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9화 〉1부 18장 11
<터키시 오전 11시,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원탁의 히어로는 국경을 초월한 존재다. 그런 존재여야했다. 어느 한 국가에 얽메여있다가는 인종, 종교, 이념 등의 이유에 따라 특정 집단을 옹호하지 않도록 한 것이 원탁의 의의였다.
전이능력을 통해 러시아 전역을 커버하던 운디네, 적토라는 기동성을 바탕으로 중국 전역을 커버하던 운장이 특이 케이스였다.
가웨인이 영국 뿐만 아니라 북해, 노르웨이 등 북해 전체 일대를 지키듯, 원탁은 자신의 출생 국가나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여러 도시를 지키는게 평균이었다.
"......."
그리고 그 원탁 중 서아시아 일대 전체를 지키는 원탁의 히어로, <살라딘>은 본래 자신의 거점 도시인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1000 km에 이르는 거리를 날아와 이스탄불 공항에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그저 제일 가깝다는 이유로.
심지어 시리아 인근에 다른 청화단의 원정대도 파견되었지만, 의전의 급을 맞춰야 한다는 터키의 강력한 요청끝에 살라딘이 직접 이스탄불에서 청화를 맞이해야 했다.
"이 시국에 원정이라...."
청화단. 살라딘으로서는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드는 존재였다. 아무리 땅덩어리가 좁다고 하더라도, 한반도에서 주력을 모조리 뺄 정도로 한국은 여유가 있는 걸까.
여유가 있었다. 같은 원탁의 일원인 석하랑이 있지 않은가.
"쯧."
석하랑의 원탁 입단에 부정적인 입장을 은연중에 내비쳤던 그로서는 여러모로 민망한 상황이었다. 불과 넉달 가량만에 이렇게 성장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만큼 아지다하카 게이트를 잘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는 건가.'
강원도에 열린 차원문 조차도 능숙하게 키워서 잡아 먹을 정도로 석하랑의 힘은 대단했다. 물론 그 때 살라딘도 다른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지만, 추후에 석하랑의 활약을 영상으로나마 간략히 볼 수 있었다.
구구구구구-
드디어 문제의 손님이 도착했다. 석하랑이라는 존재에게 마음껏 집을 지키도록하고 외유를 나온 세 명의 손님을. 살라딘은 터번을 고쳐쓰고 공항 활주로부터 나와서 손님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살라딘 님, 부디 표정을 풀어주십시오. 상대는 오일 머니가 통하지 않는, 코어 머니의 선두주자입니다."
살라딘의 옆에 다가온 테이엥 마마르 총리는 주먹을 바짝 쥐며 살라딘에게 알랑방귀를 뀌었다. 살라딘은 저자세로 나오는 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상대는 그만큼 예우를 해줘야 하는 위치였다.
"...터키에는 S급 괴수가 없는 걸로 알고 있소만."
"혹시나 모르잖습니까. 인도 때도 갑자기 킨나라가 튀어나왔고요. 분명 뭔가 알고 오는 걸겁니다."
"알고 온다라."
살라딘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괴수가 아니라 괴인의 존재를 알고 오는게 아닐지."
"...살라딘 님, 하하, 농담이 참...."
마마르 총리는 진땀을 흘렸다. 살라딘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무렴 설마 이 땅에 괴인이 있겠습니까?"
"괴인이 될 존재들은 넘쳐나지 않소. 마마르 총리, 그대도-"
끼이익.
백나로 호가 공항 활주로에 멈췄다. 의지를 가진 것 마냥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공중전함의 위용에 살라딘은 슬쩍 스마트 워치를 켰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멕시코에 갈 때는 저 형태가 아니었던 것 같건만.
"...거북이?"
형태는 뭐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북이 같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정작 그 거북이의 형태로 수 천 km를 불과 한나절도 안 되는 시각만에 주파한 속도에 얼척이 없었다.
철컥, 철컥.
문이 열리고, 안에서 한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청색자켓에 검은 셔츠, 그리고 무릎 아래가 살짝 찢어진 청바지라는 미친 청청패션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홀리 쉿."
살라딘은 그 패션에 험한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마마르 총리는 카메라가 찍고 있는 것도 모르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백염대협이...?!"
저 바른생활 청년의 귀감이라고 할 수 있던 신사의 귀감이 청바지라니. 심지어 머리는 앞으로 내린 채 끝에 청색의 브릿지를 넣었다. 청색(BLUE)의 이미지에는 우울함이 담겨있다고 하건만, 신사의 이미지는 어디로 사라지고 방황하는 청년만이 남아있었다.
"마마르 총리."
"예."
"나도 각별히 신경을 쓸 터이니, 그대도 부디 신경써주시오."
"...물론입니다. 크흡, 백염 대협이, 세상에! 주머니에 손까지...!"
