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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43화 (443/1,497)

〈 443화 〉1부 18장 25

앙그와의 충격적인 대화는 끝났다. 20년 전의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도대체 무엇을 하느라 20년을 보낸 건지 정말 여러모로 신경이 더 쓰이게 되었지만 알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김펜릴을 잡는다.'

김펜릴을 쓰러뜨리고 절풍을 각성시키는 것. 모든 정령들을 각성시키면 창염은 모든 진실을 말해 주리라. 더이상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슬슬 나갈까요, 앙그?"

"...잠깐만."

앙그는 뭔가 길게 말하고 싶은지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아지다하카의 분신을 통해 현대 문물을 상당히 많이 접했을테니 스마트 워치 또한 쓸 수 있을 터. 나는 마도기어를 두어번 두드려 앙그의 앞에 가상 키보드를 만들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타이핑하세요."

머뭇거리던 앙그는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타자기에 손을 올렸다.

[구해준건정말로고마워시간은비록오래걸렸지만5년일찍구해줘서다시한번더고마워아지다하카가생각보다더몸을험하게굴려서버티기가쉽지않았어정령으로서의힘을지키는것도네가맡긴물건들지키는것도슬슬한계였거든]

"잠깐 스톱."

불과 10초.

앙그는 빛처럼 빠른 스피드로 타이핑을 했다. 띄어쓰기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문구에 나는 대단하다 싶었지만,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대화가 너무 불편할테니 조금 진정시켜야했다.

"천천히, 띄워쓰세요. 마침표 찍고. 계속."

앙그는 아까보다는 손가락 움직이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고, 오랜 경력을 쌓은 숙련된 속기사 급의 속도였다.

[나 너를 봤어. 케레스라는 이름의 히드라를 상대로 어떻게 꼬셨는지. 아지다하카가 나중에 상황 파악한다고 퍼뜨려놓은 괴인들 하는 걸 봤거든. 아마 네가 아지다하카에게 같은 수법을 썼으면 상당히 위험했을 거야.]

"그럴 것 같아서 대타를 썼잖아요."

이승형은 지금쯤 열심히 아지다하카의 괴인을 상대로 싸우고 있을 것이다. 아직 앙그는 완전히 아지다하카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아무튼 고마워요, 친구. 당신 덕분에 안개속에 갇혀있던 시야가 조금은 트인 것 같거든요. 여전히 안개는 짙기는 하지만."

"......잠시, 잠시."

앙그는 얼굴을 붉히며 글을 수 차례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타자는 말을 하기 어려워하는 앙그에게 있어서 한 번 더 말을 가다듬을 수 있는 타자는 빛이 내려준 최고의 대화 수단이었다. 히카리가.

약 일곱 번 정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끝에, 앙그는 드디어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정제하여 내게 보였다.

[네가 설령 기억이 없다고 하더라도 네가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이상 우린 친구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 피닉스. 비록 기억은 없겠지만 나는 20년 전에도 너와 친구였어. 그러니까 지금도 친구야.]

"그러면 이제 말로 저랑 친구라고 말해보실까요?"

"......."

앙그는 침묵했다. 나는 앙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정한 친구라면 육성으로 '너는 내 친구야'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치, 치...."

앙그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시선을 피했다. 명백히 부끄러워하는 얼굴이었고, 결국 내가 먼저 앙그의 손을 잡고 날개를 펼쳤다.

"자, 잠깐만...!"

"밖으로 나가죠. 정령 친구들도 있고, 간부 친구들도 있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파트너가 되어줄 사람도 있고. 다들 당신과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으니까요. 아지다하카는 부담스러울 지 몰라도, 앙그라면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거예요."

"...안 보고 그냥 문자나 이메일로...."

"그러다 문자로 싱크로 하시겠네."

나는 앙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샌드위치처럼 짓눌린 앙그는 눈을 계속 좌우로 굴려댔다.

"잘 들어요. 내가 당신 가급적이면 배려하려고 하지만, 시간이 그렇게 여유롭지가 않아요. 성주는 벌써 목성 궤도를 향해 진입했고, 지구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은 진짜로 얼마 안 남았어요. 그리고 당신도 이제부터는 전면에 나서야 해요. 이제 전세계에 얼굴 드러내고 다녀야하는데 벌써부터 부끄러워하면 안 되죠."

앙그는 사색이 되었다. 한 손으로도 타이핑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는게 뭔가를 상당히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 아지다하카 얼굴이잖아.]

"아."

앙그의 얼굴은 당연히 아지다하카와 쏙 빼닮아있었다. 눈모양도, 이목구비도, 눈물점의 위치마저도.

[정확히는 아지다하카가 내 얼굴을 빼다박았지. 그런데 지금 이런 상태로 밖으로 나간다고? 전세계에 얼굴을 드러내? 사람들이 내가 아지다하카인 줄 알 거 아냐. 다크 레기온의 총수를 자칭한 악녀. 그냥 얼굴 들고다니기도 부끄러운데 사람들 손가락질 받을 거 뻔하잖아. 나 그렇게는 무서워서 못 해.]

앙그는 얼굴이 팔리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얼굴을 가리거나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등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그마저도 완벽한 대처는 아니었다.

