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7화 〉1부 18장 19
"으아악!!"
이승형은 정확히 차원문을 향해 자유낙하하여 블랙 바이블을 빠져나왔다. 간신히 다리를 지탱하여 선 장소는 오랫동안 인적이 끊긴 것 같은 창고였다.
"...안타깝군. 젊은이."
어둠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승형은 마력을 일으켜 불꽃을 피웠고, 어둠이 좌우로 걷히니 터번을 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그리도 자랑하던 다마스커스 검이 들려있었다.
"감히 신의 은총을 거부하다니."
"그딴게 은총이라니요."
이승형은 주먹을 들어올렸다. 이미 상대는 적의가 가득했고, 자신 또한 싸움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잘못된 길을 선택한 자가 있으면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히어로의 사명! 그것이 설령 히어로, 원탁의 일원이었다고 할지라도!!"
화륵.
화권의 눈에서 하늘색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이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빌런, 괴인인 이상 체포하겠습니다! <살라딘>!!"
"네놈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을 지 모르겠군. 흐흐, 좋다."
괴인 살라딘의 노출된 피부가 어둠에 물들어 사라졌다.
"네놈을 잡아다가 그분께 바치면 나 또한 한 번 더 세례를 받을 수 있을터. 네놈에게는 정말로 감사한다. 네놈 덕분에…."
우둑. 우두둑. 살라딘의 심장 부근이 좌우로 벌어졌다. 기괴하게 뒤틀려 생긴 구멍에는 검은 광택의 코어가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네놈이 흑사갈 소동으로 흑전갈 코어를 전세계에 뿌려준 덕분에, 나도 그분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지. 흐흐흐."
"......!!"
"빌런들이 싸우기 전에 그리 씨부려대던게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 입장이 되고 나니 이해가 되는군."
살라딘은 다마스커스 칼에 어둠을 덧씌우며 이죽거렸다.
"신의 세례를 받아 다시 태어난 존재가 어디 나 하나 뿐인 줄 아느냐?"
"......쳇!"
최악의 가정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화권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하나 뿐이었다.
눈앞의 괴인이 아지다하카가 하기 전에 쓰러뜨리는 것. 화권은 마력을 갈무리하여 괴인 살라딘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선수필승!"
"흐하하! 아지다하카 후 아크바르!!!"
□□□□□!!!
히어로와 다크 레기온의 총력전을 알리는 개막전이 인적 드문 버려진 창고가 하늘색 불꽃으로 폭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
흡사 요가를 하는 듯한 자세였다. 짐볼을 등허리에 놓고 스트레칭을 하는 것처럼, 마암룡은 침대 위에서 사지가 묶인채 배를 위아래로 튕기고 있었다.
실오라기라도 입고 한다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마암룡의 전신에는 온갖 구속수가 가득했다.
손목발목의 족쇄에는 쇠사슬이 연결되어 침대 프레임에 묶여있었고, 입에는 볼개그와 마스크, 안대가 씌워져 있었다. 하반신에 팬티처럼 채워진 정조대 사이로 막대한 조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암룡과의 첫만남은 그야말로 최악이었지만, 아지다하카가 마암룡의 정신을 붕괴시키기 위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니 동정심이 절로 생겨 순간 변신이 풀릴 정도였다.
"동족혐오…."
"놔! 놓으라고!!"
나는 내 손에 머리채가 붙잡혀 악을 쓰는 아지다하카가 절로 안타까워졌다.
펜릴은 20년 동안 왕가의 일원이 되어 떵떵거리며 사는 것도 모자라 내 감지에서 벗어나는 실력을 갖추었다.
히드라는 20년 동안 지저에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준하는 거대 지하 도시를 만들어 여왕으로 군림했다. 심지어 원로원의 우두머리인 아돌프 빌헬름을 괴인으로 부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아지다하카의 20년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분신으로 섹프나 늘리고…. 감각공유로 마암룡 정신붕괴 일으키려고 하고…. 이러니까 망하죠."
"시끄러워!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세계에서 저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 한 명밖에 없는데요?"
그리고 그 한 명은 나의 편이다. 나는 메인 아지다하카의 머리칼을 비틀어잡고 하늘을 향해 멀리 집어던졌다. 어둠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불꽃을 날려 머리칼을 완전히 태워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들려요? 들리면 고개를 끄덕여요."
마암룡은 허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고개를 움직일 수 없는 형태의 구속구라 허리를 흔들었겠지만, 그 움직임이 너무 색정적이라 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게 청순가련형 아이돌을 빗치계 AV에서 만나게 된 기분인 건가.'
히드라와 지륜의 관계에서는 지륜 쪽이 여러모로 글러먹었지만, 아지다하카와 마암룡의 관계에서는 아지다하카가 글러먹은 존재-아니 톡까놓고 말해 폐급이었다.
'루살카, 혼돈 이후로 간부 없애는 건 되게 오랜만인데.'
