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436화 (436/1,497)

〈 436화 〉1부 18장 18

"낯선 천장이다."

이승형은 온통 새까만 방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구속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유롭게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세상에."

이승형은 자신에게 갈아입혀진 옷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누구의 취향인지 훤히 알겠다 싶은,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가 가운데, 방안에는 옷 안주머니에서 꺼내진 푸른 철제 케이스만이 남아있었다.

"도대체 여긴...."

이미 어느정도 들어서 마음의 준비는 하고 왔지만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바깥이 보여야 할 유리창은 하나도 없었고, 오직 천장에 모텔을 연상케하는 주홍색 빛만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이승형은 직감했다.

'이거 혹시?'

직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의 형태며 침대의 위치, 심지어 선반에 놓인 전기포트의 위치까지. 방은 자신이 가루라와 사랑을 나누었던 그 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구조였다. 이승형은 부리나케 달려가 문고리를 잡았다.

끼익, 끼익.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바깥에 결계라도 쳐진 것 마냥 문이 잠겨있었고, 이승형은 주먹을 들어올려 문을 향해 마음껏 휘둘렀다.

쾅, 콰앙, 쾅!!

아무리 휘둘러도 문은 부서지지 않았다. 결국 이승형은 두 주먹으로 문을 내리쳤다가, 순순히 몸을 돌려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제대로 갇혔어.'

손목에 감긴 마도기어는 바깥과 연락이 완전히 단절되었다. 주변에 벌게진 피부를 보니 누군가가 마도기어를 벗겨보려는 흔적은 역력했지만 실패한 듯 했다. 이승형은 날짜를 확인했다.

4796년89월15일.

'너무 노골적인데.'

연도부터 날짜까지 뭐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 결국 이승형은 피닉스가 준 철제 케이스를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다. 마치 담배갑처럼 되어있는 케이스 안에는 하필이면 또 그런 물건이 들어있었다.

"후우."

이승형은 긴장된 마음을 한숨으로 다독였다. 방안을 한 번 쭉 훑어보니, 테이블 위에는 종이 하나가 덜렁 놓여있었다. 이승형은 테이블로 다가가 종이를 들어올렸다.

<앙그와 섹스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방>.

"허, 허허."

이승형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왜 그 수많은 히어로들이 아지다하카의 괴인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에서야 이해가 갔다.

'선택지를 이런 식으로 주니 당연히 죄다 괴인이 되지.'

1.스스로 생을 마감하거나.

2.굶거나 목말라 죽거나.

3.일단 하고 보거나.

답은 하나 뿐이었다. 아지다하카와 하는 것을 통해 살아남는 것. 이승형은 아지다하카가 파놓은 함정에 소름이 돋았다.

애초에 블랙 바이블로 오겠다고 한 이들은 아지다하카, 그러니까 앙그를 상대로 어떻게 해보겠다고 접근한 사람들이였다. 그리고 앙그는 어쩔 수 없다며 몸을 허락했을 터.

'개미지옥이 따로 없네.'

늪에 빠졌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모든게 끝난 뒤. 이승형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피닉스의 말에 따르면, 함께 있지 않으면 바로 본색을 드러낸다는 말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안녕?"

그리고 상대는 이승형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옆구리를 잡고 올라오는 손길은 백허그를 하여 셔츠를 벗기는 듯 했고, 뱀처럼 그 움직임은 몹시 농염했다. 이승형은 손목을 붙잡았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낚을 줄 몰랐는 걸."

"다들 낚이지. 예쁜 여자만 보면 환장하는 남자들 다루는 거야 내 전문이니까."

아지다하카는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며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 복장은 영상 속 가루라와 똑 닮아있었다. 이승형은 끓어오르는 분을 참았다.

"왜? 이런 거 싫어해? 원하던 거 아니었어?"

"......."

이승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연기를 해야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았다. 아지다하카는 머리모양까지 가루라와 똑같이 하며 이승형을 도발했다.

