진짜 제 오라비가 아니더라도, 의형제라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오라버니에요? 굳이 따지자면 언니 아닌가?"

"그냥 부르고 싶어서 부르는 겁니다. 호칭이 중요하겠습니까?"

백희아는 활짝 웃으며 내게 당당히 말했다.

"그렇죠. 호칭은 중요한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마음이죠, 마음. 그래요. 저는...이 싸움이 끝나면 고백할 겁니다."

"왜 다들 스스로 사망 플래그를 못 박아서 안달이지."

"안 죽을 자신이 있으니까요. ...오라버님도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자신감만으로 성주를 죽일 수 있다면, 나는 골백 번도 죽였을 것이다.

* * *

잠시 뒤.

백영도 '전장'에는 서로 익숙한 얼굴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설야.

프린세스, 김펜릴.

이유나, 히드라.

은유하, 카르나.

백희아, 앙그.

샤오린, 환룡.

그리고 특별히 초청한 루살카, 광검, 그리고 원탁의 일원인 가웨인, 질풍객.

사실상 지구상에서 강자로 소문난 모든 전력을 긁어모은 수준이었고, 당장 면면만 살펴도 지구를 뛰어넘어 달까지 날아가 성주의 목을 자를 수 있을 정도였다. 로브 때문에 죽지는 않겠지만.

"정말...아름다운 날이에요."

나는 긴장으로 가득한 그들을 앞두고 '결전대사'를 날렸다. 내가 그렇게 질색을 하던, 너무나도 많이 들었기에 질렸던 그 대사.

"하늘에는 불사조들이 날아다니고, 세계는 불꽃으로 타오르고."

퍼드득.

압록강 둥지에서 모인 미니피닉스들이 내 등 뒤의 날개에 내려앉았다. 하나하나가 A급 괴수 수준으로 성장한 녀석들은 다시 내 깃털로 돌아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날씨는 좋네요. ...죽기 딱 좋은 날씨에요."

내 말에 다들 표정이 굳었다. 누가 죽을 지는 미지수.

의외로 쉽게 끝날 수도 있지만, 아무도 안죽는 해피엔딩이 될 수도 있는 법.

"그럼 시작할까요?"

나는 품에서 TAT를 꺼냈다. 이미 마탄은 장전되어 있고, 정령들은 하나 둘 싱크로하며 '피닉스와의 전투'를 준비했다.

"전투 대상은 폭주 피닉스. ...이계의 오염된 마력을 벗어내지 못한, 또다른 나."

광검이 서서히 마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광검에게는 언질을 준대로, 내가 방아쇠를 당기는 동시에 광검의 투기장이 펼쳐질 것이다.

"뭐, 화마룡 생각하세요. 폭주하고 있을테니까 상대하기도 쉽겠죠? 그럼...."

철컥.

나는 총구를 내 관자놀이에 대었다. 모두가 식겁을 하며 긴장하는 가운데, 나는 그 누구도 반응할 시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창염개진!"

□□□□□□!!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내 의식은 가라앉았다.

동시에,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형용할 수 없는, 괴조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지만, 나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동료들에게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다.

덜커덩.

나는 정신세계로 들어가 창염의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을 열었다. 창염은 이미 양손에 총을 든 채 나를 반기고 있었다.

"역시. 기억을 되돌려주면 바로 이런 짓거리를 할 줄 알았어요."

"당연한 거 아니냐."

이미 나의 몸 또한 백청화로, 가장 전투에 익숙한 육체로 바뀌었다. 창염은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빈정거렸다.

"제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저를 제압하고, 폭주하는 피닉스를 완전히 먹어치운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럼 당신은 완전히 이 세계의 주민이 되어버리는데?"

"바로 그거지."

"이기적이네요."

"그래, 이기적이지."

나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설령 내가 백청화로 전락한다고 해도, 너만큼은 나를 기억해줄 거 아니냐."

"......아뇨, 당신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다른 애랑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창염은 총구를 내게 겨눴다.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말로 안 되면...."

나는 손을 한 번 크게 털었다.

"몸으로 설득해야지?"

"멍청이."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창염은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내게 자신의 총기를 던졌다.

"...가요. 가는데, 무조건 살아서 돌아와요."

"의외네."

"......믿으니까."

최고의 응원이었다. 나는 창염이 열어준 신전의 지하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한한 계단을 내려가, 연옥같은 지하로 내려간 그 아래에는 창염과 똑같이 생긴 여인이 차가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16명 하렘이다. 그걸 포기하려고?"

"당연하지."

"거기에는 유나도 포함되어 있는데? 미친 새끼."

"너나 나나 미친 건 마찬가지 아니냐."

나는 그에게, '나'에게 총을 겨눴다.

"뭔 말이 많아. 꼬우면 덤벼보던가. 클리어 데이터 쪼가리 주제에 존나 말 많네."

"......아주 죽으려고 환장을 하셨어."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주변에 그를 지키듯 불꽃의 인형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엔딩, 내가 피닉스 루트를 깼던 순간, 최후의 전장에 데려갔던 일곱 명의 싱크로 동료들.

"네가 이걸 단신으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물론!"

난 손에 든 총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내게는 신의 가호가 있다! 선수필승!"

나는 가장 먼저 달려들려는 둘에게 총구를 겨눴다. 김펜릴과 싱크로한 박라온, 앙그와 싱크로한 김누리. 미안하지만 여기서 리타이어다.

"창염쟝 체고다!!"

둘의 얼굴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내 총구가 푸른 불꽃을 뿜었다.

"...진짜 바보 멍청이."

푸른 머리칼의 여인은, 옥좌에 홀로 앉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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