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1화 〉1부 19장 7
잠시 뒤, 백영도.
"흐어어어, 흐우어엉!!"
앙그는 백희아의 품에서 흐느껴울었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안쓰러움에 어쩔 줄 몰라했다. 감수성이 깊은 누군가는 누리가 전한 진심에 공감을 하며 눈가를 닦고 있었다. 다들 누리와 앙그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감동했다.
"누리가, 크흥, 누리가 나보고 친구래!!"
앙그는 목놓아 꺼이꺼이 울었다. 앙그의 성격을 이미 알고있는 정령들은 앙그가 새롭게 사귄 인간 친구와의 교우 관계에 다들 코를 찡그렸다.
[거 그만 닥치고 뚝 하시지.]
카르나 빼고.
[언제까지 울 거야. 벌써 한 시간이다.]
카르나는 홀로그램으로 참가하면서도 다리를 꼰 채 앙그에 대해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앙그는 옆에 앉은 백희아에게 엉겨붙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흐끅, 희아야, 쟤가 나 구박해...!"
"자, 눈물 뚝."
"......."
카르나가 엄한 아빠라면 백희아는 자상한 어머니다. 그리고 백희아, 집행관은 이런 중요한 회의를 앙그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다는 이유로 멈추게 할 사람이 아니었다.
"...흠흠. 그럼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백희아. 역할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집행관으로서, 그리고 백나로 호의 함장으로서 역할을 해줄 거예요."
[마신이라...풉.]
유나와 함께 참가한 히드라가 대놓고 앙그를 비웃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앙그의 이명을 가지고 놀릴 것 같은 분위기가 될 것만 같아, 나는 히드라에게 주의를 줄 겸 미리 선수를 쳤다.
"네 다음 대지모신 얄다바오트."
[......너 아주 죽어, 진짜.]
히드라는 울컥했지만 옆에있던 유나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회의, 계속하시죠.]
"고마워요. 그래서 백희아가 앙그와 싱크로하게 된 것을 계기로 이제 다섯번째 여신이 생겼습니다. 짝짝짝. 이제 한 명만 잡으면 되네요."
[절풍의 펜릴.]
[드디어 내일인가.]
11월 11일.
잠정적으로 정해진 결투날이었고, 이제 불과 한나절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펜릴만 잡으면 이제 진짜로 끝이에요."
[정말 끝입니까?]
"네, 끝이어야 하죠."
끝이 아니게 된다면 결국 나는 죽는 거니까. 반드시 펜릴에게서 승리를 따내어 여신을 6여신으로, 그리고 7여신으로 만들어야했다.
[그럼 너 어떻게 싸우려고 하는 거야?]
정령 네트워크를 통한 대화이기에 사투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 석하랑의 질문이었다. 석하랑은 상당히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이중에서 가장 강한 카르나도 마찬가지였다.
[펜릴 찾았어? 어디서 뭘 하는지도 지금 모르는데.]
이곳에 있는 여섯 정령-나 포함-모두가 펜릴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다. 히카리를 통한 과학의 힘으로도, 백희아의 정보력으로도, 은유하의 X로이드 네트워크에도 펜릴은 잡히지 않았다.
"굳이 찾을 필요는 없어요. 본인이 나오게 하면 되니까."
나는 특별히 주문한 상자를 집어들었다. 모두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너 설마 또 그걸로 불러낼 생각이야?]
[한 번 당한 걸 두 번 당할만큼 멍청이는 아닐텐데.]
[너 그러다 또 당한다?]
"안 당하니까 걱정하지 마요."
내 손에는 6민트가 들려있었고, 나는 또다시 6민트를 시전할 생각이었다.
"이건 일종의 초대장이라고요. 펜릴을 전장으로 초대하기 위한 초대장."
나는 딸기향 껌을 씹으며 분홍색 아이스박스 포장을 열었다.
[어우.]
[...저건 나도 무리.]
[너 진짜 미쳤니?]
"흐흐흐."
승용차 트렁크에도 실리지 않을 진녹색 아이스박스 상자 안에는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이 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하프갤런 종이통이 아니라, 박스 안에 리터 단위로.
민트초코 150리터.