"후후, 이제는 몸도 마음도 떠난 상대잖아. 뭘 그렇게 신경써?"

"아니다."

"말은 그렇지만 아랫도리는 솔직한 걸."

"......."

눈꺼풀을 닫으니 아지다하카의 손길이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바지 앞섶을 스치는 손길은 이승형의 물건을 따라 올라갔고, 아지다하카의 말대로 이승형의 분신은 명백히 부풀어있었다.

"후훗. 그래. 그래야지. 아무렴 그래야지. 그래도 너는 운이 좋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주는 남자, 한 명도 없거든."

아지다하카는 이승형의 앞주머니에 들어있던 철제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라이터처럼 뿅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안에는 살라딘이 껄껄 웃었던 물건이 들어있었다. 아지다하카는 종이 박스에 든 비닐을 하나 들어 이승형의 앞에 흔들었다.

"너도 할 생각이 있어서 이거 가져온 거 아니니? 후후, 이거 뭐--게?"

"비타민 P."

"비타민같은 소리하고 있네. 너 말이야, 할 생각 가득 한 상태로 그런말 해봐야 아무 의미 없거든?"

아지다하카는 자긴의 웃옷을 훌러덩 벗어던졌다. 마치 행위를 하는게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 직접 보여줄게. 하음."

아지다하카는 비닐의 끝을 이로 붙잡고 손가락을 비틀었다. 비닐이 잘게 찢어지며 안에 있던 내용물이 슬쩍 피쳤다. 아지다하카는 새가 지저귀는 듯한 청량한 향기에 비닐 안에 있던 물건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

"뭐야 이거…?"

아지다하카의 손바닥에는 거미보다도 작은 푸른 카나리아가 원형의 캡슐을 한가운데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카나리아는 그 작은 얼굴로 아지다하카를 올려다보며 부리를 쩍 벌렸다.

- 피임은 내가 P라는 준말인 거시야.

"뭐?"

- 섹프는 친구가 아니라는 거시야.

"뭐라고?!"

아지다하카가 분통을 터뜨리기도 잠시, 푸른 카나리아-미니피닉스가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며 그 크기를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아지다하카는 흠칫 놀라 미니피닉스를 집어던졌다.

덥썩!

푸른 불꽃의 손길이 아지다하카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아지다하카는 어둠 속으로 도망치려던 그대로 바깥으로 딸려나왔다.

"꺄아아악!!"

"잡.았.죠?"

아지다하카가 어둠 속에서 상체를 꺼내듯, 푸른 불꽃 속에서 아지다하카의 머리채를 붙잡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청화, 피닉스는 아지다하카가 했던 인사 그대로 되돌려주며 손을 흔들었다.

"일단 한 대 맞고 시작하지 않을래요? 푸흐흐, 앙그랑 떡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

피닉스는 아지다하카의 머리칼을 손으로 휘감았다. 주먹에는 푸른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딴 거 안해도 난 나갈 수 있거든요?! 창염개진!"

검은 결계가 와장창 박살이 났다. 푸른 불꽃이 검은 성지의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 * *

톡까놓고 말해서, 아지다하카와의 플레이는 합법 행위였다.

원작 주인공인 백청화 또한 아지다하카에게 잡혀가 강제로 배를 맞추게 되었다. 정확히는 앙그에 의해 작업을 당하게 되고, 앙그가 히로인인 줄 알고 접근한 플레이어는 빌런의 악독한 수작에 당해 앙그와 행위를 하게 된다.

'히로인 소개도 앙그로 해놨으니 다들 낚였지.'

당연히 앙그는 아지다하카의 위장. 아지다하카는 펜릴을 쓰러뜨린 주인공을 자신의 장난감으로 삼기 위해 장난을 쳤고, 주인공의 절륜한 테크닉에 절여져서 주인공을 죽이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아지다하카가 만족하는 정도에 따라서 아지다하카와의 전투 난이도가 천차만별이니 말할 필요도 없고.'

