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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55화 (455/1,497)

〈 455화 〉1부 19장 11

전투는 끝났다.

펜릴의 공격은 내게 닿지 못했고, 내 마탄은 펜릴의 심장을 꿰뚫었다.

"......정말, 열받는 구나."

펜릴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전히 그 눈빛은 기회만 있다면 나를 찢어발길 듯 약점을 탐색하고 있지만, 나는 내 몸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효율적으로 싸우는 거라고 해주시죠."

펜릴의 칼바람이 닿기 직전, 나는 청화의 몸으로 바꾸었다. 체구가 작아졌기에 당연히 칼바람은 내 옷깃을 스치고 날아가게 되었고, 청화의 작은 손으로도 방아쇠를 당기기에는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없다."

펜릴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마력의 탄환은 아무리 아르엘의 몸에 깃든 펜릴이라고 하더라도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마탄은 최후의 일격으로 사용하기 위해 코어 주변의 마력을 뚫을 만큼만 남겨두었고, 펜릴의 코어를 지키는 방어막은 전부 마탄에 파괴되었다.

펜릴의 몸이 괴수 늑대였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펜릴이 만약 아르엘의 몸으로 싸웠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그 패턴은 처음이니까.'

패턴을 분석하느라 진이 빠졌을 것이고, 그러다가 어쩌면 유효타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얼굴에서 아르엘이 느껴지기에, 그것 때문에 괜히 신경이 쓰였을지도 모른다.

우우웅.

펜릴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마력이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펜릴의 몸에서 갈색의 마력이 뽑혀나가기 시작했고, 그 갈색의 마력은 알몸이 된 여인이 되어 펜릴의 앞에 기절한 채 놓였다.

아르엘.

차기 영국의 여왕이 되었어야 할 여인은 펜릴에게 몸을 바쳐 나를 죽이려들었다. 펜릴에게 몸을 바치는 것이 세계 멸망으로 이끄는 것임을 알텐데, 아르엘은 결국 펜릴을 선택했다.

"기절한 게 다행이네요. 당신의 최후를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

펜릴은 아르엘을 손으로 덮었다. 내가 아르엘의 몸을 보지 못하도록 막는 것도 있지만, 내가 아르엘을 향해 나쁜 짓을 할까봐 걱정하는 손짓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뭐 '나는 죽여도 좋으니 아르엘은 건드리지 말아다오' 이런 거죠?"

"...그래."

펜릴은 순순히 내 말을 긍정했다. 상황상 펜릴이 할 말은 그것 하나 뿐이었다. 원작에서도 정 때문에 다크 레기온을 배신하게 된 만큼, 지금도 그와 딱히 다를 건 없었다.

"좋아요. 걔는 살려주죠. 구면이거든요."

"아르엘과?"

"지나가다가 한 번 마주쳤어요. 본인도 이제 알게 되겠지만."

로마에 있었을 당시 히드라를 상대하느라 너무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했다. 히드라가 아니라 다른 용무로 로마에서 그들을 만나거나 내가 영국에 갔다면, 아마도 진작에 다른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아르엘은 백청화로서의 내 얼굴을 보았고, 직접 맞서 싸우기까지 했다. 펜릴의 인격이 주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무의식 속에서 아르엘은 간접적으로 나와 싸우며 내가 피닉스인 걸 분명히 인지했다. 펜릴이 쓰러진 이상 유일한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이는 생부인 가웨인 경이지만, 그는 나와 모종의 밀약을 맺어 아르엘의 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밀약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가웨인은 다크 레기온의 일원으로서 세계 멸망에 일조한 아르엘을 위해 내게 검을 들이밀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아르엘을 설득하고 진정시키는 거라면 모를까.

고로, 아르엘은 살려준다.

"그러니까 그렇게 경계 안해도 됩니다. 긴장 푸세요. 뭘 그렇게 심각하게 있어요?"

"......."

"아, 옷 때문에? 나참."

이미 골백번도 본 몸이지만, 펜릴은 진짜 양어머니라도 되는 것마냥 아르엘을 감싸고 돌았다. 아르엘이 다칠 바에는 자신이 상처를 입겠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그게 제 진짜 패인이 된 것도 모르고 말이지.'

"그러면 이제 진짜로 끝날 차례에요. 진짜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말이라...."

