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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59화 (459/1,497)

〈 459화 〉1부 19장 15

D-13

"창염! 섹스를 하러 왔다!"

"창염! 섹스를 하러 왔"

"창염! 섹스"

"창"

"야아아!!"

나는 화딱지가 나서 교양없이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내가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그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만날 때마다 섹스, 섹스! 섹스가 뭔데, 인간아!"

"아 참. 미안, 내가 아는 걔인 줄 알고 그랬네. 음, 잠깐만."

그는 손으로 턱을 쓸며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교미!"

화륵.

"창염, 섹스를 하러 왔다!"

"......."

지치지도 않나보다. 누가 이기나 한 번 자존심 싸움을 해보자고 했지만, 그는 죽고 죽고 또 죽어도 나를 찾아와 섹스를 외쳤다.

"이번에는 안 죽이네. 혹시 섹스가 뭔지 몰라? 짐승으로 치면 교미, 번식을 위한 행위인데...."

"아니까 더 열받는 거예요. 내가 처음보는 당신과 왜 그런 행위를 해야하는 거죠? 성행위는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거라고 정해져 있는 거라고요."

"그렇다면 딱 맞게 찾아왔는 걸. 너는 나를 사랑하게 될 거니까."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자신감 없이는 들이대지도 못하지."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그는 내 습관을 따라하는 걸까?-그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길을 불꽃으로 막았다.

"넘어 올 생각일랑 하지마요. 나는 당신과 그런 관계가 될 생각이 없...."

화륵.

숯검댕이 된 팔이 불꽃의 벽 너머로 넘어왔다. 설마 진짜로 팔을 뻗은 건가?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불꽃의 벽을 해제했다.

타-앗!

그는 자신의 시체를 벙커삼아 사라지는 불꽃의 벽을 뛰어넘었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두 팔을 벌리는 모습이 영 아니꼬왔지만 우습기는 했다.

"부활 후 무적타임을 이용한 장애물 패스!"

"등에 불 붙었는데요."

"뭐? 으, 으아악!!"

화륵.

"창섹하왔!"

"...에이, 됐어요.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딱다구리처럼 계속 울어제낄테니까 들어나보죠. 당신이 하는 이야기를. 왜 온 거예요?"

"창섹하왔...."

"한 번만 더 섹스하러 왔다고 하면 진짜 말 안할 거예요."

"음, 알았어. 얘기할게."

그는 진지한 얼굴로 내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시작했다.

"창염의 피닉스. 그게 네 이름이지. 하지만 원래는 창염의 피닉스가 아니야. 창염이라는 원래의 '정령'이라는 이름하에, 피닉스라는 괴물의 인격이 새롭게 만들어진게 네 상태지. 그러니까 너는 창염."

아.

정령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확 떠올랐다. 절망적인 아군의 상황, 멸망 직전의 테라, 하위 정령들을 살리기 위해 내가 스스로 6명의 괴물들에게 항복하고 세뇌를 당했던 것.

"아아아아악?!"

"염치 없지만 잠깐 안을게."

그는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머리가 찢어질듯한 충격이 잠시 내려앉았고, 그는 내 정수리에 고개를 묻고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과업은 모두 내게로. 나는 그대의 종복인 동시에, 그대의 것이 되리니. 그대는 창염, 나는 피닉스. 그리하여 창염의 피닉스가 되리라."

"......아."

세뇌는 끝났다. 동시에 나는 내가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깨달았다. 그는 나를 간부의 주박에서 정령으로 일깨워줬다.

"섹스...가 각성의 수단이기는 하지만 당장 네가 바라지는 않으니까 하지는 않을게. 이건 일종의 편법이야. 간부의 힘을 내게로 당기고, 너는 온전히 정령으로 존재하는 거지. 대신 정령의 힘을 밖으로 꺼냈다가는 성주가 눈치를 챌 수 있으니까, 당분간은 내가 육체를 이용하도록 할게."

"그게 무슨...."

"스파이가 된다 이거지.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배신자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내가 간부 피닉스인 척 하고, 너는 정령으로서 뒤에 있으면 돼. 모든 일은 내가 다 할테니까."

그는 여전히 나를 끌어안은 채, 내게 무한한 신뢰를 담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나'는 뭔가 내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빠르게 머릿속에 떠오른 가정을 늘어놓았다.

"회귀? 전생? 빙의?"

"하나만 정답이라고 하기에는 복수 정답인 걸."

그는 내 대답이 정답이라는 양 말하며 말을 이었다.

