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445화 (445/1,497)

〈 445화 〉1부 19장 1

.

11월 7일.

전세계적으로 아지다하카 게이트가 발생한 지도 제법 긴 시간이 지났다. 전세계에 국지적으로 열린 차원문은 수많은 인명피해를 일으켰고, 지구는 멸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국 인류의 위기는 히어로들이 나서서 해결하는 법. 그 히어로들이 특별한 소수가 될 지 아니면 평범한 다수가 될 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아지다하카 게이드틀 수월하게 틀어막은 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소수가 세계를 구원했다.

4여신.

전세계를 누비며 마룡들을 종잇장처럼 구겨버리거나 베어버린 네 명의 여인을 두고 세계는 그들을 칭송해마지 않았다. 이미 이름과 얼굴이 널리 알려진 이들도 있거니와, 남들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소녀도 있었다.

원로원의 지도자이자 정말 오랜만에 지휘관으로 복귀하여 단 한 명의 히어로도 죽이지 않은 최고의 지휘관, 유영호는 대중들의 염원에 힘입어 그들을 공식적으로 4여신으로 만들고 말았다.

당사자들-특히 얼음의 여신이 불같이 화를 내며 동해바다를 뒤엎었지만 아무런 피해는 없었다. 네 명의 여신이 보인 압도적인 무위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었고, '어쩌면 날아오는 행성 마저도 부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헛된 희망으로 남게 되었다.

- 방주를 부술 수 있는 건 오직 그 자 뿐.

가장 막강한 파괴력을 자랑한 카르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사람들의 희망을 짓밟았다. 시쳇말로 팩트폭격에 실망한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가를 두고 왈가왈부하기 시작했다.

- 얼음으로 가둬도 결국에는 얼음을 깨고 나올 것이다.

- 땅에 묻어도 땅 전체를 오염시키고 지진을 일으킬 것이다.

여신들은 모두가 명왕성의 위협을 자신이 해결할 수 없음을 알렸다. 결국 사람들은 명왕성이 목성 궤도를 넘어 화성 근처에 진입하여 지구까지 당도하기 약 2주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에 불안에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 4여신을 믿으십시오! 그들만이 지구를 지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 여신들은 여성우월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저 우연히 가장 강한 이들이 여신이 되었을 뿐입니다!

- 창염개진!!

온갖 혹세무민이 난무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결국 세계 최고의 예언자를 찾게되었다. 명왕성의 출발에 대하여 날짜 빼고는 모든 걸 완벽하게 예언한 존재, 오라클을.

- 저는 이제 무능력자입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용기가 성난 군중과 배신한 정비사에 의해 박살이 나는 바람에, 캐리어 두 개를 끌고 공항으로 가던 오라클이 시민들에게 했던 말이었다.

- 다만.... 단 하나만은 알고 있습니다.

오라클은 우울한 낯빛으로 모자를 벗었다. 선명한 핑크빛 머리칼은 잿빛처럼 하얗게 변했고,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는지 머리숱이 휑하게 사라져 하얀 두피가 훤히 보일 정도였다.

- 그것이 선대 오라클이 남긴,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보았던 예언의 끝입니다.

오라클은 폭탄을 집어던졌다. 주변에 달라붙은 기자들과 사람들은 벙찐 얼굴로 오라클에게 추가 질문을 하려했고, 오라클은 마이크를 손으로 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리고 제가 이능을 각성하면서 가장 처음 본 예언은....

오라클은 폭탄에 이어 핵폭탄을 투하했다.

- 딸기가 모두 사라지면 세계는 멸망할 것이니.

그 말을 끝으로, 오라클은 한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 * *

.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언젠가 한 번 만나야지하고 계속 벼르고 있었는데, 시간을 내기가 참 어렵더라고요. 이렇게 만나게 된 건 정말 영광이에요, 드룸프 씨."

"......왠만하면 이명으로 불러줄래?"

"얼마든지. 오라클."

나는 오라클에게 차를 권했다. 그의 취향은 이미 훤히 꿰고 있었기에, 나는 청색과 적색이 원형으로 섞인 로고의 콜라를 권했다. 오라클은 한참동안 그 콜라를 노려보다가 이를 갈았다.

"나 이거 안 좋아하는데."

"알고 드린 거예요. 콜라가 다 거기서 거기죠."

"...내가 참는다, 참아."

오라클은 캔뚜껑을 열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는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이거 맛이 좀 이상한데?"