펜릴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사장님 케이크 한 조각 먹고 싶구만."

"동감해요. 당신 유언치고는 썩 제법이네요."

나는 펜릴의 심장을 향해 손을 겨눴다.

"그럼 잘 가요, 펜릴."

푸-욱.

내 손이 펜릴의 심장을 뜯어냈다.

* * *

소녀는 어려서부터 고양이와 함께 살아왔다.

북유럽의 숲에 버려졌던 때 자신을 구해온 이도 고양이였다.

아버지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을 위로해준 이도 고양이였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앞에서 사랑스러운 친딸을 연기해야 했을 때도 옆에서 자신을 지지해준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고양이였다.

독 묻은 스프를 걸러준 이도, 고용된 빌런이 쏜 총탄을 맞받아 친 이도, 소녀에게 스스로를 지킬 힘을 길러주게 한 이도 고양이였다.

그런 고양이가, 그런 펜릴이 패배했다.

결코 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펜릴은 압도적인 화력 앞에 결국 지고 말았다. 소녀는 행여나 자신이 부족한게 있는게 아닐까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소녀는 펜릴과 하나가 되었다가 튕겨나갔다. 몸안에는 익숙한 마력의 기운이 돌고 있었으나, 가슴 한 켠이 뜯겨나간 것처럼 허전했다.

아르엘.

고양이는 바닥에 눕혀진 아르엘의 앞에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구나. 이길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진작에 네 말을 듣고 훈련을 했어야 했네.

고양이는 무안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르엘은 고양이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아무리 손을 뻗으려고 해도 손이 닿지 않았다.

이 몸은 이걸로 죽는다. 이제 이 몸의 힘은, 절풍의 힘은 온전히 너의 것이 되었다. 그나마 가기 전에 네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갈 수 있어서 기쁘구나.

아르엘은 외쳤다. 제발 떠나지 말아달라고. 자신이 몸이라도 바칠테니,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하지만 그 말에 고양이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로 패배하는 순간 끝인 걸 알고 있던 싸움이었다. 이 몸은 패배했고, 이긴 건 저것이다. 무슨 수로 이 몸의 공격을 전부 파악하는지 아직도 궁금하기는 하지만...깔끔히 승복하여야겠지. 복수할 생각은 하지 마라. 이 몸은 죽더라도, 네가 죽는 건 보고 싶지 않구나.

고양이의 몸이 안개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20년.

고양이는 아르엘에게 걸어갔다. 이미 다리는 연기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지만, 고양이는 분명히 아르엘의 앞에 서서 은은하게 웃었다.

20년 동안 행복했다. 너와 함께 스톤헨지에 잠입할 때도, 루브르 박물관에 잠입할 때도, ...그리고 서울에 잠입하여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나'는 네 덕분에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고양이의 몸이 벌써 반절가량 사라져버렸다. 아르엘은 남아있는 제 마력이라도 건네주고 싶었지만, 고양이는 너무나도 빠르게 소멸하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너를 통해 인간을 배웠다. 고맙다, 아르엘. 만약, 만약 다시 내가 너를 만나게 된다면.

고양이는 아르엘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그때도 나는 너와 함께 세상을 누비고 싶구나….

사르르.

고양이는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아르엘은 목놓아 울고 싶었지만 그 어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저 전신에 가득한 탈력감과 상실감에 정신이 아득해질 뿐이었다.

마지막에 눈에 들어온 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고양이를-유일한 가족을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

하지만 유언을 지켜야했다. 아르엘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무거운 눈꺼풀을 감아야 했다.

***

..

"끝났네요."

내 손에 뛰고 있는 펜릴의 심장은 여전히 뜨겁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심박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고, 나는 남아있는 마력을 쥐어짜내어 손에 불을 붙였다.

"소각."

시큼한 탄내와 함께 펜릴의 심장이 불타올랐다. 겉에서부터 까맣게 타오르는 펜릴의 심장은 재가 되어 하늘로 흩말렸고, 그 안에서 진녹색 코어가 나타났다.

'펜릴의 코어.'

나의 코어 심층에 창염이 깃들어있듯, 이미 펜릴 또한 내재된 절풍이 코어에 남아있었다. 아직 의식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는지, 아무리 절풍을 불러내도 답이 없었다.

