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431화 (431/1,497)

〈 431화 〉1부 18장 13

마암룡 아지다하카.

비록 지금은 회생 불가능한 가벼운 여자가 되어버렸지만, 원작에서는 고전적인 츤데레 성향이 짙은 히로인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고 하지만 철저히 숨기지는 못하는 존재. 입에 '착각하지마'를 달고 사는 그야말로 츤데레의 전형.

그런 츤데레적 성향이 여왕벌 성향과 섞이게 되어, 아지다하카의 주위에는 그런 갭에서 매력을 느낀 괴인들이 넘쳐났다. 여왕으로서 도도함을 가진 동시에, 신경을 아예 안 써주는게 아니라서 괴인들은 충성을 다했다.

그 방법이 분신을 통한 대리만족이었고, 원작에서는 절대 양지에서 걸리지 않도록 음지에서 철저히했다. 언젠가 자신을 만족시켜줄 진짜 왕자님 앞에서는 요조숙녀인 척 하겠다며, 어디까지나 일벌들과의 분신을 통한 행위는 그를 위한 연습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웠다.

괴인들은 아지다하카의 본체-마암룡으로서의 처녀를 탐하기 위해 더욱더 아지다하카에게 더욱 빠져들었다. 적어도 분신으로는 온갖 플레이를 넘어, 이상성욕까지 다 받아주는 괴인들의 성녀였으니.

아지다하카는 그런 괴인들의 중심에 서있는 존재였다. 흔히들 인싸라고 표현되는, 극도로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간부로서 주변에는 항상 잘생긴 남자 괴인이 넘쳤다. 본인도 그런 남자들이 자신에게 죽고 못사는 걸 즐기기도 했다.

그리고 마암룡은 그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웃싸이더. 소통장애.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것에 어색해하던 마암룡은 뭐든지 홀로 하기를 선호하는, 정확히는 남들과 무언가를 같이 하기를 두려워하는 성격이었다.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는 건 기본이고, 애초에 타인과 대화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뭐가. 왜. 아닌데?]

괜한 격지심에 얽메여있어 경계심마저 가득한 마암룡은 상당히 말이 짧고, 쿨하고, 틱틱거렸다. 오죽하면 정령으로 각성시킨 이후에 아지다하카로 되돌려 달라는 사람들까지 나왔을 정도로, 마암룡은 여러모로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 아웃사이더 기질이 김누리와 가장 합이 잘 맞았다. 지금이야 가족과의 관계를 악화되기 전에 빠르게 정리했고 집에서의 위상도 올라가기는 했다만, 김누리 또한 원래는 가정에서 소외된 존재였다.

그리고 김누리가 실은 상당히 생각이 깊고 정신력이 상당한 존재이듯, 마암룡 또한 그 속사정을 알게되면 원활한 대화가 충분히 이루어진다.

실상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서 난감해하는 것이며, 그 속마음이 바로바로 튀어나올까봐 일부러 말을 숨기는 것이다. 관계를 쌓아나갈수록 대화는 점점더 자연스러워지며, 한 명의 폐급 정령을 사회의 일원으로 갱생시켰다는 뿌듯함까지 얻을 수 있었다.

[키스 해도 돼? ...방금 한 말 그냥 혼잣말, 아, 아니, 농담은 아닌데, 으, 아니, 키스가 싫다는 게 아니라, 내 말은 그러니까 우리의 관계가 그만큼 깊어졌다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 의도에서 그런 거야. 왜 대답을 안 해? ...키스 하기 싫어?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기왕이면 키스에서 더 나아가서 섹, 아아아아악!!!]

야시장 데이트에서 있었던 오마케 씬의 시작이었다.

그런 마암룡을 아지다하카가 코스프레하고 있다. 아니, 연기하고 있다. 이미 나-기억에는 없지만-에 의해 20년 전부터 깨어났을테니, 그 누구보다도 마암룡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막아야 했다. 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내가 지금 뛰쳐나가면 모두 말짱 도로묵이 되어버릴 것이며, 영원히 아지다하카를 잡을 수 없게 될 지도 몰랐다.

'믿자.'

이승형이 제발 심지를 굳건히 가지기를. 나는 간곡한 마음으로 이승형이 아지다하카에게 홀리지 않기를 바랐다.

* * *

혼돈과 광란이 뒤섞인 클럽 한 가운데, 승형은 블랙 러시안을 홀짝이며 상대를 위아래로 훑었다. 실례인 것은 알지만, 눈앞의 상대가 그 아지다하카로 하기에는 쉽게 믿기 어려웠다.

잔털 하나 없이 가지런하게 늘어뜨린 검은 생 머리, 잡티 하나 없이 잘 다려진 와이셔츠와 검은 정장.

