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1화 〉1부 18장 23
노을이 지는 옥상.
어느 건물인지는 모를, 그저 한강이 훤히 보이는 건물의 옥상에서 나는 푸른 머리칼의 여인과 다시 만났다. 그는 나를 초대해놓고는 한강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말이에요.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그 새들이 미니 피닉스고, 불꽃이 피어나며 세계를 덮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지. 미안하지만 인트로는 스킵이다."
내 말에 그, 창염은 바로 몸을 돌리며 구시렁거렸다. 손에는 나를 위해 준비하기라도 한 듯한 딸기라떼 캔이 들려있었다. 창염은 내게 그 캔음료를 건내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이왕이면 사람 말 끝까지하게 해주시죠?"
"그거 너무 많이 들어서 질려. 게임오버 될 때마다 하던 얘기가 그거 아니냐. 그만해. 한 두 번도 아니고."
나는 창염의 옆에 다가가 난간을 잡고 섰다. 언제나 중요하다 싶은 순간에 나를 납치하는 건 이제 일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런 식으로 데려오는 건 좀 많이 그랬다.
"일단 내가 너를 뭐라고 부르면 되지? 너 창염 아니라며."
"창염이라고 부르세요."
"마암룡은 네가 창염이 아니라고 하던데? 거짓말해서 다른 사람 상처주는 게 무서워서 아예 말도 못하는 애가 거짓말을 할 리 없지. 네 진짜 이름을 말해봐. 창염이 본명이 아니잖아."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부른 거예요. 스포일러는 저만의 전유물이니까."
창염은 내게 캔음료를 내밀었다. 언제나 그렇듯 자기 중심적인 딸기가 들어간 음료였고, 나는 그걸 받아 목을 축였다. 시원하고 달콤쌉싸름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창염 또한 그걸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처음 당신이 제 존재를 눈치챘을 때, 저는 당신에게 말투의 자유를 줬죠."
"그래."
"설야를 각성시켰을 때도, 환룡을 각성시켰을 때도, 개천광을 각성시켰을 때도, 지륜을 각성시켰을 때도. 저는 당신에게 무언가를 하나씩 주기로 했죠."
"목소리를 받았고, 백청화의 몸을 받았지. 그리고 아직 받지 못한 밀린 것도 많고. 설마 스킨십 몇 번으로 끝내려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건카타로 퉁치자거나. 간부인 카르나나 히드라가 아직 존재하니까 무효라거나 뭐 그런 말은 사양이다."
"...하여튼 눈치는."
창염은 툴툴거리며 난간에 오징어처럼 늘어졌다. 떨어지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체를 넘겨, 난간 너머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창염의 눈빛은 우수에 잠겨있었다.
"...원래는 말이에요, 절풍까지 각성시키고 나면 모든 걸 알려주려고 했어요. 아직까지 숨기고 있는 것도 많고, 당신도 넌지시 짐작하고 있는 게 있으니까."
"그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겠지?"
"네. 설마 마암룡이 그런 말을 할 줄 몰랐어요. 루살카 때도, 환룡 때도 그런 상황이 있을까봐 짤랐는데.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진짜로 마지막으로 우리 하나 거래를 하죠. 제안이에요."
창염은 내게 스스로 거래를 제안했다. 적어도 내 기억에 있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창염의 얼굴과 표정을 보니 생전 처음 제안하는 것 같아보였다. 하지만 나는 거래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절풍 각성 시키고 오라고 하지마라."
"눈치는 더럽게 빨라요."
"눈치가 없었으면 네 루트 진입 못 했지."
나는 다시 한 번 더 딸기라떼를 들이켰다. 생으로 갈려진 딸기의 뭉클한 식감이 혀를 타고 넘어갔다. 의식 세계를 통한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감각은 실제인 것 마냥 생생했다. 창염은 내가 무언가 말하기를 기다렸고, 이제 내가 말할 차례였다.
"싱크로. 신화(神化) ."
"......."
"마력 등급 SSS, 100이라는 경지에 오르면 그 능력은 가히 신의 권능에 오른다고 생각했었지. 실제로 신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야. 하등한 인간이 신의 권능을 부리는 거니까. 그런데 말이다, 그냥 이런 생각이 들더라도. 생각을 바꿔봤거든."
나는 창염, 창염을 자칭하는 이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난간에 이불처럼 널려진 채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분명히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원래부터가 신이니까 그런 힘을 쓸 수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신화라며? 말 그대로 신이 되는 거지. 평범한 인간이 신의 힘을 얻고, 정령 또한 신이 된다. 그게 내 원래 생각이었지만...본래부터 신이었던 자들이 '다시' 신이 된다. 어때?"
"16점 드릴게요."
"17점 만점에서 1점은 어디로 날아갔나 모르겠네."
"알면서 장난은."
