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4화 〉1부 19장 10
천가을이 그러하였고, 석하랑이 그러하였듯, 결국 펜릴 또한 누가 히로인 아니랄까봐 '처음' 사용하는 압도적인 힘에 취해버린 것이다. 단지 그 사고가 나를 상대로 일어났을 뿐.
"......."
펜릴은 현재, 내 결계속에 갇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정육면체 큐브 모양의 결계에 갇힌 펜릴은 결계에 몸이 닿지 않도록 허공에 떠서 눈을 감고 있었다.
"700합. 16번."
나는 결계를 손등으로 두드려 펜릴을 불렀다. 펜릴은 여전히 내 호출에 아무 반응이 없었지만, 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펜릴을 불렀다.
"네가 나와 공방을 주고받은 횟수고, 네가 죽을 뻔했던 순간만 전부 16번이지. 그리고 이제 너는 이 결계에 갇혔어. 내가 파놓은 함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싸울 때는 한 마디도 제대로 안 하더니."
펜릴은 나를 향해 이를 갈며 울화통을 터뜨렸다. 실제로 전투 중에 나는 한 마디도 뻥긋하지 않았고, 오직 펜릴의 공격을 앞서 예상하고 피하고 대처하기에 급급했다.
"말하면 질 것 같으니까?"
"...그럼 이제는 이길 것 같으니까 말한다 이거냐?"
"그렇지."
펜릴은 침묵했다. 펜릴도 나도 손상된 마력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필요했고, 심적으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잠시 해소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펜릴은 단 한 번도 내 몸에 상처를 입힌 적이 없었고, 나는 회피와 대응에 전념하느라 진이 빠져있었다.
내가 임시로 만든 결계 함정에 펜릴이 잡힌 순간, 우리는 암묵적인 합의에 이르렀다. 잠시간의 휴식. 그리고 휴식 이후에 이어지는 전투.
"계속 이렇게 싸워볼까? 딱히 달라지는 건 없을텐데."
"...흐흐, 흐흐흐."
펜릴은 실성한 사람 마냥 흐느끼며 웃었다. 실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너 나 못 죽이잖아."
내 의지가 꺾이지 않는 이상 무한히 죽어도 죽지 않는 괴인전.
모든 공격을 피하고 막으며 약한 생채기조차 내게 하지 못하게 하는 대인전.
설령 갑자기 괴인형으로 바꾼다고 해도, 그 전투는 분명히 내 승리였다. 아르엘과 싱크로 한 몸이 괴인보다 더 강하며, 나 또한 괴인형으로 싸우는 것보다 인간형으로서 싸우는 것이 훨씬 더 익숙했다.
"어쩔래. 계속 싸워볼까?"
"너, 진짜 이제 가만안둬."
펜릴의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나는 날개를 펼쳐 결계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쩌적, 쩌저적!!!
결계 속에서 녹색의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SS급도 깨기 버거울 정도로 두터운 결계가 산산조각나기 시작했고, 펜릴의 몸에서 온갖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테라의 장기에 오염된 펜릴 본인의 마력.
지구에서 그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끔 하는 육체인 아르엘의 마력.
그리고 간부와 정령이 가진 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절풍의 마력.
그 세가지의 힘이 결계 속 펜릴에게 모여들기 시작했고, 나는 마력으로 회수하는데 성공한 두 정의 TAT를 꽉 붙잡았다.
"3페이즈는 최종보스 전용인데."
크르르르.
바람이 울부짖는다. 이것이 간부들을 상대함에 있어서 최종전이라고 생각한다면, 3페이즈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신살랑(神殺狼), 펜릴.
크아아아아아-----!!
결계가 박살남과 동시에,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 * *
폭주 펜릴.
이미 내가 숱한 전투를 치뤄본 적이 있었지만, 오늘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싱크로 때문에 그런가.'
크기는 대략 70m. 나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호로관의 성벽 위에 올라 점점 몸집을 불려나가는 펜릴을 주시했다. 세 개의 마력이 한군데 뒤섞여, 펜릴은 끊임없이 그 크기를 불리고 있었다.
"멈추질 않네...."
꾸르륵, 꾸륵!!
4족보행의 검녹색 늑대는 어느새 전장 70m를 훌쩍 뛰어 넘었다.
"진짜 크네."
간부 중 폭주 석하랑의 나비 날개도 가로 길이가 80m에 이르고, 히드라의 길이를 전부 다 합치면 100m를 훌쩍 넘길 것이다. 아무리 괴물이라도 크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마력이 필요했고, 마력이 그 육체를 받쳐주지 않는다면 몸이 괴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륵, 꾸르륵!!
펜릴은 계속해서 그 크기를,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었다. 70m는 어느새 훌쩍 넘기고, 눈 깜짝할 새에 100m에 이르렀다.
"어우."
나는 날개를 펄력여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내가 발을 떼기가 무섭게, 호로관의 성벽을 향해 다섯 갈래의 칼바람이 날아왔다.
서걱, 서걱!!