얼마나 절륜한가에 따라서 아지다하카가 손대중을 해주는 정도가 달라진다. 그야말로 아지다하카를 완벽하게 보내버릴 경우, 손부채질 하나만으로도 아지다하카는 주인공의 품안에 쓰러지는 척 연기를 하며 패배한다.

물론 만족하지 못하게 될 경우는 끝. 그저 자동 이벤트 씬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스펙을 가지고도 아지다하카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영영 결계 속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결국 아지다하카의 우리를 빠져나오는 방법은 두 가지.

아지다하카가 만족하여 결계를 해제하거나, 아니면 안이든 밖이든 결계 이상의 힘을 이용해 결계 자체를 깨부수는 것. 당연히 후자는 인게임 플레이상 불가능했다. 아지다하카는 낚은 상대를 검은 성지, 이계로 납치하니까.

하지만 이곳은 게임이 아닌 현실이다.

나는 이승형의 안주머니에 급히 미니피닉스를 집어넣었다. 아지다하카나 살라딘이 보더라도 의심하지 않을 물건으로 위장을 하였고, 아지다하카는 예상대로 이승형이 보는 눈앞에서 비닐을 찢었다.

결과는 창염개진.

나는 아지다하카의 결계를 창염개진으로 터뜨린 다음, 바로 이승형을 잡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승형은 십년감수한 얼굴로 안도했다. 블랙 바이블의 상공으로 날아오른 나는 바로 건물들의 구조를 파악했다.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였다.

"수고 많았어요! 당신은 귀환!!"

"스승님--?!"

나는 출구 건물을 향해 이승형을 집어던졌다. 이승형은 지구로 통하는 차원문을 향해 자유낙하했고, 검은 차원문으로 쏙 들어가 사라졌다.

"이제 우리끼리 놀아볼까요?"

"너, 너--!!"

창염개진으로 또다시 얼굴이 불탄 아지다하카는 수도를 세워 자신의 목을 날렸다. 아지다하카의 목이 뎅겅 날아갔고, 나는 분신이 폭발하기 전에 아지다하카의 머리를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콰앙, 콰아아앙!!

마력이 들끓으며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사방 팔방에서 아지다하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 죽었어!!"""

"어우, 아지다하카 분신 한 번 참 많네요. 이거 전부다 밖에 퍼져나갔으면 지구상의 모든 남자가 아지다하카랑 한 번은 다 잤겠네요, 푸흐흐."

아지다하카는 바퀴벌레처럼 바글바글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 모든 분신들이 하나같이 S급의 이능력자 수준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나마 마력의 한계로 인해 블랙 바이블에서 바깥으로 빼낼 수 있는 분신의 수에 한계가 있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아무렴 블랙 바이블의 분신을 다 꺼낸다면 지구인 전체를 상대로 1:1을 할 수 있다는게 허언이 아니지.'

상대하는 방법은 여러모로 다양하겠지만, 정말 징글징글하다 싶을 정도로 아지다하카의 분신은 끓어넘쳤다. 심지어 이미 아지다하카에 의해 노예가 된 괴인들과 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신은 사방 팔방에서 나를 덮쳤다.

"그럼 이중에 본체, 마암룡을 찾아야 하는 건데...."

나는 가장 먼저 달려든 아지다하카의 손톱을 피해 멱살을 움켜쥐었다.

"어디있어요?"

"내가 말할 것 같아?!"

"그럼 말하지 말고 죽으시던가."

우둑. 나는 아지다하카의 목을 꺾어버렸다. 곧 등 뒤에서 내 날개를 할퀴려는 손톱이 느껴져 날개를 해제하고 바닥을 향해 자유낙하했다.

꺄하하학!!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리라.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 할지라도 헐벗은 상태로 벌떼처럼 날아다니면 무슨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

서걱! 서걱!

알몸의 아지다하카들은 마구잡이로 나를 할퀴려들었다. 날개를 다시 펼쳐 원형으로 몸을 감싸니, 날개의 겉을 할퀴어 깃털을 손톱으로 뜯어냈다.