"이상하네…. 테라리스트들은 모두 죽였는데."

펜릴의 몸에 달라붙은 이같은 존재들, 테라리스트는 모두 창염에 소멸했다. 펜릴의 털이 증명하듯, 펜릴에게는 더이상 테라의 장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깨끗하게 소독했다.

"펜릴이든 절풍이든 아르엘이든 셋 다 깨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네요."

아르엘은 기절. 펜릴는 코어화. 절풍은 감감무소식.

어느쪽이든 당장 효율을 따져야하는 나로서는 모차럼 싱크로에 이른 콤비를 떨어뜨릴 이유가 없었다. 뭣보다도 아르엘이 스스로 인류 평화를 위해 기여하며 세계를 구하도록 해야했다.

"펜릴은 나도 죽이기 아까우니까."

기출문제와 똑같은 유형의 문제는 기출문제의 풀이를 참고하여 풀면 그만이었다. 마침 이 이계로 들어오는 사람도 없으니, 나는 내 안주머니에서 동그란 물체 하나를 꺼내들었다.

"창염개진 빛!!"

나의 손에는 전 지구상에서 유일한 풍속성의 SS급 코어가 반짝이고 있었다.

* * *

아르엘은 의식을 찾았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전신에는 마력이 가득했지만 정신적으로 진한 탈력감이 들어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정령이 깃들어서 그런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익숙해질테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세요."

"......."

아르엘은 침묵했다.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청명했으나,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고양이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괴수 펜릴은 죽어야만 했어요. 아지다하카가 죽고 암속성 정령이 남은 것처럼.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펜릴은 진심으로 성주의 충견이 되기를 자처했다는게 가장 컸어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표정, 눈빛, 행동, 그리고 마력. 그 모든 곳에서 당신이 저를 증오하는게 느껴지는 걸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얼굴만 봐도 알아요. 짜증나고 죽여버리고 싶고. 뭐...저도 같은 상황이라면 충분히 그런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건 하나 확실히 하자고요."

푸른 소녀-피닉스는 정말 말이 많았다.

"당신, 그래도 인류잖아요? 그런데 왜 인류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하기로 한 거예요? 빌런도 아니고, 괴인도 아니고, 일국의 공주이기도 하신 분이."

"......펜릴은 전세계가 적이었어."

아르엘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내 인생은 숲에 버려진 날 끝난 거야. 펜릴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골백 번도 암살당했겠지. ...펜릴은 내 어머니나 다름 없는 존재였어."

"그런가요."

피닉스는 담담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는 아르엘을 상대로 등을 보이고 있었고, 아르엘이 조금만 더 조용히 마력을 사용한다면 등을 가시창으로 찌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복수하지 말라.

하지만 자꾸만 펜릴이 남긴 유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르엘은 그제서야 차오르는 울분에 숨을 들이삼켰다. 꼴사납게 피닉스의 앞에서 통곡할 수는 없었다.

"설령 그 어머니가 세계를 파괴하려고 한다고 해도?"

"말했잖아. 전세계가 펜릴의 적이라고."

아르엘은 펜릴에게는 직접 전하지 못했던 진심을 토해냈다.

"......설령 모두가 펜릴이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나만큼은 펜릴의 편이어야 했어."

"만약 펜릴 때문에 세계가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

아르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피닉스는 알겠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좋아요. 그럼 당신 안에 있는 절풍을 불러보도록 하죠. 당신은 구면인가요?"

"...반갑지는 않지만."

똑같은 존재나 다름없지만, 펜릴이 절풍으로부터 파생된 존재나 다름없지만 아르엘은 절풍이라는 존재가 영 탐탁찮았다. 피닉스가 절풍을 깨우기 위해 펜릴을 죽였던 만큼, 절풍을 바라보는 아르엘의 시선은 고울 수가 없었다.

우우웅.

녹빛의 바람이 아르엘에게서 빠져나와 한 명의 인영을 만들어냈다. 녹색머리칼의 고양이상 여인은 긴 장발을 흩날리며 손을 배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펜릴과 쌍둥이라고 해도 믿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새롭게 실체화하여 나타난 여인은 펜릴을 닮아있었다.

"반갑소이다. 절풍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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