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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46화 (446/1,497)

〈 446화 〉1부 19장 2

"당신 싱크로 조건은 별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진짜 쉬워요. 2주는 커녕 하루만에 가능하기도 하단 말예요."

"나, 나한테는...."

앙그는 제 앞에 놓인 소다를 마실 생각도 못한 채 어깨를 움츠렸다. 행여나 누가 볼까봐 자꾸 창문 너머를 응시하는게 꼭 죄를 진 도둑이 제발 저리는 것 같았다.

"여기 당신 아는 사람 없어요. 다크 레기온의 총수 아지다하카는 사망. 여기 있는 건 암속성 정령 앙그. 얼굴형도 달라졌잖아요?"

"그, 그렇긴 한데."

한국에 들어온 이후, 앙그는 수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전혀 다른 얼굴로 활개를 칠 수 있었다. 그 얼굴은 앙그 본연의 것과는 달리 다소 흑사갈을 닮아있었다. 몸매마저도.

"흑사갈의 코어를 이용해 바이오로이드를 제작했죠. 암속성 정령이 깃들 소체니 다른 코어 쓸 필요도 없었고, 본체가 아닌 분신을 집어넣기만 하면 끝이니 제작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녜요. 시간은 당신이 그 몸에 적응하는 시간밖에 없는데...."

나는 앙그의 흑사갈처럼 거대한 가슴을 가리켰다. 인간 사이즈로 치면 120, 맞는 브래지어 조차 없어서 백청영이 흑사갈 전용으로 제작한 여벌 옷 중 그나마 노출 면적이 적고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옷을 공수하고 나서야 앙그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입을 수 있었다.

"그래도 적응은 끝났죠?"

"...응."

"생활하는데 아무 지장없죠? 어차피 U튜브보고 누워서 마도기어로 네트워크 돌아다니고 하는데에는 가슴 크기가 아무 지장이 없으니까."

본체는 백영도 내 침실에 특수제작된 흑관 속에 누워있다. 본디 피닉스에게로의 타인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해 만든 백영도의 얼음 결계는 앙그의 피신처가 되었다. 앙그는 본체는 그 안에 숨은 채, 분신을 바이오로이드에 깃들게 하여 서울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간단하네요. 자, 선택하세요. 서울에 남아서 김누리랑 친구먹을래요, 아니면 신서울로 내려가서 백희아랑 친구먹을래요?"

앙그, 마암룡의 싱크로 조건.

1단계, 친구가 되는 것.

2단계,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친하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친한 존재가 되는 것.

3단계, 구체적으로 그 기준을 돈으로 환산하자면 결혼식장에서 축의금으로 20만원을 봉투에 넣는 것에서 나아가 개인적으로 알고있는 비밀 계좌에 몰래 찔러넣을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1단계여도 인간의 인격이 주체가 되는 정령각성이 가능하다.

2단계여야 비로소 인간과 정령이 대등한 관계를 이루는 신화의 단계에 이른다. 절친이 되는 것 정도로 싱크로가 가능하다니, 이 얼마나 쉽고 간단한 조건이랴.

3단계는 앙그에 몇 명이 추가되는 하렘 루트다. 주로 싱크로 후보군인 김누리, 백희아, 히카리 등이 그 대표적이 대상이었다.

"둘 다 이미 설명은 끝내놨어요. 그냥 가서 친구먹으면 됩니다. 그러면 끝! 김누리, 야황! 백희아, 청화대비! 바로 S급 찍는 것도 모자라서 어둠의 여신 등극이라고요!"

"그...."

앙그는 소다빨대를 오물거리며 어깨를 도통 펴지 못했다.

"...둘 다 초면이라. 그리고 면목이...."

"아지다하카가 했던 짓은 신경쓰지 말라니까요? 분신으로 가면 진실된 관계를 맺는게 아니니까 미안하고, 본체로 가기에는 아지다하카가 했던 짓 때문에 다가가기 무섭고. 뭐하자는 거예요, 지금!"

"나, 나한테도 시간을...!"

"지금 성주가 화성에 오는데에에에에!!"

절로 내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아지다하카를 격퇴한 지 2주가 지났음에도 지지부진한 앙그의 행동에 나는 답답함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당신 원하는 대로 대외활동 가능한 몸으로 만들어줬잖아요!"

"그치만...이 몸, 너무 커서 사람들 시선이...."

"아. 정말...."

화딱지가 나서 하늘을 향해 창염개진이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끓는 속을 삭히기 위해 시원한 냉수가 필요했다.

"사장님, 저 딸기에이드 한 잔만 더 주세요."

"피닉스."

