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2화 〉1부 18장 14
와장창!
나는 조용히 내 유리잔을 들어올렸다. 아직 잔에는 딸기 아포가토가 들어있었고, 나는 아이스크림 곁에 있는 에스프레소를 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아, 아아, 아아…!"
백희아는 손발이 오그라들어 어쩔줄을 몰랐다. 이미 노래는 시작되었고, 영상은 멈추지 않았다. 내 마도기어를 통해 재생되고 있는 만큼, 내가 멈춰야만 끝날 수 있었다.
"왜 그래요?"
"다, 당장 멈춰야…!"
"역시 실력파 배우 답게 연기 잘 하고 있는데."
"저, 저게 연기라고요?"
백희아는 식겁을 하며 나를 째려봤다. 나는 백희아에게 아포가토를 건넸다. 이미 백희아의 유리잔은 백희아가 기겁을 하며 놀란 나머지 바닥에 떨어져 풍비박산이 났고, 내가 불꽃으로 태워 소멸시켰다.
"그럼 연기지 진짜로 그러게요?"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곡을 무슨!"
"저것도 나름 K-POP인데."
"아무리 그래도!!"
이승형의 노래는 점점 구슬퍼지기 시작했다. 한국어가 가능한 이들은 전부다 소태씹은 표정으로 영상을 보고 있을테지만, 한국어가 불가능한 이들은 이승형의 노래를 스마트 워치로 실시간 번역으로 듣고 있었다.
-GAZIMARA, GAZIMARA, GAZI-MAL,A LA-
그들에게 있어서는 외국계 팝 가수가 그리 부르는 것 같지 않을까. 세상 진지한 얼굴로 신디사이저의 건반을 누르며 진심을 담아 노래를 부르는 승형의 애절함은 한민족의 얼까지 서려 있었다.
"라라, 라라라라."
나는 신이 나서 절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모두가 이승형의 경쾌하면서도 애절한 목소리에 빠져드는 가운데, 스스로를 앙그라고 사기친 아지다하카만이 굳은 얼굴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나를 위해, 한 번 만, 노래를 해주렴.
"아무렴 그렇죠. 푸흐흐."
여왕벌의 근처에는 일벌만 있을 뿐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 그건 마암룡도 마찬가지. 아지다하카나 마암룡이나, 개똥벌레는 완벽하게 둘을 저격하는 노래였다.
"가슴을 아무리 내밀어봐도 친구는 없죠. 애초에 내밀 가슴도 빈약한데. 음음."
"......."
"당신 얘기 아니니까 그렇게 째려보지 마요."
"...언제는 저랑 아지다하카랑 상성이 발군이라면서요?"
앗차. 나는 아포카토를 한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 달콤 쌉싸름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이 딸기향이 가시기 전에 빨리 변명거리를 생각해내야 했다.
"백희아 아가씨, 은유하 아가씨가 어디 카르나랑 상성 맞다고 그쪽도 상성이 맞던가요?"
백희아가 하도 카르나의 싱크로 대상이 누구인지 궁금해하여 은유하라고만 가르쳐줬다. 물론 본인이 회장인 건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에 신분은 숨겼다. 그리고 내 변명을 들은 백희아는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요."
"그런 셈이죠."
어느덧 노래는 간주로 들어갔다. 이승형의 추태 아닌 추태를 생중계하던 영상의 라이브 채팅에는 모두가 슬퍼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인들만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울어봐도 (여자) 친구가 없는 거임ㅠㅠㅠㅜ
-아 분명 노래는 슬픈데 왜 눈물이 다나냐ㅋㅋㅋ
-입국금지시켜라 쪽팔려서 영상을 볼 수가 없다 미친 거 아니냐 그 좋은 이별 노래들 놔두고 무슨 개똥같은 노래야
-그만큼 우리 오빠 지금 멘탈이 박살난 거라고요!!!
