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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42화 (442/1,497)

〈 442화 〉1부 18장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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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자면, 간부들이 지구로 일제히 넘어온 날은 1999년 12월 25일이다.

피의 일주일이 시작된 날이며, 정확히 31일에 이른 시점 부터 하나 둘 마력이 고갈되어 활동 중지에 이르렀다. 간부마다 시기는 대동소이하지만, 2000년이라는 한 세기가 넘어간 때라는 건 엇비슷하다.

그리고 앙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20년 전에 빙의를 했다고 했다. 그 기억을 창염이 가져갔다고 한다면, 앙그의 말은 얼핏 맞아들어갔다.

"그런데 내가 창염에게 기억을 지금 압류당한 상태라서 확인할 방법이 없네요. 20년 전에 내가 당신한테 무슨 말을 한 거예요?"

"저 아니고 아지다하카에게. 간부들 각자 잡아다가 너희들은 정령이라고 커밍아웃 했습니다…."

"...진짜요?"

"네. '너 정령! 마암룡!' 그러고 제가 바로 각성...."

앙그 왈.

아지다하카는 일주일간 날뛰고 7일째 되는 날 잠에 들려고 했더니, 갑자기 피닉스가 날아와 간부들에게 정령이라는 실체를 까발렸다고 한다. 사실은 우리가 정령이라는 존재이며, 성주에게 세뇌를 당해 세계 정복을 하고 있다고.

정밍아웃이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과거의 나.

"그 바람에 정령들 일제히 각성…. 저, 지륜, 절풍이 각성했고, 그에따라 간부들은 정령의 인격을 구속.... 아지다하카는 분신으로 이 육신에서 빠져나와 큐브로 저를 구속했고...."

"루살카, 환룡, 개천광은요?"

"...그 때 엄청 시간 없어보였습니다. 횡설수설하고, 이제 시간 없다면서 네가 마지막이라고, 네게 이걸 맡긴다고...."

앙그는 손에서 마력을 끌어올려 어둠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지다하카의 분신들이 드나들던 어둠은 이제 앙그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이 되었다.

'딥 다크.'

그리고 그곳은 앙그가 아니면 그 누구도 손 댈 수 없는 '아공간'이기도 하다. 창염 조차 앙그를 협박하여 스스로 꺼내게 하지 않으면 안에 있는 물건을 확인할 수 없는 고유의 공간. 앙그는 그 속에서 내가 맡겼다고 하는 물건을 찾아 손을 휘저었다.

"잠깐만...분명 여기 안쪽에…. 아!"

앙그가 활짝 웃으며 어둠속을 휘젓던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게 당신이 맡긴 물건! ...아."

앙그의 손에는 면적이라고 할 수 없는, 손톱보다 얇은 너비의 실오라기가 들려있었다. 톡까놓고 말해 T팬티였다. 심지어 색깔을 맞추기라도 한 듯 검은색이었다.

"......제거 아님!"

"누가 뭐래요."

아지다하카가 쓰던 공간이니 아무렴 아지다하카의 물건들도 있겠지만, 주인이 아닌 앙그가 저런식으로 부끄러워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정녕 나는 앙그의 무엇을 믿고 '모든 것'이라고 할만한 물건을 맡긴 걸까. 귀까지 시뻘게진 앙그는 손을 휘저으며 마구잡이로 물건들을 빼냈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앙그는 정말 온갖 잡동사니들을 아공간에서 꺼냈다. 성인용품 백화점에 왔다 싶을 정도로 온갖 물건들이 바닥에 즐비했다. 바이브, 딜도, 로터, 안마기, 차마 이름조차 말할 수 없는 그것들. 심지어 잘생긴 남자 배우를 형상화 한듯한 X로이드까지 나오더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제 거 아님!!"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하던가요?"

"그, 그런 눈으로 자꾸 바라보니까…!"

"내가 무슨 눈으로 봤다고 그래요?"

내가 한 차례 따지고 드니 앙그는 울상을 지으며 몸을 움츠렸다. 겁먹은 햄스터같아서 나는 손을 휘휘 저었고, 앙그는 훌쩍거리며 다시 어둠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여전히 손에 잡혀 빠져나오는 물건들은 아지다하카의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었다.

"아."

상반신 전체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이리저리 휘젓던 앙그가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나는 드디어 찾았나 싶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앙그는 분명 뭔가를 잡고 있었다.

"찾았나요?"

"......자, 잠깐만."

앙그는 어둠속으로 다이빙을 하듯 뛰어들었다. 나는 갑자기 사라져버린 앙그에 어안이 벙벙했다. 검은 성지에는 나 혼자 나게 되었다.