"코카콜라예요. 내용물을 바꿔치기했죠. 역시 콜라 중독자."

"...사람 놀리는 거냐?"

"당신이 말실수 한 거 생각하면 이 정도는 싼 편이죠."

날선 내 지적에 오라클은 볼을 긁적였다. 스트레스성 탈모 초기 단계인듯한 머리칼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였으나, 그가 내게 던진 오물폭탄은 나로서는 피할 수 없는 오욕이었다.

"그 날. 우리가 압록강 근처에서 만난 날. 나는 당신에게 거래를 제안했죠."

"...그래. 남들 모르게, 이걸로."

오라클은 마도기어를 두드렸다. 당시에는 스마트워치였지만, 말은 하지 않아도 '블랙마켓'을 통한 뒷세계 계정을 통해 나와 오라클은 이면 계약을 맺었다.

"당신만 쓰려고 만든 비밀계정에 내가 대화를 걸었고, 선대 오라클만이 알고 있는 마지막 예언을 말했죠. 그리고 우리는 거래를 맺었어요. 멸망의 미래를 알고 있는 당신으로서는 멸망을 스스로 막아보겠다는 나를 알음알음 지원해왔죠."

루살카가 중간에 큰 역할을 해주기는 했지만, 마침 조우한 오라클과 거래를 맺은 것이 원탁에서 지금까지 나를 반신반의하며 지원한 배경이었다. 오라클이 나를 믿었기에 지금까지 나는 원탁과 반목을 하지 않을 수 있었고, 또한 히어로 최강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도 크게 간섭을 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는 대통령 손자라는 당신의 입지. 그리고 히어로적으로는 세계 최강 원탁의 일원이라는 당신의 입지. 경계적으로는 세계 100대 부호 안에 들어가는 문화계의 큰 손. 그 모든 배경을 통해 당신은 외부에서 청화단을 지원했어요. 한국에서 소화 불가능한 코어를 미국에서 음양으로 처리해주셨죠. 그건 정말로 감사해요. 하지만."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켰다. 오라클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이능력이라는게 말이야, 원래 가장 처음 쓸 때 선명하게 쓸 수 있는 법이지. 예언도 마찬가지야. 점점 마지막으로 갈수록 온갖 비유와 수사가 붙지만, 선명할 때는 정말로 노골적이거든."

오라클은 지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 그게 내가 처음으로 오라클로서 꾼 꿈의 내용이었지. 그게 곧 내 예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기도 했고. 그런데 말이야...."

오라클은 내 앞에 놓인 딸기쉐이크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막말로 딸기에 미친 네가 세계를 구원할 구세주라는 말 아니냐."

"엄밀히 따지자면 다른 의미기는 한데...크게 다르지 않죠."

원작적으로 피닉스 루트에 진입하는 힌트기는 했지만, 설령 오라클로부터 그걸 전해들었다고 하더라도 채워야 할 판이 후안 사장의 카페 메뉴판인 걸 누가 이해할까. 제작자 놈들이 미친 새끼들이지.

"실례. 하여튼 당신이 그걸 말한 덕분에, 지금 전세계의 딸기가 동났어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실 거예요?"

"지금 그걸 나한테 따지려고 하는 거야?"

"저한테 있어서는 중요한 문제라고요."

하루라도 딸기를 거르면 입안에 가시가 돋히는 몸이다. 정기적인 딸기 공급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지금 사장님 카페에 딸기가 확보된 물량이 2개월분 밖에 안 남았어요. 세계를 구하고 나서도 딸기를 먹으려면 내년 1월에는 수확을 해야할텐데, 당신 때문에 지금 종자까지 다 뜯어먹히게 생겼다고요."

현재, 세계는 딸기밭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히어로들이 사람이 아니라 딸기를 지키고 있었고, 온갖 멸망론자들과 자연발생괴인들은 딸기농장과 딸기공장을 급습하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당신이 앞장서서 혹세무민을 해야 사람들이 마음의 안정을 얻고 침착하게 지낼 수 있잖아요. 그런데 당신이 그러면 어쩌자는 거예요?"

"...그냥 조크라고 농담한 거라고 하면 더 난리가 나겠지?"

"당연하죠. 어휴, 아무리 미래 예언이 안 통해도 그렇지. 당신 예언 스톡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써버리고 말이에요. 도대체 무슨 미래가 그렇게 궁금해서 천개가 넘는 예언 스톡을 전부 탕진한 거예요?"