바람이 일으킨 상처는 호로관을 여섯 등분으로 쪼개어버렸다. 펜릴은 그저 손톱을 휘두르는 것 한 번으로 성벽과 대지를 갈라버렸다.
"그런데 언제까지 커질 거야."
크르륵.
펜릴의 몸집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장 70m는 커녕 이제 키가 70m에 이를 정도였다. 나는 살짝 더 높이 날아올랐고, 펜릴은 변신에 따른 기류 만으로도 주변 대지를 전부 바람으로 갈아버렸다.
"저건 확실히 강하겠네."
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몸집은 원판은 커녕 원작 그 어떤 괴수와 비교해도 비교가 불가능할만큼 커졌고, 심지어 내가 이곳에 와서 가장 크다고 느꼈던 폭주 아지다하카-다크 레기온보다도 더 거대했다.
투둑. 투두둑.
펜릴의 털에서 조그만 무언가들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작은 것들이었지만, 체구가 족히 10m는 되어보이는 대형 괴수들이었다.
■■■■■.
"쓰으읍. 역시 나와버렸네."
나는 괴수들의 형태를 보고 이가 갈렸다. 박쥐와 같은 날개를 한 검은 괴수들은 전체적으로 장수말벌의 형태를 하고 있었고, 머리의 형태나 몸통에 돋아난 양 팔은 도마뱀마냥 보라색 비늘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
마력에 기생하여 숙주를 좀먹어 들어가는 기생형 미생물. 테라의 오염된 마력은 전부 저 괴수들이 깃든 마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주가 테라를 점령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일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펜릴, 조금 크기가 크고 양이 많지 않니?"
피부에 붙어 사는 미생물이나 다름없는 놈들이지만, 저렇게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그 크기를 불리고 수가 하늘을 뒤덮을 정도면 당연히 사람의 속을 메스껍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우리, 조만간 지구 전역에서 저거 보게 될 거 아니야. 안 그래?"
성주가 최후의 일전을 결심하는 즉시, 테라에 들끓는 테라사이트가 차원문을 통해 마구잡이로 쏟아지게 될 것이다. 비단 지금 뿐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조만간 코어조차 나오지 않는 테라사이트들을 상대로 극심한 소모전을 벌여야 했다.
"그러니까 우리 깔끔하게 너랑 나랑 붙는 걸로 끝내자. 어때?"
캬아아아아!!
몸집을 300m까지 키운 펜릴이 나를 향해 거칠게 포효했다. 동시에 테라사이트들이 소름끼치는 날갯짓 소리를 내며 펜릴의 바람을 타고 내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꼬리에 있는 독침은 장기섞인 마력을 직접 주입하는, 대상을 순식간에 괴인이나 괴수로 변이시키는 특성이 있었다.
"말로 하니까 역시 안 듣네."
나는 양손에 든 TAT를 아래로 내렸다. 창염 덕분에 총기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이렇게 대량의 적을 상대할 때에는 총만큼 좋은 무기가 또 없었다. 애초에 총은 내게 있어서 익숙한 무기이기도 했다. 원작 주인공의 기본 무기가 이 TAT의 개조 사양이었으니.
"그럼 말을 듣게 해야겠지?!"
□□□□□□□!!
푸른 불꽃이 아래로 내리꽂혀 폭발했다. 테라사이트들은 날개와 몸에 불이 붙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속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 만큼, 테라사이트들은 죽음의 공포를 모르는 부나방처럼 불에 타들어가면서도 나를 향해 독침을 찌르려했다. 나는 날개를 움직여 더 높은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파바박!!
땅에 곤두박질치는 테라사이트들은 내장과 함께 독침을 몸 안에서 쏘아댔다. 독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중세 기병들이 랜스 차징을 할 때나 쓸법한 기병창이 장기를 번들거리며 나를 오염시키려 했다.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요격하여 떨어뜨린 것들이 단말마로 내지른 발악이었다. 진짜는 마탄의 폭발을 피해 나를 향해 수직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스스스스스스!!
모기와 벌의 날갯짓 소리를 섞어놓은 듯한 소리로 날아오는 테라리스트들은 족히 수십이 넘었다. 나는 수직으로 계속 날아오르며 아래를 향해 마탄을 연사했다.
타앙, 타앙!!
푸른 불꽃이 비가 내렸다. 나는 연사의 반동까지 보태어 하늘로 더 높이 날아올랐고, 테라리스트들은 마탄에 얻어맞아가면서도 날아오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3페이즈 진짜 패턴 더럽네!!"
1:1 대인전으로 두 번 이어지다가 어떻게 이런 식으로 대량의 부하를 쏟아낼 수 있단 말인가. 부하라기보다는 기생충같은 것들이 펜릴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셈이었지만, 어쨌든 기생충이든 펜릴이든 나를 죽이려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직 본 게임은 시작도 안했는데.'
마탄을 쏘아대며 가려진 시야 너머, 수백 미터를 날아올랐음에도 아래에 훤히 보이는 펜릴은 검녹색 털에서 점차 검은 마력이 털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마력은 당연히 테라리스트로서 실체를 갖추고 나를 향해 날아왔지만, 적어도 검녹색의 형태보다 순수한 녹색 털이 더 눈에 보기는 좋았다.