"이 정도면 충분히 초대하고도 남을 걸요?"
[그래.... 그래서 어디서 초대할 계획인가?]
[다들 일정 비워뒀어. 말만 해. 언제든지 갈 수 있으니까.]
[지난 번 처럼 영국으로 갈 거야?]
"......."
나는 환룡을 슬쩍 주시했다. 환룡은 남들 눈치채지 못하게-심지어 샤오린조차도-내게 동그라미 표시를 보냈고, 나는 여유로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알겠지만, 펜릴이 상당히 여유부리잖아요? 그래서 내일 하루가 된다고 해서 꼭 바로 나타나진 않을 거예요. 아마 11월 11일 23시 59분에 짠하고 나타날 수도 있는 거고."
[귀찮은 녀석이군.]
"그럼 24시간동안 기다려야한다는 겁니까?"
"그런 셈이죠. 필요하면 부를게요. 푸흐흐."
필요하다면.
마신에 대한 소개.
펜릴에 대한 공략 소개.
그 모든 것을 하고난 나는 환룡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누구에게조차 비밀로 한 채.
절풍의 펜릴 전투.
1:1이다.
* * *
단언컨대, 나는 단 한 번도 물리적 상처를 입은 적이 없다.
아마 없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첨언하자면, 내가 적에게 일부러 몸을 망가뜨리면서 싸운 적을 제외하고, 적에게 예상치 못한 공격을 허용하여 상처를 입은 적은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만큼 창염의 피닉스, 다크 레기온의 간부로서의 피닉스는 강했다. 간부 중 최강이라는 스펙은 헛것이 아니며, 나는 간부로서의 힘을 수많은 시행착오끝에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런 피닉스의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처음으로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데미지를 허용했고, 팔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그런 위용을 일으킨 자는 다름아닌 절풍의 펜릴.
[짜릿한데.]
팔은 재생하면 된다. 떨어져나간 팔은 코어와의 연결이 끊겨 푸른 불꽃으로 산화했고, 몸통에서부터 불꽃을 이어만든다면 팔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만들어낼 수 있었다.
[20년간 놀고 먹은 건 아니군.]
창염의 피닉스가 배신했다는 걸 알면서도 펜릴은 김펜릴로서 놀고 먹었다. 나를 상대로 몇 번이나 승리를 자신하며 나를 가지고 놀았던 이유를 이제서야 체감할 수 있었다.
펜릴.
강하다.
[강하긴 한데.]
나는 남은 팔을 들어올려 전방을 가로막았다. 내 오른팔을 자르고 옆으로 빗겨나갔으면서, 언제 또 정면으로 돌아왔는지 펜릴은 나를 향해 칼을 번뜩이며 허공을 달리고 있었다.
[나만큼 강해진 건 아니잖냐.]
카--앙!!
내 건틀릿과 펜릴의 칼날이 맞부딪혔다. 청색과 옥색의 마력이 서로 부딪혀 굉음을 일으키듯 폭발했고, 나는 펜릴을 내려다보며 손으로 칼날을 움켜쥐었다.
[이 정도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깝죽댄 거냐?]
칼날은 내 건틀릿 사이에서 빠르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톱날처럼 회전하는 단분자 커터라도 되는 것마냥 내 마력 방벽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수속성이라면 위험했겠네.]
석하랑이 이 정도의 전투 센스를 발휘했다면 아마 진짜로 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성에서 오는 힘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풍속성은 화속성을 이기지 못한다.
[산소는 불꽃에 타버리지않나. 그렇지?]
딱.
나는 재생한 오른손을 튕겼다. 맑고 청명한 소리와 함께 후방을 노리며 달려들던 펜릴의 전신에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절풍에 의한 스턴, 그걸 내가 미리 대비하지 않았을까봐.]
펜릴은 전신이 타들어가는 와중에도 바람의 칼날로 내 목을 날리려 칼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순간적으로 시야가 뒤집힐 정도였다.
목이 베였다.
하지만 코어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나는 잘려나간 투구와 머리 부분을 재생하고 펜릴을 향해 총을 들어올렸다.
퍼-억!
