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8화 〉1부 19장 14
"민초의 김펜릴은 안 되냥?"
"당연한 말씀."
"아쉽."
김펜릴은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아쉬워했다. 카페에 있을때면 언제나처럼 녹색 고양이귀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모처럼 정직원으로 채용된 만큼 복장도 바리스타 답게 제복을 갖추고 있었다.
"사장님, 저 쇼트케이크 추가-"
"다 떨어졌다네."
"......아오."
나는 품에서 딸기향 껌을 꺼내 씹었다. 카페에서 껌을 씹는 건 카페에 민폐였지만, 건물주라는 신분이 내 행동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아님 말고.
"그런데 이렇게 놀아도 되요?"
"견습 알바생이 들어왔으니까 괜찮다냥."
쾅!
녹색 장발 메이드 소녀는 거칠게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책상이 부서지지 않을까 큰 소리가 났지만, 놀랍게도 접시에 담겨진 디저트와 음료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원형을 갖추고 있었다.
"어허! 견습, 민트초코 케이크 형태가 흐트러졌다냥!"
"씨발, 닥쳐."
절풍은 쌍욕을 내뱉으며 부엌으로 돌아갔다. 김펜릴은 낄낄 거리며 내게 작게 속삭였다.
"요즘 알바 커뮤니티 돌아다녀서 저렇다냥. 서비스 개판인 건 이해해달라냥."
"절풍도 절풍이지만 당신도 참 얼굴에 철판 깔았네요. 절풍을 당신 곁에 둘 생각을 하다니."
"협력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라냥. 아무리 그래도 쟤도 이 몸의 일면인데 피규어 인형마냥 창고에 봉인하는 건 불쌍하지 않느냥."
김펜릴은 삭풍이 되는 조건으로 절풍을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게 하기를 바랐다. 나도 딱히 나쁠 건 없는 조건이었고, 김펜릴은 거기서 더 나아가 카페의 알바생으로 고용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남들이 보면 쌍둥이 자매인줄 알겠어요. 푸흐흐."
"건물주, 뒤지실?"
"...내가 틀린 말 했나요?"
외형만 따지면 머리길이의 차이, 그리고 고양이귀의 유무만 다를 뿐 생김새부터 체구까지 완전히 똑같은 존재였다. 도플갱어가 변화를 주기 위해 한쪽이 조금 외형을 다르게 가꾸었다는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나는 당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에 껌을 휴지에 뱉고 민트초코 케이크를 한움큼 입에 집어넣었다.
"역시 건물주다냥. 민트초코 먹을 줄 안다니."
"양치한 건데요. 이제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가야해서."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슬슬 날씨는 쌀쌀해져 겨울이 다가오기 시작했고, 세계도 멸망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아르엘을 잘 다독여줘요, 펜릴."
"알았다냥. ...? 아르엘 만나러 가는 거 아니었냥?"
"네."
아르엘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가야했다.
"민트초코로 양치라니, 최악이네요."
"절풍이 민트초코 냄새 싫어하잖아."
"그럼 인정."
신전에서 마주하게된 나와 창염의 첫인사였다.
* * *
"정말-"
"아름다운 밤이니까 그만."
"쳇."
창염의 인사는 조기에 차단했다. 나는 신전의 앞으로 다가갔고, 창염은 고개를 떨군 채 가만히 내가 다가가는 것을 기다렸다.
"나한테 뭐 하고 싶은 말 없어?"
"많죠. 많은데...."
풀썩.
창염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 그냥 안 듣고 끝내면 안 될까요?"
"안 돼."
"단호하시네요."
창염은 여전히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계속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눈치여서 나는 그냥 그대로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면 당신은 견딜 수 없을 거예요."
"그건 내가 듣고 판단한다."
"제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진짜면 그대로 판단하면 되고, 아니면 네가 거짓말하는 거지. 근데 너 거짓말 할 때 유두 서잖냐."
"변태."
"가슴 붙이고 있는 애가 할 말은 아닌데."
창염은 손을 내 등허리로 넘기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자신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판단하라는 의미기도 했고, 안아달라는 행동이기도 했다. 정령이라는 존재가, 한 세계의 신과도 같은 존재가 이런 식으로 어리광을 부리는 게 잠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화에 이르게 되면 완전무결한 존재가 되어야 해요. 우리는 이미 싱크로의 조건을 갖추고 있죠. 네. 상사상애. ...저는 당신을 싫어하지는 않아요. 싫어하지는."
"......."
"하지만 말이에요, 격이 달라요. 격이."
창염의 말은 얼핏 들으면 나를 상처입히게 하는 말이었으나, 나는 묵묵히 창염의 말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저는 따지면 세계의 일곱 신과 같은 존재지만 2차원의 존재예요. 저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지만,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죠. 그에 비해 당신은 평범한 인간일 뿐이지만 4차원에서 온 존재. ......싱크로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 것 같아요?"
