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8화 〉1부 19장 24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실패해서, 남자건 히로인이건 할 것 없이 몇 번을 강간당하는데도, 그런데도 저를 구하겠다고 자꾸 처음으로 돌아오고...."
"아, 미안. 안 듣고 있었다.
창염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나는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방금 네가 뒷치기로 강간 플레이 해달라는 기억이 들어왔거든. 이것만 좀 되새기고. 음...."
"...그런거 최소 300개는 넘으니까 좀 진지하게 들어요!"
"나 지금 무척 진지한데? 정령 뒷구멍은...과연. 그런 용도였던가. 관장은 필요없겠군."
"그거야 당연한 거죠. 정령이 원래 어떤 존재인데. 완전무결한 존재라고요. 인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이, 씨. 진짜. 모처럼 진지해지려고 하는데!!"
"사랑한다!"
"아아아아악!! 진짜, 짜증나!"
나는 히스테리를 부리는 창염에게 달려가 창염을 끌어안았다. 창염은 내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왜! 제발! 좀! 사람말을, 들으라구요!!"
"듣고 있잖냐. 이렇게."
"다른 히로인 루트 타요! 나 버리고! 성주 반으로 쪼개버리고, 누구 하나 잡아서 기둥서방을 하든 아니면 당신 좋다고 하는 애들 공용 딜도를 하든! 들었죠?! 이제 돌아오지 마요!"
"에이.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나는 창염의 얼굴을 붙잡았다.
"다른 모든 애들 합쳐도 너만 못한데, 내가 왜 그래야 하겠냐. 나는 말이야, 몇 번을 실패해도 돌아올 거다. 네가 내 기억을 지우는 것도...그 실패한 기억들을 내가 모르게 하려고 하는 거 아니냐."
"......."
창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면 아예 내게 들키게 되니, 묵비권을 행사하려는 듯 했다.
"그런데 신라, 이번에는 다르다."
나는 창염의, ■의 얼굴을 붙잡고 시선을 맞췄다.
"내게, 계획이 있어. 너도 나도 살아남고 우리 둘이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계획이."
엔딩은, 이미 처음부터 보였다.
* * *
기억이 있든 없든, 내 사고회로와 행동 패턴의 모든 근본은 '창염을 살리는 것'에 근간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기억을 가진 온전한 과거의 나든, 기억을 창염에게 의탁한 현재의 나든, 앞으로 다가올 멸망에 맞서 싸울 미래의 나든 그 목표는 변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는다."
"아뇨, 실패할 거예요. 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창염은 깊은 패배주의에 찌들어있었다. 내가 벌써 몇 번이나 실패를 했는지 몰라도, 창염은 나의 완벽하고 퍼펙트한 계획을 믿지 않았다.
"정말...모든 수단을 동원해봤다고요. 그런데 그 어떤 계획을 세우더라도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제발 좀 포기하세요. 그게 당신도 편하고 나도 편한 길이에요."
"편안하게 서로 죽는 거지."
어찌 창염만 두고 나 혼자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것은 창염에 대한 배신이고 나에 대한 배신이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 그리고 계획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면 되는 거야. 이미 핵심 피스는 갖춰졌다. 너도 내 기억을 읽으니까 알 거 아냐."
"...몰라요, 그런 거."
창염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읽지 않은 건가?"
"당신이 그렇게 '완벽한 계획'이 있다, '이번에는 틀림없다'라고 말한 것도 벌써 백 번을 훨씬 넘었다고요. 예상이 되나요? 얼마나 망했는지?"
"......인생은 말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지."
나는 창염을 끌어안았다.
"백번을 루프했으면, 적어도 한 번 루프 했을 때의 곱하기 백번은 너랑 떡쳤다는 거 아니냐."
"......그게 지금 할 소리예요?"
"20년씩 100번을 떡쳐? 어이쿠,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했겠네. 유나랑 한 건 아득히 뛰어넘었...아니, 전 세계 사람들이 유나랑 한 횟수보다 많겠네."
"순식간에 유나를 걸레로 만들어버리시네요."
"...전세계 사람들이 '백청화로서' 유나랑 한 횟수."
유나는 여신. 나는 속으로 유나에게 사과했다.