한쪽 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껄렁껄렁한 자세로 가장 먼저 내려오는 그의 행동은 라이브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 화권은 아무 거리낌없이 계단을 털레털레 내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내려오는 집행관과 청화는 굳은 얼굴로 그에게서 거리를 벌린 채 백나로 호에서 하선했다. 누가봐도 부끄러운 무언가에게서 거리를 두는 움직임이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이승형은 휘파람까지 불면서 레드 카펫에 올랐다.
저벅, 저벅.
모델 워킹으로 시원시원하게 걷다가 한바퀴를 빙글 돌고 백희아와 청화를 기다리는 그의 행동은 분명히 정신이 어딘가로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레드카펫의 끝, 입국하는 그들을 찍고있던 기자들을 향해 이승형은 손가락을 튕기며 윙크했다. 촬영하고 있던 여기자 하나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렸다.
"......안 부끄럽나?"
청화의 궁시렁거리는 혼잣말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뭐라 말하지 못했다.
이승형.
히어로인 동시에, 그는 탑급 배우이자 연예인이었다.
* * *
공항에서 청청패션의 테러를 일으킨 이후.
우리는 터키 마마르 총리와 <살라딘>의 인도를 따라 터키 이스탄불 협회로 들어왔다. 살라딘이 있는 시리아 다마스커스가 아닌 터키 이스찬불로 온 것에 마마르 총리는 촌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터키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냥요."
본토 아이스크림을 직접 먹어보고 싶다는 말보다는 안하무인이 더 나았다. 총리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살라딘의 얼굴은 제대로 구겨졌다.
"거짓말이에요."
"하하, 그, 그렇죠? 청화 양은 농담을 참...오래 사귄 친구처럼 격식없이 하시는 군요, 으허허!"
싸가지 없다는 말을 돌려말하는 구나. 그래서 나는 그대로 되돌려줬다.
"언제 어떤 때라도 올 수 있는 사이라는 의미에서 말씀드린 건데,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크흠, 아닙니다. 그렇다면야."
총리의 얼굴은 더할 나위없이 붉어졌다. 나는 백희아가 은근슬쩍 눈치를 줄 정도로 장난을 쳤다. 청화의 밥말아먹은 캐릭터를 유지해야했기에 어쩔 수 없었건만, 혼나고 말았다.
'그럴거면 저 놈이나 혼을 내지.'
내가 이렇게 막되먹은 짓을 해도 아무렴 이승형만 하겠는가. 보라, 저 삐딱한 자세를. 테이블에 비스듬히 앉아 회담에는 전혀 집중하지 않고 냅킨으로 종이학을 접는 모습을.
"후후."
이승형은 완벽한 종이학을 접고 실실거렸다. 부리가 워낙에 날카로워 찔릴 것 같았다. 남들은 열심히 회의중인데 혼자서 종이접기나 하다니, 저 얼마나 막되먹은 행동인가.
".......청년, 힘내시오. 인생사가 다 그런게지."
"네? 저는 괜찮습니다."
"......."
살라딘은 슬쩍 눈을 감았다. 그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지금 안타까운 마음에 폭풍 오열을 하는 셈이었다. 그도 예전에 사랑하던 이를 빼앗긴 아픔을 가진 이였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지금 어그로를 끌어도 결국 이승형에 대한 인상은 '동정'이 강했다. 아, 저 청년이 연인을 빼앗긴 충격을 아직 이겨내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구나.
'잘하고 있네.'
이승형은 현재 열심히 자신만의 일탈을 즐기고 있다. 그 일탈이 회의 중에 딴짓을 한다는게 고작이라 여러모로 대단하다 싶었지만, 아무튼 이승형은 열심히 하고 있다.
'이제 나도 열심히 해야지.'
내가 딴 생각을 하는 동안, 이미 백희아는 총리와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공적인 이야기였고, 우리가 방문한 진짜 목적을 말하기 시작했다.
"...총리님, 저희가 이번에 이스탄불에 온 이유는 괴수에 대한 퇴치를 위해서입니다."
"역시 그렇군요! S급입니까?!"
"괴수가 있다는데 엄청 기뻐하시네요?"
내가 일침을 놓자 총리는 물잔을 들어올렸다. 백희아는 내 손을 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충분하니까 그만하라는 신호였다.
"꼭 자기네 동네에서 나오는 괴수도 가루라처럼 사도화 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는…. 터키에 있는 괴수...."
"크흠! 흠흠흠!"
척하면 척이지. 물론 틀린 말은 아니기에, 나는 백희아가 인상까지 찌푸리고 나서야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내 입에서 터키의 괴수가 나오는 순간, 흐리멍텅하던 이승형의 눈이 반짝거렸다.