'독수리와 장수말벌떼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뜬금없는 비유이기는 하지만 지금 상황이 그러했다. 나는 이승형을 밖에 집어던졌고, 검은 성지 안에는 아지다하카밖에 없었다.

'여왕벌을 잡으면 게임 끝인데.'

여왕벌을 참칭하는 아지다하카가 아니라, 진짜 본체이며 약점인 마암룡을 찾아야했다. 햇빛 한 점 없는 어두운 세상은 그림자가 드리운게 아니라 그만큼 아지다하카가 공간을 채워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큐브 털어가기 딱 좋겠네.'

[그럼 바로 알현하러 날아가볼까.]

화르르륵!

거대한 불꽃의 날개가 좌우로 활짝 펼쳐졌다. 괴인형으로 날개를 펼치며 가감없이 마력을 부여한 만큼 날개는 수십 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해졌다.

"꺄아아악!!"

덕분에 날개에 얻어맞은 아지다하카들은 푸른 불꽃에 타들어갔다. 피부가 벌겋게 익어버리고, 곧 뼈만 앙상히 남아 몸을 비틀다 안개가 되어 소멸했다.

[진짜 징글징글하네.]

날갯짓 한 번에 수 백구의 시체가 만들어졌다가 소멸했다. 아지다하카들은 내가 괴인형으로 변신하자마자 나를 원형으로 에워싸기 시작했다.

"""오호호! 이걸로 넌 독 안에 든 쥐야!!"""

[거 누가 찐따 아니랄까봐 표현 더럽게 진부하군.]

흠칫.

아지다하카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멍하니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살짝 두려울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겁먹거나 쫄 정도는 아니었다.

[맨날 여기서 틀어박혀서 떡만 쳐대니 친구가 안 생기지.]

"다, 닥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지다하카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아지다하카를 향해 전속력으로 날았다.

"꺄아악?!"

또다시 머리칼이 붙잡힌 아지다하카는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붙잡히기 직전 마력으로 머리칼을 보호했기에 불 태우기는 어려웠지만, 아까처럼 스스로 목을 날리지는 않았다.

[네가 지금 '메인'이구나.]

"너, 너 그걸 어떻게…?!"

[찐따 냄새가 제일 강하게 풍겨서.]

나는 아지다하카를 잡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아무리 큐브에 의해 수 억의 분신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그 모든 분신을 총괄하는 '주 인격'을 맡은 아지다하카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럼 진짜 마암룡을 만나러 가보실까.]

"흥, 그래봐야 어디있는 지 모를, 꺄아악!!"

나는 아지다하카를 잡고 검은 성지 전체를 한 바퀴 돌았다. 고대 환상의 도시를 그대로 답습한 듯한 외형은 가운데 깎아지른 첨탑을 제외하고 전부 대동소이했다.

꺄아아아아악!!

아지다하카들은 첨탑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내가 올라가는 걸 방해하겠다는 듯 모여든 아지다하카는 구름처럼 퍼져있었다.

[쿡.]

"왜 웃어!!"

[마암룡같은 아싸가 도시 정중앙에 살겠냐.]

나는 아지다하카를 잡고 도시 최외곽으로 날았다. 가장 허름한 건물, 햇볕조차 잘 들지 않을 것처럼 옆 건물에 일조권을 침해당하는 건물, 그리고 그 건물의 반지하!

콰---앙!!

나는 전신에 마력을 두르고 낙하하여 건물을 날려버렸다. 흙먼지 아래 아주 미약하게나마 마암룡의 반응이 느껴졌다.

[구하러 왔다.]

원작처럼 손목에 족쇄가 채워져 천장을 향해 들어올려진 가련한 여왕, 마암룡이 안개속에서 모습을-

"이런 씹."

...사로잡힌 여왕은 침대 위에 사지가 결박된 채 나신으로 용기병 자세가 되어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