"둘 중 하나는 죽겠지."
창염과 피닉스. 둘 중 하나는 죽는다. 나는 그 말이 떠올랐다.
"네 격이 높아지거나, 내가 격을 낮추거나."
"전자는 불가능해요. 그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저희가 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후자가 되어야 하는데."
창염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푸른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있었다.
"현실의 모든 것을 잊어야해요. 이 세계가 게임이었다느니, 당신이 현실에서 이 세계로 떨어졌다느니 하는 모든 것들을. 게임을 통해 플레이했던 모든 기억은 당신의 꿈으로 치환될 거고, 당신은 그저 이 세계의 주민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현실에 돌아가지 못하고, 게임 속 세상에 갇혀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예요."
"그게 내 죽음인가."
"...모든 기억을 잃은 채, 그저 한 명의 가 되어버리는 거죠. 이 세계에 살고 있을 백청화의 도플갱어. 그게 당신이 저와 싱크로를 하게 되었을 때의 끝이에요."
생명이 다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억이 증발하고, 이 세계의 주민으로 전락하게 되어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소멸하게 되고, '백청화'라는 존재로 대체되는 것.
확실히, 죽음이다.
"하지만 모순이다. 너는 죽고 싶지 않다고 했어. 그건 틀림없는 본심이야. 그런데 우리, 싱크로하지 않으면 성주에게 죽어."
나는 창염의 얼굴을 붙잡았다.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거나 하는 문제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으니 모르잖아. 그건 네 가정일 뿐이야. 실제로 해보지 않고는 모르지."
"......만약, 만약 이미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봤다면요?"
창염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 말만으로도 나는 창염이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창염이 왜 내 기억을 빼앗았는지 깨달았다.
"......몇 번째냐?"
"까먹었어요."
창염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창염조차 잊을 정도로 이짓을 반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은 말이에요, 저를 살리기 위해 정말 온갖 짓을 다해봤어요. 2000년대부터 활동도 해보고, 당신이 말하는 원작 시점부터 활동도 해보고. 그 모든 상황의 끝은 언제나 파국이었어요. 그리고 상처입는 건 당신. 그리고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나."
창염은 내게서 살짝 떨어져 구슬 하나를 꺼내들었다. 창염이 '기억 구슬'이라고 표현하던 것들 중 유독 영롱하고 붉은 것.
딱.
창염이 손가락을 튕겼다. 신전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그 너머에서 색이 바랜 기억 구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수는 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신전을 가득 채울 기세로 넘쳐났다.
"당신, 정말로 이기적인 사람인 거 알아요?"
창염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심장을 향해 붉은 구슬을 밀어넣었다.
"눈 조금만 다른 사람에게 돌리면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는데, 왜 자꾸 나를 못 살려서 안달이냐고요...."
내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 * *
"아, 진짜 거지같네요."
나는 내가 주어진 상황에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지구를 한 바퀴 쭉 돌고 예정시간 동안 어디를 어떻게 태워버릴까 고민하고 잠에 들려고 했건만, 왠 이상한 존재가 나타나 내 몸을 강제로 빼앗아버렸다.
"이 신전은 또 뭐람."
나는 신전의 사제라도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은 온통 파란색으로 가득했고, 나는 멍하니 앉아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분명 갇혔는데."
마력은 무한히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무한에 가까운 마력으로 이 신전을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나는 이미 신전을 열 번 넘게 부수고 태우며 신전에서 나가려고 했지만, 신전은 마치 나를 가두는 결계라도 되는 양 나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래서야 나중에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럼 지금 내 육체를 가지고 움직이는 놈은 누구죠? 성주님이 보낸 대타일까요?"
육체를 대신 조종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인간계에 자연스레 녹아내려라? 기억 상실인 척?"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정은 인간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대타 인격을 보냈다는 것. 명예로운 다크 레기온의 간부인 자신이 아주 쉽게 인간 세상에 녹아들 수 있도록, 간부의 인격을 지우고 인간으로서 활동하게 만든다면 분명 설득력이 있었다.
"성주님 오실 때까지 인간의 인격이 자연스레 인간계에서 기반을 마련하고, 때가 되면 진정한 자신을 각성한다라.... 좋네요, 푸흐흐."
25년 동안 인간으로서 살아온 이가 자신의 진짜 정체가 세계 멸망의 첨병이었다면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럼 그 육체를 빼앗아버리면, 아니 되찾으면 그만일 것이다. 여차하면 인격 자체를 찍어눌러 불로 태워버리거나.
"어디 들어오기만 해봐라."
아주 사지를 찢어놓을 것이다. 나는 신전의 입구에 들어올 이-내 몸을 차지한 이를 기다리며 고뇌에 잠겼다. 어떻게 죽일 것인가. 이미 일주일 가량 몇천만에 이르는 인간들을 태워죽인 나로서는 소사 이외의 방법을 찾고 싶었다.
