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6화 〉1부 19장 12
"반가워요, 절풍. 저는 일단 피닉스라고 부르세요."
펜릴과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얼굴. 하지만 말투부터가 달랐고, 아르엘을 바라보는 눈빛마저 달랐다.
"......."
"......."
둘은 명백히 서로에 대해 꺼려했다. 애초에 절풍이 펜릴과 척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펜릴과 싱크로까지 한 아르엘과 친해질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그런 애매한 사이 덕분에 나는 애매하게 싱크로한 셋을 상대로 쉬이 이겨낼 수 있었다. 100은 3으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으니까.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펜릴이 절풍의 힘을 이용해 아르엘과 싱크로를 하면서 이미 아르엘의 몸에는 절풍이 깃들게 되었다. 이제 아르엘과 절풍이 마음만 먹으면 싱크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둘이서 합을 맞출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뭐예요, 둘이 싸웠어요?"
"애초에 싸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저것과 합을 맞춘 건 펜릴이지, 본인이 아니다."
절풍은 단호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건 분명히 공감할 수 있었다. 당장 식성부터 취향에서 갈리는 둘이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요. 그러면 절풍,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성주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나?"
"물론. 이기려고 시작한 싸움이에요. 질 수도 없고, 질 리도 없죠. 당신이 거들어준다면."
나는 바닥에 좌절하여 쓰러진 아르엘을 가리켰다.
"싱크로. 해주셔야겠는데요."
"거절한다."
"아르엘이라서?"
"물론. 다른 이와의 싱크로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한국에는 본인의 속성을 가진 우수한 이능력자들이 많지. 당장 원탁에도 질풍객이라고 하는 인간도 있다.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했던 저 여자와 싱크로할 이유는 없어."
철컹.
절풍이 손을 아래로 뻗어 바람의 칼날을 뭉쳤다. 펜릴과 달리 절풍은 세검을 손에 들고있었다.
"저 여자를 죽이고 온전히 존재하도록 하겠다. 이미 깃들어버린 이상 그 숙주를 죽이면 자연히 풀려날 터."
절풍이 세검을 아르엘에게 찌르려들었다. 아르엘은 순순히 자신에게 찔러들어오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카앙.
"무슨 짓이지?"
"원래 방해와 트롤링은 제 전문이라서."
나는 아직 형태는 남아있는 TAT로 절풍의 공격을 막았다. 절풍은 상당히 짜증을 냈지만, 이대로 아르엘이 죽으면 시간적으로 난감했다.
"아르엘은 죽일 수 없어요."
"뭐지? 펜릴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펜릴이 죽었으니 그 숙주인 아르엘은 살려주겠다?"
"그런 것도 있고, 굳이 죽일 이유도 없고. 당장 내일 써먹을 전력이 필요한데 어느 세월에 또 싱크로까지 한 이능력자를 찾겠어요? 그냥 회유해서 써먹고 말지."
"하."
절풍은 나를 향해 입꼬리를 당기며 비웃었다.
"좋다. 설령 본인이 저것을 죽이지 않는다고 한들, 저것이 너를 돕겠느냐? 너는 양어머니와도 같은 존재를 죽였다. 당장 저것에게 이 검을 쥐어주면 누구를 찌르겠느냐?"
"둘 다."
아르엘이라면 둘은 커녕 셋도 찌르고 남을 것이다. 자기자신까지. 이 전투가 끝나고 어디 구금을 하더라도, 지탱할 곳을 잃은 피폐해진 정신으로 잘못된 선택을 할게 분명했다.
"저는 아르엘을 죽일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펜릴을 죽인게 아르엘이 저를 돕지 않는 이유라고 한다면...그건 미안하네요. 하지만 이미 다 방법을 생각해뒀죠. 푸흐흐."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전이었고, 다행히 그 작전은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다.
"언제까지 숨어있을 거예요?"
"......."
"지금 안 나오면 상황이 더 애매해지는 거 몰라요? 나오세요, 당장. 명령을 내려야 할까요, 김펜릴?"
"너어는 진짜 나쁜 년이다냥."
절풍의 표정이 굳었다. 아르엘의 표정에 화색이 돌아왔다. 절풍과 똑같은 목소리로 전혀 다른 말투로 말하는 존재는 분명히 절풍이 아닌 존재였다.
고오오오.
절풍의 색보다는 조금 옅은, 연녹색의 바람이 내 뒤에 늑대의 형상으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그 형태는 수백미터까지 성장했다가 내 궁극기를 얻어맞았던 신살랑과 똑같은 형태였다.
"자, 여기 올라와볼래요?"
단지 그 크기가 줄어들어도 한참 줄어들었다는 것. 나는 포메라니안 수준으로 줄어든 개냥이, 김펜릴을 품에 안아들었다.