카페 Padre Juan의 사장, 후안은 몹시도 난감한 얼굴로 냉장고를 가리켰다.

"오늘 사용할 분량의 딸기는 이미 다 써버렸는데...."

"아니, 도대체 누가요?"

"자네가. 벌써 딸기 관련 음료만 넉잔 째인 거 아나? 자정에 한 잔, 새벽에 한 잔, 미국에서 온 중요한 손님 만나면서 한 잔. 그리고 여기서 한 잔."

"......."

얼음의 여신에게 '예언'을 전하러 왔다는 명목으로 부산으로 내려간 오라클이 갑자기 더 미워졌다. 나는 결국 월급을 가불하는 심정으로 후안에게 다섯 번째 딸기 에이드를 주문했다.

"...미안해요. 요즘 살짝 신경이 곤두서있어서. 그래서 우리가 어디까지 얘기했죠?"

"김누리랑 백희아.... 둘 중 누구로 할 지."

"아, 그렇죠. 그럼 이렇게 해요. 하루씩 같이 지내보세요. 오늘이 7일이니까 8일은 누리, 9일은 희아. 이렇게 하루씩 지내보고, 10일에 누구랑 싱크로할지 정하세요. 10일이 마지노선입니다."

"아, 알았어. ...그런데 있잖아."

앙그는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너는 내가 누구랑 싱크로를 하면 좋겠어...?"

"그런 건 왜 물어요?"

"그...."

앙그는 답답한지 마도기어를 거칠게 두드렸다. 5초도 지나지 않아 앙그에게서 장문의 문자가 날아왔다.

[전투적으로는 김누리가 더 강하다는 건 알겠어. 나도 걔 활약하는 걸 영상으로 봤으니까. 적어도 누리랑 함께라면 개천광만큼의 전투력은 발휘할 거야. 하지만 누리는 미성년자잖아? 그렇다고 백희아랑 하자니 맘에 걸린단 말이야. 걔는 전투원이 아니라며. 그러면 최종전에서 성주를 상대로 싸울 때 나는 전력적으로 열외란 말이잖아.]

"앙그."

나는 앙그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주물렀다.

"당신은 어깨에 힘을 빼세요. 뒷수습은 제가 다 할테니까. 당신은 누구든 마음 편한 쪽이랑 싱크로하기만 하면 됩니다. 누리 미성년자 문제라거나, 희아 비전투원 문제는 제가 다 준비해 둔 플랜이 있어요."

"...정말?"

"물론이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내가 손으로 마력을 불어넣으며 바이오로이드의 에너지를 보충시키고 나서야 앙그는 한결 마음을 놓았다.

"자네도 참 여러모로 고생이 많구만."

"여신들 늘리려고 아주 발악을 하는 거죠. 사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누구 지지하시죠?"

"나야 이 가게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내어주는 분의 신도지."

"은유하?"

"...흐흐, 이보게 피닉스. 조물주 위에 건물주일세."

"역시 연륜 있으신 분이시군요. 저희의 계약이 계속 이루어지도록 반드시 여신들을 각성시켜서 세계를 구하도록 할게요."

나는 후안이 직접 들고온 딸기에이드를 삼켰다. 오늘따라 그 고양이의 빈자리가 더 많이 느껴졌다.

"사장님. 걔 근로계약서 다시 한 번만 더 보여주시겠어요?"

"그래. 여기있다네."

후안은 내게 꼬깃꼬깃 구겨진 표준근로계약서를 내밀었다. 눈물이라도 질질 짠 건지, 빳빳했던 종이는 물먹은 흔적이 역력했다.

김펜릴.

고용기간.

2020년 11월 10일까지.

나는 김펜릴의 표준근로계약서를 앙그에게 내밀었다.

"마지노선의 의미를 아시겠어요?"

"......친해지도록 노력할게."

사교성은 없어도 생각은 깊은 앙그는 금방 날짜의 의미를 이해했다.

2020년 11월 11일.

김펜릴이 이 되는 날짜이자, 그가 내게 도전장을 날린 날이었다.

"저, 펜릴 가만히 안 놔둘 거라고요. 저거 보이시죠?"

나는 진열대에 놓인 딸기 쇼트 케이크를 가리켰다.

"저러면 포크로 못 찍어 먹는다고요."

생크림 조각 케이크의 딸기는 1자 네 개로 잘려져 있었다.

* * *

카르나와 같이 이미지가 떡락한 존재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나마 이미지가 회복된 이도 있었다.

화권 이승형. 그리고 가루라.

