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0화 〉1부 18장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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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서의 아지다하카 2페이즈는 암마룡을 축으로 하여 양쪽에 두 개의 랜덤한 마룡을 서브로 하는 삼두룡과의 결전으로 이루어진다.
마룡들이 하나로 합쳐진다는 떡밥을 넌지시 던져 피닉스 루트로의 단서-이계의 여신 이유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도 플레이어들은 1페이즈의 괴랄한 난이도에서 이어지는 정통 레이드에 정신이 혼비백산해진다.
삼두룡이 각각 뿜어내는 브레스.
마룡 두 마리가 함께 나오는 전장도 없을 뿐더러, 세 개의 차원문이 동시에 열리는 경우도 없건만, 아지다하카의 2페이즈는 세 마룡이 하나로 합쳐져 동시에 3속성의 브레스를 쏘아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암마룡이 하나가 고정이고, 나머지 둘은 암마룡을 제외한 랜덤이라는 것.
기존의 플레이어들은 광암화의 삼두룡을 최고 난이도로 꼽았지만, 피닉스 루트의 뒷배경을 아는 나로서는 7단합체를 보고 솔직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근데 약하네.]
너무 머리가 많아서 몸이 무거워진 걸까.
아니면 그 많은 머리로도 친구가 없다고 정신을 살살 긁어놓으니 멘탈이 나가버린 껄까.
그도 아니라면 7두룡이 되었음에도 내가 너무 강해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걸까.
'셋 다.'
아지다하카에게는 미안하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광역으로 학살하는 건 피닉스의 주특기이며, 이렇게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싸울 수 있는 전장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환영이다.
[그러니 슬슬 끝내는 건 어떻겠나?]
나는 날개를 펄럭여 암마룡 위에 있는 아지다하카와 시선을 마주했다. 흑사갈 때처럼 상반신만 알몸으로 내민 아지다하카는 암마룡의 위에서 주먹을 불끈 쥔 채 머리를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이런...말도 안 되는...! 어째서...!"
아지다하카는 전신이 쪼아먹히고 있음에도 전혀 패배를 인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암마룡을 제외한 여섯 마룡들이 열심히 목을 움직이며 미니 피닉스들을 잡아먹으려 했지만, 미니 피닉스들은 벌떼처럼 몰려들어 목에 부리를 박아넣었다.
[1페이즈 때와는 상황이 완벽하게 역전되었군.]
"어떻게, 어째서, 왜에에에!!"
아지다하카는 핏발이 선 눈으로 내게 울분을 토해냈다.
"그런 힘이 있으면서 왜 세계를 정복하려고 들지 않는 거야! 그 정도 힘이 진작에 있었으면, 세계 전부를 불태워버렸으면 되잖아! 왜 어줍잖은 배신 따위를 하고 그러는데!!"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뭔들 못할까.]
나는 암마룡의 콧잔등 위에 올라섰다. 브레스가 주 공격 수단이라면, 당연히 브레스를 쏠 수 없는 사각지대가 다크 레기온의 약점이었다. 그리고 그걸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아지다하카는 지금 전의를 잃었다.
[내가 간부 피닉스를 자처하고 있기는 하지. 하지만 내가 하는 모든 건 정령인 창염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게 곧 세계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고.]
"...하, 하하.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애초에 이해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 안했다. 받는 사랑만 하는 네가 나를 이해할 리가 없지. 자, 마지막으로 유언은 없나?]
"크, 크흐흐, 어디서 벌써부터 이겼다고 자랑을 하고 있어...!"
아지다하카는 양 손을 검게 물들였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니 다시 전의가 생기는 모양이었고, 아지다하카의 몸은 허리만 길쭉하게 늘어져 나를 습격했다.
"죽어---!!"
[의지는 정말 가상하군.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걸 알면서도.]
콰득.
나는 아지다하카의 목을 움켜쥐었다. 아지다하카의 마지막 일격은 내 건틀릿의 관절부를 손톱으로 찔렀지만, 아주 조금 파고드는 것으로 끝났다. 그것이 아지다하카가 내게 준 가장 큰 상처였다.
[차라리 2페이즈를 괴수형으로 변신해서 싸웠다면 이것보다 더 많은 상처를 입혔을 거다. 이런 불완전한 형태의 융합체가 아니라, 온전히 너 자신으로 싸웠다면 나도 패배할 확률을 1할 정도는 높였겠지.]
"...커헉, 크으윽...."
아지다하카의 입꼬리에서 실혈이 흘렀다. 새의 발톱을 형상화한 내 건틀릿 끝은 발톱처럼 아지다하카의 살점을 파고들었다. 입 뿐만 아니라 흰 목덜미에 붉은 피가 흘렀다.
[미안하다고 사과는 안 할 거다. 너는 너무 많이 엇나갔어. 그래. 네가 전 세계에 차원문을 열면서 지난 한 달간 죽은 인간의 수만 천만이 넘는다.]
"......어차피 죽을 인간들이야. 성주님께서 오시면, 너도 끝장이라고. 퉷."