"짠."
"...어, 어떻게?"
"운이 좋았죠. 마침 SS급 코어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풍속성이었네요. 푸흐흐."
나는 김펜릴의 심장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절풍 다음으로 가장 정교하다고 할 수 있는 SS급 코어가 펜릴의 핵이 되어 박동하고 있었다. 굳이 SS급 코어가 아니더라도 S급 코어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겠지만, 모처럼의 상황인 만큼 나는 과감하게 SS급 코어의 주인을 정해버렸다.
"괴인 김펜릴. 알바생으로 워낙 일을 잘해서, 우리 카페의 정직원으로 채용하려고요."
"네 카페 아니지않냥."
"별반 다를거 없거든요?"
"......지금 뭐하자는 거냐?"
절풍이 분노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나와 펜릴의 말을 끊었다.
"모든 괴수들은 죽여야 한다. 모든 괴인들도 마찬가지. 테라를 망가뜨린 원흉의 싹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해. 그런데 지금 펜릴을 되살려? 미친게야?"
"미친 건 진작에 미쳤고, 펜릴을 제어할 수단도 마련되어 있어요. 김펜릴, 손."
내가 손을 앞으로 뻗자, 펜릴은 내 손바닥 위에 손을 척하고 올렸다. 절풍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괴인에 대한 절대명령권? 지금 장난하는 것이냐? 정녕 그걸로 저것을 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거두절미하고 물어볼게요. 테라사이트. 성주가 테라에 뿌렸던, 마력을 오염시키는 미생물. 그걸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를 죽여야한다고 생각하나요?"
"물론."
"그렇다면 미안하네요. 저는 이미 갱생한 케이스를 둘-아니 셋이나 봤거든요. 사랑의 위대함이라고 해야하나요? 푸흐흐."
간부임에도 사랑하는 딸을 위해 제 목숨을 버린 케이스.
죽어가는 간부에 대하여 측은지심을 느끼고 동화한 케이스.
간부이나 인류 평화와 제 욕망을 위해 악의 조직에서 배신한 케이스.
그 모든 경우를 종합해봤을 때, 펜릴을 내 직속 괴인으로 만들어 아군으로 만드는 것에 큰 문제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절풍. 펜릴이 이 세상에 있는게 무섭고 두려운 거잖아요? 펜릴에게 질투를 느껴서 말이에요."
"......."
자존심이 강한 존재다. 절풍은 펜릴이 보는 앞에서 내게 답할 의사가 없어보였다.
"그리고 지금 저는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할 시간이 없어요. 아르엘에게는 펜릴을 죽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부활시켜줬으니 용서해줘요. 부활 서비스로 안에 있던 모든 기생충들 다 제거했으니까."
나는 김펜릴을 아르엘에게 집어던졌다. 아르엘은 허겁지겁 김펜릴을 받아 끌어안았다.
"절풍. 잘들어요. 정령의 힘이라는 거, 정령의 의식과 별개의 장소에서 공존할 수 있는 거거든요? 정령의 힘을 가진 당신은 아르엘과 싱크로 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데, 저는 당장에라도 싱크로 한 전력이 필요하다 이거죠."
나는 한걸음에 절풍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아르엘과 싱크로하기 싫으면 당장 그 힘을 내놓으시라. 3초 줄게요."
"미친 소리. 장난치지 마라. 아무리 너라고 한들-"
푹.
나는 절풍의 심장에 손을 박아넣었다.
"잘자요."
절풍은 경악한 눈동자로 나를 노려봤고, 나는 절풍의 얼굴에 손을 올려 눈꺼풀을 닫게 만들었다.
푸우우욱--!!
녹색의 마력이 피분수처럼 솟구쳤다.
* * *
절풍은 의식을 되찾았다. 하지만 의식만 되찾았을 뿐 그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눈꺼풀 위에 이상한 숫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33, 57, 73. 두자리 수는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차오르기 시작했고, 그 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만큼 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컴퓨터?'
눈에는 분명히 무언가 작업을 나타내는 듯한 수치가 올라가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절풍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거 뭐지?'
절풍은 자신을 감싸는 기묘한 감각에 뭐라 말을 할 방법이 없었다. 애초에 입에 마개가 채워진 상태에서, 전신이 물속에 퐁당 빠진 상황에서 말할 방법은 마력밖에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절풍은 마력을 일으켰다. 하지만 마력은 전혀 솟아나지 않았다. 정령은 마력을 숨쉬듯 사용할 수 있건만, 당장은 그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듯, 꼭 펜릴에게 주도권이 빼앗겨 정신만 남아 몸속에 처박힌 듯한 느낌이었다.
정령이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 절풍은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감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91, 94, 99. 수치가 어느덧 100에 이른 순간.
