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2화 〉1부 19장 18
“.......”
여러모로 불편한 장소에 나를 데려다줬다. 그는 처음으로 내게서 눈을 떼고 강변에 섰다. 흩날리는 백색의 코트가 오늘따라 더 쓸쓸해보였다.
“...피닉스인 내가 소멸함으로써, 우리 롸 아가씨는 이 세계에 살아남을 수 있는 거야. 화속성 정령 창염으로서.”
“예?”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나는 그에게 달려가 손목을 잡아당겼다.
“.......”
그는 표정없이 울고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그의 눈물에 당혹스러웠다. 불에 타죽으면서도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하지 않던 그가, 고작 이 자리에 왔다고 소리조차 내지 않고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죽으면, 난 소멸하게 될 거야. 그리고 너는 이세계에서 내가 쌓아온 모든 이들과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게 되겠지. 그러니까 너는 여기서 가만히 있다가, 내가 쌓아온 그 자리를 대신 이어받으면 돼.”
“그게 무슨 개소리예요?”
“아무리 해봐도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겠더라고. 너를 살리는 길이.”
그는 처연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령 사랑을 나누어 싱크로에 성공하더라도, 그게 과연 몇 분이나 갈까. 길어봤자 10분? 3분? 어쩌면 0.1초도 되지 않을 수 있어. 억지로 맞춰놔도 다시 망가지겠지. 둘 중 하나는 그걸로 끽.”
“...격의 차이 때문에?”
“응. 그러니까 롸양. 내가 진짜 고심끝에 말하는 건데….”
그는 몸을 숙여 나와 눈을 마주했다.
“언젠가 나랑 섹스하자. 그리고 나는 소멸하고, 너는 순수한 정령 창염으로서 이 세계에서 살아가게 될 거야.”
“그럼 당신은요?”
“......뭐, 장기기증하고 죽는다고 생각하는 거지. 후후.”
“.......”
단단히 미쳤다. 그리고 동시에 고맙고 미웠다. 그는 자신을 소멸시켜가면서 나를….
“저기요.”
“응.”
“당신 뜻대로 할 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뭔데?! 말만 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줄게!”
그는 그 어느때보다도 활짝 웃었다. 처음 내 신전에 들어올 때보다도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표정을 감추고 뒷꿈치를 들어올렸다. 그는 자연스레 고개를 숙였다.
“저랑 하고 싶으면 말이에요.”
나는 그의 볼에 입술을 맞춘 뒤,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잡아돌려 그에게 선언했다.
“당신도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시면, 한 번...아니 평생동안 하게 해드릴게요.”
함께 살아남는다.
그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나 또한 그를 죽이면서까지 밖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 미친 놈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이는 아무래도 나밖에 없는 것 같으니까.
* * *
D-987
"좋아요. 슈리는 과감하게 포기. 최소한만 유지하도록 하죠. 핵심 동료는 누구?"
"은유하, 히카리, 백희아."
나와 그는 결국 빌런의 길을 걷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그 빌런의 길을 걷는데 가장 도움이 될 세 명을 추렸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장 많은 도움이 될 재력가.
언제 어디서든 원작 수준의 기술력을 뽑아낼 수 있는 기술자.
그리고 선의철의 암수에서 여인들과 동료들을 지켜낼 정계의 거물.
"천가을은 어떻게 하지?"
"둘 중 하나죠. 신서울에 있으면 그대로 배우하라고 하고 나중에 접근. 이능력자로 각성시키면 배우 겸 히어로로서 활동하게 되겠죠? 빌런으로 이미 각성했다면 힘으로 찍어누르면 돼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사람일테니."
"...글쎄."
그는 천가을에 대해서는 영 탐탁찮은 표정이었다. 나는 그의 심드렁한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요? 천가을 루트에서는 가슴에 파묻혀 살더니."
"가을이가 몸매 하나는 박살나지. 하지만 괜히 가을이 건드렸다가는 너도 나도 박살날 것 같아서 말이야."
"왜요?"
"서울 상황 정리하고 주인공이랑 스타팅 네 명이서 4P 들어가거든."
"......."
침착하자. 모든 사고 회로가 그쪽으로 돌아가는 그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그의 직설적이고 또라이같은 말에는 다른 의미가 함축되어있다. 그간의 대화를 통해 그 말 뒤에 내포된 의미를 생각하여 한 마디로 정리해보면....
"천가을이라는 역경을 이겨내는 것을 계기로 데스디나스 팀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만큼, 괜히 첫단추를 어그러뜨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
그는 정곡이 찔렸다는 것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속으로 그게 우스우면서도 딴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천가을은 빌런이 되는 과정에서 그 고생을 할텐데요? 당신은 천가을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뭐...다들 불쌍하기는 하지. 가을이 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 모두가 그렇잖아. 그런데 롸양,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전제조건으로 깔고 들어갈 것이 있어."