"예? 터키에 괴수가 있, 쓰으읍…."
나는 오랜만에 이승형의 심장 속 창염을 건드렸다. 죽을 정도로 아프지는 않고 그냥 양주 넘기는 정도의 쓰라림이지만, 덕분에 이승형의 입을 막는데 성공했다.
"...그렇지. 인생은 쓰라린게야…."
살라딘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이승형의 말실수를 막은 나는 그냥 바로 패를 오픈하기로 했다.
"괴수는 여기에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터키의 남쪽.
이제는 사람이 살지 못하게 된 괴수들의 섬, 키프로스.
"괴수의 등급은 S. 이름은…."
나는 이승형을 잠깐 흘기고 입을 열었다.
"마그마 드래곤."
삼대장 중 하나이며, 히드라가 데리고 있던 괴수.
"키프로스 섬 아래에는 마그마 드래곤이 살고 있어요."
어제부터.
* * *
<오후 7시, 이스탄불 협회 VIP 객실>.
[응, 지금 보냈어. 계속 불안해하니까 어서 가서 잘 챙겨줘. 내 안에 지륜있다고 하니까 끝까지 안 믿더라.]
"당연하죠. 일단 마력이 히드라인데."
나는 따로 받은 1인용 VIP 객실에서 히드라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히드라는 이미 지하 땅굴망을 통해 키프로스 섬에 대량의 괴수들을 심어두었다. 흙의 감옥속에 갇힌 괴수들은 우리가 작전을 실행하는 즉시 감옥에서 풀려나 키프로스 섬을 알랑거릴 것이다.
그리고 그 섬의 대장, <마그마 드래곤>은 키프로스 섬의 지하로 이동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가루라 때와는 달리 이미 진작에 활동을 시작한 괴수였고, 히드라의 아래에서 괴수로서 활약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물론 가루라와 마찬가지로 그런 '척'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테라에서의 우주 방어를 기억하던 최후의 부하들 중 삼대장 답게, 괴수로서 올가미가 씌워졌지만 그 정신은 테라 시절의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 창염의 피닉스는 이미 정령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했어. 나도 성주님을 배신하기로 마음을 먹었단다. 내 안에는 지륜이 있고. 얘, 네가 원래 지륜의 종복이었다고 했지. 뭐 어떻게 하면 믿을래?
-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마그마 드래곤. 히드라 님의 괴수이며 괴인일 뿐입니다. 제발 제 충성심을 시험하려 들지 말아주십시오, 히드라 님이시여!!
...히드라가 '지륜'이 아닌 덕분에, 마그마 드래곤은 히드라의 말을 기만으로 이해하고 끝까지 자신은 괴수라며 끝까지 잡아떼었다. 결국 내가 직접 마그마 드래곤을 만나서 가루라와 같은 의식-<창염개진>을 하고 나야만 나와 히드라 사이의 거래를 마그마 드래곤은 믿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말이에요. 굳이 흙의 감옥 해제 트리거를 그걸로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오호호, 그거 말고 더 적절한 말이 뭐가 있겠어?]
"아주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려고 작정하셨네."
[로마에서 있었던 일의 벌이야. 후훗, 북경에서 했던 만큼 하면 되잖아?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그라운드 제로!"
[네 다음 창염개진. ......우리끼리는 휴전하자.]
"좋아요."
어차피 외쳐야 할 것이라면 서로서로 상처까지 입힐 필요는 없었다. 나는 히드라의 P팀이 제대로 잘 움직이고 있는지 확인했다. 유나와 히드라를 태운 전용기는 현재 열심히 하늘을 날고있었다. 하늘만 날고 있었다.
"적당히 시간이 되면 배달될 거예요. 아니면 그 전부터 미리 준비하고 있어도 되고."
[걱정마. 유나는 내가 잘 지킬테니까. 후후.]
"이전부터 궁금했는데, 도대체 둘이 뭐가 그렇게 잘 맞아 떨어진 거예요?]
[비-밀.]
도대체 히드라와 유나가 싱크로를 한 계기가 무엇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검지를 입술에 붙이는 히드라의 행동은 끝까지 내게 진실을 얘기하지 않을 의지를 보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에휴, 됐어요. 아무튼 배달 고마워요. 내일 잘 챙길게요."
[그래. 그보다 얘, 그 '작전'은 언제 시작되니? 나랑 유나 지금 그거 보는 거 기다리느라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데. 유나는 벌써 팝콘까지 튀겨놨어.]
"비행기 안에서....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달이 떠오르는 밤."
나는 와인잔을 들어올렸다. 글라스에는 딸기 에이드가 들어있었다.
"내면의 야수가 깨어날테니."
작전명, <심P오트>.
오늘 밤, '승형 더 블레이즈 댄서 리'가 깨어날 것이다.