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2화 〉1부 19장 8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펜릴은 전신의 갑주가 불에 녹아내려 진녹색의 형태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 내려앉아 청화의 모습이 되어 옆에 쪼그려앉았다.
"내가 당신을 가만히 놔둔 이유가 뭘 것 같아요?"
펜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죽은 것 같기도 하고, 아예 의식이 날아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쪽이든 나는 펜릴에게 마음 속에 담아둔 말을 전부 끄집어냈다.
"당신은 세계를 일주일 내로 멸망시킬 수 있으니까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겠죠. 네, 저를 회칠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싱크로한 애들 눈 피해다니면서 사람들 전부 죽이고 다닌다거나, 아예 대기권을 날려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겠네요."
펜릴은 서서히 자신의 몸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내 코어를 칼로 베려고 했을 때 아이디어를 얻은 건지, 내 궁극기를 맞았을 때 전신의 가드를 포기하고 모든 마력을 코어 보호에 돌린 건 충분히 잘한 일이었다.
'안그랬으면 이미 펜릴이 절풍이 되었을테니.'
"그런데 말이에요, 당신이 그러려면 우선 나부터 잡고 가야할텐데, 괜찮겠어요? 당신의 유일한 상성인 내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내가 손짓 한 번만 하면 바로 마력이 불타 사라질텐데."
펜릴은 전신을 갖춰 몸을 일으켰다. 갑주의 겉은 전부 녹아내려 원형조차 찾을 수 없었고, 머리의 늑대 모양 투구는 한쪽이 완전히 녹아내려있었다. 펜릴의 전신은 보기 힘들 정도로 불에 타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본체로 변신해서 2페이즈로 들어가는 건데.... 뭐 다를 거 없잖아요? 예전에 1:3으로 싸웠을 때도 내가 그냥 봐줬으니까 망정이지, 당신만 조지고 들어갔으면 그 날 바로 엔딩이었다 이 말씀."
펜릴은 아무 말 없이 두 손을 들어올렸다. 손목 부터 녹아내린 갑주는 손가락의 형체는 찾아볼 수 없을만큼 망가져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승리를 확신했다.
"악당들이 왜 승리 직전에 이렇게 떠벌리는 지 알겠네요.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입을 터는 거였어요. 네, 질 자신이. 푸흐흐. 이제서야 조금 이해가 가네요."
나는 품에서 덕배트를 꺼내 손에 쥐었다.
"역시 미친 개는 몽둥이로 뚜드려 패야 제맛이죠. 늑대는 개과잖아요? 어디 오늘 한 번 몸에 민트초코 대신 된장 발라봅시다. 펜릴탕, 어때요?"
[정말 더럽게 말이 많군. 그 말 하나하나가 패배 플래그라고 생각하지 않나?]
"푸흐흐, 그거 참 말 잘했습니다."
나는 비틀거리는 펜릴이 너무나도 우스웠다.
"이미 플래그는 압도적으로 쌓여있어요. 가는 곳곳마다 '살아서 돌아가겠다'느니, '이 싸움이 끝나고 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느니. 지금 말하고 있는 순간 순간 마저도 플래그가 쌓이고 있죠. 당신이 파워업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는 거예요. 악당의 마지막 자비죠."
나는 덕배트로 펜릴의 가슴을 쿡쿡 눌렀다. 펜릴은 내 도발에도 가만히 있었다.
"자, 어서 빨리 본체 꺼내봐요. 그게 당신 마지막 수단이잖아요?"
[그게 네가 생각하는 본좌의 최대치인가?]
"...좌?"
어디서 이상한 단어나 배워서는. 나는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
"......"
소리를 전할 매질이 사라졌다. 공기가 사라졌다. 켈리펠라의 이계를 둘러싼 대기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게.]
[미안하지만 그건 옛날 정보다.]
펜릴은 덕배트를 발로 디디고 뒤로 껑충 물러섰다. 대기는 진공상태가 되었고, 불꽃을 태울 산소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파워업 플래그는 주인공의 전유물이지.]
척.
펜릴은 한 손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렸다. 몸 전체에 녹색의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펜릴은 자신의 육체를 새롭게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변, 신!"
[변신?]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괴인형으로 변신했다. 변신이라고 말을 했지만, 갑자기 본체로 불쑥 몸을 바꿀 수 있으므로.
"괴도, 펜리르!"
...남성용 검은 정장 슈트에 코트. 단발이 아닌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진녹색의 머리칼의 여인. 그리고 눈에는 고양이를 형상화한 아이마스크까지. 전체적으로 고양이와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아이마스크 아래의 하관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김펜릴의 디폴트가 아니었다.
[아르엘?]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 나는 뒷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날개를 펼쳐 뒤로 날아올라야 했다.
고오오오---!!
거대한 상승기류가 나를 덮쳤다. 나는 날개를 펄럭일 틈도 없이 순식간에 하늘로 띄워졌고, 순식간에 바람을 타고 달려온 펜릴-아르엘 얼굴-과 마주했다.
"놀랬냐?"
