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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44화 (444/1,497)

〈 444화 〉1부 18장 26

"으하하! 오늘 공주 맛 좀 보겠구나!"

S급 빌런 <캡틴 키드>는 반구형의 콘크리트를 향해 쌍권총을 난사했다. 콘크리트의 방패는 토치카마냥 외부의 마탄 사격을 튕겨냈으나, 토치카를 향해 총을 쏘는 건 캡틴 키드 뿐만이 아니었다.

"우오오!!"

A급 이하의 수많은 빌런, 그리고 심지어 괴인들 마저도 토치카를 향해 자신의 이능을 마음껏 사용하며 방패를 부수려 했다. 안에 있는 단 한 명의 여인에게 자신들의 욕망을 배출하기 위해서.

"지금 나오면 적당히 약하게 해주마, 프린세스 아르엘!!"

캡틴 키드는 쌍권총을 수평으로 나란히 놓았다. 이미 그의 아랫도리의 장총에는 탄환이 풀로 장전되어 있었고, 그건 비단 키드 선장 뿐만이 아니었다. 폐증기선에 있는 자신의 모든 부하들도 똑같이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흐하하! 차원문을 닫느라 힘을 다 썼지! 가웨인은 아직도 노르웨이의 차원문을 닫느라 바쁘신 몸이다! 지금이라도 나오너라! 이게 마지막 한 방이다!"

키드가 엄포를 놓으며 마탄을 장전했다. 쌍권총을 들고 달려간 그의 총구가 토치카 바로 앞에서 불을 뿜었다.

콰----앙!!

마탄은 토치카를 덮쳣고, 결국 반구형의 콘크리트는 박살이 나고 말았다. 안에는 그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르엘이 피투성이가 된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빌런들을 믿은 내가 바보지."

"흐하하, 왜 그러시나? 나도 영국 국민으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캡틴 키드는 재생되려는 콘크리트를 발로 밟으며 사납게 웃었다. 발에서 보랏빛 마력이 튀어 콘크리트의 재생을 막았고, 키드의 선글라스 아래에는 보랏빛 귀기가 흐르고 있었다.

"차원문을 닫는데 협조했으니 그만큼 보상을 받아야지. 안 그래?"

"...괴인을 보고 모른척 해준 걸로 충분하지 않아?"

"아-니. 천만금을 주더라도, 작위를 주더라도 나는 그런 보상 사양이다. 내가 바라는 보상이 뭐겠냐?"

캡틴 키드는 허리띠를 풀어 바지를 내려버렸다. 팬티째 내린 그의 장총은 아르엘을 향해 빳빳하게 서있었다. 아르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을 내리쳤다.

파지직.

땅이 들썩이며 철판이 캡틴 키드에게로 날아갔으나, 키드는 총을 거꾸로 잡아 철판을 후려치는 것으로 손쉽게 공격을 막아냈다. 아르엘의 최후의 발악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흐하하, 앙칼진 것 같으니라고. 그러길래 사람들 구하는데 마력을 그렇게 쓰지 말았어야지!"

"...그러게. 이렇게 끝날 줄 알았으면 뭘 그렇게 발악을 했을까."

아르엘은 입꼬리를 비틀며 자조했다. 찢어진 예복 사이로 보이는 속옷이 캡틴 키드의 음심을 자극했다. 그의 아랫도리의 총구는 벌써부터 투명한 물을 흘리고 있었다.

"흐흐. 그래. 어차피 그 놈들도 죽을 놈들인데 뭘 그렇게 힘들게 구했냐. 어차피 한 달 뒤면 명왕성이 지구에 갖다 박힐 것을. 공주님, 너 행성 파괴할 만큼 힘은 있냐? 지구에서 도망칠 힘은 있어? 흐흐, 없지? 그럼 공주님, 죽기전에 우리랑 한 판 찐하게 놀다가는 건 어때?"

"...너희들 300명이랑?"

"물론! 걱정마라. 처음은 내가 할테니. 지금 항복하면 상냥하게 해주마."

캡틴 키드는 자신의 장총을 아르엘의 앞에서 흔들며 아르엘을 조롱했다. 아르엘은 아무 반응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땅만 쳐다보고 있었고, 행여나 숨겨놓은 수가 있을까 싶어 캡틴 키드는 뒤로 물러섰다.

'이상한데.'

느낌상 마력은 전부 고갈되어 텅 비어버인 존재이건만, 아르엘의 행동에는 여유가 넘쳤다. 체력이나 마력을 급속 회복하는 방법이 있을까 싶었지만, 아르엘은 작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래, 찐하게 놀자고. 지옥에 가서."

"뭐?"

아르엘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올렸고, 캡틴 키드는 금빛의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옥빛으로 반짝인 것을 확인했다. 무언가 수가 있음을 깨달은 캡틴 키드가 손을 들어올린 순간.

서걱.

과도로 사과 자르는 소리와 함께, 캡틴 키드는 시야가 뒤로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그가 본 광경은 자신의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흰 가터벨트와 민트색 삼각팬티였다.

괴인 캡틴 키드는 검은 안개가 되어 소멸했다.

* * *

"늦어서 미안하다냥."

"아뇨. 괜찮아요. ...사장님은요?"

"안전하다냥. 애초에 서울이 괴인 비율이 가장 적은 곳 아니냥."

"프린세스로 복귀한지 너무 오래돼서.... 안부 전해주셔서 고마워요."

아르엘은 김펜릴이 내민 손을 잡고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마력은 고갈되어 괴인들에게 범해지기 일보 직전이었건만, 아르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평했다.

"캐트시 아니었으면 저 진짜 당할 뻔 했네요."