그는 수직선을 그었다.
천가을이 빌런이 되는 시점, 2020년 4월.
그리고 그가 내 몸에 빙의하여 이 의식세계로 잠들어 마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던 시점, 2000년 1월 1일.
"아직 25년은 훌쩍 남아있다 이거지. 천가을 지금 초등학생이야."
"조금 더 빨리 움직이지는 못해요? 당장 밖에 뛰쳐나가면 되잖아요. 마그마 밖으로 뛰쳐나가는 걸로."
"이게 문제지."
그는 자신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이쪽이야 내 기억과 정신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지만, 밖의 상황은 아니야. 나는 지금 실시간으로 괴인 피닉스의 폭주를 억누르고 있다고. 최소 20년은 걸려야 이 세계 밖에서도 내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걸?"
그가 말하기를, 세뇌된 피닉스의 인격은 자신이 깔고앉아 사라졌다고 해도 그 힘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고 했다. 그 바람에 간부 피닉스의 힘이 자신의 의식을 좀먹어머리게 된다면, 나는 영원히 이 신전에 갇히고 자신은 간부 피닉스로 변질될 것이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거지. 내가 조금만 더 일찍 나가잖아? 그러면 롸양 여체로 나가야 해요. 모든 기억은 동기화되지 않고, 극히 일부만 선별해서 나가야겠지? 그러다가 누구한테 반하기라도 하면 끝장이라고. 큥큥당하는 거지."
"무슨 이상한 말을. 그런데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정신은 육체를 따라간다는 말 몰라요? 그럼 당신이 반해봤자 누구한테 반하게 되겠어요?"
"여자?"
"그렇죠."
그는 당연한듯 내 성향을 짚었다. 다른 이들이 있다면 부끄러울 상황이었지만, 나는 내 성향까지 사랑해주는 그의 마음가짐에 안도했다. 그러면서도 참 상황이 재미있었다.
"저기요. 당신, 내가 만약에 당신이 사랑하던 여자들한테 반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엄청 마음아프겠지? 근데 괜찮아. 행복하다면 오케이다."
그는 담담히 얘기하며 손사레를 쳤다. 살포시 웃으며 이해한다는 얼굴에 나는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 순간 헷갈렸다. 의식세계라 그의 생각과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네가 설령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더라도, 나는 그걸 응원할 거야. 원래 성향이 그런 걸 어떻겠어? 후후."
"그런데 만약에 내가 다른 여자가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게 된다면요?"
"황송할 따름입니다."
"......당신, 혹시 여자가 될 생각 없어요?"
나는 그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의 기억 속에서 육식계의 여인들이 그에게 유혹을 하듯, 그가 좋아하는 가슴을 딱 붙이며 올려다봤다. 그는 그 답지 않게 상당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여자가 된다면 저, 진짜 생각 많이 바꿔볼 수 있는데."
"......나는 박는 사람이지 박히는 사람이 아니야."
"후타나리까지는 봐드릴게요."
"......5분만 생각 좀."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할 때만 여자가 되는 게 아니라 몸도 마음도 여자가 되겠지만, 나는 그를 배려하여 그의 남성성을 남겨 줄 의향이 충분했다. ...그, 남겨둔 상태에서 한 번 쯤은 넣게 해줄 생각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그가 여자가 된다는 조건 하에.
"롸 아가씨."
그는 진지한 얼굴로 나와 눈을 마주했다. 히어로, 빌런 논의를 할 때보다 더 진지한 눈빛이었다.
"백합 플레이 도중에 남자 난입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그러니까 당신 말은."
"네가 유나나 가을이랑 하다가 내가 끼어드는 거지. 16P+1P 콜?"
"......."
정령 여섯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열, 총합 16명으로 백합 할렘을 차린다라. 그는 과거의 나라면 듣자마자 바로 덥썩 낚아챘을 제안을 했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제안에 화답할 뻔 했다.
'이젠 아니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나. 나는 지금 그런 할렘도 바라지 않는다. ...물론 밥상이 차려지면 엎을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한 명이면 족했다.
"저는 2P만 하고싶은데요."
"......끄응, 그래? 그럼 누구? 유나니? 역시 유나겠지? 아니면 속서이 같은 슈리인가? 정령 중에 한 명?"
"맞춰보세요, 푸흐흐. 당신은 누군지 절대로 볼 수 없을 거니까."
한 가지 말하자면, 내 신전에는 거울이 없었다.
* * *
D-996
"그럼 최종적으로 정리해보죠. 살려야하는 사람의 수는?"
"16명 히로인 모두. 그리고 마지막에 너."