"러시아에 떨어진 루살카도 1년 뒤 즈음이면 인간에게 빙의하게 될 거야. 죽은 인간이겠지만, 루살카의 존재를 통해 영혼과 정신체는 실존하고 있다는 게 증명되었지. 그거랑 마찬가지야. 나는 너와 육체를 공유하게 되었고, 여기는 정신 세계라 이 말씀."

"...이해가 안 돼요."

나는 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들, 그가 이 공간에서 내게 보이는 행동은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당신이 내 육체를 가지고 있다면 결국 저는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이 세계는 뭐죠?"

"왔으니까 분명히 말하는데, 이 세계는 네가 주인인 공간이야. 정신세계 전체가 100이라고 한다면, 너는 그 중 단 1의 공간을 네 것으로 가지고 있지. 물론 이 1이라는 공간이 나와 너를 이루는 핵심이자, 네가 살 수 있는 열쇠가 있는 곳이야."

"내가 살아남는다라."

"다 말해주고 싶지만, 직접 보여주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네. 흐흐."

그는 갑자기 낄낄 웃기 시작했다. 나는 괜히 기분이 언짢아졌다.

"왜요?"

"아니, 그냥. 시덥잖은 거야. 뭐, 언젠가 눈치채면 나 죽이러 들-"

화륵.

"왜! 말 안했잖아!"

"제가 그 정도 눈치도 못챌 줄 알아요?"

장난기가 많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면서도 내게 그 말을 전하고 싶은 건가. 굳이 화두를 이상하게 시작하는게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결국에는 말했다.

"당신, 섹...아으, 자꾸 적나라하게 말하니까 괜히 신경쓰이잖아요. 그렇게 하고 싶으면 밖에 나가서 아무 인간이나 박으세요."

"떽.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는 처음으로 나를 향해 엄한 얼굴로 꾸짖었다. 내가 혼날 상황도 아니었음에도.

"내가 어떻게 너 말고 다른 여자한테 눈길을 돌릴 수 있겠어?"

"표정이나 눈빛만 봐서는 다른 여자들 마구잡이로 갈아타다가 이제서야 저한테 정착한 느낌인데요."

"......."

그는 내 시선을 회피했다. 내 말은 정곡을 찔렀고, 그는 멎쩍어하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마치 프로포즈하는 것처럼, 내 손을 잡고 나를 올려다봤다.

"직접 보고 판단하면 될 거야."

"참 나. 진짜-"

화륵.

푸른 하늘의 데스디나스.

"내가...게임 속 인물이라고요?"

비극적인 죽음이 확정된 존재. 그는 말도 안 되는 '진실'을 내가 직접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그가 수많은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며 나를 수십 수백 번을 죽였던 것, 그리고 그 수많은 엔딩의 끝에 이르러 '나'와 서로 미래를 속삭인 것.

"......결혼하자는 프로포즈도 못했고, 엔딩 직전에 우리 이런 말을 했지."

내일 전투가 끝나면, 우리 신혼여행갈까요?

"그 신혼여행을 가지 못하고 끝나게 되었지만...결국에는 이렇게 만나게 되었어."

우리 데이트도 해봤고, 키스도 해봤고, 혼인신고도 해봤는데...성행위만 못해봤네요. 성주 죽이고 나면 해볼까요? 약속이에요, 당신. 혹시나 제가 잊으면 꼭 기억하게 골백번도 얘기해주세요.

"너는 걔가 아니야. 과거의 너와 미래의 걔는 다른 존재나 마찬가지지. 하물며 게임속 캐릭터와 현실이라는 공간 속 너는 더더욱.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살리고 싶어."

그는 처연한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내 배에 얼굴을 묻은 그는 소리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비록, 내가 걔는 다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너와 만나게 되었잖아."

"당신...."

"그러니까 새롭게 인사할게. 너는 끝까지 살릴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니까 앞으로...."

그는 나를 올려다보며 애처롭게 웃었다.

"내가 피닉스를 자처하도록, 허락해 줄 수 있어?"

"......."

나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은근슬쩍 아랫배에 얼굴 비비고 밑가슴 보려고 하는거 파렴치해요."

"으악 들킴."

화륵.

* * *

D-38

다크 레기온.

성주.

테라.

정령.

창염.

그의 기억으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전해받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창염!"

"섹스를 하러 왔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죠?"

"...아, 아니. 오늘은 이름만 부를 생각이었는데."

그는 비를 쫄딱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나를 바라보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있으니 내게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것도 분명 업보였지만, 그래도 저런 식으로 나오니 불쌍하기도 했다.

'불쌍하다라.'