"아니, 이유라도 좀 알려주고 가면 덧나나?"

내 빈정거림에 허공이 세로로 길게 갈라졌다.

"5분만 기달…!"

앙그는 허공에서 얼굴만 내놓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말하고 다시 쏙 들어가려고 해서, 나는 바로 앞으로 날아가 앙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짜악'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바닥이 앙그의 뺨을 살짝 때렸다.

"당신 단점이 뭔지 알아요? 혼자만 알고 얘기 안해서 사람들 오해하게 만드는 거예요."

"아, 아픔…!"

"이유를 얘기 안하고 아공간으로 튀면 내가 어떻게 알아요? 시간 걸리더라도 직접 꺼내세요. 내가 보는 앞에서, 직접."

"그, 그게 실은...!"

앙그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빙그르르 돌기 시작하는 눈동자의 움직임은 머릿속에 마구니가 씌인 상태였다. 나는 새삼스럽지만 앙그 또한 정령임을 상기했다.

또 뭔가 성적인 문제가 들어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앙그는 안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물건을 찾으려 하는 것임을.

"당신, 물건 어디에 보관했어요?"

"그, 그게 무슨 말...?"

"아지다하카와 공간을 공유하는 곳에 내가 맡겨달라고 한 물건을 보관해뒀을 리는 없을테고. 그럼 분명 아지다하카는 건드리지 못하는 곳에 보관해뒀을 거 아녜요. 어디죠?"

"그, 제, 제 뱃속에…."

"10분."

나는 앙그의 머리채를 놓고 아공간으로 밀어넣었다. 담배라도 피웠다면 아마 10분간 한 대 피우며 씁쓸한 속을 달랬을 것이다.

□□□□□!!

대신 나는 하늘에 TAT를 난사하는 걸로 울분을 토해냈다. 20년 전의 나는 도대체 무슨 또라이같은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설마 직접 넣은 건 아니겠지.

'그래도 상당히 심려깊게 움직였군. 용의주도해. 마암룡이면 확실히 비밀을 지킬만한 존재지.'

10분간 나는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고, 앙그는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내게 비닐로 덧씌워진 물건을 건넸다.

"여, 여기...."

"고마워요. 그런데...."

비닐 안의 딱딱하고 얇은 내용물은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정사각형 형태에 안에 동그란 구멍이 난 플라스틱.

"...플로피 디스크??"

도대체 이건 언제적 물건이란 말인가. 하필 색깔도 파란색 디스켓이라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시대가 시대인데-

'2000년이었지, 참.'

스마트폰은 커녕 USB도 없었을테니 뭔가 기록하고 저장할 매체가 필요하기는 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플로피 디스크가 무엇인가. 적어도 공CD에다가 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그조차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건가.'

나는 비닐 겉에 있는 끈적한 액체에 불을 붙여 소멸시켰다. 그 액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안의 내용물이 더 중요했으니까.

"씁.... 이거 호환은 되나?"

마도기어와 세대 차이만 따져도 족히 수 세대는 차이가 날만큼의 물건이었다. 스마트워치와 마도기어의 보급에 따라 노트북은 커녕 PC에서도 디스켓 넣는 공간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 졸지에 구형 박물관에 가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에휴."

나는 마도 기어 위에 플로피 디스켓을 올렸다. 혹시나 뭔가 반응이 있나 싶었지만-

삐빅.

마도기어에서 푸른 빛이 명멸했다. 나는 귀신에 홀린듯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플로피 디스크의 안에 마력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25년은 되어야만 그 안의 데이터를 읽어낼 수 있을 거라고...."

"과연."

형태는 플로피 디스크라도 마도 기어가 아니면 읽을 수 없도록 한 건가. 과거의 나는 생각보다 더 철두철미했다. 그리고 창염이 왜 이것에 관한 기억을 지웠는지 새삼 이해가 갔다.

'이 디스크가 외부에 존재하는 이상, 아무리 기억을 지워도 여기에 저장되어있는 내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 기억은 내가 처음 이 세계로 넘어오면서부터 가진 온전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마도기어에 저장된 데이터를 살폈다. 아주 짧은 음성파일이 하나 들어있었고, 그 시간은 고작 1분이 채 되지 않았다.

"......고작 이걸 25년 동안 보관하라고 했다고요?"

"네."

"도대체 당신은 왜 그 부탁을 들어준 건데요? 아니, 아지다하카는 그 때 뭐하고?"

"...아주 잠깐, 제가 육체의 주도권을 가진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걸 주시면서 말씀하셨...."

