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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61화 (461/1,497)

〈 461화 〉1부 20장 18

"......."

창염의 피닉스는 게임 속 존재. 그 화제는 나로서는 반기지 않지만, 이 놈의 호기심 때문에 내가 먼저 화두를 던졌다.

"이른바 갭모에라고 하는 거야. 청순가련의 대명사인 유나가 사실은 주인공이랑 하는 섹, 아차. 금기어지. 큥큥 한 번에 반해버리는 음란한 아이였다는거랑 같은 이치지."

"......뭔가 이해할 듯 하면서도 모르겠네요."

섹스 한 번에 반해버리는 여자가 있을까. 나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상대에 대한 호감이 이미 쌓여있다면 그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가령 내 앞에 있는 그-

화륵.

"이번에는 왜 죽이는 거야?"

"당신 때문에 대화가 또 주제에서 엇나가서요."

"먼저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한 건 롸느님인데."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삼천포로 빠지게 만든 이유에요."

"자기 잘못 인정 안하고 아득바득 우기는 롸 아가씨도 귀엽네. 좋아. 이번은 넘어갈게."

그는 키득키득 거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래서 히어로라는 건 말이야, 상당히 제약이 많은 존재라고. 일단 가장 큰 문제가 뭔지 알아? 돈이야, 돈. 너 지금 내가 2천억 태웠으면서 돈문제를 거론하는게 얼척없었지?"

"......."

나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양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는 돈이라는 건 나한테 쓸 돈을 얘기하는 게 아니야. 네가 먹을 딸기 사오고, 라떼 말아줄 바리스타 사장님 고용하고, 그 건물 사고, 그 건물 괴수들에게 파괴 안 당하게 지켜줄 경비원들 고용할 돈이라 이말씀."

"그런 돈이라면 어쩔 수 없네요. 승인합니다."

딸기는 중대 사항이다.

내가 그를 죽일 때마다 세 번은 참고 죽이는 이유는 그가 육체를 조종하던 마지막 순간에 5단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한 입에 털어먹고 이곳으로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지? 그런데 이게 그냥 놔두면 구하기가 정말 어려워져. 나중에 테라사이트들이 활개를 치게 되는데, 이 매개체가 바로 일곱 가지 음식이야. 파리가 병원균을 옮겨대는 것마냥, 전세계에 퍼져있는 음식에 사람을 괴인으로 만드는 것들이 즐비하게 되지."

"딸기, 돼지고기, 민트초코, 밀, 홍차, 콜라, 그리고...."

"술."

"잠깐만요. 석하랑은 블루베리 성애자라면서요?"

"걔 엄마가 돼지고기 좋아했거든. 정확히는 돼지국밥. 부산에서 살면서 돼지국밥 든든하게 먹고, 그 힘을 모두 애 만드는데 쓰는 거지. 어떻게 만난지 얼마 안되서 간부의 몸에 애가 들게 되겠어? 하루가 멀다하고 큥큥하니까, 애가 안에서 죽지 않고 계속 아빠랑 엄마의 마력을 전해받은 거야. 아빠가 뿌린 정액으로."

또 의도치 않게 쓸데없는 정보를 들어버렸다. 그는 나와 원작의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를 좋아했다. ...언제부턴가 나도 포기하고 그를 통해 원작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하루라도 붕가붕가 걸렀으면, 석하랑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다 이 말씀."

"그래서 당신도 그렇게 저랑 하고 싶어요?"

"지금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합체하고 싶은 걸?"

"......휴우. 알겠어요. 그럼 당신, 그런 섹스 삼매경으로 태어난 석하랑도 히어로를 하는데 당신이 히어로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나는 간신히 이탈하는 화제를 원래 궤도로 올려두었다. 궁금한 것은 참을 수 없던 나와 내게 설명해주는 걸 좋아하는 그.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만무했다.

"글쎄. 또 혼자서 청승맞게 호텔 들어가서 뷔페 삼끼 하지 않을까?"

"거봐요. 히어로도 돈을 엄청나게 쓸 수 있잖아요. 매일매일 호텔을 전세내어서 한 끼 식사를 하는데, 히어로 길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치만 석하랑은 특이케이스야. 어려서부터 쌓아온 돈도 많고, 뭣보다 나라랑 후원 기업에서 나오는 품위 유지비가 장난 아니거든. 나라의 유일한 여성 S급 히어로가 라면도 못 끓여서 매일 파스타만 먹는다고 생각해봐. 나라도 당장 쉐프 한 명 전담으로 붙여서 먹이겠다."

"그 쉐프가 집 상태 보고 기겁하면서 도망쳤다면서요. 외국으로."

"그래. 그 친구가 선의철 피해 도망다니려고 성형하고 로마로 튀었지. 후후."

...그의 기억 속 석하랑의 집은 확실히 심각하기는 했다. 내가 그곳을 봤다면 아마 바로 건물 통째로 태워버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집은 더러웠다.

