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460화 (460/1,497)

〈 460화 〉1부 19장 16

"......."

그가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진솔하게 자신의 감정을 부딪혀오는 이가 있던가. 그건 그의 말에 따른 '정령' 시절에도, 잠시 세뇌를 당했던 간부 시절에도 없었다.

"......제가 흔들리는 건 당신이 상위 차원에서 온 존재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저랑 같은 세계의 존재였잖아요? 그럼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거라고요."

"아닐 걸?"

"백청화한테 걔가 마음이 간 건 어디까지나 설정이 그런 거니까 그런 거라고요. 미연시니까 당연히 해피 엔딩으로 가는 거죠. 실제로 사람이 그런 식으로 반할 것 같아요? 막 골목길에서 마주치면서 '어맛'하면서 반하는 게 말이나 가당키나 해요?"

"롸야, 그게 다 왜 그런 지 아니?"

그는 가슴을 만지던 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았다. 체스 대결에서 캐슬링을 무르게 되면서, 그는 내 얼굴을 만질 권리를 얻어냈다.

"마주친 상대가 잘생기거나 예뻐서 그런 거야. 상황은 항상 우연찮게 이어지지만, 거기서 썸으로 나아가는 건 마주친 상대의 외형이 호감이기 때문인 거지."

"그래서 당신 취향은?"

"너. 얼굴보고 반하고, 몸매보고 반했지."

그는 대놓고 나의 외형을 칭찬했다.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막상 대놓고 칭찬을 들으니 썩 기분은 나쁘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다른 예쁜 히로인들은 두고 왜 나예요?"

"네가 제일 아름다워서?"

"본심은?"

"제일 꼴렸-"

화륵.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롸야! 내 아를 낳아도!"

"당신 하는 거 봐서 생각은 해볼게요. 생각만."

"점점 더 가드가 내려가고 있는데. 흐흐."

그는 능글맞은 웃음으로 다시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의자에서 나오지 않자, 그는 내 앞에 주저앉아 발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맨발로 다니는 거 안 아파? 나름 실내인데 슬리퍼 신고 다니는 건 어때?"

"어차피 정신세계고 마력으로 발바닥 보호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예요."

"나중가면 바닥에 엄청하게 흥건하게 고일 거거든. 아, 뭐냐면 말이야. 너와 내가 흘린 사랑의 결실이 끈적하게-"

화륵.

* * *

D-125

"그래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슬리퍼라도 신는게 좋지 않을까?"

"이보세요, 당신 지금 불타서 죽었다 살아난 거거든요? 자연스럽게 돌아와서 발바닥 간지럽히지, 햣...?"

그는 내 발등에 입술을 맞췄다. 도발적인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아주 천천히 입술을 오물거리며 발등에 키스하는 통에 나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자존심은 없어요?"

"나야 네 피닉스니까."

"이럴 거면 이름을 허락하는 게 아니었어."

"흐흐, 롸야. 후회는 언제나 늦단다. 나처럼 말이야."

그는 반대편 발등에도 키스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

"이렇게 된 거 후회해요?"

"......."

그는 더이상 웃지 않았다. 그가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그에 대한 추궁을 이어나갔다.

"원래 세계의 모든 것을 잃게 되고, 2천억이라는 돈까지 버리면서, 데이터 속 폴리곤 쪼가리랑 섹스 한 번 하겠다고 뛰어든 거 후회하시냐고요."

"......후회하지. 그런데 어쩌겠어.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로 안 그랬겠지."

그는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나와 어깨동무를 했다.

"그런데 그건 어차피 지나간 일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좆대로 생각하다가 좆된 거지. 흐흐, 그래도 뭐 좋잖아. 내가 생각하던 그 데이터 쪼가리가 사실은 살아있는 한 인간이었다는게."

"인간 아닌데요."

"정정, 존재였다는게. 설마 진짜로 한 세계를 납치해다가 게임으로 만들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 새끼들이 미친 놈들인 거지. 그러니까 후회는 안 해. ...아니다, 정정할게."

그는 진지한 얼굴로 내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만약에 네가 게임 속 존재가 아니라 진짜 한 세계의 주민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리고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될 걸 알았다면 말이야. 나는 그 상황에서 무슨 선택을 했을까?"

"2천억 받고 튀었겠죠."

"글쎄. 아닐 걸?"

그는 확신은 하지 못했다.