허윤환의 몸에 오염된 간부의 마력과 힘만 깃들어 있던 루살카. 애초에 환룡과 별반 다를게 없었지만 장강 물에 빠져 죽은 혼돈.
그 둘을 제외하고 카르나나 히드라나 간부로서 내게 협력하기로 했지만, 간부를 정령으로 각성시키는 것은 결국 만들어진 간부의 인격을 소멸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즉.
"지금부터 모든 아지다하카 태워 죽일 생각인데, 참을 수 있겠어요?"
쿵쿵. 마암룡은 엉덩이를 침대 매트리스에 찧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암룡의 구속을 당장이라도 풀어주고 싶었지만, 큐브의 힘이 깃든 구속구라 쉽게 구속을 해제하기 힘들었다.
구속을 해제하는 순간, 아지다하카가 마암룡에게 깃들게 될테니.
"조금만 버텨요. 예정보다 5년 일찍 온 거니까."
쿵쿵쿵.
"...대답은 안 해도 되고."
나는 목에 두른 청록의 베일을 마암룡의 위에 덮었다. 베일은 마암룡의 신체 전체를 휘감는 걸로 모자라 침대 전체로 퍼져나갔다. 구속구가 침대 프레임에 엮여있다면 침대 자체를 덮어버리면 될 일.
콰득.
내가 주먹을 쥐자 침대는 청록의 베일로 진공포장이 되었다. 스판덱스처럼 딱 달라붙은 베일 덕분에 마암룡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기는 했지만, 적어도 나체로 매트리스 위에서 쿵쿵 거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이걸로 방해 요소는 전부 제거."
나는 반지하 방을 빠져나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는 아지다하카들이 들끓어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애초에 태양 자체를 만들어놓지 않은 세계라 빛은 조명밖에 없지만.
"흐흐."
그렇다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양이 되어 줄 차례. 나는 마도 기어 속에 넣어놓은 두 개의 무기를 꺼냈다.
한 손에는 TAT, 그리고 다른 손에는 덕배트.
"그럼 아지다하카?"
[우리들의 워게임을 시작해 보자.]
승리 조건.
아지다하카의 전멸.
괴인형으로 변한 상태에서, 나는 전력을 다하기 위해 푸른 날개를 펼쳤다.
[아지다하카여, 이걸 알고 있는가?]
철컥.
TAT의 총신이 뜨겁게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탄환이 장전되지는 않았지만, 총열의 안에는 나의 마력이 듬뿍 담긴 마탄이 금방이라도 터져 폭발할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창염개진은.]
끼아아아아악!!
아지다하카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입을 쩍 벌렸다. 공포영화 속 요괴처럼 벌어진 입의 한가운 데에는 검은 마력이 몽글몽글 모여들기 시작했다.
천지에서 나를 향해 브레스를 쏘려들었다. 나는 천장을 향해 TAT를 들어올렸다. 하늘 높은 곳에서 뭉쳐있던 아지다하카들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피하려면 옆으로 피하는게 아니라, 아예 이 세계에서 빠져나가야했다.
[이렇게도 쓸 수 있는 것을.]
□□□□□□□!!!
빛 한 점 없는 검은 성지에 푸른 태양이 떠올랐다.
***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차원문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차원문은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아지다하카하며 생긴 인위적인 차원문이었다.
"A팀, 현지의 히어로들을 지원합니다. 암마룡의 꼬리 부분을 공격하세요."
차세대 대통령으로 호감도가 높았던 정치인, 기부와 선행으로 자선 콘서트를 자주 벌였던 연예인, 사회적으로 명망을 가지고 있던 명사, 그리고 온갖 괴수와 빌런들을 퇴치한 걸로 이름을 날린 히어로까지.
"C팀, 파리의 D팀과 합류. 풍마룡을 두 팀이 함께 공략합니다. D팀은 C팀이 합류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세요. 에펠탑 지키라는 현지 명령은 무시. 시민들 지키세요."
그야말로 각양각측의 사람들이 아지다하카하며 괴밍아웃을 했다. 99%가 젊고 잘생긴 남자들이었지만, 극히 일부의 예쁜 여성들도 존재하기는 했다.
"F팀, 카자흐스탄에서 대기. 상처를 회복하고 이동합니다. K팀은...그만. 의지는 알겠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요. 명령입니다. 회복에 전념하세요."
졸지에 그들은 괴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숨겨왔던 성정체성까지, 정말 많은 것을 커밍아웃 하게 되었다. 하지만 누가 그런 것을 신경쓸 수 있으랴.
캬오오오오오!!
그들은 모두 아지다하카에 의해 차원문을 여는 제물이 되었고, 차원문에서는 곧장 암마룡이 튀어나왔다. 전세계에 열린 차원문의 수만 수백 개에 이르렀고, 그 중 마룡이 튀어나온 차원문의 수만 50개에 이르렀다.
"...여기는 집행관. 전국, 전세계, 전 지구에 있는 히어로들에게 지시를 내립니다."
백희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휘 콘솔을 붙잡고 명령을 하달했다.