"농담은. 바로 봉인 풀고 싸우려고 했을 거면서."

"...들켰나요."

아르엘은 김펜릴이 건넨 플라스틱 컵을 건네받았다. 이라는 문구가 박힌 컵 안에는 따뜻한 핫초코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배달까지 고마워요."

"사장님이 서비스로 주신 거다냥."

김펜릴은 자신의 몫인 민트초코라떼를 꺼내 빨대를 물었다. 서울에서 웨일즈까지 하늘을 날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안의 내용물은 무사했다.

"...캐트시가 이렇게 날아왔다는 건 이제 끝이라는 거죠?"

"그렇다냥. 성주 님이 아직 오시려면 멀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그 전에 먼저 싸워야 할 것 같다냥."

김펜릴은 바닥에 검은 흑채가루가 된 괴인 키드의 잔해를 구둣발로 짓밟았다.

"이 몸이 목을 날리기 직전에 죽었다냥. 상위 개체가 소멸하면서 그에 소속된 하위 괴인이 소멸하는 현상이라고 들었다냥."

"...아지다하카까지 죽은 거군요."

"그렇다냥."

김펜릴은 하얀 면장갑을 낀 손을 들어올렸다.

"루살카는 20년 전에 죽었다고 하니 논외. 혼돈이 죽었고, 카르나는 개천광이 되었고, 히드라는 배신했다냥. 이제 아지다하카가 죽었으니, 진짜로 남은 다크 레기온의 간부는 이 몸 하나 뿐이다냥."

"...캐트시, 아니 펜릴. 당신 한 명이 아니에요."

아르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김펜릴의 손을 꼭 잡았다.

"제가 있잖아요."

"...아르엘."

"저, 당신 덕분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아르엘은 김펜릴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녹색의 메이드복에 붉은 피가 묻었지만, 김펜릴은 아르엘을 조용히 감싸안았다.

"...어머니가 저를 북유럽의 숲 한가운데에 버렸을 때, 요람에서 울고있던 저를 당신이 구해서 다시 어머니께 되돌려드렸죠. 인간이 주식이던 당신이 배가 고파서 삐쩍 곯았는데도, 제가 든 요람을 입에 물고 가서 호텔 앞에서 쓰러지셨잖아요."

"한 순간의 변덕일 뿐이었다냥."

"그 한 순간의 변덕 덕분에 저는 살아남았아요."

아르엘은 울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니까 당신이 살려준 이 목숨, 사용하시는데 부담갖지 말아주세요. 당신과 함께 지내온 이 모든 시간, 정말로 행복했으니까."

김펜릴은 아르엘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여왕이라면 몰라도, 아버지한테는 하고 싶은 말 없냥?"

"...다음 생에는 어머니같은 사람 만나서 고생하지 말고, 그냥 원하는 대로 살아달라고 전해주세요."

"만약에 이 몸이 지면?"

"그럴 리가 없어요. 캐트시, 당신은 제 슈퍼 히어로인 걸요. 당신이 질 리가 없어요."

아르엘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확신에 차있었다. 김펜릴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몸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걔도 죽자사자 달려들 거다냥."

"히어로는 빌런에게 지지 않아요."

"...굳이 따지자면 걔 쪽이 더 히어로에 가깝지 않냥? 다크 히어로."

"하지만 여기가 그렇잖아요."

아르엘은 펜릴의 가슴을, 심장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고 20년동안이나 기다려 주신 거, 다른 게 아니라 저를 위해서 그러셨잖아요."

"......."

김펜릴은 침묵했다. 아르엘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자는 분명 당신이 아닌 절풍을 살리려 들겠죠. 그게 세계를 구하고 자신이 살아남는 길일 테니까. 하지만 저는 당신을 잃을 수 없어요. 저를 살려주고, 저와 평생을 함께 해온 당신을. ...5년만 더 함께 살기를 바랐지만, 그건 아무래도 더 이상 무리인가봐요."

"아르엘."

"저도 계속 제 취미 생활 하고 싶고,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가보고 싶고, ...솔직히, 죽고싶지 않아요. 하지만...!"

아르엘은 고개를 김펜릴의 가슴에 묻었다.

"당신이 죽는 거...싫단 말이에요...!"

"......잘못해서 지기라도 한다면, 너는 죽을 수도 있다냥."

"당신이 이기든 지든 죽는 전투라면, 저도 같이 따라가겠어요."

아르엘의 의지는 확고했다. 결국 김펜릴은 아르엘의 의지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던가. 진짜 자식은 아니지만...이 몸도 너와의 20년이 즐거웠다냥. 다른 건 몰라도 피닉스 덕분에 그 날 북유럽으로 가서 너를 만난 것, 그것 하나 만큼은 고맙게 생각한다냥."

"......후훗."

아르엘은 옅게 웃었다.

"꼭 이겨주세요, 나의 히어로."

"...물론."

펜릴의 몸이 녹색의 바람으로 흩어졌다. 주변을 찢어발기는 절풍(折風)이 폐증기선의 화물칸을 사정없이 찢어발겼고, 그 칼바람의 일부가 아르엘의 왼쪽 눈을 세로로 길게 찢어버렸다.

주륵.

세로로 찢어진 아르엘의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르엘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머리칼은 에메랄드빛으로 물들고, 눈의 상처는 옥빛으로 반짝이며 피가 아물기 시작했다.

"......그래. 반드시 이긴다."

펜릴을 닮은 것 같은, 아르엘을 닮은 것 같은 녹색의 여인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추후.

웨일즈에서 닫힌 차원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파견된 히어로들은 그저 수백 조각으로 찢어진 폐증기선의 잔해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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