오직 한국어 채팅만이 갑론을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노래의 저격 대상인 아지다하카는 깔루아 밀크를 홀짝이고 있었지만, 눈썹을 찌푸리며 글라스를 손톱으로 살살 긁고 있었다.
"저거 찔려가지고 지금 부들부들 떠는 거 보여요? 자기한테 일부러 외치는 거 아닐까 싶어서 전전긍긍하는 거 보여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피닉스 님, 아지다하카 한국에서 활동했나요? 한국어를 아는게 아니면 저런 반응이 나올 리가 없는데."
"[텍스트만 읽으면 서정시 뺨치는 가사니까요]."
"꺅?!"
백희아는 새된 비명을 비르며 놀랐다.
"방금 목소리에…?"
"마력을 실었죠. 언어는 한국어일지 몰라도, 목소리에 마력을 실어서 전달하면 그 마력이 그 사람의 의지를 전달해주는 거예요. 괴인형일 때 자주 그랬던 거 기억하죠?"
"아, 그게."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승형과 동시에 노래를 불렀다. 어느덧 노래는 2절로 넘어가 있었다.
[사랑 하고 싶지만, 마음 뿐인 걸-]
"...방금 그거 진심이에요? 리얼?"
"좋으실대로 생각하세요. 아무튼 이렇게 마력을 담아서 얘기하면 언어의 필터링 없이 의지가 직접 전해진다, 이 말씀. 그리고 지금 아지다하카 직접 듣고 있는 거예요."
나는 이승형의 목소리에서 마력의 파장을 스캔했다. 이승형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비관하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제가 설명한 아지다하카의 실체에 대해 느낀 감정을 노래로 표현한 거예요. 이건 그가 아지다하카에게 노래로 전하는 메세지죠."
인싸를 자처하는 아싸가 제일 뜨끔해서 불타오를 때가 언제일까. 그건 바로 저격을 당했을 때다.
"이제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보세요. 아주 재미있을 테니까. 그래요, 지금 아지다하카에게 하는 노래의 의미는 이거예요."
나는 만약 아지다하카가 듣는다면, 직접 들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말했다.
"혹시...꼬우신가요?"
꼬우면 본체 드러내고 덤벼보시던가. 이건 내가 이승형을 통해 아지다하카에게 내민 도전장이었다.
"아지다하카나 마암룡이나 찐따라서 자기 욕하는 줄 알 거예요."
***
노래는 끝났다. 이승형은 애절한 발라드로 광기어린 클럽을 다시 원래의 라이브 카페로 되돌려놓았다. 그는 주변 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당신, 하아."
앙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얼굴로 손으로 이마를 쓸어넘겼다. 이승형은 사람좋은 얼굴로 위스키를 홀짝이며 앙그를 주시했다.
'닮았다.'
앞머리를 머리 위로 쓸어넘긴 순간, 앙그는 아지다하카가 되었다. 눈물점만 지우고 화장만 조금 더 짙게 한다면, 아지다하카와 별반 다를게 없었다.
'화장을 하고 안하고 차이가 이리도 차이가 많이 나는구나.'
가루라는 자신이 피닉스와 같은 얼굴이라는 것이 너무 황송하고 불경스러워 화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그 화장이 조금 과한 덕분에 어디선가는 '갸루라'라고 욕을 듣고 있지만, 승형으로서는 확실히 화장을 한 가루라가 훨씬 나았다. 안그러면 맨 얼굴로 할 경우, 대면좌위를 하기가 너무나도 죄송스러웠다.
"하아…."
"왜 그러십니까."
"가루라 보고싶, 흡."
이승형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입을 손으로 막았다. 클럽 안의 분위기가 잠시 숙연해졌고, 곧 애써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이승형은 위스키를 홀짝이며 본심을 숨겼다.