얼굴, 목소리, 몸매. 그 모든 것이 아르엘이었지만, 말투와 몸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분명히 펜릴의 것이었다. 펜릴의 왼쪽 눈에서 보라색 기운, 테라의 오염된 장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본체를 꺼냈을 때 졌는데, 또 본체를 꺼낼 것 같냐?"
펜릴은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나는 숨이 턱 막혀 옴싹달싹을 할 수 없었다.
"말조차 하기 어렵지? 주변 공기를 다 지워버렸으니, 성대가 울려도 그걸 전달할 방법이 없잖냐."
[자꾸 냐냐 거리지 마라. 듣기 짜증나니까.]
"지는."
펜릴은 시니컬한 얼굴로 나를 비웃으며 손을 쭉 뻗었다. 손에는 언제나처럼 절풍이 잡혀있었고, 손목에는 언제 착용했는지도 모를 황금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어때? 예쁘지? 이게 네 관이 될 거야."
펜릴은 팔찌를 해제하여 내 목에 채웠다. 나는 격렬히 저항했지만 팔찌는 내 목을 조아대기 시작했다. 손오공이 머리에 금고아가 채워진다면 이런 느낌일까.
"너무 시끄러워서 모가지를 뽑아버리고 싶은데.... 어차피 죽을 거 아냐."
펜릴은 씩 웃으며 내 몸을 뒤집었다. 나는 펜릴에 의해 180도 뒤집혔다. 마력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코어에서의 마력은 황금의 고리에서 뿜어져나오는 녹색의 마력에 상쇄되어 코어 안에서만 맴돌게 되었다.
"마침 하늘도 어두워졌네."
어두운 회색 구름이 태양빛을 가렸다. 펜릴은 나를 짓밟으며 아래를 가리켰다. 막대한 공기가 날카로운 칼날비가 되어 수직으로 지상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제트스트림이야. 이 세계의 대기를 뒤집었어. 어디 지상까지 그대로 곤두박질쳐보라고."
펜릴은 두 손을 놓으며, 내 목을 짓밟았다.
"."
나는 마하를 아득히 뛰어넘은 광속으로 지표면을 향해 처박혔다.
* * *
역 제트 기류.
중력 가속도.
드라우프닐.
세 가지 요소가 갖춰진 끝에 피닉스는 성층권에서부터 수직으로 낙하하여 지표에 내리꽂혔다. 지표면에 떨어지는 순간의 충격이 어찌나 컸는지, 대륙 전체가 들썩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후우."
펜릴은 호흡을 골랐다.
'이겼다.'
황금의 고리, 드라우프닐은 여전히 깨지지않고 피닉스의 목소리를 앗아간 족쇄가 되었고, 동시에 무게추가 되어 피닉스를 바닥에 메다 꽂았다. 펜릴이 직접 절풍을 사용하여 포를 뜬 것만 수백번에 이르건만, 피닉스는 죽어가면서도 몸을 재생시키며 절풍의 경직마저 풀어버렸다.
'끝난 거다.'
하지만 그도 이걸로 끝. 아무리 피닉스라도 마력으로 몸을 보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십 km를 자유낙하하여 바닥에 내리꽂힌 건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이지는 못해도 의식을 되찾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며, 그게 불과 3분도 안 되는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펜릴에게 그 시간이면 충분했다.
'누구 말대로 지구 대기 뒤집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야.'
적도의 공기 흐름을 멈추게 만들고 전 지구의 산소를 대류권 위로 상승시켜버리면 전 인류가 10분이 지나지 않아 소멸할 것이다. 밀폐된 공간이나 지하실에 박힌 놈들은 그보다 조금 더 살 수 있겠지만, 과연 그들이 산소가 내려가지 않는 지구에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그래. 3분이면 충분-'
[100 나누기 3은?]
두근.
펜릴은 지하 깊숙한 곳까지 처박힌 구멍을 내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지열처럼 스멀스멀 올라오는 청색의 마력은 마치 지옥불처럼 들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싱크로는 완벽한 조화야. 오직 둘이서 하나로 합쳐지는 거지. 100은 2로 나누면 50으로 나누어 떨어지잖아?]
펄럭, 펄럭.
지옥의 마귀가 올라온다면 저런 모습일까. 전신이 뒤틀린 피닉스는 두 날개만 펄럭이며 관절인형처럼 지옥구덩이에서 천천히 상승하고 있었다.
[너는 분명히 강해졌어. 하지만 완전한 싱크로에는 이르지 못했구나. 그러니까 내가 아무 망설임없이 너를 혼자서 잡으러 온 거야. …...절풍이 방해하고 있구나? 절풍이 있으니까 지분이 딱 1:1이 안 되는 거야.]
"......."
펜릴은 이를 악물었다. 반박을 해야하지만 반박을 할 수 없었다. 피닉스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유사신화. 인간이든 정령이든 어느 한쪽의 힘이 더 높은 현상을 두고 칭하는 말이지. 신에 가까운 힘을 얻기는 했지만, 신에는 이르지 못한 단계 말야. 99.99. 그게 네 상태인 거지?]