아지다하카의 본진을 털기 위해 스스로 오욕을 뒤집어 쓰기로 한 그들 커플, 아니 부부에게 사람들은 찬사를 보냈다. 수많은 이들이 화권과 가루라에게 욕을 남겼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했다.

- 태양을 향해 몸을 돌린 다음, 팔을 이렇게 하고 외치십시오. 창염개진. 그러면 당신들이 저지른 죄를 용서하겠습니다.

화권과 가루라의 넓은 아량에 전세계에서 창염개진이 퍼져나갔다. 대부분의 이들이 창염을 향해 숭배하며 죄를 뉘우쳤지만, 여전히 가루라의 진실됨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화권이 정면돌파를 시도했던 것 처럼, 가루라도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주인님, 저 이 남자랑 결혼하고 싶어요."

...나에게.

* * *

일의 시작은 청화 페이스의 세 존재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금발갸루 가루라.

적발누님 샐러맨더.

흑발청초 흑염룡.

마지막 한 명이 다소 이상한 것 같기는 하지만, 흑염룡은 두 명의 사도에게 인간 세계의 상식을 알려주는 좋은 스승이 되었다.

가루라야 이미 화권과 데이트를 즐길 정도로 많이 인간 세상에 적응했다고는 하지만, 샐러맨더는 지륜처럼 신중하기는 했어도 인간 세계에 대해 강력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둘에게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인성과 덕목을 가르치는 교사로 흑염룡은 상당히 적임이었다.

'훈련프로그램 말고는 흑염룡이 설 곳이 없으니까.'

뉴클리언 레이드 이후, 내가 흑염룡을 타고 북한 일대를 돌아다닐 이유가 사라지면서 흑염룡은 일시적으로 실업 상태에 빠졌다. 훈련프로그램 화속성 S급을 전적으로 도맡아 싸우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가루라와 샐러맨더가 합류하면서 일거리가 1/3으로 줄고 말았다.

결국 흑염룡은 사도들의 도덕 과외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장 급한 가루라, 그리고 흥미가 깊은 샐러맨더에게 플라토닉 러브에 따른 결혼에 대해 설명했다고 했다.

결혼.

"모든 전투가 끝나면, 저희 결혼하겠습니다!"

"안 돼요."

화권과 가루라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선언했지만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손까지 꼭 붙잡은 둘은 한 순간 절망어린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지만, 둘 다 굽힐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스승님, 분명 아지다하카 공략전에 저희가 희생을 하는 것으로 결혼을 허락해주셨잖습니까!"

"첫번째 이유, 부케를 나한테 던진다는 것에서 기각. 두번째 이유, 주례를 나한테 서달라고 하는 것에서 기각. 세번째 이유, 허락은 하되 지금 이 타이밍에 하면 부정타니까 기각."

빠르게 세 개의 불허 이유를 읊자 둘은 고개를 숙였다. 다소 불만어린 표정이었으나 세번째 이유를 듣고 어느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부연 설명을 이어나갔다.

"부케는 저기 다른 사람한테 던져요. 당신에게 결혼의 의미를 알려준 흑염룡에게 던지면 되겠네요. 주례는 저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당장 하늘성도 괜찮고, 은유하가 은하수 회장의 인형을 통해 주례를 서도 되겠죠. 그리고 세번째 이유가 제일 중요한데."

나는 마도기어를 통해 나사에서 촬영하고 있는 실시간 중계 영상을 꺼냈다.

"당장 내일모레 성주와의 싸움이 시작될 수 있는 이 시국에 당신들이 결혼얘기를 꺼내면 부정탄다고요. 플래그 몰라요? 전쟁터 나가기 전에 '나, 꼭 살아서 돌아올게'같은 말을 하는 군인은 적의 총탄에 백이면 백 맞아죽어요."

"하지만 스승님."

이승형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반드시 이길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젠장, 예전에는 빌런이니 뭐니 의심하면서 경계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그거야 스승님의 진면목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스승님과 저는 비록 악연에서 이어진 사이였으나, 수차례 대화와 대화를 거듭한 끝에 이렇게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이어질 수 있었잖습니까!"

"오늘따라 당신 파이팅이 넘치네요. 당신 무슨 일 있어요?"

애초에 이 타이밍에 갑자기 온 것도 이상하기야 했지만, 갑자기 와서 결혼 얘기를 꺼내는 것도 의문스러웠다. 어쩌면 내가 죽기 전에 결혼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아놓으려는 게 아닐까 하는 고까운 생각까지 들었다.

"아,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흠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화권은 마도기어를 조작해 홀로그램 영상을 꺼냈다.

그곳에는.

"...임신교육?"

착한 어린이는 봐선 안 되는, 성교육 영상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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