총구가 펜릴의 턱 아래를 처올렸다. 동시에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나갔고, 펜릴의 머리 또한 폭발에 날아가버렸다. 펜릴이 내 목을 날려버렸고, 나는 펜릴의 머리를 태워버렸다.
[빨리 돌아오지?]
[...쫑알쫑알 더럽게 말이 많군.]
오로지 공격 일변도로 내 몸을 토막내던 펜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펜릴의 몸은 잔불에 타들어갔고, 펜릴은 내 바로 뒤에서 나타나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생사결에 잡담이 필요한가?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만.]
[말하면서 못 싸우나? 그렇다면 그것 참 아쉽군. 이야기할 여유조차 없이 이러고 끝난다면 내 승리다.]
나는 총을 거꾸로 쥐고 등 뒤에 선 펜릴의 관자놀이를 손잡이로 후려쳤다.
펜릴은 손바닥을 들어올려 총을 막았다. S급 괴수들의 사체로 만든 TAT가 맥없이 막혔다.
이번에는 펜릴이 앞으로 한걸음 다가오며 나를 향해 손바닥을 처올렸다. 정확히 내 턱부분을 노리고 날아오는 손바닥에 나는 고개를 뒤로 젖혔고, 펜릴의 공격은 허공을 가로질렀다.
[여기다 쏴달라고?]
투두두두두두!!
나는 다른쪽 손의 TAT를 들고 펜릴의 겨드랑이 아래에 마탄을 연발로 쏘아냈다. 위력의 가감은 없었고, 폭발의 반동 따위 무시한 채 더 많은 마력을 때려부어 마탄을 쏟아냈다.
카가가강!!
펜릴의 몸 주변에 흐르던 기류가 마탄을 사방으로 도탄시켰다. 순간적으로 급격하게 마력의 흐름을 꺾어, 마탄이 나아가는 진로를 강제로 비틀어버렸다. 펜릴의 겨드랑이를 향해 쏜 내 마탄은 단 한 발도 닿지 않았고, 펜릴은 허공에 뻗어진 손의 손톱을 날카롭게 세웠다.
푸--욱!!
펜릴의 손톱이 내 투구에 박혔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손톱끝이 투구를 가르고 안쪽의 불꽃까지 찔러들어왔고, 펜릴은 내 머리를 잡고 곧장 바닥에 패대기쳤다.
우둑!
펜릴은 내 목을 통째로 꺾어버렸다. 버티면 허리가 부러질 상태라 나는 그대로 펜릴이 꺾는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펜릴은 내 머리를 손으로 위에서 짓누르며, 스프린터마냥 자세를 잡았다.
[뛰려고?]
카가가가강!!
펜릴은 내 예상대로, 나를 바닥에 처박고 달리기 시작했다. 고대 삼국시대의 대륙은 황무지나 다름 없었고, 그에 따라 땅에 부딪힌 내 등이 갈려나가기 시작했다. 등의 갑주에 긴 상처가 생기고, 돌에 긁히고, 펜릴이 미리 세워놓은 칼바람에 어깨가 잘려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심각한 데미지는 없다. 펜릴은 나를 일방적으로 공격했지만, 그럴싸한 유효타는 없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간만 볼 거냐.]
[정말, 더럽게 말 많군!]
펜릴이 내 몸을 바닥에 찍어버렸다. 나는 그대로 목만 땅에 처박혔고, 마력으로 펜릴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파악해야했다.
우우우웅---!!
바람소리와 함께 몸이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력의 흐름이 상승기류가 되어 올라가기 시작했고, 펜릴은 하늘높이 치켜든 마력의 검을 내게 크게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걱!!
발목, 종아리, 무릎, 허벅지, 하체.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펜릴은 내 하반신을 열 조각 이상으로 썰어버렸다. 불꽃이 피분수처럼 터져나갔고, 나는 상반신만 남아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상체도 자를테냐?]
서걱!
펜릴은 일언반구없이 내 몸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척추를 타고 내려오던 칼날은 정확히 심장부의 코어에 다다랐다.
[뭐?]
내가 낸 소리가 아니었다. 펜릴은 처음으로 당황했다. 펜릴의 칼날은 내 코어를 감싼 보호막에 가로막혔고, 결국 칼날이 내 몸에 박힌 형국이 되었다.