'변장을 해도 스캔되면 걸릴테니까.'

이 세상에 '암속성 100에 나머지 전부다 0'이라는 마력 반응은 아지다하카와 앙그 둘 뿐이었다. 다른게 있다면 아지다하카 쪽이 테라의 오염 패턴이 묻어있다는 것 뿐. 당연히 사람들은 아지다하카와 앙그의 연관성에 대해 의심하게 될 것이다.

마력패턴은 상이하지만 외모가 워낙 닮지 않았는가.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안되겠네요. 이럴 때야말로 한국의 위대함을 보여줘야겠어요."

"무엇."

"앙그."

나는 손으로 턱을 갈랐다.

"성형합시다. 강남 언니 되는 거예요."

"......."

"눈 키우고, 코 세우고, 턱 깎고, 애교살 좀 넣고.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당신인 줄 모를 걸요?"

나는 홀로그램으로 전형적인 강남 미인의 상을 만들었다. 앙그는 한참동안 그 도플갱어같은 수많은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사는게...."

"아니면 히잡이라도 쓰실?"

나는 변장을 위한 드레스 코드를 찾기 위해 네트워크를 뒤졌다. 히잡부터 가면은 기본이었고, 종국에는 얼굴을 하얗게 분칠하는 광대 화장까지 이르렀다. 약 10분 동안 앙그의 의견을 물어본 결과,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검은 스냅백에 눈만 간신히 내놓는 검은 안면 마스크. 꼭 연예인들이 사생활 보호를 위해 착용하는 변장도구 같았다. 앙그는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마력을 이용하여 옷을 만들어냈다.

"이러니까 꼭 수감될 사람 같네요."

"...아닙, 잠시...."

"참, 앙그."

나는 타이핑을 하려던 앙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앙그는 화들짝 놀라 내 눈치를 스멀스멀 보기 시작했다.

"괜히 신경써서 존댓말 안 해도 됩니다. 저야 제 상황이 그러니까 존댓말하는데, 굳이 저한테 맞추실 필요 없어요. 편한대로 말해요."

"...그치만."

"흠흠. 이거 되게 오랜만이긴 한데...."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냥 편하게 말하지. 지금처럼. 타자로 말하는 것처럼 평소에도 이렇게 말하면 훨씬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렇습, 아니, 그래...?"

"아무래도 네게는 꼭 친구가 필요할 것 같군."

상황은 다르지만 동병상련을 겪을 뻔 했던 외톨이 여중생이라거나, 집안의 배경과 자신의 이능 때문에 친구가 없는 모 함장님이면 앙그와 충분히 지음이 될 것이다. 앙그가 아무리 20년의 스노우볼로 이런 상태가 되었더라고 하더라도, 환룡과 가을이 그러하듯 최고의 파트너가 될 것이다.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으니.'

나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둘은 당신에게 최고의 친구가 되어줄 거예요. 그들 말고도 많을 거예요. 당신이 원한다면 그 둘 말고도 수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 거고.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성주를 쓰러뜨릴 수 있다면 지구인 전체와 친구가 될 수도 있겠죠."

"...이길 수 있어?"

"물론."

싱크로만 한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지만, 그 문제는 당장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보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단 그러러면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 슬슬 시작해도 될까요?"

나는 잠시 손을 놓고 두 팔을 벌렸다. 건물의 9할이 파괴된 검은 성지는 검은 안개만이 두둥실 떠있었다.

그 모든 입자들이 아지다하카 분신이 파괴되고 남은 흔적들이었다. 미세먼지처럼 워낙에 작아서 아지다하카라는 개체를 구성하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형체를 갖추고 아지다하카의 인격을 가진 괴인으로 부활할지도 모르는 존재.

"이거 전부 소멸시키면 아지다하카는 영영 사라지는 거예요."

"......후우."

앙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자꾸 타자기에 손이 가는 듯 했지만, 적어도 그 말 만큼은 직접 하겠다는 듯 자신의 손목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아지다하카 덕분에 정말 많은 걸 알게되었어. 고맙기는 하지만, 이대로 두고 떠나면 언젠가 또 사람들이 아지다하카 할 거야. ...끝내줘, 피닉스."

"말 잘하네요.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생각했던 말."

"20년 동안?"

"......."

앙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더이상 앙그가 부끄럽지 않게, 양손에 불꽃을 피웠다. 창염은 여전히 푸르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창염은 나와 앙그를 중심으로 구형의 결계를 펼쳤고, 안에 있던 검은 입자들은 말끔하게 소멸했다.

"창염개진."

나는 두 불꽃을 합장하여 기도한 뒤, 하늘을 향해 양 팔을 쭉 뻗었다. 불꽃의 구체에 들어간 창염은 서서히 그 몸집을 넓혀나가며 아지다하카 입자들을 태워 소멸시켰다.

"이대로 그냥 두면 전부 다 소각 될 거예요."

나는 앙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앙그는 순순히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럼 이제 갑시다. 성형하고, 친구 만나고, 그리고...."

김펜릴 잡으러.

창염을 살리고, 나도 사는 해피 엔딩을 꿈꾸며, 나는 앙그와 함께 검은 영지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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