"...거기까지 들어가면 내가 너무 황송해지는데."
창염은 베시시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몸을 돌려 난간위에 걸터앉은 모습은 장난기 가득한 젊은 아가씨나 다름 없었지만, 그 실체를 알고나니 예상외로 무서웠다. 나는 나머지 1점을 받기 위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능성을 전부다 꺼냈다.
"본인이야, 아니면 화신이야? 그도 아니면 분령? 힘을 이어받은 자? 아니면 마지막으로 남은 성녀? 그래서 석장을 들고 계시던가?"
"역시 한 번 정답을 찾은 사람다우시네요. 넷 중 하나는 맞아요. 마지막은 땡.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알려줄 수가 없네요. 그걸 알려주는 순간, 당신과 나의 관계는 이제 영원히 끝난다는 거죠. 가망이 없게 되겠죠? 푸흐흐."
"싱크로를 거부하는 이유가 이제서야 이해가 되는 군."
나는 딸기라떼를 전부 들이켰다. 목으로 마저 넘어가지 않은 딸기 과즙 섞인 우유가 입안에 텁텁하게 남았다.
"이계의 존재에게 신격을 빼앗긴 것도 빡치는데, 왠 인간 나부랭이가 따먹고 신위를 가져가겠다고 하니 열받을 수밖에. 응당 가져야 할 권능과 권위, 거기에 이름조차 빼앗겼으니 말이야."
"거기에 게임 속 존재로 전락까지 해버렸죠. 모든 걸 잃고, 단지 인간들의 성노리개가 되어버린 셈이죠."
창염은 쓰게 웃으며 난간을 붙잡았다. 철로 된 난간이 하얀 손길에 찌그러졌다.
"예전에도 한 번 얘기한 것 같은데, 당신에게는 나름 고마워하고 있어요. 내가 왜, 우리들이 왜, 나의 세계가 왜 그런 꼴을 당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당신과 만나게 되면서 그건 정말로 감사하고 있어요. 이건 비꼬는 게 아니예요, 진심이에요."
"이거 상당히 황송한 걸."
"비꼬는 거 아니라고 하는데도 비꼬기는. 불경해요. 사형."
"복상사로 부탁드리옵니다. 창염개진."
"......하여튼."
창염은 허탈한 얼굴로 헛웃었다. 나는 캔음료를 창염에게 들어올렸다. 이미 창염의 권능에 따라 음료는 또다시 딸기라떼로 가득 차있었다.
깡.
맑고 경쾌한 소리가 옥상 위에 울렸다.
"하긴. 역시 그런 거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네요."
"그렇지. 단지 내가 조금 더 모시고 살게 될 뿐."
"갑자기 경건해 지셨네요. 이제서야 제 위대함을 아시겠어요? 한 번 더 찬양하세요. 어서."
"창염개진. 그런데 창염보다 진짜 이름을 알아야 찬양을 하지. 아니, 정확히는…."
나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두드렸다.
"네가 가져간 내 기억. 거기에 있을 너에 관한 모든 정보들. 네 프로필을 돌려받으면 그 때는 진짜 이름으로 불러주마. 동서남북으로 목청 터져라 외쳐주마. 그때까지는 어떻게 기도할 방법이 없네. 창, 염, 개, 진. 이거 말고는."
"...당신, 창염개진이 그나마 나은 선택지였다는 걸 언젠가 알게 될 거예요."
창염은 입술을 깨물며 으르렁거렸다.
"하아. 그런데 말이에요, 당신 어떻게 여기까지 파고든 거예요? 내가 그렇게 기를 쓰고 차단하고 숨기고 파묻었는데."
"그래. 정말 짜증날 정도로 숨기고 파묻기는 했지. 간부 셋 동시에 잡겠다 싶으니까 의식을 납치해버리고 말이야."
"...그 때 일은 제가 다 보상해드렸거든요?"
"뭐? 몸으로? 같이 목욕하면서 가슴 좀 만지작거린 걸로 될 것 같아? 기억을 내놔, 기억을. 뭐든지 했으면 기록이 남아있을 거 아냐."
"부끄러우니까 나중에. 그보다 빨리 얘기해봐요. 어떻게 안 거예요?"
창염은 상당히 조급해하는 듯 했다. 내 기억을 읽으면 바로 알 것을 일부러 내 입으로 듣기를 바라는 건지 대답을 종용했다. 잠깐 창염이 내 기분이 되어봐라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냥 쿨하게 얘기해주기로 했다.
"이름."
"이름요?"
"애초에 이계의 정령들 이름이 창염(蒼炎)이니 설야(雪夜)니 하면서 한자 이름인것부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창염은 나를 지긋이 보며 피식 웃었다. 나는 빨대로 라떼를 휘휘 저으며 마력을 일으켰다. 허공에는 일곱 가지 색의 불꽃이 떠올랐다.