아지다하카는 피가 섞인 침을 내게 뱉었다. 나는 침이 얼굴에 닿기도 전에 불꽃을 일으켜 허공에서 증발시켜버렸다.
[걱정마라. 너 잡고 마암룡 각성시키고 나면 딱 하나 남았으니까.]
"펜릴? 크, 흐흐흐, 너 아직도 모르는 구나? 흐흐, 아하하하!"
아지다하카는 광소하며 하늘을 향해 피를 토했다.
"세상에서 너보다 잘 아는 사람이 딱 한 명 뿐이라고? 흐히힛, 네가 펜릴을 앞에 두고 당황해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걸 못 보는게 정말로 아쉽네, 아쉬워! 깔깔깔!"
[펜릴에게 남은 큐브라도 다 맡겨놓기라도 했냐?]
"흐흐흐, 이거 봐. 저-언혀 눈치채지 못하잖아."
[가능성이 너무 많기는 한데,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때려잡으면 그만이니.]
나는 발을 들어올려 아지다하카의 명치를 짓밟았다. 아지다하카는 순순히 암마룡의 이마 위에 누워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20년 동안.... 흐흣, 흐으."
[세계정복조직 다크 레기온적으로는 가장 성과를 많이 냈을지 몰라도, 유감이지만 이제 무대의 뒤로 사라질 때다. 지금부터는 마암룡의 턴이거든.]
"마암룡이라고 다를 것 같아? 마암룡이 너를 위해 열심히 일해줄 것 같아? 천만에."
아지다하카는 두 팔을 벌리며 나를 비웃었다.
"마암룡이 변해서 된 게 나야. 윗물이 더러운데 아랫물도 깨끗할 것 같아? 네가 마암룡을 구제할 수 있을 것 같아? 흐흐, 절대로 안 될 걸. 마암룡도 나랑 다를 거 없는 구제불능의 쓰레기니까!"
[그건 동족혐오인가?]
"틀렸어! 내가 왜 걸레같이 몸을 놀리고 다녔겠어?! 내가 왜 잘생긴 남자만 골라서 따먹고 다녔겠어! 다 마암룡이 마음 속 깊이 바라니까 그렇게 된 거 아냐! 내가 이렇게 된 건 내 탓이 아니야! 다 그 년이 폐인같은 년이라서 그런 거라고!"
[핑계는.]
나는 아지다하카의 가슴을 담뱃불 비벼끄듯 짓밟았다. 아지다하카는 피를 토하면서도 제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미 뼛속까지 걸레가 되어버린 년이야! 족히 수 천 단위의 남자와 한 행위들이 고스란히 그 년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지! 네가 저 탕녀를 각성시키고도 감당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어?!"
[아주 살려고 발악을 하시는 구나. 네가 이렇게 시끄럽게 꽥꽥거리는 이유가 뭐겠어. 다 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겠냐.]
"당연한 거 아니야?! 누가 죽고 싶겠어, 씨발!"
아지다하카는 쌍욕을 내뱉으며 입을 벌렸다. 욕지기와 함께 뱉어낸 침이 내 시야를 가렸고, 그 가려진 시야 너머로 혀 위에 작고 검은 구체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죽어----!!"
■■■■■■■!!
아지다하카가 직접 쏜 검은 브레스가 내 상체에 직격했다. 닿는 즉시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강한 산성의 브레스는 내 갑주를 녹여버릴 것처럼 들끓었다. 실제로 갑주가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흐흐, 한 방 먹였어!"
[그래. 한 방 먹였지.]
화륵.
나는 전신을 불꽃으로 샤워했다. 독과 산성의 브레스는 말끔히 불꽃에 사그라들아 씻겨내려갔다. 아지다하카의 표정이 기괴하게 비틀렸다.
[이대로 죽으면 억울할 것 같아서, 딱 한 방만 맞아줬다.]
"너...너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잘못한 거 없어. 너는 아무것도 잘못한 거 없지. 간부로서 최선을 다했을 뿐. 욕망에 충실했을 뿐. 그게 잘못됐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냐. 인간들 입장에서는 씹어먹어도 시원찮겠지만, 나는 달라. 단지.]
나는 아지다하카에게서 발을 떼어, 아지다하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눈을 마주했다.
[네가 살고 싶어서 지금 난리치는 것처럼, 나도 살고 싶어서 이러는 거다.]
"너무하잖아...!"
[네가 20년 동안 한 행동들이 너무한 거지. 미래에서의 너는 사람 마음 홀리는 팜므 파탈이었지, 이런 바빌론의 탕녀가 아니었거든.]
아지다하카의 표정이 굳었다. 내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슬슬 마무리를 위해 손가락을 튕겨, 내 육체를 바꾸었다. 괴인형도, 청화도 아닌 백청화의 모습으로.
"네가 펜릴에게 무슨 희망을 걸었든 상관없어. 나는 펜릴을 이겨서 정령으로 각성시키고, 성주도 이기고, 이계신도 이겨서 끝까지 살아남을 거다. 내가 사랑하는 자와 함께."