"아무튼 그렇게 엄청나게 해댔는데 나랑 떨어지기를 바란다? 싫은데."
"당신은 질리지도 않아요?"
"그 질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기억 저장 플레이를 하는 거 아니냐. ...혹시 너도 질리냐?"
"......아뇨."
창염은 한 걸음 물러서서 내 손을 붙잡았다.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웃는게 너무나도 처연해보였다.
"질릴리가요. 매번 매 순간이 새로운 걸요. 당신이 저를 공략하는 방법은 정말로 무궁무진해서. 그리고 그거 알아요?"
창염은 하나의 기억 구슬을 꺼냈다.
"이 속에는 당신의 기억도 있지만, 내 기억도 있어요. 어쩌면 당신과 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실제로는 첫 경험을 하는 제가 상대인 경우도 있을 수 있죠."
"와, 그러면 처녀 총각 플레이도 가능한 건가?"
"...기억 돌려주지 말 걸 그랬어. 기껏 사람 만들어놨더니."
"애초에 정령 하나씩 각성시킬 때마다 돌려주겠다고 한 건 너잖아."
목소리, 몸, 기억. 그 대부분을 이어받아서 그런지 과거의 내가 불쑥 튀어나왔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심정적으로는 과거의 내가 훨씬 편했지만, 창염이 개조한 내가 창염의 이상형이라면 응당 따라야했다.
"흠흠."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창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눈높이가 정확히 맞아 떨어진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믿어라.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아."
"...정말로 믿어도 될까요?"
"그래. 이전의 실패한 놈들은 다 멍청해서 그래. 너랑 싱크로를 하는데 고작 3초? 3분? 그 새끼들 다 조루네, 조루. 찍사고 죽으니까 너 구하지 못하고 리셋이지."
"그게 다 당신이라니까요."
"아아, 안 들려. 그런 거 모른다. 나는 너랑 무조건 평생 살 거다. 그러니까 슬슬 허락해다오. 절풍까지 각성시켰으니, 이제 딱 끝 아니냐."
나는 창염의 손을 들어올렸다. 내 손에는 창염의 갸녀린 왼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싱크로, 허락해줄래?"
"......내가, 진짜, 이것 때문에 몇 번을 낚였는데...."
창염은 울락말락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또 돌아오기만 해봐요. 그 때는 진짜 만나자마자 콱 태워버릴 테니까."
"언제는 안 그랬나."
나는 조용히, 창염의 네번째 손가락에 입술을 맞췄다.
그와 동시에-세계가 모두 푸르게 불타올랐다.
* * *
"익숙한 천장이다."
나는 항상 그랬듯이 호텔의 펜트하우스에서 눈을 떴다. 항상 느낀 거지만 집은 집이되 왜 편안한 안정감이 없나 싶었더니, 엄연히 내 집이 아니라는 무의식 때문에 이 공간에 대해 그닥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천가을한테 덮쳐질 것 같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창염과 함께 할 공간을 진짜 집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호텔을 아예 사버려서 이대로 창염과 평생을 살아가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어림도 없지.'
살아남으려면 상상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실제로 실천을 해야했고, 나는 선택을 해야했다. 잘못된 선택지를 고르면 바로 끔살에, 설령 바른 선택지를 골라도 온갖 트롤링 요소가 겹쳐지면 인생이 쫑나고 리셋을 하게 되는 개쓰레기같은 상황.
"...이제 뒤도 없고, 만약도 없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총동원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방법까지 동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방법이 없다면, 나는 아마 최후의 선택이자 최초의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쿵, 쿵쿵.
"후우."
속에서 심장이, 코어가 또다시 울린다. 왜 또 그런 생각을 하냐는 듯 따지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창염은 비록 큐브 없이는 직접 나오지 못했지만, 이렇게나마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 내가 잘 눈치를 못 채서 그렇지.
'다른 애들이랑 그거 하기 직전 상황에서도 심장 두근거리던 이유가 있었네.'
심장이 박동하는 것이 아니라 창염이 속에서 발을 구르며 성질을 내던 것이리라. 나는 가슴을 토닥였다.