목을 졸라 죽일까, 아니면 그냥 반으로 갈라버릴까.
들어오지도 않을 상상 속의 강탈범을 상대로 온갖 살해방법을 생각하던 도중, 신전의 입구가 일렁거리며 한 인영이 나타났다.
"창염!"
흑발의 인간은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마치 등산을 통해 산의 정상에 오른 산악인마냥 보람에 차있었다.
"만나서 반가워! 정말로 보고싶었어!"
"...성주님이 저와 협력을 하라고 보낸 건가요? 그런 것 치고는 뭔가 이상한데."
"나는 너를 따먹으로 온 거야!"
화륵.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튕겨버렸다. 그는 푸른 불꽃에 타올라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그 누구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누가 있다고 한들 이 상황에 대하여 답을 내려줄 수 있을까? 갑자기 나타난 흑발의 인간 나부랭이가 자신을 따먹겠다-즉 범하겠다고 날뛰는 이 상황을?
"아니, 범한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닐 거예요."
자리를 빼앗겠다는 속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내가 앉은 자리, 라는 존재를 빼앗고 나의 인격을 소멸시켜버리겠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제 알 방법은 없다. 이제 죽여버렸으니.
"창염!"
"...또?"
그는 다시 신전의 앞에 나타나 두 팔을 벌렸다. 분명 불에 태워죽였는데 다시 또 이런 상황이 발생되다니.
"만나서 반-"
화륵.
나는 손가락을 튕겨 그를 죽였다. 그는 다시 재가 되어 소멸했다. 인간이 가장 고통스럽게 죽는 방법에 불에 타 죽는 것이라고 하던데, 그는 인간이 아닌걸까 아니면 불에 타 죽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다음 번에 오면 물어봐야겠네요."
만약 또 나타난다면. 이번에는 재만 남기고 다 태워버렸으니 이제 다시는 나타나지 못할 터. 나는 의자에 몸을 눕혔다.
"창염!!"
그는 다시 나타났다. 두 팔은 벌리지 않고 내게 손을 들어올리는 그 행동은 아까 전과는 사뭇 달랐다.
"...뭐예요. 당신 죽어도 부활하는 거예요?"
"그런 것 같아."
"같아는 뭐야, 같아는. ...잠깐, 그거 제 능력이잖아요."
재생, 그리고 부활. 잘려나간 부위가 있다면 바로 재생이 가능하고, 어떤 이유로 죽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만의 권능. 그 권능을 저 인간 나부랭이가 사용하고 있다. 아무래도 인간은 내 몸에 깃든지 하루도 안 되는 시간만에 제법 많은 능력을 파악한 것 같았다.
'아니면 이미 성주님께 언질을 듣고 왔거나.'
어느쪽이든 나로서는 고깝기 그지 없는 상황이었다. 후자면 성주님이 나를 믿지 못하여 내 몸을 이용할 또다른 존재를 파견했다는 말이었고, 전자면 군말할 것도 없이 목을 졸라 비틀어버릴 것이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예요?"
"여러모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그는 팔짱을 낀 채 설명을 머뭇거리더니 손뼉을 치며 활짝 웃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외계인이야. 너를 살리러 온 외계의 존재."
"......예?"
나는 그의 말을 한순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소 경박해보이는 듯한 그는 내게 손을 뻗으며 처연하게 웃었다.
"25년 뒤에 너는 무조건 죽어. 그래서 내가 너를 구하려고 이렇게 여기에 온 거야."
"당신이 누구길래요?"
"네 미래의 남편."
"미친 새끼."
화륵.
나는 한 걸음에 달려가 그의 목을 몸에서 뽑아버렸다. 뽑혀나간 목구멍에서 피분수가 튀어 내 전신을 적셨고, 나는 불꽃을 이용해 내 몸을 정화했다. 남편 운운하던 미친 존재는 당연히 숯검댕이 되어 바스라졌다.
"창염!!"
"아니."
이걸로만 벌써 네 번째인가? 나는 일단 그가 나를 부르는 칭호부터 정정하고 싶었다.
"저는 창염의 피닉스인데요?"
"아니, 너는 창염이야! 그걸 설명하려면 엄청 오래 걸릴텐데, 결론부터 얘기할게."
그는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랑 섹스하면 너는 살 수 있어!!"
화륵.
나는 뼛조각 하나 남지 않도록 그를 태워버렸다. 섹스. 성행위. 번식을 위한 교미. 그걸 당당히 얘기하는 그의 말에 나는 절로 화가 치밀었다.
"어딜 처녀한테...처녀?"
내가 처녀인가? 뭔가 이상한...?
"창염!!"
그는 다시 한 번 더 나타나 내 앞에 당당히 섰다.
"섹스를 하러왔다!!"
"......."
일단 한 번 죽이고, 그 다음에 생각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나는 그를 만난 지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각에, 다섯 번을 죽였다.
"창염, 섹스를 하러왔다!!"
여섯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