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0화 〉1부 19장 6
"축하해요."
한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암속성 S급이 된 백희아, 그리고 백희아를 S급으로 만든 앙그는 손을 살포시 잡은 채 동시에 내게 고개를 돌렸다.
"대화는 잘 하고 있어요?"
"...응."
"정말로 유익한 대화입니다. 심층의식을 통한 진솔한 대화라니. 언어로는 통하지 않는 진심이 느껴집니다."
밖에서 보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앙그는 백희아의 심층의식 속에 접속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타인의 정신에 접속하는 것은 환룡의 특기이나, 꼭 그런 이능이 아니더라도 마력을 통해 상대의 진심을 읽는 건 S급이나 정령들의 패시브 스킬이나 다름없다.
말로 대화하기 어려우니 마력으로 대화하자.
자신의 의식을 직접, 자신의 진심을 직접 전달하는 수단인 만큼 둘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대화법이었다.
물론, 암속성끼리 직접 대화를 주고받는 통에 나는 둘이 무슨 말을 나누는지 저-언-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앙그와 희아는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때로는 울상을, 때로는 희희덕거리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백줌마.'
아무리 폐급인 앙그라고 할지라도 포용할 수 있는 모성의 소유자. 나 때문에 나이를 조금 더 먹기 전에 일찍 무대 전면에 데뷔해서 그런지 조금 거칠고 까칠하기는 하지만, 그 근본 성향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
둘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마력손실이 오기전에 잠시 날개를 펼쳐 섬을 한바퀴 순찰하고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내가 떠나기 전 자세 그대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저기요? 슬슬 저도 대화에 끼워주시죠?"
"...아."
"흠흠."
둘은 대놓고 아쉬운 눈치를 내게 주며 손을 놓았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길래 저렇게 친해진 걸까. 나중에 따로 앙그에게 물어보기로 한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싱크로 할 수 있겠어요?"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겠지만 일단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누리 양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되지 않을까요?"
"그 문제라면 걱정마요. 내가 따로 누리 불러내면 되니까."
"...피닉스. 나 바로 정했어."
앙그가 굳은 의지를 내게 비쳤다. 야황과 청화대비, 둘 중에 누구와 싱크로를 할 지 마음을 정한듯 했고, 누구인지 나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집행관?"
"응."
"왜죠?"
굳이 캐물어야 할 필요까지 있나 싶기도 하지만, 나는 왜 앙그가 김누리가 아닌 백희아를 선택했는지 알아야했다. 행여나 모종의 이유로 둘의 관계가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나는 둘 사이를 잘 중재하여 다시 신화에 이를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해야했다.
"...나는 말이야, 인간이 아니야."
"네네."
앙그가 힘겹게 말을 시작했다. 나는 귀를 활짝 열고 앙그와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앙그는 마력도 문자도 아닌, 자신의 진심을 말로서 직접 표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부분은 잘 몰라. 하지만 적어도 어린 아이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면 안 되는 건 알아. 김누리, 2025년이 되어야 성인이 되는 아이잖아."
"그렇죠."
지금은 철저히 청화단에서 지켜줄 수 있는 보호자가 동반된 전투에서만 활약하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화권이 누리를 보호했으며, 석하랑은 스승이면서 물의 정령으로 누리를 24시간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싱크로를 하게되면 진짜 목숨을 건 전장으로 나가야 해. 본인은 각오가 되어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럴 수 없어."
"생각보다 인간적인 감상이네요."
"이제는 정령이니까. 그리고...."
앙그는 백희아의 손을 꼭 잡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희아는, 나와 너를 위해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있어. 살아남는게 가장 좋겠지. 네 말대로라면, 희아는 비전투원이라 싸움에 큰 도움이 안 될 거야. 하지만 그 외의 방법으로 물심양면으로 도울 거야."
"이렇게 말을 잘 하는데 왜 지금까지 그렇게 굴었담."
"그, 그러지마...! 그 말 하니까 괜히 의식하게 되잖아...!"
앙그가 다시 부끄러워하며 말을 더듬었다. 백희아가 손을 꼭 잡아주며 대신 입을 열었다.
"저도 전면에 나서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누리를 총알받이로 내세울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가 할게요, 싱크로."
의지는 확고했다. 내가 모종의 이유를 들어 반대한다고 해도 둘은 서로의 싱크로를 강행할 것 같았고, 그들의 싱크로를 막을 이유도 없었다.
"그럼 당신들, 이제 제일 중요한 과정이 둘 남았어요."
"뭐죠?"