"내가 진짜 정령 각성 시켜볼려고 별 짓을 다한다, 진짜!"
추후, 펜릴이 정령으로 각성한다면 내게 큰 빚을 졌다고 절을 해야할 것이다. 나는 쿨타임이 돌아왔음을 직감하고 지상을 향해 총구를 나란히 놓았다. 테라리스트들이 열심히 내 뒤를 쫓아 날아왔지만, 수직으로 날기만 하는 내 속도를 따라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부 다 죽여버려야 뒷탈이 없겠지. 너, 알바로 열심히 일한 서비스라고 생각해. 알바생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나같은 건물주 없다?"
TAT의 외부 장식이 살짝 녹아내릴 정도로, 나는 안에 막대한 양의 마력을 쏟아넣었다. 언제 도달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나는 태풍의 머리와 눈을 맞댈 지점까지 날아올랐고, 하늘은 청명하고 대지는 고요했다.
"후우."
나는 좌우익의 날개를 펼쳤던 마력을 전부 TAT에 밀어넣었다. S급 괴수의 소재로도 견디지 못할 만큼의 마력이 총열에 집약되었고, 조금만 더 불어넣었다가는 과열되어 내 손에서 터질 것만 같았다.
"케프리, 아툼."
공중에 떠오를 정도의 마력만 최소한으로 남긴 뒤.
"노바 익스플로젼."
한계까지 쥐어짜내 동시에 만들어낸 두 개의 마탄을 지상으로 놓은 뒤, 방아쇠를 당겼다. 나란히 놓인 총구에서 소형 태양 두 개가 함께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자유낙하하며 불안정해진 두 마탄은 나선을 그리며 막대한 불꽃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두 태양은 사방으로 창염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테라리스트들은 창염의 비에 닿자마자 독침을 쏠 기력도 없이 재가 되어 소멸해버렸다. 태양마탄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지상을 향해 날아가며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펜릴의 몸에서 튀어나온 테라사이트를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캬오오오!!
전신이 녹색빛으로 물든 펜릴이 나를 향해 포효하던 순간.
달칵.
펜릴의 쫙 벌린 입 위에 두 개의 마탄이 서로 부딪혔다.
"쾅!"
내가 날고있는 200km 상공에서도 그 형태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푸른 버섯 구름이 아주 예쁘게 피어올랐다.
"하아...."
진한 탈력감에 나는 호흡이 가빠졌다. 카르나를 상대할 때도 이만큼 마력을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 아마 이 세계에 와서 여력을 남기지 않고 마력을 쓴 적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내가 진짜, 정령 각성 시키려고 별 짓을 다한다."
언제나 전력으로 싸워도 모자랄 판에, 상대가 족쇄를 끊어내는 것을 거들어주고 싸워야한다니. 절로 눈물이 눈앞을 가리지만, 그게 결국에는 창염을 살리는 길이라 굳게 믿으며 나는 등뒤에 미니피닉스만큼 작게 펼쳐진 날개를 접었다.
새애액----!!
자유낙하하는 나는 버섯구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잔불과 부딪히며 조금이나마 마력이 회복되었고, 테라리스트의 잔재와 부딪히며 마력이 깎여나갔다. 졸지에 내가 만들게 된 태풍의 눈 한가운데로 나는 낙하했고, 평소보다 훨씬 적은 마력만이 남아있었다.
두둥실.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던 내 몸의 낙하속도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상 1km 지점에 이르렀을 때는 하늘에서 천사가 강림하여 내려오듯 아주 천천히 낙하했다. 아래에서는 녹색의 바람이 나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래, 적어도 이 정도 예의는 있다 이거지?"
지상의 펜릴은 이전보다 훨씬 크기가 줄어들어있었다. 500m까지 커졌던 체구는 내 궁극기를 버텨내는데 사용이라도 했는지 고작 3m 조금 넘는 크기가 되었다. 몸의 털은 녹색으로 반짝이고 있었고, 털의 겉에는 창염의 잔불씨가 남아 타들어가고 있었다.
"야, 펜릴아. 너 정령의 힘을 각성하고, 거의 준싱크로까지 해놓고 나한테 지는 이유가 뭔지 아냐?"
크르르.
나는 녹아내린 TAT를 꽉 붙잡았다. 총열 내부가 완전히 녹아내린 덕분에 마탄은 더이상 쏠 수 없지만, 하나 정도는 원형을 살려 싸울 수 있었다.
스르르.
최후의 보루 삼아 가지고 있던 덕배의 코어가 총신에 깃들었다. 은빛의 외형이 회색으로 물들었고, 녹아내린 부분이 보정되어 원형을 조금이나마 되찾았다. 나는 복구한 TAT를 펜릴에게 겨눴다.
"네 패인은 하나다, 펜릴."
나는 펜릴에게 총구를 겨눴다.
"너는 딸기를 소중히 하지 않았지."
펜릴이 입을 쩍 벌리며 나를 향해 칼바람을 날렸고, 나는 펜릴에게 마탄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