"아마도 아닐 거야. 엄청나게 고민은 많이 했겠지만, 후회할 거 뻔히 알고 있었겠지만 이 길을 선택했을 걸? 너도 알겠지만 내가 단단히 미친 놈이라서. 떡 한 번 쳐보겠다고 2천억을 태운게 나야. 흐흐."

"......자랑처럼 얘기하지 마요."

나는 그를 발로 걷어차 바닥으로 굴러떨어뜨렸다. 그는 굴러 떨어지면서도 나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나는 너라면 BDSM도 환영이야!"

쪽팔려서 태워버렸다.

...

쪽팔려?

* * *

D-394

"이유나, 박라온, 김누리, 슈리, 히카리.

샤오린, 은유하, 아르엘, 천가을, 백희아.

...절풍, 석하랑, 지륜, 개천광, 마암룡, 환룡."

"응."

"그게 당신이 지금까지 존나게 떡치고 사랑한다고 속삭인 사람들이에요. 맞아요?"

"맞아."

"그런데 이제는 저를 사랑하니까 모든 사람들을 버릴 거다?"

"응."

그는 여전히 웃으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미친 존재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저런 잔인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모두를 버리고 나만 살리겠다?"

"과거로 돌아온 시점에서 어차피 남남이야. 내가 알던 창염이 우리 롸양이 아닌 것처럼, 그 녀석들도 본인이 아니지. 운명이 있다면 살아가는 상황은 비슷하겠지만."

"그건, 그건 너무 불쌍하잖아요."

나는 그들에게 측은지심과 미안함을 느꼈다. 왠지 그들에게서 그를 빼앗은 것 같은 기분도 있었지만, 나 때문에 한 때는 사랑했다고 속삭이던 그들을 가차없이 버리겠다는 그의 생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게임 속 히로인이라고 해도 같은 사람이잖아요?"

"다른 존재지. 그걸 깨닫게 해준 건 다름아닌 너야."

"......."

그는 내가 창염과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식한 뒤로, 그가 우리의 세계를 통해 간접 체험한 '원작'과 '실제'의 여인들에 대해서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차갑게 대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선뜻 말리기도 어려웠다.

"신라, 나는 너를 살리고자 이 세계에 온 거야. 다른 애들까지 신경 쓰면 머리 터질 걸? 그리고 이미 기본적인 조치는 취해뒀어."

"만나는 간부마다 '너 정령!'외치고 다닌 거요?"

"그래. 너 정령이라고 듣자마자 바로 정신 차렸잖아? 나머지는 걔들의 몫이지."

펜릴, 히드라, 아지다하카. 셋은 그가 내 육체를 움직인 그 하루 동안에 바로 정령으로 각성했다. 그의 말에 따라 '조건'을 갖추지 않고 강제로 각성시킨 탓에 간부의 자아와 정령의 자아가 싸우게 되었다고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간부의 자아가 이기게 되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해결하면 되고, 정령의 자아가 이긴다면 내 입장으로서는 좋지. 성주와 이계신을 쓰러뜨릴 수 있는 전력이 될 테니까. 모든 동료들이 다 똑같은 거야. 회귀라는 게 다 그런거거든. 미래에서 사랑했던 존재라고 하더라도, 과거에 돌아오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될 수 있는 거지. 유부남 유부녀가 총각 처녀 시절로 돌아간다면 과연 원래의 짝과 다시 결혼을 할까?"

"당신은요?"

"나는 로맨티스트라서."

"제가 사랑스러워서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런 거기도 하지."

그는 내가 작성한 계약서를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것도 너와 나 사이의 '게임'이라고 하자. 음, 그래. 내 사랑을 증명하기에도 딱 좋은 기회가 되겠어."

그는 가차없이 엄지를 이로 깨물어 피를 만들어냈다. 비릿한 혈향이 내 코에 스쳤고, 그는 내가 들이민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다른 모든 애들을 구하고 성주와 이계신을 쓰러뜨린다. 너는 내 속에 숨어서 성주의 눈을 피하고, 나는 네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세계를 구하려든다. 그렇게 '기억할게'."

"......."

허점 투성이에 그로서는 일방적으로 손해만 보는 계약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제안한 것'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였다.

"진짜 당신은 미쳤어요."

"그래, 미쳤지."

그는 내게 계약서를 내밀며, 항상 그랬던 것처럼 웃었다.

"나는 너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할 거야."

* * *

D-647

"그러니까 히어로로 활동하는 거예요.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것도 다 히어로로서 활동한 거잖아요?"