"......하, 미친 새끼."
"맞아.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어?"
철컥.
마도기어에서 TAT와 덕배트를 꺼냈다. 덕배트는 바로 은색의 매끈한 50구경 탄환이 되었고, 나는 그걸 TAT에 장전하고 아지다하카의 이마에 총구를 겨눴다.
"...만약에 말야."
아지다하카는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미 다크 레기온으로서의 융합체는 새들에게 살점이 뜯겨나가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었다. 아지다하카는 방아쇠에 걸어놓은 내 손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몸을 떨었다.
"내가, 내가 네 말대로 조금만 더 다른 방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으면 히드라처럼 지저 왕국을 만들어서 따로 괴인들을 관리했겠지. 히드라처럼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을테고, 그럼 <마암룡> 아지다하카가 되는 세계도 있었을 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상냥한 세계는 내게도 아지다하카에게도 없다. 아지다하카는 세계의 공적이며, 이미 전세계에 너무 많은 차원문을 열어버렸다. 후에 성주가 지구를 멸망시킬 때 사용할 수도 있는 침략의 통로를.
"그런가...."
내 손을 붙잡는 아지다하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만약에, 만약에 그런 세상이 있었다면, 너는 나와 무슨 관계였을까."
"친구 일수도, 가족 일수도, 적 일수도. 어떻게 될 지 모르지. 일단 연인이 아닌 건확정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기있거든."
나는 빈손의 엄지를 내 심장을 향해 가리켰다. 아지다하카는 벙찐 얼굴로 입을 벌렸다.
"미친."
"그래, 미쳤다. 미쳤으니까 이해해, 이런 말 하면 가증스럽겠지만, 그래도 가기 전에 전별금 대신이야."
검지가 방아쇠 위를 살짝 눌렀다.
"지옥이 있다면 거기서 보자고, 친구."
"......."
아지다하카는 나를 향해 두 손을 들어, 조용히 중지만 펴올렸다.
타앙.
검은 성지에 총성이 조용히 울렸다. 다크 레기온의 뼈에 앉아있던 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고, 합마룡 다크 레기온은 검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푸스스.
아지다하카는 마지막까지도 나를 향해 들어올린 중지를 내리지 않았다. 검은 안개는 내 옷깃을 스치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미안하지만 피닉스는 불사조라서 죽어도 죽을 수가 없네."
만약 지옥에서 아지다하카를 보는 날이 있다면, 그건 내가 실패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실패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칠부능선의 다섯번째 정상을 정복했다. 나는 그 보상이나 마찬가지인 마암룡을 향해 날개를 펄럭이며 자유낙하했다. 마암룡을 묶어둔 침대는 그 전투의 여파 속에 이리저리 튕겨나갔으나, 다행히 베일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아. 벗기기 전에."
짝! 나는 다시 청화의 페이스로 되돌렸다. 괜히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게 최고였다.
사락.
나는 베일을 벗겨냈다. 마력으로 허공에 고정시킨 침대에는 마암룡이 사지를 쭉 뻗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큐브를 네 개나 구속구로 박아넣었으니 찾을래야 못 찾지."
화륵. 나는 손가락을 튕겨 구속구를 전부 불태웠다. 마암룡은 가만히 내 불꽃이 구속구를 태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운 데이트권이 네 개나 날아가는 구나.'
나는 눈물을 머금고 큐브로 된 구속구를 태웠다. 창염과 만나 받아야 할 것도, 물어봐야 할 것도 너무나도 많았지만, 큐브가 하나라도 있으면 마암룡이 정령의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파사삭.
마지막 구속구가 소멸되며, 짙은 어둠이 마암룡을 휘감았다.
"역시 알몸으로 계속 있는 건 부끄럽죠?"
"아까 그건 잊으시길...."
급한대로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인 마암룡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살짝 드러난 귀는 바늘을 찌르면 피분수가 튈 것 마냥 붉어져 있었다. 나는 침대를 덮었던 베일을 마암룡의 위에 덮었다.
"지구에 온 걸 환영합니다, 마암룡."
"그거 엄청 어색한데...."
"뭐가요?"
"이름.... 마암룡."
"......? 마암룡이 마암룡이지 뭐가 어색해요."
"그거 제 이름 아닙니다...."
마암룡(..?)은 손끝을 코까지 내리며 나를 흘겼다. 그 눈은 심연처럼 깊어서 나로서는 그 깊이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짙고 검은 눈동자는 내 밑바닥을 눈으로 훑는 것만 같았다.
"제 이름은 ■■■■. ...■■라 ■■■? 아, 이것도. ...역시, 격을 빼앗겼으니 이름조차."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실래요?"
"...당신 이름은?"
"피닉스. 창염의 피닉스."
"그거 말고."
나를 향해, 그는 입을 열었다.
"■, 그게 당신 이름이잖-"
그 순간, 내 시야가 온통 푸른 빛으로 물들었고, 나는 의식을 또다시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