"그에 비해서 빌런들 사는 것 생각해봐. 간부들은 말할 것도 없지. 재계 빌런 은유하는 국가 최대 그룹의 회장으로 매일매일 사치를 부리고, 정계 빌런 백희아는 유서깊은 가문의 수장으로 선의철과 국가를 양분하는 정치 세력의 흑막이야. 외국의 빌런들만 하더라도 그렇지. 나쁜 놈들이 더 잘 살고 있잖아?"

"그건 그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니까 그런 거죠!"

어쩌다보니 내가 인류의 입장에서 정론과 상식을 얘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그의 논리는 괴팍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내가 히어로 짓거리를 1년씩 골백번도 해보니까 알겠더라고. 100번 잘해도 한 번 잘못하면 개쌍욕을 들어먹는데, 100번 잘못하다 1번 잘하면 그건 또 '저 씨발놈 그래도 할 때는 하네'소리를 듣더라고?"

"그 한 번이 세계 평화고요?"

"너를 살리고, 나도 살고, 성주 죽이고, 이계신 죽이고. 그 모든 일이 단 하나의 프로세스지. 그걸 위한 정답은 단 하나!"

"섹스?"

"예스!"

그는 박수를 치며 나를 끌어안으려했다. 나는 그를 불태워버렸고, 그의 잔재가 내 얼굴을 덮혔다.

"......성행위가 그렇게 좋은 건가?"

어차피 이 세계에서 나가지도 못할텐데, 한 번은 경험해 봐도 나쁘지 않을-

짝!

나는 내 얼굴을 양손으로 때려 정신을 차렸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끼이익.

그는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신, 라시여! 제가 세계 평화를 이룩하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뭔데요?"

"저와 떡-"

나는 그를 피떡으로 만들어버렸다.

"와, 처음으로 맞아 죽었어! 하하!"

"......."

이런 놈에게 내 몸을 허락할 생각을 하다니, 아무래도 뇌가 슬슬 저 놈을 닮아 미치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 * *

D-777

히어로, 빌런. 아직까지 어떤 노선으로 움직일 지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내 신전을 새롭게 리모델링했다.

“서울 좋아?”

“좋네요. 무너진 건물하며 곳곳에 남은 잔해가 정말로 아름다워요. 이게 세계가 멸망하게 된다면 그 뒤의 흔적이 되겠죠.”

“그렇지. 지금 네가 구현한 이 세계가 내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원작의 서울’. 그리고 이제….”

딱.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기억을 더듬어, 3차원 원작 속 폐허가 된 서울이 아닌 그의 정신 속 4차원의 서울을 만들어내었다. 건물들은 기존보다 훨씬 더 높고 고급스러워졌고, 사람들의 옷은 훨씬 더 세련되었다. 나는 엄청난 인파에 정신이 아뜩해졌다.

“이게 당신의 세계….”

“마력으로 구현화한 세계지. 하지만 이 세계는 어디까지나 꿈 속 세계 같은 거니까, 실체는 아니야. 막 이렇게 해도 된다는 거지.”

그는 자판기 앞에 서서 누군가 오기를 기다렸다. 얼굴조차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남자가 신용카드를 대자마자, 그는 자판기의 음료를 두 개 눌러 잽싸게 꺼냈다.

“그거 범죄인데요.”

“천성이 빌런이지.”

“다른 사람 걸 빼앗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지.”

“오, 나도 그 생각은 못했는데. 역시 우리 통하는 게 많아. 후후.”

“.......”

다르지만 거의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서 차가운 캔음료를 받았다. 딸기과즙이 들어간 탄산음료. 그는 싸구려 캔커피였다.

“조금 더 비싼 거 마시지 왜 그런 거 마셔요?”

“어차피 잠깐 정신차리려고 마시는 거니까 아무거나 괜찮아.”

그는 내게 빈 손을 건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인파를 헤치고 나간 거리의 끝에는 넓은 강이 나왔다. 한강. 그리고 여의도. 창염의 피닉스가 자신을 희생할 곳.

“악취미네요.”

“그냥 구경 한 번 하자는 거지. 원작보다는 훨씬 예쁘지? 잠깐만.”

그는 손으로 내 오른쪽 눈을 가렸다가, 왼쪽 눈을 가렸다. 각각 두 개의 전경이 들어왔고, 멸망한 서울과 발전된 서울의 모습이 번갈아 스쳤다. 그는 낄낄거리며 다 마셔버린 빈 캔을 한강에 집어던졌다.

화륵.

나는 캔이 물에 들어가기 전 캔과 그를 함께 불태워버렸다.

“왜 나까지 태우는 거야?”

“쓰레기는 소각이에요.”

“...미안. 원작 한강은 쓰레기장이나 마찬가지라서 말이야. 시청사의 뱀을 죽이기 전까지는 5급수만도 못한 곳이거든.”

“시청사의 뱀?”

“아, 서울시청에 있는 이무기같은 S급 괴수야. 아지…. 마암룡의 새끼 중 하나지.”

그는 내가 모르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정확히는 내가 그가 얘기하는 것에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고, 그는 내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면서 나와의 대화를 주도했다.