"또 애들 앞에서 웃는 척하면서 똥 닦아주는 거 귀찮은데."

그는 대놓고 싫은 기색을 내보였다. 내 앞이라고 나름 더럽거나 불결한 표현은 지양하던 그가 저런 저속한 말을 하는 건 상당히 의외였다.

"유나 섹드립 치는 거 알면서 모르는 척 일일이 다 받아줘야되고.... 라온이 생리대 사러 가는 것도 귀찮고.... 누리는 틈만 나면 열등감 느껴서 걸핏하면 탈출하잖아. 그런 애들 셋 데리고 또 하라고?"

이유나, 박라온, 김누리.

그가 '스타팅'이라고 표현하는 셋은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한 '팀 데스디나스'의 초기 멤버이자 핵심 멤버였다.

'이유나는 여신.'

이계신의 화신체라는 압도적인 스펙. 내 입장으로서는 상당히 짜증나는 설정을 가진 존재였지만, 결국 성주가 안에 이계신을 박아넣어 제 것으로 부리겠다는 야욕의 희생양인 것에 나는 측은지심을 느꼈다.

'박라온은 구 히어로들의 상징, 김누리는 신 헌터들의 상징.'

오래전부터 히어로로 활동하던 박라온, 그리고 새롭게 헌터로 떠오르는 김누리 사이의 알력이 화합을 이루며 한국-나아가 세계 전체의 이능력자들이 하나로 힘을 모으게 되는 것.

그것이 그가 지금까지 성주를 쓰러뜨려 온 방법의 기본 골자였다.

'그런데 그런 애들을 버리려고 한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우스갯소리일까. 나는 은근슬쩍 그를 떠보았다.

"제가 섹드립 치면요?"

"황송합니다."

"제가 생리대 사고 오라고 하면요?"

"메이커는 말 안해도 쓰는 거 미리 숙지하고 있을 것이며, 검은 비닐 20원 내서라도 사서 챙겨오겠습니다."

"제가 틈만나면 당신한테 빡쳐서 죽이는 거는요?"

"내가 너를 화나게 했으니까!"

화륵.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요?"

"화낼 때 입술 깨무는 거, 정말 섹시하단 말이지. 음, 음, 매번 반할 것 같...미안."

그는 금방 꼬리를 말았다.

장난기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나에 대해서는 적정선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온전히 나에 대해 완벽이라고 할만큼 파악하고 있었기에, 내 비점을 정확히 알았다. 심지어 내가 '오늘은 좀 일찍 짜증을 부려볼까'하고 마음먹은 순간 마저도.

'지금도 그랬지.'

먼저 죽이고 다음에 정색을 하니, 정색을 하고 난 뒤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여러모로 짜증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여인들에게 하던 행위를 모두 끊고 내게만 하겠다는 것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좋아요. 원래 화제로 돌아가도록 해요. 히어로냐, 빌런이냐. 히어로 하세요."

"그러니까 롸 아가씨, 이게 그렇게 단정적으로 정할 문제가 아니라니까? 첫 단추를 한 번 잘못 꿰면 영영 돌이킬 수가 없다고."

그는 원작의 나, 그러니까 '창염의 피닉스'가 가진 이미지를 그대로 이어가기를 바랐다.

"거슬리면 모두 죽이고 보는 냉혹한 살인마! 하지만 딸기에는 사족을 못쓰는게 포인트. 원래 성격을 닮아서 너무나도 착실하고 성실하지만, 성주의 영향으로 인해 세계를 멸망시키는데 전심전력을 다하는 존재. 그냥 취미 하나가 독특한 악역 빌런이잖아."

"객관적으로 보니까 인류 입장에서는 완전 구제불능의 학살범이네요."

성주 다음가는 학살자가 나였다.

'심지어 멍청이였고.'

최강대국인 미국을 힘으로 협박하기 위해 나라의 절반을 불태워버리겠다는 협박을 하면서, 'USA'의 아메리카에 대한 구분을 '대륙'으로 착각하여 남미 전체를 태워버린 실수는 빡대가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건 결코 내가 아니다. 나는 적어도 그런 실수는 하지 않으니까.

"완벽초인같은 존재도 맹탕인 부분이 있으니까 귀여운 거지. 후후."

"그런 존재가 힘을 넘겨주고 갱생을 하는데 인기가 많았어요?"

"원래 공략불가 히로인이 제일 인기 많은 법이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