"서로를 믿고, 의심하지 말고, 언제나처럼 함께 싸워주세요…!"
이미 히어로들은 저마다 파견된 장소에서 차원문을 막느라 여념이 없었으나, 히어로들끼리 서로 경계를 하느라 차원문을 닫기에 상당한 지장이 있었다.
-원탁의 히어로마저도 괴인인데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화권과 살라딘은 예루살렘 일대에서 검과 권을 주고받으며 서전을 알렸다. 이후 우후죽순으로 아지다하카를 찬양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세계는 대혼란에 빠졌다.
누군가가 혼란을 잠재워 줄 필요가 있었다. 집행관은 청화단 이상으로는 미치지 않는 자신의 영향력에 눈물이 핑 돌았다.
[여기는 B팀 하늘성. 발리로 이동 중. 도착하는 즉시 발리의 마룡을 퇴치하겠소.]
[이쪽은 L팀 템페스트 레이디. 현재 남아공의 암마룡과 교전중입니다! 지마룡까지 튀어나왔어요! 지원을!]
세계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각국에 파견된 히어로들의 구성이 다양하듯, 차원문에서 튀어나온 마룡의 종류도 구성도 다양했다. 노르웨이에서는 차원문만 열리고 마룡이 안 튀어나오는가 하면, 시드니에서는 암마룡에 수마룡에 광마룡까지 튀어나왔다.
"이런…."
백희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리 자신이 청화단 전체를 움직인다고는 해도, 그 청화단으로는 엄연히 한계가 있었다. S급 히어로가 아지다하카하며 빚어진 혼란은 각국 히어로 협회의 지휘체계 마저 무너질 정도였다.
반전이 필요했다. 백희아 혼자서도 13개의 팀에 쉴틈없이 지휘를 내리고 있지만, 아무리 목이 터져라 소리를 쳐도 백희이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아아. 음음. 카악, 퉤.]
지휘관 전용 통신에 왠 술취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희아는 순간 통신에 문제가 생겼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아, 듣고있냐. 쫄보들아.]
"아니."
백희아는 다시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 지구의 히어로들을 상대로 도발한 장본인은 한국어로 말하고 있었고, 명백히 깔보는 말투였다.
[이 새끼들아! 평소에는 잘만 하더니 고작 이런 걸로 벙찌고 그러냐! 어! 나 때 말이야, 나랑 썸타던 여자가 실은 나 세뇌하려고 하던 변태년인거 알고 나서도 나랏일 하고 그랬어!!]
"아니!!"
술에 취한 게 틀림없었다. 백희아는 혼란스러운 상황조차 잊고 괜히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마 지금 전세계에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히어로들 또한 혼란스럽지 않을까.
[히어로가 말이야, 어! 살다보면 S급 괴수랑 맞다이 까보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살면서 언제 또 마룡들 만나보겠냐! 죽을 것 같아? 씨발, 안 죽어! 괴수든 괴인이든 마룡이든 그 새끼들이 죽지 히어로가 죽을 것 같냐아아아!! 히어로 네버 다이!! 뭐? 광검? 그 형님이 내 지시 들었으면 지금 살아있었어, 이것들아!]
"......."
백희아는 모든 걸 포기했다.
[그러니까 복창해라! 히어로는 죽지 않는다! 히어로는 지지 않는다!! 물론 니들이 거기서 얼타고 찌질대고 있으면 질수도 있겠지. 하지만 설령 지더라도 저런 성욕에 패배한 쓰레기들에게 지지 않는다!!! 나중에 지구가 멸망하고 나서 '음란 변태들한테 멸망당했다'고 기록되고 싶냐?! 정신 차려!!]
"후우."
갑자기 머리가 차분해졌다.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하고, 혼란스러움에 두근거리던 심박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정신을 안 차릴래야 안 차릴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해 꼬장을 부리는 아저씨의 주정에 절로 정신이 빠짝 들었다. 아, 암만 그래도 내가 저정도는 아니지. 충격요법 치고는 상당히 정신나간 언사였다.
[지금부터 나랑 집행관 명령 들으면 살 것이고, 안 듣는 새끼들은 전부 다 아지다하카 초대남이다. 꼬와? 꼬우면 살아서 한 대 치러 오던가, 씨발. 지휘관 명령 안 듣는 새끼들 다 협회에서 제명인 거 몰라? 뭐? 남자새끼 말을 어떻게 믿냐고? 아지다하카 개새끼! 됐냐!!]
"......난 이제 모르겠다."
백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옆에서 보좌를 하는 샐러맨더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집정관, 남반구 맡아주세요. 저는 북반구를 맡을테니까."
[오냐! 내가 한 명이라도 히어로 죽이면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 팬티만 입고 춤춘다!!]
그건 오히려 역효과가 아닐까. 백희아는 끓는 속을 진정시키며 추가 콘솔을 꺼냈다. 패널에는 각각 N, O, P, Q, R이 적혀있었다.
"NTR 작전 개시. 부디 광화문을 깨끗하게 지켜주세요."
지구 전체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