"너는 거기서 나랑 떡친 기억이나 리플레이하고 있어라. 사랑한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췄다. 의식 세계 속에서 절정에 치닫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에, 창염도 방금 한 번 좋아서 죽었을 것이다. 당연히 금방 살아나겠지만 당분간은 조금 잠잠해질 터.
"마도기어, 마도기어가...."
나는 슬립 상태로 둔 마도기어를 활성화시켰다. 예상대로 온갖 메세지가 도착해있었고,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급하고 중요한 정보를 우선적으로 확인했다.
"성주가 결국에는 오셨구만."
화성 궤도를 벗어난 명왕성이 어느덧 지구와 화성 사이를 절반이나 가로질렀다. 돌다리를 정밀 스캔까지 하고 건너는 타입이지만, 정밀 스캔이 끝났다 싶으면 바로 불도저처럼 달려드는게 성주의 성질이었다.
"우주 벌레 새끼 하나가 아주 여러 사람 골치아프게 만들었어."
모든 일의 원흉은 성주.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고로 성주를 흔적도 없이 태워버리면 이계신도 기뻐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깨달은 이계신의 지구 방문 목적이 틀리지 않았다면, 결국 창염과 내가 살아남는 길은 단 하나.
"내가 죽어야지. 그래야 살지."
단,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다. 아직까지 성주가 달에 도착해 달과 명왕성을 도킹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있다. 나는 그 잠깐의 시간이라도 알뜰살뜰하게 사용해야했다.
'그러니까 쟤들 도움을 받아야하는데.'
"......."
선뜻, 결계를 해제하기가 무서웠다. 그리고 창염이 왜 기억을 일부러라도 빼앗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하나같이 죄다 트롤러에 강간마 밖에 없냐.'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상황이 그러했든, 아니면 내가 그런 빌미를 제공했든. 물 속에, 공기 속에, 건물 속에, 빛 속에, 그림자 속에, 그리고 영체로 숨어있는 모든 애들이 하나같이 나를 범하고 나를 실패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몰랐으니까 망정이지, 기억 가진 상태에서 만났으면 무조건 하나는 죽이고 시작했을 것 같은데.'
가령, 창염의 몸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천가을의 촉수에 범해져서 죽었다면 천가을이 서울에서 괴수에게 범해지더라도 방폐했을 것이다.
가령, 싱크로의 묘리를 깨우친 석하랑이 나를 제압하고 강간했다면 부산이 터지든 말든 석하랑을 방치하거나 제압해버렸을 것이다.
가령, 환룡이 무신의 육체에 들어가 나를 강제로 범했다면 환룡과 무신의 육체를 세트로 소멸시켜버렸을 것이다.
남자로 변신하든 얼음자지를 만들든 괴인을 만들어 범하든 친오라비를 이용하든 기계팔을 쓰든 정말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내가 앙앙거리게 만들었고, 내가 앙앙거리는 순간 바로 간부 피닉스의 인격이 튀어나와 세계를 멸망시키게 만들었다.
'어째 유나 빼고 죄다 이 모양 이 꼴이니 원.'
지금까지 쌓아온 동료애와 신뢰가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쯤 하나 정도는 속에 다른 마음을 품고있지 않았을까. 없던 혐오증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지.'
여섯 여신.
그 정도가 아니면, 나를 상대로 확실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큰 맘을 먹고 결계를 해제했다.
"꺅?!"
사방에서 정령들이 튀어나왔다. 결계에 몸을 기대고 있었는지 죄다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며 펜트하우스 안으로 들어왔다.
"당신들...진짜."
나는 눈을 감고 화를 삭혔다. 얼굴을 보면 이 몸을 범하던 모습들이 떠올라, 괜히 더 신경질을 부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창염이 다시 기억을 가져가주는게 훨씬 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면 또 궁금해해서 창염 달달 볶겠지.'
그리고 창염과 사랑을 나눈 기억조차 봉인되리라.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들 나를 도와주겠어?"
"어...?"
"너 왜 말투가...."
...아차.
나도 모르게 그만.
"흠흠, 다들, 나를 돕거라. 아니, 도와다오? 도와주세요?"
....
왜 나를 보는 눈빛들이 다 저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