...시스템 가동, 준비완료.
어디선가 이상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커흑!!"
절풍은 기침과 함께 사방이 녹색으로 물든 세계에서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세상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리니, 그 세계는 여전히 녹색이었다. 녹색의 물로 가득찬 수조에 절풍은 갇혀있었다.
"......?!"
그제서야 절풍은 자신이 어딘가에 진짜로 '갇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사지가 결박되어있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구속은 끊어낼 수 없었다. 힘겹게 손을 당겨보니 손목에는 청록빛깔의 베일이 휘감겨있었다. 창염을 두른, 피닉스의 마력이 깃든 물건이었다.
왜? 어째서?
절풍은 마지막 순간의 기억을 더듬었다.
'아르엘과의 싱크로.'
사소한 언쟁이 있었고, 절풍은 피닉스와 협상을 하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다른 누가 되든 '아르엘'만 아니면 절풍은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고작 사람 한 명, 아니 사람도 아니다. 아무리 양어머니같은 존재라고 한들,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괴물의 편이 되어 세계를 멸망시키려는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고작 인간 나부랭이가 그 무게를 견뎌낼 수 있을까. 하나의 세계가 자신 때문에 멸망했다는 걸 과연 받아들일 수나 있을까. 절풍은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오만한 인간과는 합을 맞출 수 없었다.
그런데 왜 피닉스는 펜릴을 괴인으로 부활시키고 자신의 심장을 꿰뚫은 것인가. 절풍은 괜한 생각이 들어 화가 치밀어올랐다.
설마 펜릴이 피닉스의 아래에서 알바생이랍시고 일한 그 잠깐의 순간 때문에? 정직원 운운하던 것이 농담이 아니었던가?
"쓰레기같은 년."
절풍은 허탈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첫인사가 과격하네요."
그 문제의 미친년이 유리벽 너머에 얼굴을 붙인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절풍은 생전 처음으로 겁에 질렸다.
"히카리, 캡슐 여세요. 아무래도 조금 이야기가 필요한 것 같으니."
쏴아아.
신체 주변에 채워진 녹색 물들이 빠르게 아래로 빨려내려가기 시작했다. 절풍의 시야에는 녹색 이외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절풍의 눈앞에 요상한 홀로그램 스크린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이오로이드 , 가동을 시작합니다.]
"뭐, 뭐야...?"
"뭐긴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거죠."
피닉스는 두 팔을 벌리며 절풍을 반겼다. 기억이 끊기기 전, 저 웃는 모습 그대로 제 심장에 손을 쑤셔넣었던게 생각이 나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간단하게 설명할까요, 아니면 길게 설명해드릴까요?"
"......."
절풍은 대답하지 못했다. 무엇을 물어봐야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고, 피닉스는 잠시 기다렸다가 뒷짐을 진 채 혼자서 방 안을 걷기 시작했다. 흰 연구 가운을 걸친 피닉스 말고도 방에는 처음 보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처음보는 얼굴의 갈색 단발머리 여인.
전신을 명품으로 치장한 금발의 여인.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여인.
어째 여자들밖에 없었지만, 절풍에게 있어서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들에게서 익숙한 기운-정령의 마력이 느껴진다는 것.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당신의 영혼을 뽑아서 바이오로이드에다가 집어넣었다 이 말씀."
피닉스가 검은 회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자 손잡이에는 자신보다 훨씬 선명한 녹색의 고양이가 제 털을 꼬리로 쓸며 갸르릉거리고 있었다. 피닉스는 그 고양이의 털을 손으로 쓸며 눈짓했다.
"악의 조직에 고양이가 빠질 수 없죠. 인사해요, 우리 집 냐옹이에요. 주식은 민트초코. 우는 소리는 '펜릴', '펜릴'하고 울죠."
"장난치지마라냥."
냐옹이, 펜릴이 꼬리를 휘둘러 피닉스의 손등을 때렸다. 피닉스는 인상을 와락 찡그리면서 중얼거렸다.
"...김펜릴이에요. 그래서 힘의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정령의 힘, 이쪽으로 넘어온게?"
"도, 도대체-"
"인격과 정령의 힘이 별개라는 건 이미 입증된 사실이에요. 모든 연구가 끝났고, 당신 새 파트너를 찾을 시간이 없어요. 그러니까."
피닉스는 펜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통통 두드리며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괜히 말 안들을 당신에게 사정사정하며 도움을 청하느니,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레시피 하나면 홀라당 넘어오는 애를 영입하는게 훨씬 더 이득이다 이 말씀.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했다 이거죠. 미안해요, 당신같이 정도를 추구하는 정의로운 존재가 아니라서."
피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쓰레기같은 악당이라서 말이에요. 푸흐흐."
절풍은 절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