"피닉스, 루살카, 펜릴, 히드라, 카르나, 아지다하카, 혼돈. 그 모든 괴수들이 인간들-그러니까 설정상 원로원에서 정한 이름이지. 정령의 이름도 마찬가지고. 솔직히 톡까놓고 말해서."
나는 검은 불꽃과 회색의 불꽃을 높이 띄워올렸다.
"마암룡이랑 환룡이랑 둘 다 이름에 용이 있는데 용이 아니잖냐. 정령이라면서 이름 겹치는 건 뭐야."
"......스포해드려요?"
"어."
"정령의 이름 또한 원로원에서 정한 거라고 말씀하셨죠? 두 글자. 한자 이름. 범인이 누구겠어요?"
"집정관이군."
운사, 우사, 풍백, 광검, 청송, 화권, 성녀, 청운, 야황, 군신, 그리고 그외 기타 등등. 2자에 집착하는 이는 그 밖에 없었다. 내 말에 창염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17점. 덧붙여서 개천광과 마암룡인 이유는 다른 거 없어요. 술먹고 정해서 그렇지.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말이죠."
창염은 쪼르르 음료를 마시며 빨대를 오물오물 씹었다. 뭔가 더 뒷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나 때문에 참는게 눈에 훤했다. 나는 창염이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거래. 당신이 절풍을 각성시키고 오면 모두 알려드릴게요. 그 때는 모두 알려드릴테니까. 이미 짐작하시고 있는 걸 알려드리는 거라 의미는 없겠지만요."
"공수표가 될 수도 있겠지만, 뭐 좋아. 조만간 끝날테니."
펜릴이 약속을 어기고 어디 잠적하지 않는 이상, 마음만 먹는다면 창염에게 모든 진실을 듣는 건 당장 내일도 가능했다.
"거래, 받아들이마. 하지만 잊지마, 내 생각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테니. 나 너 무조건 구한다. 너랑 싱크로해서 꼭 너 살릴 거다."
"......당신, 지금 한 말 무조건 철회하게 될 거예요."
창염은 나를 자신의 앞으로 잡아당겼다. 난간 위에 걸터앉으니 창염과 내 시선이 딱 맞아떨어졌다.
"모든 진실을 알면 당신 스스로 싱크로를 거부할테니까."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나는 딸기맛과 함께 의식을 잃었다.
* * *
잠시 뒤.
나는 다시 현계로 의식을 되찾았다. 창염과의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고, 나는 나를 기다리는 마암룡-본인 피셜 ■■■ ■■■와 눈을 마주했다. 다행히 그는 도망치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피닉스'라고 불러요. 그게 지금 제 이름이니까."
"그럼 저는...앙그."
마암룡, 앙그는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을 앙그라고 정했다.
아지다하카가 정한 앙그라는 이름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마암룡이 아지다하카가 내건 이름을 사용한다는 건, 그리고 방금 전 이름을 가지고 언급한 걸 생각해보면 최대한 자신의 진명과 비슷하게나마 정한 이름일 것이다.
"그럼 앙그. 나한테 뭐 할 말 없어요?"
"......."
앙그는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본인의 성격이나 정황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당신 의심병 도지는 거 아는데, 일단 내 상황을 얘기해줄게요."
나는 원작이라는 요소를 제외하고 앙그가 나를 신뢰할만한 정보를 풀었다.
백청화라는 지휘관이 창염의 피닉스에 빙의하여 성주와 대항하고 있다는 것. 한참동안 내 설명을 들은 앙그는 여전히 고개는 숙인 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20년 전에 한 약속을 말한다면 믿습니다."
"정령 창염이 제 기억을 봉인하고 있어요. 그래서 20년 전에 말한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인지 모르는데, 아마 나일 거예요. 그래서 약속도 몰라요."
"......그럼 제가 질문할테니 대답."
앙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입을 열었다. 원작에서 봤던 것보다 더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에 나까지 덩달아 긴장되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칵테일은…?"
"......? 칵테일은 커녕 술 마시지도 않는 사람이 무슨…. 자, 잠깐만요. 이건 혼잣말이니까-"
앙그는 손을 가슴 위에 올리며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답.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름모를, '피닉스'라 자처하는 당신. 20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
네?
"......최악의 경우 25년만 버텨달라고 하시더니, 역시 그..? 그녀? 아무튼 ■가 기억을 날린 건 사실인 듯…."
"그 이름 저한테도 안들리니까 창염이라고 좀 해줄래요? 방금 본인이랑 얘기하고 왔으니까요."
"상황 C-2, 잠시…. 어, 음. 이런 상황이면…."
앙그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다가, 내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 기억났다. 이렇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흠흠.
[빙의 시점은 1999년 12월 31일.]
그렇게 말하면 다 알아들을 거라고…."
"...전혀."
나는 잠시 생각하기를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