앙그는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이, 이거 잘 지키면 25년 뒤에도 우리는 친구라고...!"

"......허허, 허."

20년 전의 내가 용의주도하고 사려깊다고 했던가.

전언철회.

'마암룡은 친구 없으니까 남한테 절대 말 안 할 거라고 생각한 거잖아, 그러면.'

20년 전의 나는 너무나도 쓰레기였다. 나는 과연 그 쓰레기가 내게 무슨 말을 남겼을까 궁금했다.

치지직, 지직.

음성 파일에는 잡음이 들렸다. 나는 조용히 마도기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아. 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청화의 고운 미성이 울렸다. 저 목소리는 내가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창염이 나인척 하고 말하는 것인가.

[잘 들리나 모르겠네요.... 말투 이런 건 이해하세요. 성주 개새끼. 이계신 씹쌔끼. 제작진 씨발 새끼.]

"......흠흠."

나다.

내가 분명하다.

[창염 씨ㅂ.... 흠흠, 창염은 무죄. 아, ■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창염은 죄가 없어요. 미워하지 마요. 어차피 내가 마음 안 바뀌면 미워하지도 않겠지만!]

"...이거 엄청 오글거리는데, 앙그. 잠깐 귀 좀 막아줄래요?"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은데, 이제 시간이 없네요. 오라클의 예언, 기억해요? 기억하겠죠?]

"푸른 태양이 하늘에 떠오르고, 불사조는 고꾸라지리라?"

[그래요. 그거. 기억 못하면 나가 뒤지고. 오라클의 예언은 절대적이에요. 그러니까 당신이 진정으로 승리를 따내고 해피 엔딩을 맞이하려면 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빙빙 돌리는 거 저 극혐이니까, 확실하게 말할게요.]

지직, 치지직.

음성에 잡음이 더욱 심해졌다. 그건 마치 차원문이 발생하면서 주변의 마력 파장이 흔들리는 것과 비슷했다.

[피닉스가 죽어야 창염이 살아남습니다.]

"......역시."

앙그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라 담담했지만, 앙그는 눈동자가 흔들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나는 지금부터 창염을 깨우러 갑니다. 1년 안에 깨우면 좋고, 24년이 걸려서 원작 시작하는 때에 깨어날 수도 있고. 얼마나 걸릴 지는 모르겠네요.]

"20년 걸렸죠."

[예상으로는 20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그보다 빨리 정신 차릴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아, 시간 슬슬 다 됐다.]

음성 파일은 어느덧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과거의 나는 어딘가를 오르고 있었다.

[...나중에 제정신이면 어차피 이거 망가뜨릴테니까, 오글거리더라도 이것 만큼은 말해야 겠네요. 흠흠. 잊지마요. 당신이 이 세계에 온 계기를. 왜 이 세계에 왔는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모두를 구하고, 모두를 각성시키고, 창염까지 구한다. 뒤지게 힘들고 실제로도 죽을 것 같겠지만, 딱 하나만 기억하세요.]

과거의 나는 내게 뭔가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기억을 잃고 미래에서 이런 식으로 그 말을 전해들을 거라 예상이라도 한 걸까 싶었다.

[세계가 두 쪽이 나도 창염은 당신의 편이라는 걸. 절대로 의심하지 마세요.]

"......."

괜히 그렇게 말을 하니까 없던 미혹도 생기는 것 같았다. 괜히 들었나 싶어서 나는 음성 파일의 재생을 멈추려고 했다.

[이계신.]

내 손은 멈췄다.

[우리 편이니까.... 알죠?]

"아니, 모르니까 좀! 더! 설명!"

뚝.

음성 파일은 끝났다. 내 시선이 자연스레 앙그에게로 돌아갔다.

"더, 더 없음...! 그게 끝!"

"......하아, 오케이. 알겠어요."

나는 순간적으로 앙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뻔 했다. 정보를 알려고 문을 열었더니 더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실제로도 혼란스러웠다. 과거의 내가 지칭하고 있는 이계신이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건지 애매했으므로.

"구체적으로 말해주면 어디 덧나나."

파사삭. 플로피 디스크는 망가져버렸다. 마력으로 구성한 물건인 듯 너무나도 손쉽게 바스라졌다. 이제 더이상 과거의 내가 남겨놓은 유산이나 정보를 알 방법은 없었다.

"앙그, 혹시 제가 뭔가 다른 말 한 거 기억나요? 당신도 지금 대충 상황 파악 했을텐데."

"그, 다른 말은 안 했는데.... 떠나기 직전에."

앙그는 우물쭈물 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지금부터 창염 따먹으러 간다고.... 끼요옷 하시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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