설마 인간에게 이런 감정이 들 줄이야. 그리고 나는 그 감정이 내게서 흘러나오는 것에 괜히 짜증이 났다.

'이게 다 그 망할 기억 때문이야.'

그가 보여준 '미래의 나'와 그가 보낸 기억들. 비록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만났다고는 하지만, 미래의 나와 그가 함께한 추억은 나조차도 질투가 날 정도로 행복해보였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런 얼굴로 웃고 떠들며 한 명의 존재와 사랑을 나눈다는게 너무나도 부러웠으며-

"역겨워."

"응?"

"그냥 한 말이에요."

역겨웠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그저 정령이라는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자신을 세뇌에서 풀어준 인간과 사랑에 빠진 아둔한 자. 그것이 그가 나를 두고 부르는 '창염'이라는 존재였다.

'나는 창염이 아닌데.'

원래부터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조차도 모르는 것일까.

"저기요, 당신. 제 이름 아세요?"

"창염이잖아."

"아닌데요."

"......?"

그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그에게 내 이름을 밝혔다.

"제 이름은요, ■라고 해요. ......뭐야, 이거?"

분명 이름을 얘기했는데 발성이 되지 않는다. 나는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

"■■ ■■■ ■■■■■■■■!!!!"

신전 전체가 떠나갈 것처럼 나는 목청껏 소리쳤으나, 나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아, 그 이름? 그거 성주한테 세뇌당하면서 이름을 빼앗긴 거야. 지금은 '정령'이라는 카테고리의 종족이니까 창염이라고 불렀던 건데. 네 이름은 ■--"

그는 당황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아.... 나도 필터링 걸리네. ...그럼 이렇게 하자!"

그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삼국시대에는 세 가지 나라가 있지!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 라?"

"정답!"

그는 손가락을 튕기며 윙크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신롸양."

"재수없어."

화륵.

그렇게, 나는 그에게 '신 라'라는 애칭을 받았다.

* *

D-123

"아, 창염과 큥큥하고 싶다!"

"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이 바보야."

그는 내 전술을 방해하고자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고작 그런 잡다한 방해공작으로 내 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신 본진 털리고 있는데 그럴 시간 있어요?"

"있지. 왜냐면 거기에 지뢰 쫙 깔려있거든."

"뭐요? 자, 잠깐만. 소환취-"

끼아아악.

부대가 전멸당했다. 나의 정령 부대들은 사르르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이 되었고, 그는 꽃이 핀 것처럼 만개한 얼굴로 웃으며 내 미니맵을 가리켰다.

"지금 네 본진이랑 8시 멀티 털러갈 거야."

"그런 걸 예고해봐야-"

"1초 뒤에."

미니맵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붉은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히어로 부대가 절벽을 넘어 내 본진을 급습하는 동시에, 대규모 헌터 부대가 자원줄인 8시 멀티를 공격했다.

"안 해."

"지지?"

"시끄러워요."

나는 바로 몸을 돌려 의자에 주저앉았다. 인간 주제에 병사들을 컨트롤하는 건 어찌나 대단한지, 거의 나와 호각을 이룰 정도였다.

"호각이라니. 말은 바로 해야지. 99번 싸워서 98을 졌잖아."

"어쨌든 제가 이긴 거예요. 나머지는 다 연습 경기."

"...솔직히 그거 한 번 반칙으로 이긴 거잖아."

그는 툴툴거리며 바닥에 엎어진 바둑판을 가리켰다.

"한 수 물려주면 가슴 만지게 해준다며."

"그래서 만지셨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덕분에 판 다 말아먹고 져버렸지만."

그는 다 이긴 경기를 내 가슴에 집어던졌다. 이런 지방 덩어리가 뭐가 그리 좋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좋았다.

"아까 본진에 공격 들어갈 때부터 다시 해요."

"한 번 만지게 해주니?"

"세 번은 더 만지게 해줄테니까."

"흐흐."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고,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나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의 무릎 위에 살포시 앉아 등을 기대었다.

주물, 주물.

그는 농염한 손길로 내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주물거린다기보다는 피로를 회복한다는양 마사지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듯한 감각에 그의 손길에 긴장을 풀어버렸다.

'좋긴 하네.'

성주 새끼에게 하나 고마운 것이 있다면, 나를 여성체로서 만들어준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나를 상대로 이렇게 욕정할 리가 없으니까.

"저기요."

"응."

"가슴은 개천광이나 히드라, 천가을이 더 큰데 왜 제 거 만지고 있는 거예요?"

"이게 네 가슴이니까."

미친 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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