테이블에 가려져 있지만, 마도기어의 홀로그램 스캔을 통해 확인한 아래는 남색 하이힐에 반투명에 가까운 검은 스타킹을 입고 있었다. 붉은 넥타이가 시선을 끌기도 하지만, 그런 넥타이보다도 승형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왼쪽 눈가 아래에 있는 눈물점.

'가을 누님 자주 보던 드라마 생각나게 하는데.'

왜 너는 나를 만나서 나를 슬프게 하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생각나는 점의 위치였다. 물론 불륜과 치정에 의한 복수귀라기 보다는, 안그래도 단아한 여인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게 만드는 마성을 가지고 있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딱딱한 듯 하면서도 고저없는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나긋나긋했다. 승형은 자신이 너무 빤히 쳐다봤나싶어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생각해보니 이름을 몰랐다. 아무리 말실수를 자주 하는 승형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아지다하카 씨'라고 부를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승형의 시선이 정장 조끼의 명찰로 내려갔다.

[ANG].

명패에는 알파벳 세글자만 적혀있었다. 승형은 저것이 도대체 아지다하카와 어떤 관계가 있나 생각해봤지만, 그보다 저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할 지 더 고민이 되었다.

"...앙?"

"앙그."

처음으로 아지다하카-앙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승형이 끝을 올리는 식으로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사람의 이름을 놀리는 듯한 느낌으로 말해버렸다. 승형은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죄송합니다, 앙그 씨. 그, 본명이신가요?"

"아뇨."

앙그는 또다시 칵테일을 만들어 흔들기 시작했다. 승형은 아직 다 마시지도 않은 블랙 러시안이 남아있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남은 것들을 한 입에 털어넣었다.

"무리하게 안 드셔도 됩니다."

"지금 완전 멀쩡합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얘기하죠."

승형은 앙그 또한 자신에 대해 오해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피닉스의 계획대로, 실연당한 자신을 연기해야만 했다. 한숨을 푹푹 내쉬고, 다들 알고 있지만 사연있는 척을 하며 청승을 떨어야 했다.

"...아닌데요? 저 정말 괜찮습니다."

하지만 승형은 그러지 않았다. 그에 앙그가 처음으로 쓰게 웃었다. 승형의 안타까운 사연에 대해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진한 동정을 내비치는 쓴웃음이었다.

"괜찮다면야."

앙그는 술을 섞었다. 스피리터스를 단 번에 털어넣고, 블랙 러시안으로 목을 축인 승형에게 이번에는 달콤한 깔루아 밀크를 건넸다. 승형은 뭔가 자신이 알던 칵테일 바와는 다른 제멋대로인 제안에 조금 난감해졌다.

"......저기, 저 이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제 겁니다만."

앙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이 섞은 깔루아 밀크를 살짝 홀짝였다. 피처럼 짙은 붉은 립스틱 위로 살짝 묻은 우유 거품에 승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유혹당하는 척을 하기 위해 왔건만, 그 난이도는 승형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높았다. 역시 수많은 S급 남자들을 성적으로 타락하게 만든 장본인 답게,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남자를 유혹하고 있었다.

할짝.

앙그는 입술을 안으로 오므렸다가 혀로 낼름 거품을 삼켰다. 승형은 그에 침이 절로 넘어갔다.

"...한 잔?"

"아뇨. 가볍게 몰딥, 아니 모히또로."

실수를 할 뻔 했다. 승형의 주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앙그는 빈 글라스 하나를 챙겨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승형은 타오르는 목을 축이기 위해 선반 근처에 놓여있던 아무 병이나 집어들었다.

"응?"

상당히 독한 럼이었다. 하지만 승형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승형은 자신을 주시하는 클럽 안의 사람들에게 묘기를 부리고자, 마개를 연 럼의 위에 청백의 불꽃을 피웠다. 이번에는 마시지 않고, 마치 향초처럼 태워 자신의 자리 옆에 놓았다.

"...흠흠, 미스터 블레이즈?"

클럽의 오너는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안쪽으로 눈짓을 보냈다. 주방에서 칼로 무언가를 자르는 소리가 울렸다.

"따로 자리를 마련해드릴까요?"

"따로 자리라니, 무슨-"

"후후, 괜찮습니다. 실은 저희 클럽에서 앙그 양, 자기가 좋을 때만 나오는 사람이라서요."

"...바텐더인데요?"

승형은 순간적으로 오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출근을 제멋대로 한다니. 지각도 일탈이라고 생각하는 승형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세계였다.

"술을 엄청 잘 섞는 실력자거든요. 어디 술 뿐이겠습니까? 지금 다른 사람들 보이시나요?"

오너는 클럽 안의 사람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다들 각자의 파트너와 자리를 잡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클럽의 중심에 앉아있는 승형을 향해있었다.