"신화에 따른 이명. 이나 말고 다른 이명이 필요할 거 아녜요. 원래는-"
"마신."
앙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뭐요?"
"마신. 한자로...魔神."
"와. 정말 이계신 맙소사네요."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이명이 튀어나왔다. 원작 기출문제에도 없던 이명이 이런 식으로 튀어나올 줄이야. 나는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찌그러지는 듯한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니, 암속성으로 신화에 이르는게 맞기는 한데...."
"원래 이명도 마암룡이었잖아요. 암신이라고 하면 어감이 이상하니까, 그냥 마신으로 간단하게 부르는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아...."
한자 두글자. 백희아의 작명스승이 새삼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후우, 좋아요. 이명이 어떻든 저는 신경 안쓸게요. 네, 그럼 마신분들. 묻겠습니다. 서로를 진정 벗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
앙그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백희아가 앙그의 손을 꼭 잡고 대답했다.
"아직은 벗이라고 지칭하기에는 어렵긴 하네요.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고, 이제 직접 만난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 걸요. 하지만...이제부터 알아가면 되잖아요? 그쵸?"
"...응."
"뭐...아슬아슬하게 세이프인가...?"
둘의 눈동자는 같은 검정으로 물들어있었다. 히드라, 지륜, 유나도 만나자마자 싱크로를 할 수 있었는데 이 둘이야 오죽할까. 나는 손의 관절을 풀었다.
"좋아요. 그러면 둘이 싱크로하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둘이 마주보시고."
둘은 결연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봤다. 나는 손을 가리키며 둘의 싱크로 방법을 가르쳐줬다.
"쎄쎄쎄하세요. 반달 부르면서."
"......? 저 그런 거 한 번도 안해봤는데요...?"
"그게...뭐야?"
"아차."
나는 이걸 가르쳐 줄 이가 없다는 것에 충격에 빠졌다. 결국 나는 급히 백영도의 관리를 맡고 있는 사람을 불러야했다.
"하선태 씨, 쎄쎄쎄 아시죠? 반달로."
"알기야 합니다만...."
"자. 지금부터 잘 보고 따라하세요. 이거 22초 컷 성공해야 당신들 싱크로 할 수 있으니까."
나는 하선태와 똑같이 마주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결국 마신이 지구에 강림하기까지 한 시간 걸렸다.
* * *
11월 10일.
나는 회의에 참가하기에 앞서, 김누리의 집에 다시 방문했다. 가족의 옆에서 내가 말을 하는 건 누리 본인이 반기지 않았고, 결국 차를 몰며 드라이브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싱크로는 집행관 언니야가 하는 거네."
"네. 그렇게 됐어요. 절대 당신이 어리다고 얕보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목숨을 건 전장인만큼 신경이 안 쓰일래야 안 쓰일 수가 없잖아요. 이해해주세요."
"......."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심통이 난 김누리를 상대해야했다.
"친구비 들킨 거 아님?"
"그거야 농담이잖아요."
"오해를 사기에는 충분한 것 같은데."
그제 앙그와 이야기를 나눈 뒤로 싱크로할 상상에 부풀어있었겠지만, 현실은 어림도 없었다. 앙그는 백희아를 선택했고, 김누리는 서브가 되었다. 혹시나 백희아에게 모종의 일이 생기면 싱크로를 하게 될 서브로.
"뭔가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지만 상당히 기분이 더러운 거임."
"맞아요. 기분이 나쁠 수 있죠. 미안해요, 괜히 줬다 빼앗는 것 같아서."
누리 입장에서는 화가 나는게 당연했다. 이미 싱크로에 관해서 어느정도 듣기야 했지만, 순전히 나이 때문에 밀린 것이므로.
"아니, 단장님. 내 말은 그게 아니라요."
누리는 손사래를 치며 화들짝 놀랐다.
"빼앗겼다거나 하는 거에 기분이 나쁜게 아니라, 생각해보니 앙그가 기분이 나빴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 혼자 세시간 내내 떠들었잖아요. 앙그도 분명 얘기하고 싶었던게 있을텐데, 너무 나만 떠들었던 거임."
"......?"
얘는 지금 뭘 가지고 자책을 하는 거지.
"그것 때문에 오히려 앙그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았겠음? '아, 김누리 고년은 지 할 말만 떠들고 내 말은 들어주지도 않더라. 그런데 집행관 언니야는 내가 이야기해도 잘 들어주고 그러네?' 나같아도 집행관 선택하지."
"음... 글쎄요."