[그 정도 칼날로는 내 코어를 자를 수 없다.]
그리고 코어가 파괴되지 않는 한, 간부든 정령이든 죽일 수 없다. 설령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죽을만큼 쇼크를 받더라도 죽지는 않는다.
[내가 말이다, 왜 간부형으로 싸우는 지 아냐?]
퍼--억!!
나는 손을 뻗어 펜릴의 발목을 붙잡았다. 펜릴은 자신의 발을 잘라내려고 칼날을 내 몸에서 뽑아내려 했지만, 잘려진 단면에서 타오른 불꽃에 손이 먹혀버렸다. 펜릴은 내게 손발이 붙잡혔다.
[내 몸주인께서 피보면서 싸우지 말라고 하셨거든. 피를 보게 될 것 같으면 최대한 간부형으로 싸우라는 말은 덤으로 하셨지.]
무조건 피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지만, 아무래도 그 약속은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펜릴은 괴인체로서의 나를 수백 조각으로 썰어버릴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넌 지금 내가 최선으로 싸우고 있는 것 같냐?]
나는 등 뒤로 불꽃의 날개를 펼치며 지상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칼을 잡은 손은 다시 재생된 내 손에 붙잡혔고, 나는 발목을 놓고 펜릴의 목을 낚아채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서걱, 서걱!!
펜릴은 발길질을 하며 내 몸을 잘라냈다. 전투화의 날카로운 끝은 절풍을 담은 칼날이 되어 내 갑주를 베었다. 하지만 잘라내기만 할 뿐, 그걸로 끝이었다.
[인간이었으면 쇼크사든 과다출혈이든 벌써 10번은 더 죽었을 거다. 애초에 목이 날아간 자가 살아있을 수는 없으니까.]
콰득!
펜릴이 사복검같은 꼬리로 내 목을 휘감았다. 가시같은 칼날이 내 목을 우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깔끔하게 목이 뎅겅 날아가는게 좋겠다 싶을 정도로, 수많은 칼날이 목에 박히는 감각과 옥죄여오는 고통이 동시에 느껴졌다.
하지만.
그 뿐이라면.
[죽음의 고통 정도로 끝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이거야.]
죽을 것처럼 아프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죽음에 이르기라도 하더라도, 나는 '피닉스'인 만큼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팔이 잘려나가면 팔을, 목이 잘려나가면 목을.
카가가강!!
펜릴이 전신의 마력을 폭발시키며 내 몸 전체를 잘라버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체가 잘려나가는 듯한 감각이 정신을 헤집어놓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릴의 공격은 내 코어에는 닿지 않는다.
[네게만 특별히 얘기하도록 하지.]
나는 아주 천천히 몸을 재생시키며 펜릴의 목을 움켜쥐었다. 코어에서 뻗어나간 팔이 가장 먼저, 그리고 몸에서 머리-다리로 퍼져나가는 불꽃은 코어에서 멈출 줄 모르고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정령들은 하나같이 자연의 일부를 상징하고 있지. 아니, 정확히는 그런 자연이 외계의 침략으로부터 행성-테라를 보호하기 위해 의지를 가지기 시작한게 정령이라고 하지. 설야는 물, 절풍은 대기. 그렇다면 창염은 무엇이겠어?]
화륵!
펜릴을 붙잡고 날아오른 나는 어느새 대기권의 끝에 다다랐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대기권을 벗어나 공기가 존재하지 않는 외기권으로 나아가게 되며, 펜릴은 힘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나는 저거지, 저거.]
실제 태양은 아니지만, 구현화된 이계에도 엄연히 태양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펜릴은 눈을 찡그리며 축 늘어졌고, 나는 오로라처럼 펼쳐진 날개의 마력을 모아 TAT의 탄창에 실었다.
[어디 한 번 직접 느껴보거라.]
나는 하늘의 태양빛을 마탄에 집약시켜 펜릴의 코어를 향해 쏘았다.
[아툼, 플레어.]
□□□□□□□□□!!!
태양의 열기가 마탄과 함께 펜릴을 지평선 너머까지 멀리 날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