"퍼펙트."
나와 그는 적당히 거래를 주고받았다. 16명-나까지 포함하면 17명 모두를 살리는 걸 전제로 하되, 그들은 반드시 구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합의를 봤다. ...나를 위한 할렘을 만들자는 이유가 아니라, 그가 내 간곡한 설득 끝에 히로인들의 기구한 운명을 구원하는 것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잊지마요. 그들 또한 당신이 플레이하던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니예요. 엄연히 살아있는 한 명의 인간이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고통받고 있을 거라고요."
"그래, 그래. 역지사지. '만약 네가 석하랑에게 빙의했다면 어떨까'. 충분히 이해했으니까 그건 더 얘기 안 해도 돼."
"........"
귀찮다는 듯 심통을 부리는 그의 말투에 내가 다 심통이 났다. 나는 백허그 한 채 가슴을 주물럭거리던 그의 손을 잡고 내 허벅지에 올렸다.
"가슴 만질래."
"싫어요. 5분간 금지."
"......롸 양, 그거 알아? 가슴은 엉덩이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나는 그의 몸에서 살포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서로 마주보는 자세가 되었고, 나는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그럼 천가을이나 지륜은 어디 뭐 엉덩이에 혹달고 다녀요? 걔들은 힙보다 바스트가 더 크잖아요."
"그냥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거야."
그는 내 장골부터 서서히 손으로 마사지를 시작했다. 그와의 내기 승부를 수 차례 주고받은 결과, 그는 이제 사실상 내 몸에서 한 곳만을 남겨둔 채 마음대로 만질 권리를 손에 넣었다.
"정말, 그렇게 다른 여자들 먹어놓고는 나까지 먹고 싶어요?"
"롸 양,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걔들을 게임 캐릭터로서 만난 거야. 실제로 만나면 다르겠지만...적어도 너와는 확연히 다르지. 비록 상황이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너랑 나랑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됐잖아? 실제로. 현실로. 그리고 분명히 말할게."
그는 내 얼굴을 붙잡았다.
"나 유나 빼고는 전부 1번밖에 루트 공략 안했다?"
"예. 반 년동안 한 루트씩 공략하고, 제 루트 진입하겠다고 나머지 플레이는 다 이유나 루트로 직행했잖아요. '피닉스 루트 망했으니까 유나 루트 밟고 다음 회차 고고'하면서. 이유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실제로 만나면 엄청 미안하겠지."
그는 멎쩍은 얼굴로 쓰게 웃었다. 장난스럽게 이야기는 하지만 나는 그의 진심을 알고 있다. 유나가 이계신의 화신체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피닉스 루트였던만큼, 그가 내 루트를 밟은 것을 통해 그는 진정으로 이유나를 구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행위와 테크닉을 연마하게 된 건, 조금이 아니라 상당히 불쾌했다.
"저기요, 유나랑 몇 번 했어요?"
"......내가 죽은 횟수보다는 더 많이 했을 걸?"
"그래요? 흥, 그러시구나. 가상현실게임에서 시간배속기능까지 써서 한 게 유나랑 하신 거구나. 밥먹고 떡치고 커피먹고 떡치고 영화보고 떡치고 아주 떡떡떡떡 하신게 소설로 쓰면 거의 실록급으로 나오겠네요. 어디 한 번 읊어보실래요? 유나랑 당신이 벌인 팔만떡장경을."
"그, 뭐라고 해야하나. .......롸 양, 너 혹시 질투하니?"
미쳤나.
"미쳤어요? 제가 왜 질투를 해요? 제가 당신한테 몸 만지는 것 좀 허락했다고 해서 기고만장하시는데, 제가 아직까지는 제 안까지 허락할 정도로 마음을 열지는 않았거든요? 착각도 유분수지. 맨날 괴수 피닉스 공략하면서 패턴 파악해서 제가 쉬운 여자인 줄 착각하시는데, 저는 결코 그런 가벼운 존재가 아니라고요. 한 세계의 정령, 시-인이었어요! 알겠어요?! 당신 기준으로 판타지로 따시면 불의 여신! 그 이름도 찬란한 ■! ...통일신 라!!"
이름을 빼앗긴게 이리도 짜증이 날 줄이야. 매번 그에게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어정쩡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상당히 불쾌했다.
"안되겠어요. 지금부터 머리를 짜냅시다. 새롭게 이름을 정해야겠어요."
"뭘로? 우리 지금 애들 누구 어떻게 살릴 지 정하기로 했잖아."
"시끄러워요. 걔들이 중요해요, 내가 중요해요?"
"너지. 그래, 이름 얘기는 뭐야?"
"애칭. 당신이 나를 부를 애칭을 정하도록 하죠."
"청화(靑火)."
칼같은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