척.

눈이 마주친 이들은 엄지를 들어올리며 승형을 응원하고 있었다. 승형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고, 누군가는 음흉한 눈빛으로 승형에게 손가락을 꼼지락대었다.

"끄응."

"흐흐, 다들 응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가 미스터 블레이즈니까 몰래 말씀드리는 건데...."

오너는 승형의 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앙그 양이 자기도 입에 술을 대었다는 말은-"

탕.

거친 소리와 함께 갈린 얼음이 동동 띄워진 모히또가 승형의 앞에 놓였다. 차가운 인상의 앙그가 다시 바에 섰고, 오너는 걸음아 나살려라 물러났다.

"감사합니다."

"...이것도 인연이니."

앙그는 상체를 기울이며 자신의 잔을 들었다. 승형도 모히또를 들어올렸다. 바텐더로서는 완전히 실격이나 다름없었지만, 상대의 정체가 실은 색정녀라는 걸 알면서도 정숙한 모습을 보니 자꾸만 아래에 열이 올랐다.

혹시 술에 뭔가를 탄게 아닐까. 하루 빨리 가루라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승형의 몸에 불이 달아올랐다.

"당신의 새로운 인연을 위하여, 건배."

"...건배."

두 개의 글라스가 부딪혔다. 도수는 아주 낮았지만, 승형은 자신을 바라보는 앙그의 깊은 눈빛에 취해버릴 뻔 했다.

"......."

칠흑처럼 어두운 검은 눈동자 속에서, 승형은 보았다. 앙그와 똑같이 생긴, 검은 머리칼의 여인이 나신으로 결박당한 것을. 달아오른 몸의 취기가 싹 가라앉고, 승형은 모히또를 한 모금 홀짝인 뒤 바로 입안에서 불꽃으로 태워버렸다.

"후우."

승형의 짙은 한숨이 바에 내려앉았다. 눈꺼풀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승형은 다시 눈을 번쩍 밝혔다. 지금부터 '작전'을 시작할 때.

"...오너."

"예."

"혹시 저기 있는 그랜드, 잠깐 쳐도 됩니까?"

"신디인데요."

"...아무튼."

승형은 바카디를 병째 들고 신디사이저의 앞에 앉았다. 모양새는 그다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흥을 돋우기에는 충분했다.

"아아, 음, 아아! 그냥 한 곡 불러보겠습니다. 왜 부르고 싶어졌냐면, 그냥 불러보고 싶어서요."

승형은 어디서 준비했는지 검은 선글라스를 자켓에서 꺼내 눈에 썼다. 뜬금없는 가창 선언이었지만, 오늘 이 클럽을 산 주인은 승형이었다. 사람들은 기꺼이 승형을 위해 친구가 되어 주었다.

"저...한국 노래는 저희 잘 모르는데요."

밴드는 난감한 미소로 웃었고, 승형은 괜찮다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이것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아아, 그러면-"

승형은 그 말과 함께 전주를 치기 시작했다. 박자는 자신의 운동화 뒷굽으로 드럼을 치듯 박을 맞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경쾌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구슬픈 듯한 음색에 숨을 참았다.

* * *

"......."

앙그, 아지다하카 또한 깔루아 밀크를 홀짝이며 승형을 예의주시했다.

'저 남자, 과연 노래는 어떨까.'

남자가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를 통해, 아지다하카는 그가 침대에서 어떤 신음을 흘리게 될 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유럽의 한 무기회사의 오너는 카리스마 넘치는 마초였지만, 실은 여자에게 역으로 가혹하게 지배당하는 것을 선호하는 마조히스트였다.

그는 부히익거리며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었고, 아지다하카는 그 날 처음으로 남자를 상대로 박는 경험까지 해보았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고, 아지다하카는 그를 맨체스터로 보내어 차원문의 제물로 바쳤다.

'피닉스의 애제자, 침대에서는 어떨까....'

이미 마력으로 스캔은 마쳤다. 화권의 몸속에는 피닉스의 마력이 깃들어있었고, 그를 통해 피닉스가 상당히 아끼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도도 아닌 인간으로 두고 있으면서 그 정도의 마력을 불어넣다니, 어쩌면 사랑하는 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럴수록 더 빼앗는 맛이 있겠어.'

이승형을 서울로 보내어, 서울 63빌딩 상공에 차원문을 연다면 과연 피닉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만으로도 짜릿해 머리카락에 정전기가 통할 정도였다. 아직까지 아지다하카는 자신의 머리를 불태운 피닉스의 악행을 마음속에 깊이 담아두었다.

홀짝.

전주가 끝났다. 승형이 입술을 떼었다. 아지다하카는 눈을 감았다.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아지다하카는 글라스를 손아귀로 터뜨릴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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