오라클은 시선을 회피하며 캔을 집어들었다. 분명 다음 달에 500% 상승할 주식이라던가, 파워볼 번호라던가, 회사에 소속된 연예인들에 관련된 스캔들을 확인한게 분명하다. 원작에서도 사적 용도로 사용하다가 2024년 크리스마스에 마지막 예언을 받게 되니까.

"대답하기 싫으면 협조나 하세요. 이쪽에 혹세무민의 스페셜리스트들이 한 둘이 아니니까. 원탁이잖아요? 세계 멸망을 앞두고 사람들이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도록 침착하게 해주는 거예요."

나는 손가락을 일곱 개 펼쳐들었다.

"7여신. 지구를 지키기 위해 여신들이 내려와서 세계를 구할 것이다. 새로운 신탁이 내려왔다고 알리세요."

"예언 사기를 치라는 거야?"

"사기가 아니게 하면 되죠."

"...알았어. 내가 잘못한게 있으니, 그리고 그쪽이 불쌍하니 그에 따르도록 하지."

"...? 제가 왜 불쌍해요?"

"...그런게 있다. 하아."

오라클은 여전히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무안해했다. 하필이면 긁은 부분이 스트레스로 머리칼이 빠져 두피가 드러난 부분이라 붉은 손톱자국이 진하게 보였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뒷말을 딸기쉐이크와 함께 삼켰다.

"...그런데 피닉스 씨. 지금 4여신 아니야? 왜 7여신이지?"

"아, 그거요? 아직 각성하지 못한 여신이 셋 있거든요. 그들 모두가 각성해야만 해피엔딩이 될 거예요."

"...이제 2주 남았는데 아직 3명이나?"

"걱정마세요."

나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한 명은 각성 대기중이고, 다른 한 명은 맞짱뜨기로 정했으니까."

"...뭐요?"

"아, 7여신 중에 제가 자리하나 차지하고 있어요. 어...그러니까...사람들 표현에 따르면 태양의 화신(火神)? 엄밀히 따지면 정령은 무성이니까 여신이라고 부르기 애매하기는 한데, 그냥 귀찮으니까 여신으로 퉁치기로 해요. 자, 어서 SNS에 혹세무민을 하세요. 오라클."

오라클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 * *

전세계의 혼란은 지속되었고, 세계의 평화와 멸망에 관한 이슈 이외에는 크게 묻히고 말았다. 전세계의 관심은 딸기와 4여신에게 쏠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자연히 그와 관련 없는 이슈는 소리소문 없이 사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신 중 한 명, 빛의 여신 카르나와 관계가 깊은 화권과 가루라는 여전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가십의 주역이었다. 정확히는 카르나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사람들은 진실을 깨달았다.

- 니가쩔은 사실 내가 금발 태닝 양아치로 변신하여 가루라와 똑같이 생긴 인형을 범한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뉴욕 스퀘어 광장 한복판에서 정확히 영상 속 모습과 똑같이 변신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절반 정도 믿게 되었고, 가루라가 보는 앞에서 가루라와 똑같이 생긴 바이오로이드 가루다와 행위를 저지르려는 것을 계기로 99%의 사람들이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 무슨 약을 하셨길래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르셨나요?

- 아지다하카를 낚기 위함이었다!!

정말로 다행히 바이오로이드 가루다를 상대로 공공외설죄를 범하려던 것은 진짜배기 여신에 의해 땅속에 파묻히는 것으로 저지되었다. 여전히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땅의 여신'은 카르나의 몸을 땅에 묻고 얼굴만 드러내게 한 채 세계에 진실을 말했다.

화권의 아지다하카 낚시.

아지다하카의 본거지 발각.

그리고 에이전트 P에 의해 아지다하카의 본거지 파괴.

그 과정에서 전세계에 차원문이 발생하게 되었지만, 아지다하카의 소멸에 따라 더이상 인위적인 차원문은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지난 2주동안 차원문은 단 하나도 열리지 않았고, 괴수 반응 조차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명왕성 문제만 아니었다면, 지구는 감히 평화를 되찾았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조용했다.

명왕성 문제만 해결된다면, 지구는 감히 평화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었다.

성주와 이계신 문제만 해결된다면, 나 또한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세계 평화를 완벽하게 이루려면 당신이 인간과 싱크로를 해야만 된다는 거예요. 이해했어요?"

"무, 무리...."

나는 그 평화로운 삶을 위해, 앙그에게 최고 난이도의 미션을 내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