앙그는 아마 듣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대화가 잘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하리라. 김누리나 백희아나 둘 다 비슷한 수준으로 친해졌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냥 말로만 '우리는 친구!'라고 해도 앙그는 쉽게 친해지는 존재이니까.
'서로 생각하는게 엄청 다르네.'
"앙그는 그걸로도 충분히 대화가 되었다고 생각할 걸요?"
"그럼 왜 내가 아닌 집행관이 싱크로 대상인 거임?"
"당신이 어리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리가 아닌 희아를 선택한 이유는 그저 누리가 미성년자이며, 생과 사가 오가는 전장에 직접 투입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성주와 이계신을 상대하기 위해 직접 달에 올라가서 싸우는 만큼, 앙그는 어른이라는 사정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고 심사숙고하여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앙그가 누리보다는 희아를 더 편하게 여긴 것 같단 말이지. 나이를 떠나서.'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 원작에서의 베스트 콤비였던 누리와 앙그의 조합이 삐거덕거리기 시작한 시발점은. 고작 5년의 차이긴 하더라도-
"아."
"왜 그러심?"
"그냥, 당신 미래의 학창생활이 엄청 고달팠구나 싶어서요. 당신이 앙그랑 진심으로 싱크로 하려면 남은 학창생활을 진짜 힘들게 지내야 하거든요."
김누리가 앙그와 비슷한 성향을 가지게 된 이유는 중학생 시절부터 타의적 아싸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과 비교당해서 키가 S급 시절만 되었어도 아마 일진 여고생의 길을 걸었을 만큼, 김누리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다.
"뭐임? 단장님, 나 미래에 완전 찐이었음요?"
"언니는 이능력 A급인데 자기는 무능력자인 상태로 내신 9등급에 어디 대학하나 가지도 못한 고졸? 집에서는 재수할 돈 아깝다고 안 보내주고, 유성 하청에 하청인 공장에 취직하라고 하는 정도?"
"아, 스포 에반데."
그리고 그런 흑역사 가득한 미래와 달리, 현재의 김누리는 앞날이 창창하다. 내가 그렇게 만들게 되었다.
"이미 삭제된 미래니까 상관없어요. 당신은 이제 꽃길만 걸으면 돼요. 대한민국 유이의 S급 암속성 이능력자. 거기에 서브인 수속성도 S급. 이 정도로 성장속도가 빠른 존재는 거의 없을 걸요?"
"석 쌤 있잖슴."
"석하랑은 반인반령이니까요. 석하랑은 태생도 특별하고. SS급 포텐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랑 정령인 어머니."
한강에서 태어났지만 그 누구하나 보듬어 줄 존재 없던 석하랑, 개천에서 태어났지만 그래도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있었던 김누리.
어쩌다보니 엮이게 된 관계였지만 둘은 잘 어울리지 않겠다 싶으면서도 제법 잘 어울렸다. 김누리가 석하랑의 생활력 때문에 가지고 있던 환상이 다 깨져서 그렇지, 둘은 서로 말투까지 닮아갈 정도로 상당히 친해졌다.
"당신은 그런 존재를 스승으로 두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자리에 있는지 알아요? 석하랑 제자, 청화단 간부급 헌터, 이중속성 S급. 이정도만 하더라도 지금 전세계에서 급으로 치면 거의 30위 안에는 들 걸요?"
"30위? 꼴랑?"
"60억 명 중에서 30등."
"그럼 뭐."
김누리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우쭐거리며 히히덕거렸다. 칭찬이 고프고 칭찬에 약한 아이. 그 본성은 다르지 않지만, 그 정도는 20살의 누리보다 훨씬 덜했다.
'원작이 비틀렸지만, 차라리 이게 낫다.'
학창 시절의 끝을 스스로 몸을 던지는 길로 가게 만드느니, 차라리 남들에 비해 조금 특별한 경험을 겪게 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
"축하해요. 찐이 아니라 인싸의 길을 걷게 되어서."
"단장님 덕분이에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피닉스 충성충성. 이건 진심이에요. 천년 만년 사셔서 앞으로도 저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제가 돈 엄청 벌면 단장님 원하는 거 하나 사드림. 히힛."
"......그거 참 고맙네요."
어느덧 차는 다시 신서울로 진입했다. 누리는 차에서 내리기 직전,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암튼 단장님. 앙그 만나면 얘기 좀 해주세요. ...다음 번에는 본체로 만나기로 하자고. 절대로 저 싱크로 안 해줬다고 삐친 거 아니니까, 괜히 걱정 안해도 된다고."
김누리는 마치 영상편지라도 날리듯 내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 친구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