피닉스는 하반신이 아예 떨어져 나간 상태 그대로 허공으로 떠오르며 펜릴을 올려다봤다.
[그래. 그게 네 2페이즈라면....]
콰아아아아아앙!!
우레와 같은 폭발 소리와 함께 펜릴의 전신을 푸른 불기둥이 덮쳤다. 펜릴이 발을 아래로 내려 불꽃을 갈랐고, 그 아래에는 청발의 청년이 손에 총을 든 채 씩 웃고있었다.
"이쪽도 2페이즈다."
□□□□□!!
다시, 창염이 펜릴을 덮쳤다.
* * *
인간으로 싸워본 적이 얼마만인가.
'남성체로 싸운 건 처음인가?'
피닉스, 그러니까 청화의 몸으로 싸우는 건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써야하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루살카 만나기 전에는 더럽게 험하게 굴렸지.'
광검과의 전투에서는 멘탈을 박살내기 위해 일부러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그 때는 창염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뒤로는 몸이 상처입지 않도록 충분히 관리해왔다. 몸 주인이 그걸 바라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번 전투는 최대한 피하면서.'
그리고 나는 괴인 피닉스의 몸이 수십 조각으로 썰려나가는 대 펜릴 전투에서 백청화의 몸을, 창염이 내게 준 '나의 몸'을 꺼내들었다.
아무리 펜릴이 아르엘과 준 싱크로를 했다고는 하지만 싱크로는 싱크로. 아르엘의 육체를 차지한 펜릴의 공격은 매섭고 날카로운 칼이었다.
그러니 피하면 그만.
피하지 못할 것 같으면 막으면 그만.
카앙, 카앙!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 칼바람을 쳐냈다. 심장을 찔러오는 칼바람은 몸을 비틀어 피했다. 발목을 잘라내려고 날아오는 칼바람은 한쪽 발을 들어올림과 동시에, TAT의 총구를 바닥에 겨누며 쏘았다.
"크흑?!"
하단을 찌르려던 펜릴은 마탄에 제자리에서 멈춰섰다. 한 번도 맞지는 않았지만 맞으면 큰일난다는 건 펜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한 발이라도 맞춰야했다.
타앙, 타앙!!
양손의 TAT가 불을 뿜었다. 50구경 마탄은 창염을 머금고 허공을 가로질렀고, 각각 펜릴의 좌우를 향해 나아갔다.
부--웅!!
견제용으로 쏜 걸 눈치챈 펜릴은 오히려 앞으로 뛰었다. 덕분에 두 마탄은 펜릴을 스쳐지나갔고, 펜릴은 풀쩍 뛰어 몸을 수직으로 빙그르르 돌렸다.
날카로운 꼬리가 나를 내려치려했다. 나는 한쪽 TAT를 휘둘러 꼬리끝을 총구에 휘감았다. 그 사이 펜릴이 나를 향해 손톱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새애액---!!
무엇이든 잘라버릴 것처럼 손톱이 날아들었다. 한쪽으로 꼬리를 휘감은 덕분에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떻게 피할까.'
펜릴의 공격 패턴은 세 가지. 손에 든 절풍, 휘두르는 것 만으로도 상대를 베어버리는 발차기, 그리고 장골에 달린 꼬리. 아르엘의 몸을 베이스로 하고 있으니, 아르엘의 주 공격 수단에 풍속성을 엮는다면 공격 방법은 둘, 피하는 루트는 하나.
철컥.
나는 두 정의 TAT를 손에서 놓아버렸다. 두 손은 텅텅 비었고, 펜릴은 졸지에 꼬리에 무거운 무게추를 달게 되었다.
"흣?!"
내가 스스로 무기를 놓은 잠깐의 순간, 펜릴이 당황해 동작을 멈췄다. 그 찰나의 순간이면 역공을 펼치기에는 충분했다.
부웅--!!
펜릴의 손톱은 허공을 갈랐다. 날카로운 손톱은 공기를 가르고 나서도 피부를 갈라버릴 것 마냥 따가웠다. 만약 총을 놓지 않았으면 그대로 갈려버렸을 거리였다.
"풋."
허공을 베어갈랐으나 펜릴은 나를 향해 비웃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거 어쩔래?"
펜릴은 두 정의 총기를 가리키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무기를 스스로 버리며 공격을 피한 것에 우스운 모양이다. 내가 피하기는 해도 자신을 공격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나를 죽일 수 있겠어?"
펜릴은 여유로운 얼굴로 손을 땅에 짚었다. 역시.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아주 의기양양한데 고작 그 정도로는-"
퍼--억.
펜릴의 얼굴이 내 무릎에 걷어차였다. 빛이 속도로 찬 것도 아니고, 내 니킥이 펜릴의 속도를 아득히 상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펜릴은 그저 극히 찰나의 순간, 내가 공격하려던 순간에 막지 못했을 뿐이다.
"어떻, 게...?"
펜릴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첫 인사는 어디까지나 경고성으로 날린 것인만큼 제대로 마력은 폭발시키지 않았지만, 펜릴은 직감했을 것이다.
방금, 한 번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