백나로 호에 승선하기 직전까지 가루라와 한 침대에 있었다는 걸 알면 저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면 V로그를 통해 공개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기만 행위에 따른 저들의 위로가 아지다하카를 공략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사람들 위로도 받으시고 참 좋으시겠습니다?"
앙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있었다. 간부이니 더 잘 알고 있겠지만, 사람들은 진심으로 이승형을 위로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수많은 테이블을 섭렵하며 친구가 된, 아지다하카는 범접할 수 없는 사교성이었다.
"하하, 원래 술 사면 다 친구 아닙니까."
이승형은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돈으로 친구를 샀다는 말도 그가 하니 위트 있는 농담처럼 들렸다. 앙그는 금방이라도 깨져서 손에 피가 튈 것만 같은 글라스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술로 마음은 되돌릴 수 없, 흠흠."
앙그는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말이라는 건 술처럼 이미 쏟아버린 이상 주워담을 수 없었다. 이승형은 우울한 눈빛으로 위스키를 다시 병나발 째 물었다.
"후우, 그렇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승형은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허하네요."
"...흠, 그 공허함을 채우는 방법. 제가 잘 압니다."
앙그는 조끼 안주머니에서 검은 명함을 꺼냈다. 검은 배경에 금박으로 씌워진 명함은 앙그의 입술과 똑같은 모양과 색의 붉은 입술자국이 프린트 되어있었다. 이승형은 테이블 위에 스리슬쩍 올려진 명함에 난색을 표했다.
"저기,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건…."
"기록에 전혀 남지 않는 곳이니까 괜찮습니다. 오늘의 실수도 있고…."
앙그는 남은 깔루아 밀크를 전부 마시고 빈 잔을 명함 위에 올렸다. 그 박력에 이승형은 깜짝 놀랐고, 앙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
이승형은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글라스를 옆으로 밀고 명함을 챙겼다. 그리고 그의 스승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서비스 두 시간.
"......훗."
두 시간이면 충분하지. 이승형은 지금까지의 연기를 벗어던지고, 위스키 병을 들고 아무 자리에나 몸을 던졌다. 그가 가장 먼저 앉은 곳은 덩치가 우락부락한 근육질 사내들의 자리였다.
"터키 히어로 분들이시죠?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뭐요?"
"저, 개인적으로 빌런 <하이레딘>을 제압한 일화가 궁금해서요. 혹시 아시는 바가 있으면-"
"으하하하하!!"
터키의 히어로들은 클럽이 떠나가라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웃음에 클럽이 잠시 경직 되었고, 히어로들은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하이레딘>이 어떻게 체포되었는가 궁금한가?"
"예."
그야말로 일촉 즉발의 상황. 모두가 혹시나 싶은 사태에 침을 꼴깍 삼키는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남자가 마력으로 양주를 수십병 잡아당기며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의 묘기 아닌 묘기에 사람들이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아무렴 술값을 이리 받았는데 얘기해줘야지! 흐하하, 잘 찾아오셨소! 내가 이래뵈도 하이레딘 공략전에 직접 참가했던 사람이라 이 말이야!"
"오오오!"
"흐허허, 이거 알고봤더니 그냥 순정 히어로였구만! 내가 개쩌는 이야기를 들려주겠소! 슬픈 일 따위는 잊어버리시오!"
"아, 저 전혀 슬프지 않은-"
이승형의 사소한 반항은 히어로들이 직접 시연을 펼치는 영웅담 속에 파묻혔다.
***
쾅!
아지다하카는 바닥에 깔아놓은 특대 딜도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정확히 조준하고 앉은 덕분에 꼿꼿이 선 딜도가 아지다하카의 음부를 정확히 찌르고 들어갔다.
으으읍!!
침대의 마암룡은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침대 시트는 마를 새도 없이 더욱 축축하게 젖어들어갔다. 아지다하카는 딜도 위에서 여유롭게 허리를 맷돌처럼 돌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시건방진 새끼. 그거 분명히 나 들으라고 하는 노래였겠지? 응? 뭐? 아냐? 그냥 이별 노래였을 거라고? 웃기지 마!"