“서울에는 두 개체의 S급 괴수가 있어. 서로 아는 사이지. 둘 다 정치인이 괴수가 된 케이스였거든. 한 명은 전에 말한 광검의 불알친구-촉수꺼비. 큐브 없애려다가 괴수가 되어버린 남자. 또 한 명은 선의철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전 서울시장. 서울시청에서 끝까지 인명구조작업을 벌이다가 괴수가 된 거지. 후후.”

“선의철은 개새끼라면서요? 근데 정치적 스승?”

“배신 때린 거야. 그나마 마포대교 폭파 안시켰던 것도 그 양반에 대한 마지막 의리일 걸? 결국에는 시청에서 옥쇄하고 버티다가 그렇게 되었지만.”

“여러모로 당신과 비슷한 쓰레기네요.”

그는 진심으로 충격적인 소리를 들었다는 양 표정이 굳었다. 나는 괜히 그가 상처입지 않았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너무 심한 말이었나요?”

“선의철이랑 비교되니까 뭔가 억울한데. 풀발 3cm인 양반이랑 나를 비교하다니,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어. 너 지금 그거 너랑 절풍이랑 비교한거다?”

“죄송해요. 제가 큰 실수를 했네요. 가슴 만질래요?”

“응.”

그는 벤치 의자에 앉았고, 나는 그 위에 올라탔다. 그의 손이 가슴을 아래에서 받쳐올리니 이제 안정감마저 느껴졌다.

“선의철은 서울을 버렸지. 그런데 주요 무대는 서울이란 말이야. 히어로로 서울을 지키려면 여러모로 제약이 많아. 신서울에서 서울로 매일매일 오다녀야하고, 또 서울에서 번 모든 코어를 국세로 내야하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10%씩 선의철 같은 놈한테 세금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니까 화딱지가 나더라고. ”

“그래서 서울에 알박기로 빌런 조직을 만들겠다?”

“응. 히어로로 간다고 하더라도 그런 헌터 조직이나 그에 준하는 빌런 조직은 필요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조직 말이야.”

“조직이라….”

나는 그의 말에 절로 의문이 들었다. 조직. 그건 히어로/빌런이라는 이지선다의 선택 말고도 나와 그가 이견을 보이는 부분이었다.

“꼭 그런 애들이 필요해요? 애들 관리하는 거 귀찮기만 하잖아요. 언제는 애들 뒷처리 하기 귀찮다면서요.”

“처음 방향만 잘 잡아주면 그 이후에는 편하지. 뭣보다도 조직원이 있잖아? 그럼 너랑 내가 호텔 같은 곳에서 마음껏 사랑을 나눠도 그거 다 조직원들이 치우도록 짬 때리면-”

화륵.

그가 재가 되면서 나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는 자연스레 내 옆에 붙어앉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된다 이거지. 아, 이건 너무 내 입장에서 얘기했나. 호텔 룸서비스 알지? 그런 거 갖춰놓으면 원하는 시간에 딸기 케이크 가져오라고 마음대로 주문할 수 있단다.”

“...자꾸 딸기, 딸기. 제가 고작 그런 거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해요?”

“응.”

“......아으, 짜증나.”

그는 나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비겁하게 딸기를 인질로 삼다니, 역시 그는 본인의 말대로 천성이 빌런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도저히 그가 플레이한 기록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본성을 감추고 어떻게 그렇게 친절한 신사를 연기한 거예요?”

“재능?”

“재수없어.”

“최고의 찬사야. 그래서 롸양, 우리 잠깐 장소를 바꿔볼까?”

그는 내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으며 나를 일으켜세웠다. 그냥 내가 걸어가면 되는데, 그는 굳이 공주님 앉기를 하겠다며 땡깡을 부렸다.

“이동하면서 가슴과 허벅지를 마사지 하기 위한 방법이야!”

“그냥 제 가슴이랑 허벅지를 만지면서 이동하고 싶다는 거잖아요.”

“그렇지.”

여기서 또 싫다고 하면 왜 공주님 안기로 이동을 해야하는 지 일장연설을 펼칠게 뻔했기에, 난 그가 인도하는 대로 이동했다. 그는 한강 둔치를 따라 걸으며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여기서 라온이가 펜릴이랑 싸우다가….”

“...이 강을 지나가겠다고 다들 난리를 부리다가, 결국 유하가 먼저 빠졌지. 1억짜리 코어 코트가 똥물에 퐁당 빠져가지고….”

“...이 즈음에서 유나랑 비탈길에서 야외 큥큥했어.”

그가 지나가는 모든 곳에 그가 공략한 히로인들과의 흔적과 기억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나와 성행위를 하고 싶다며 끊임없이 조잘대기는 했지만, 그는 분명히 히로인들과 겪은 일들에 대하여 즐거운 추억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과거의 인연이라.’

내가 만약 마음을 허락하고, 내가 만약 몸을 허락하면 그에게 있어서 나도 이런 식으로 과거의 추억이 되어버리는 걸까. ...그건 좀 싫었다.

“다 왔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그가 가리킨 곳은 평범한 공터였지만, 그는 이 장소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듯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기가 바로 창염의 피닉스가 백청화에게 힘을 건네준 장소지.”

피닉스가, 소멸할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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