쾅쾅쾅!
아지다하카는 짜증을 담아 방아를 찧었다. 아래에 깔고 앉은 딜도에 대해서는 배려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멍이 들겠다 싶을 정도로 격하게 하는 행위의 고통이 쾌락으로 전해질 마암룡에 대한 배려도 없었다.
"씨이, 잘생기면 다야? 건방진 새끼가 죽을라고…."
아지다하카는 딜도의 위에서 방아를 찧으며 분을 삭혔다. 마암룡을 괴롭히기 위해서, 마암룡의 정신을 붕괴시켜 마암룡이 가진 마력의 정수를 빼앗기 위해 시작한 행위에 어느덧 재미가 붙어, 살을 섞는 행위는 아지다하카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좋은 수단이었다.
"그 새끼, 분명 피닉스의 사주를 받은게 분명해. 내가 접근할 걸 알고, 그런 식의 레파토리만 수백개는 준비했을 거야. 쓰레기 같은 년놈들."
아지다하카는 모르지만, 본인이 찔려서 하게 된 말도 안 되는 과대망상은 거의 진실에 가깝게 도달해있었다. 아직까지 타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설령 눈치 챘어도 상관없다.
"후후후, 고마워. 마암룡 나으리. 당신 덕분에 이런 개쩌는 몸을 받았으니 말이야."
그 어떤 존재도 자신의 속을 맛보면 헤어나오지 못했다. 아지다하카는 속에 들어온 물건을 껄떡이는 딜도의 뺨을 두어번 툭툭 후려쳤다.
"야, 너도 내일부터 작업 시작해. 오랜만에 동양산 거근으로 몸보신 좀 해야될 것 같으니까."
"으으읍."
아지다하카의 밑에 깔린 딜도-괴인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지다하카는 창 너머의 야경을 보며 상상속에 몸을 떨었다.
"흐읏."
그 자세는 마치 자신이 가루라라도 된 것 같은 자세였다.
***
"다녀왔습니다!"
이승형은 싱글벙글 웃으며 VIP 전용 객실로 들어왔다. 이미 나와 백희아가 한참 전부터 방안에 같이 있었기에, 그 누구도 이승형이 나의 객실로 밤늦은 시간에 들어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으리라.
"윽, 술냄새."
"아직은 미숙하네요."
나는 이승형의 심장에 박힌 창염을 조작했다. 심장에서 흐른 불꽃이 혈관을 지나 모세혈관 하나하나를 스쳐지나가며 알코올을 전부 태워버렸다. 이승형의 몸에 있던 연한 알코올 냄새가 모두 날아갔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찐따 연기를 하라고 한 제가 미안하죠."
네트워크는 이미 개똥벌레로 폭발해있었다. 이승형이 삶의 고독함을 느꼈지만 터키의 좋은 친구들을 만나 삶의 의욕을 다시 얻고 정의감에 붙타오르는 장면은 여러모로 역대급 영상이었다.
영상 속 이승형은 끝에 가서야 만이 비로소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이전의 모든 장면은 우울함과 자괴감에 미쳐버려 광기어린 슬픔을 가진 존재였다. 실연의 공허함을 뭘로 해서라도 달래보고 싶어하는 그런 상태.
"축하해요. 이제 이러고 가루라 만나러 가서 애정어린 딥키스 하면 완벽한 반전 로맨스네요."
"로맨스라는 이름의 스릴러 아닐까요."
"장르야 어쨌든 그만큼 이승형의 연기가 대단했다는 얘기죠. 그럼 줘봐요, 명함."
이승형은 초대장을 받았다. 아지다하카의 온갖 망상벽이 구현화된, 아지다하카만을 위한 하렘으로의 초대장.
"<블랙바이블>."
아지다하카의 하렘이 위치한 곳은, 여러 의미로 성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